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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는
자가 운장(雲長)이고 하동(河東) 해량(解梁: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雲城市>
상평촌<常平村>) 출신이다.
동한 말기에
그는 유비(劉備)·장비(張飛)와 결의형제를 맺고 의병을 일으켜 촉한(蜀漢)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정사에는
관우가 태어난 날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
·≪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과 민간에 전해지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이름을 장생(長生)이라 하였다가 뒤에 우(羽)로
바꾸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관우는 광화(光和) 6년(183)
그의 나이 23세에 악덕 호족 여웅(呂熊)을 죽이고 고향을 떠나 5년 후에
탁(?: 지금의 하북성 탁주시<?州市>)에 이르러 유비와 장비를
만나 결의형제를 맺었다.
당시에 황건적의 난이
전국을 휩쓸자 동한의 통치자는 각지의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관우는 유비를 따라서
탁현(?縣)의 의병 모집에 응하여, 유주태수(幽州太守) 유언(劉焉),
중랑장(中郞將) 노식(盧植), 교위(校尉) 추청(鄒淸), 교위도정후(校尉都亭侯) 공손찬(公孫瓚)의 부대에서 황건적 진압에 가담하였다.
동한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190),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는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현령, 영평원상(領平原相)에 임명되었으며, 관우와 장비는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소속 부대를 통솔하였다.
동한 흥평(興平) 원년(194),
조조(曹操)와 도겸(陶謙)이 서주(徐州)를 쟁탈할 때 유비는 예주자사(豫州刺史)로
파견되어 관우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였다.
동한 건안(建安) 원년(196),
원술(袁術)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관우와 함께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縣> 회음시)에서 그것을 막았다.
건안 3년(198) 11월,
유비와 조조의 연합군이 여포(呂布)를 공격하여 조조가
하비(下?: 지금의 강소성 비현<?縣> 동쪽)에서 여포를 죽였을 때,
관우도 그 전쟁에 참가하였다.
건안 4년(199), 관우는
유비의 명으로 서주자사 거주(車胄)를 죽이고 서주를
점령하였다.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면서 태수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건안 5년(200),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패주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이때 유비의 아내와 함께 있던 관우는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였으며, 조조는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극진히 예우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조가 원소와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쪽)에서
일전을 벌였다.
이때 관우는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돌진하여 원소의 대장 안량(顔良)의
목을 베었다.
이 전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 책봉되었다.
7월,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다는 것을 안 관우는 조조에게 이별을
고하고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그후 유비와 함께
여남(汝南: 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동남)으로 달려가서 유벽(劉?)과
연합하여 조조를 공격하였다.
관도(官渡)에서
원소를 물리친 조조는 건안 6년(201) 9월에 남쪽으로 내려와
유비를 공격하였다.
이때 유비와 관우 등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면서 신야(新野: 지금의
하남성 신야현 남쪽)에서 7년간 주둔하였다.
건안 12년(207), 유비는
관우·장비와 함께 융중(隆中)의 초막에 있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삼고초려하여 군사(軍師)로 초빙하였다.
건안 13년(208) 7월,
조조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유표(劉表)를 공격하였다.
8월에
유표가 병사하자 그의 둘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유비는
번성(樊城)에서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강릉현)으로
달아났다.
관우는 수군을 이끌고
강하(江夏)의 유기(劉琦: 유표의 장남)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한 후,
다시 면강(沔江)에서 유비와 합류하여 함께 하구(夏口: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武漢市>)로 갔다.
이해 11월에
제갈량·노숙(魯肅) 등이 오(吳)나라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적벽(赤壁: 지금의 호북성 포기현<蒲圻縣> 경내)에서 조조군을 대파하였으며,
이로써 유비는 형주(荊州) 이남의 4개 군을 차지하였다. 이때 관우도
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건안 14년(209) 12월,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가 병사하자 유비는 손권에게서
형주 이북의 여러 군을 빌었다.
관우는 양양태수(襄陽太守)
·탕구장군(蕩寇將軍)에 임명되어 강릉에
주둔하였다.
건안 16년(211),
유비가 유장(劉璋)의 요청으로 사천(四川)에 들어갔을 때,
제갈량과 관우는 형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청니(靑泥: 지금의 호북성 안격현<安擊縣> 동쪽)에서
조조의 장수 악진과 우금(于禁)을 물리쳤다.
건안 19년(214),
유비가 낙성(?城: 지금의 사천성 광한현<廣漢縣>)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갈량·장비·조운(趙雲) 등이
급히 달려가서 유비를 지원했다.
이에 관우 혼자서 형주를 지키게 되었다.
이해 6월, 유비는 성도(成都)를 점령하여 스스로 익주(益州) 목사에 오른 다음
정식으로 관우를 도독형주사무(都督荊州事務)에 임명하였다.
건안 20년(215),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유비가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거절함으로써 오와 촉은
갈등이 더욱 심화되엇다.
손권은
장사(長沙)·영릉(零陵)·계양(桂陽) 3개 군(郡)에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관우에게 쫓겨났다.
손권은
여몽(呂蒙)에게 명하여 장사와 계양을
습격하게 하였다.
유비는 직접 5만대군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들을 대적하였으며, 관우도 정예병 3만을 이끌고
익양(益陽: 지금의 호남성 익양시 서쪽)에서 노숙과 대치하였다.
이해 2월, 조조가
한중(漢中)을 공격하자 유비는 익주를 잃을까 염려되어
손권과 강화를 맺었다.
건안 24년(219), 유비는
조조를 공격하여 한중을 점령하고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에 오른 다음,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에 임명하였다.
8월, 관우는
손권과 조조가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번성·양양을 점령, 조조의 장수 방덕(龐德)의 목을 베고 우금(于禁)을 항복시킴으로써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같은 해 10월,
손권은 여몽을 보내어 퇴로를 차단한 후 형주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관우는
오나라 군대의 협공을 받고 위기에
처하였다.
11월,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하여 형주 탈환을 기도하였으나 도중에 오나라 군대의
기습을 받고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관우는 형주 탈환을 포기하고
퇴각을 거듭하여 일단 맥성(麥城: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當陽縣> 동남)에서
버티다가 사천으로 도주하여 유비와 합류하려고 하였다.
12월, 관우는 맥성에서 패하여
임저장향(臨沮章鄕: 지금의 호북성 안원현<安遠縣> 북쪽)으로 퇴각하다가
손권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때 관우의 나이 59세였다.
관우가 죽은지 41년 후 촉(蜀) 경요(景耀) 3년(260, 관우 탄신 100주년)에
후주 유선(劉禪)은 관우의 시호를 장목후(壯繆侯)로 추증했다.
그러나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천(天)"으로 올라갔다.
그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신성시 되는 우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병칭되었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민간설화와 명대의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를 거치면서 '충의(忠義)'의
화신으로 신격화 되어갔다.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전형 인물을 빌어 그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수호신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관우의 충의와 용맹·무예를 더욱 과장하여 많은
문무대신들이 관우처럼 왕에게 충의를 다하고 사직에 용맹과 무예를
바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관우에게
왕이라는 작위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송대부터이다.
휘종(徽宗)은 숭녕(崇寧)
원년(1102)에 관우의 시호를 '충혜공(忠惠公)'으로 추증하고 그의 작위를
후작에서 공작으로 한단계 더 높였다.
다시 계속하여
숭녕 3년(1104)에는'숭녕진군(崇寧眞君)', 대관(大觀) 2년(1108)에는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 선화(宣和) 5년(1123)에는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으로 추존했다.
남송의 창시자 고종(高宗)도
건염(建炎) 2년(1128)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에 봉했고,
그의 아들 효종(孝宗)은 순희(淳熙) 14년(1187)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영제왕
(壯繆義勇武安英濟王)'에 봉했다.
원나라 문종(文宗)은
천력(天曆) 원년(1328)에 남송시대에 관우에게 내린 시호에서
'장목(壯繆)'을 없애고 대신 '현령(顯靈)'으로 바꾸어, '현령의용무안영제왕
(顯靈勇武安英濟王)'이라 하였다.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명대부터이다.
주원장(朱元璋)이 죽은 후
혜제(惠帝)가 왕위를 계승했다.
혜제 건문(建文) 3년(1399)에
주체(朱?)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영락황제<永樂皇帝>)이다.
성조는 자신의 행동을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가 황제가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황제가 관우를
신이라 한 이상, 신하와 백성들도 당연히
관우를 신으로 숭상하였다.
명대 중후기의 정덕(正德) 4년(1509),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전국에 있던 관묘(關廟: 관우 사당)의 이름을 모두
'충무묘(忠武廟)'로 고치게 했다.
만력(萬曆) 22년(1594),
도사 장통원(張通元)의 요청으로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은
관우를 제(帝)에 봉하고, 관묘의 이름을 '충무'에서
'영렬(英烈)'로 바꾸었다.
만력 42년(1614) 10월,
신종은 관우를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해여총고(咳余叢考)≫≪노포총담(老圃叢談)≫ 참고)에 봉했다.
≪해현지(解縣志)≫와
≪산서통지(山西通志)≫에는 관우에게 '제'라는 시호를 봉한 기록이
상술한 내용과 다르다.
일설은 만력 18년(1590)에 관우를
'협천호국충의제(協天護國忠義帝)'에 봉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일설은 만력 10년에 관우를 '협천대제(協天大帝)'에 봉하였다는 것인데,
어느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더 고증을 요한다.
청대의 통치자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했다.
세조(世祖: 순치황제<順治皇帝>)는 순치 원년(1644)에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에 봉했고, 성조(聖祖: 강희황제<康熙皇帝>)는 강희 42년(1703)에 관우의 선조, 조부, 부친을 공작(公爵)으로 추존했다.
건륭(乾隆) 이후
가경(嘉慶)·도광(道光) 두 왕조를 거치면서 관우의 시호를
'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우찬선덕충의신무관성대제(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羽贊宣德忠義神武關聖大帝)'라고 하여 그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다.
문종(文宗: 함풍황제<咸豊皇帝>)은
함풍 5년(1855)에 관우의 선조를 '광소왕(光昭王)',
조부를 '유창왕(裕昌王)', 부친을 '성충왕(成忠王)'에 추증하고, 관우의
신위를 황궁에 모셔두었다.
관림은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낙양시(洛陽市) 남쪽 7㎞에 위치한 관림은 관우의 목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무덤만 하나 있었으나,
명대 만력(萬曆) 연간에 여기에 사당을 짓고 잣나무를 심었다. 그후 다시 청대 건륭(乾隆) 연간에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로 조성하였다.
'관림'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과거 중국의 등급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황제의 무덤을 '능(陵)', 왕후의 무덤을 '총(塚)',
일반 백성의 무덤을 '분(墳)'이라 하였으며, 오직 성인의 무덤에만
'림(林)'자를 붙였다.
중국 역사상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중국 최초의 교육가 공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삼국시대 촉의 명장 관우이다.
따라서 오직
이 두 사람의 무덤만은 각각 '공림(孔林)'과 '관림(關林)'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이러한 관림묘(關林廟)는 세 군데 있다.
관우의 목이 안장된 낙양 관림 외에도, 관우의 시신이 안장된 호북성 당양(當陽)의
관림과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 해현(解縣)에 세워진
운성관림(運城關林)이 있다.
따라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민간에서는 관우를 일러 "머리는 낙양을 베게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 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삼국연의≫에 의하면,
관우가 59세에 호북성 당양에서 오나라 군사에게 피살되었을 때,
오나라의 손권은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관우의 머리를 몰래 낙양에 있던 조조에게 보내어 책임을 조조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일시적인 화를 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손권의 음모를
미리 간파한 조조는 평소에 관우의 인품을 흠모하고 있었던 터이라
관우를 극진히 예우하고 낙양성 남쪽에 안장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관림묘이다.
[출처] 관우(關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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