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그 부제에 “한승원의 『초의』를 중심으로”라고 되어 있다. 한승원의 소설 초의』는 2003년 4월 23일 김영사에서 1판 1쇄가 나왔다. 평자가 갖고 있는 책이 2004년 3월 26일 발행된 것인데, 1판 8쇄였다고 한다. 약 11개월만에 8쇄를 거듭했으니, 굉장히 많이 읽힌 책이다.
솔직히 말하면, 평자는 이 책을 처음에는 다 못 읽었다. 읽다가 말았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10년도 더 전에 나온 책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 읽다가 그만두었을까? “아무리 어렵더라도 일단 끝까지 읽기로 하자”는 것을 하나의 독서원칙으로 삼고 있는 터에 말이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이 책이 그 당시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평자가 읽은 소설 중에 재미없었던 – 지극히 어려웠던 – 소설은 사르트르의 『구토』였다. 그래도 다 읽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른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사르트의 구토마저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있는 평자가, 초의(草衣, 1786-1866)라는 조선후기의 스님을 다룬 이 작품을 다 못 읽은 탓은 평자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었겠지만, 다른 탓을 찾자면 솔직히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기억된다.
재미는 언제 생성되는가?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때, 그래서 궁금할 때 생기지 않던가. 그런데 대충 알고 있는 인물에 대한 소설적 형상이었다. 애당초부터 그 점에서 약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도전을 했고,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 이 논평을 위해서, 먼지를 털고 다시 읽은 결과 작가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고 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그러나 이제 논자(정혜정)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평자가 읽다가 중지해 버렸던 이유 중의 하나가 어쩌면 이 소설이 무거워서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깊이 있지 않은가? 작가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초의가 살던 시대, 초의의 사상, 초의의 예술, 초의의 교우관계까지 잘 복원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 시대에 대한 재인식이 가져다 주는 여운은 깊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라고, 이 소설은 무겁게 되지 않았을까? 본문까지만 370쪽이다. 한 손으로 들어보더라도, 책의 무게는 물리적으로도 묵직하다.
평자는 지금 왜 글을 이렇게 쓰고 있을까? 논자는 ‘서론’에서는, “초의를 중심으로 인간 성장의 계기와 정신적 다차원을 논의하여 근대체제의 현대교육이 간과하고 있는 인성교육의 원리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라고 하였고, 논자의 “연구가 특히 초점 두는 것은 초의를 매체로 작품에 내재된 교육적 의미와 정신 성장의 관련성을 밝혀내고 개별적 감동의 타당성을 근거 지어 인성교육의 지도원리를 탐색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논문에서 그러한 “지도원리‘를 탐색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성장의 계기와 정신적 다차원을 2장에서 네 가지로 구분함으로써, 가령 작품을 안 읽은 독자들에게도 이해의 계기를 제공해 주고는 있으나, ”인성교육의 지도원리“를 찾아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2장은 물론 3장에서까지도 작품을 재정리하고 있다. “인성교육의 지도원리”는 언제 찾아서 이런 것이라고 제시해 줄 것인가, 의심이 가는 중에 3장까지의 본론은 끝난다. 그리고는 바로 4장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기대하던 “인성교육의 지도원리”가 아니라 작품 초의를 학생들에게 읽히고, 그것을 갖고서 토론 수업을 할 때 제시할 수 있는 질문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독서수업의 실제를 예시(例示)한 것으로 생각될 뿐, “인성교육의 지도원리”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도 같다. 2장에서 논한 초의라는 인간의 성장에 계기가 되어준 정신적 차원 네 가지마다, 참으로 좋은 질문, 생각해 볼 주제들을 정리해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업현장에서 지도하는 교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참고사항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평자로서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앞서 길게 평자 자신이 처음에 읽다가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한 이유도 바로 이 점과 관련된다. 논자는 4장의 결론에서 “아이들로 하여금”이라거나, “학생들에게”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다. 과연 초의를 읽고서, 스스로 질문하고, 감동을 나누고, 정신적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아이들, 학생들이 도대체 어떤 아이들이고, 학생들인가?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논자의 글에서는 그러한 한정이 없다.
상당히 무거운 책으로(물론, 평자는 이번에 다 읽어봄으로써, 평자와 같이 어느 정도 불교에 대한 지식을 갖춘 독자들에게는 나름으로 의미 깊은 작품임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평자와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제대로 다 읽지를 못한 이 책을 가지고 어떤 학생들이나 어떤 아이들과 이러한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입시교육이니까 오히려 더욱 인성교육이나 문학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원론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현재의 교육현장이라는 기(機)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 수기설법(隨機說法)이 되어야 한다 - 는 점에서, 인성발달을 위한 문학교육의 교재로서 이 책의 선정은 과연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초의를 선택하는 데 학생들 내지 아이들보다는 교사나 논자의 입장에서의 선호가 더 많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남는다. 불교적 시각의 성장소설로 다른 작품을 좀 더 찾아본다면 어떨까? 예컨대 유년시대나 소년시대의 이야기가 작품의 2/3를 점하는 겨울의 유산(立原正秋/다치하라 마사아키 지음, 한 걸음 더)과 같은 작품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조금은 쉬운 작품이 아닐까?
초의를 갖고서 논문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졌던 놀라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만, 또한 논자가 치밀하게 작품을 읽고서 타당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평자로서는 이상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논자의 노고를 생각하면, 송구스럽지만 말이다.
(2015년 5월 5일 어린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