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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맞은 아이는 제철 과일처럼 싱그럽게 물이 올랐다. 새로 만난 담임선생님에 대한 나름의 분석에서 자신의 옆에 앉은 새로운 친구들의 사소한 속내까지 아이가 쏟아내는 재잘거림은 이 봄을 생기있게 한다. 새 출발이란, 참 좋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간을 잘라 일 년씩 다시 출발할 수 있었던 학창시절이야말로 기분 설레는 단맛이었다. 낯섦이 주는 탄력과 기분 좋은 스트레스는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황홀한 기대를 하게 했다. 어른이 되고 나니 하늘 아래 더는 새로울 것도 별스러울 것도 없다. 매일 보는 남편의 얼굴은 익숙하다 못해 내 얼굴과 매한가지가 된 지 오래다. 매일 마주치는 동료들과 매일 스쳐 가는 마트 아저씨의 얼굴, 게다가 매일 인사 나누는 거래처 사람들과 매일 말을 섞는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삶으로 지쳐갈 때 새 학기처럼 다시 찾아와주는 이 봄이 눈물겹게 고맙다. 이렇게 고마운 봄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출발이 고파질 때면 나는 미술관을 찾는다.
어쩌다 점심 약속이 없는 날. 짧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며 미술관 1층 카페테리아에서 즐기는 뜨거운 커피 한 잔. 이보다 더 좋은 힐링이 또 있을까. 미술관의 작품은 어제의 그 작품이 아니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작품의 모습은 수천수만 가지의 옷을 입고 나를 맞는다. 작품 속의 주인공이 새롭게 말을 건다. 어제는 씁쓸했던 대화가 오늘은 달콤하다.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느긋한 여유는 작가가 선물해주는 기적이다.
오늘 미술관을 찾은 건 얼마 전 결혼한 후배 커플을 위해 선물을 사기 위함이다. 선물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작품을 골라 들었다. 지역 작가들의 소품을 사서 나누는 일은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다는 거창한 사명감과 함께 애써 내 삶의 수준을 치켜 올려보는 나름의 사치스러운 놀이다.
작품의 가격은 몇만 원이지만 작가의 가능성은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그 사치스러운 작품 속에 함께 넣을 엽서도 한 장 산다. 엽서는 백지다. 먼저 살아본 선배로서 새 출발선에 선 그들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엽서 한 장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전쟁 같은 삶의 해법을 어찌 그 작은 종이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한 장을 더 꺼내려다 말고 그냥 마무리 짓기로 한다. 저마다 다른 그릇에 무엇을 담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엽서는 그렇게 작품 속에 끼워져 새 출발하는 신혼부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가끔은 사는 일도 간간이 새로운 출발점이 있으면 좋겠다. 그 싱그러운 출발이 미술품을 관람하듯 느긋한 걸음이면 더 좋겠다.
머리는 텅 비워둔 채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작품을 고르며 마음의 사치를 한껏 누려 보는 일. 호사스러운 사치는 백화점의 명품백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더라고 이 나이 되어서야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지금, 나는 행복하다.
유정임 부산영어방송 편성제작국장 / 국제신문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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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술관 가본 지 한참?
눈 호사(?)의 가치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럼에도 자신에게 보상을 해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