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9월25일
나무 그늘에 앉아 가을을 만나다
햇살이 따사로운 9월의 오후 두 시다. 광주리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가 햇살에 몸을 말리고 있다. 바스락바스락 잘도 마르고 있다. 시골집 텃밭에서 수확한 고추가 제법 양이 많다. 잘 말린 고추는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 냉동실에 가득 채워놓았다가 냉장고에 부화가 걸려서 모터가 고장이 났다. 무엇이든 적당히 채워 놓고 살아야 한다.
바람도 선선하고 기온도 살갗에 닿는 촉감이 보드랍다. 추석 전 무더위가 한창일 때 산책하면서 힘든 이야기를 했던 친구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냥 들어주는 일 밖에는 없었다.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 주기를 기도했다.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매우 안타까웠다.
오늘은 마음을 냈다. 그녀에게 전화해서 산책하러 가자고 청하니 교회에서 교우들과 같이 있다고 한다.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어려울 때 종교가 있으면 의지가 될 것이다. 가까이에 좋은 벗들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랑 띠동갑 친구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나이는 어려도 모든 것이 야무지고 지혜로운 친구다. 산책할 때 가끔 함께하는 친구다. 생각나서 전화를 해보니 어깨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너무 오래 아픈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어느 한 곳이 불편하면 여간 힘이 쓰이는 게 아니다. 고생한다는 생각에 더 보고 싶어졌다,
여기저기 전화해도 다들 바빠서 오늘은 혼자 가야 한다. 혼자면 혼자대로 좋은 것이 산책이다, 오늘은 토산지 나무 공원이 눈에 어른거렸다. 무더위에 한동안 가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모처럼 키스 나무가 사는 작은 숲길을 걸었다. 그늘이 깊어서 서늘한 기분마저 들었다. ‘좋다’라는 탄성이 수시로 터졌다. 키스 나무도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반갑게 인사한다. 어깨를 감싸안고 한동안 체온을 주고받았다. 그리움 하나가 가슴으로 쑥 들어왔다.
진량 행정복지센터 앞에 토산지라는 작은 연못이 호수처럼 펼쳐있다. 개구리밥으로 덮여서 숨이 막혀 보인다. 작은 물길에 하얀 새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다. 저 새는 언제나 혼자다. 참새나 오리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큰 새들은 언제나 혼자다. 고적한 자태가 더 아름답다.
느티나무 아래 나무 의자에 앉으니 익숙한 바람이 찾아온다. 얼마나 그리워한 바람인가? 아무리 더워도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흥건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바람이 뽀송하게 말려주고 이마에 흐른 땀도 씻어준다. 올해 같은 무더위에는 감히 집을 나서기가 두려워서 갇혀 살면서 몹시 그리워했다.
군데군데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김해 사는 시인 선생님하고는 가을 부산에서 꼭 만나자고 약속했다. 대구에서 학생들과 씨름하고 있는 예쁜 선생님 친구랑 가을이 깊어지면 자주 만나던 은행나무 아래서 만나기로 했다. 서양화가 언니가 동생 간병하느라 힘들어하는데 어떤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몰라 마른침만 꾹꾹 삼켰다.
저녁 해가 가물가물 지는 것을 보면서 집으로 가다가 연못 위에서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딸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고 한다. 얼마나 반가운지 꼭 안아주었다.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나도 오십 견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더 안타까웠다. 갑자기 달달한 침이 마구 샘솟았다. 어디서든 만나면 반갑고 사랑스러운 친구가 있고 가을 안부를 전할 수 있는 벗들이 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음에 가슴이 쩌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