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군과 박사
이 문 열
다시 한 번 되풀이하거니와,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에게 유일한 불행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행복의 목록이 너무도 빠짐없이 짜인 것일 뿐이라는 말도 전에 했던가.
하지만 이번 이야기의 목적은 그 숱한 행복의 목록을 시시콜콜하게 들춰 이미 싫증나기 시작한 그 정신적 자위행위(自慰行爲)를 되풀이하려는 데 있지 않다. 벌써 수십 년째 끈질기게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떠도는 고약한 소문 ―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 그날, 서력으로는 1945년 8월 15일에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어떤 장군과 박사의 이야기 ― 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따라서 우리들 행복의 점검도 그런 목적에 맞는 항목이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만 정치적인 행복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치적 행복의 내용 가운데 다른 불행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장 뜨겁게 바라면서도 잘 얻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지도자와의 일체감일 것이다. 그것은 별 실속도 없으면서 사람을 기분 좋고 으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의 행복까지 몇 배로 뻥튀기 해 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지도자와의 일체감에서 이 세상 어떤 땅의 사람들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통치가 없고 관리(管理)만 있으며, 그 관리의 역할마저 완벽한 기회 균등의 제도에 따라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할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른 불행한 나라에서 정치적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우리에게는 관리인(管理人)이 되는 셈인데, 그 관리인과 우리와의 관계는 일체감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일치(一致)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묘한 습성이 있어 뻔한 것도 뒤집어 보기를 좋아하고, 모두가 맞다고 하면 일부러 아니라고 우겨 보기를 즐기는 데가 있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그런 경향이 심해, 나이 든 사람들이 말짱하다고 하면 말짱한 그릇도 깨졌다고 보고, 나이 든 사람들이 곱다고 하면 이제껏 소중히 들고 다니던 꽃다발도 무슨 더러운 물건 내던지듯 팽개치는 게 유행처럼 펴져 간다고 한다. 우리의 완강한 행복을 흔들 만큼 많은 수도 아니고, 또 그게 병이라도 한때의 병이라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절로 눈치가 보인다. 더군다나 이 글이 우리끼리만 돌려 보고 만다는 보장이 없으니, 지금의 우리 같은 상태가 까마득한 꿈일 뿐인 다른 불행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더욱 못 미더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앞서의 추상적인 주장을 구체적인 예(例)로 바꾸어 보자. 설령 그게 우리끼리는 다 아는, 현대사의 흔해 빠진 삽화일지라도.
얘기가 좀 빗나간 듯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먼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예를 들어 보자. 몇 달 전 나는 오뉴월 감기보다 더 고약한 어떤 관리 업무의 당직(當直)에 걸려 꼬박 일주일 동안이나 초죽음을 당한 적이 있다. 바로 청와대 당직으로 다른 불행한 나라에서는 거기서 일하는 최고 책임자를 대통령이니 뭐니 하며 서로 맡기를 다툰다지만, 다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지겨운 당직인가.
처음 그 당직 통지문을 받았을 때 나는 솔직히 터무니없이 일찍 돌아온 내 순번에 부정의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알아볼 대로 알아보고 확인할 대로 확인해 보아도 누가 순번을 조작했거나 부당하게 담합해 나를 원래보다 일찍 그 당직에 끌어들인 혐의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질병, 기타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유도 발생하지 않아, 나는 하고 있던 온갖 급한 일을 일시 미뤄 두고 청와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일주일의 끔찍함이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내 순번은 우리들의 ‘신성한 약속’ 중의 하나라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때워나가기는 했어도, 일생에 두 번 다시 그곳 당직이 돌아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감옥행을 택할 것이다. 회의는 왜 그렇게 많고 사람은 또 왜 그리 몰려들던지 회의, 숙의, 회동(會同), 요담, 밀담, 회담, 접견, 예방 ― 거기다가 끊임없이 서명을 요구하는 결재, 승인, 추인, 허가, 인가…….
일주일 내내 머리는 금세 터질 것 같았고 잠은 턱없이 모자랐다. 밥은 모래를 씹는 맛이었고, 없던 소화불량의 증세가 나타났으며, 나중에는 코피까지 줄줄이 쏟아졌다. 가까스로 일주일을 채우고 돌아오니 내가 그 전에 하던 일은 밀려 엉망이 돼 있고.
그렇지만 곰곰 헤아려 보면 나는 아직도 몇 번인가 그런 괴로운 당직을 더 남겨 놓고 있디. 청와대는 이미 때웠으니 남은 곳은 도청(道廳)이나 부처(部處) 같은 데라 일은 좀 가벼울지 몰라도 대신 이번에는 당직 기간이 훨씬 기니 고생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러한 당직은 이 땅에 살려면 한 번은 돌아오기 마련인 것을. 곧 우리에게 통치는 없고 관리만 있으며, 그 관리인이 되는 것은 권리의 획득이 아니라 의무의 수행일 뿐이다.
따라서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면, 지도자와의 일체감이란 우리에게는 오히려 괴로울 정도의 일치(一致)로 실현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지도자와의 일체감이 그 정도라면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정치적 행복의 다른 내용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낡고 애매하고 다분히 선동적인 그런 용어들은 아직도 권력을 잡은 지도자의 ‘통치’를 받고 있는 다른 불행한 나라나 전(前) 시대에 속한 말일 뿐 우리네 정치학 사전에는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요즈음 항간에는 그런 우리의 정치적 행복을 정면으로 의심케 하는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한다. 우리에게는 바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관리인이 있는 게 아니라 전혀 일체감을 못느끼는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있으며 그것도 둘씩이나 된다는 내용이다
좀 더 구체적이 되면 그 소문은 이렇게 발전하기도 한다. 곧, 그들 중 하나는 장군이며 하나는 박사로서, 몇 수십 년 전부터 이 나라를 남북 둘로 쪼개 다스리고 있다는 식으로. 거기다가, 좀 더 신이 나면 제법 소상한 후일담까지 보태는데, 거기 따르면, 북쪽을 차지한 장군은 반세기나 권력을 잡고 있었어도 양이 안 차 이제는 그 아들에게 물려줄 궁리가 한창이고, 남쪽의 박사는 십이 년 만에 쫓겨났지만 그 뒤로도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잇는 바람에 그 남쪽 사람들의 정치적 불행도 북쪽에 못지않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말, 마른날에 날벼락 맞아 죽을 소리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무슨무슨 강대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느니, 그래서 남과 북이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는 싸움까지 몇 년씩 했다느니 하는 따위의 유언비어와 근원이 같아 보인다 행복에 겨워 심심해진 나머지 꾸며낸 가상극(假想劇)이거나, 한자(韓子)와 되[胡]튀기, 양(洋)튀기가 먹은 마음이 있어 지어 퍼뜨린 낭설임에 분명한 까닭이다. 조금만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그걸 다 말이라고 귀 있다 해서 듣고 앉았고 입 있다 해서 수군수군 옮겨 대는 짓거리는 않을 터이다.
하기야 어떤 이는 비록 그게 헛소문일지라도 그 치밀한 구성이나 빼어난 상상력은 인정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것이 그 얘기의 원형이나 전개방식에는 어딘가 일본 현대사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기 들어 한 끗발 잡은 일본이 앞뒤 없이 촐랑대다가 낭패를 당해도 크게 당한 뒤에 겪은 일과 요즈음 우리를 노엽게 하는 그 헛소문이 몹시 닮아 있다는 뜻이다.
일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저 서력(西曆) 1945년의 패전이 몰아다 준 혼란을 틈타 넓지도 않은 그 땅을 두 토막 낸 금촌(金村) 장군과 목자(木子) 박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땅덩어리 뿐만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두 동강 낸 자들로, 일본사람들은 그때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두 사람이 남긴 상처에 시달리고 있다. 이왕 얘기가 나왔을뿐더러 우리로 보면 가까운 이웃의 일이니 이 기회에 한번 살펴봐 두자. 타산(他山)의 돌이 비록 쓸모가 없어도 내 칼을 가는〔磨〕 데는 좋은 숫돌일 수 있느니.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지 모른다고 이웃 일본이 뒤늦게 배운식민지 놀음에 미쳐 한동안 꼴같잖게 촐랑거리고 담방댄 이야기는 이미 했다. 그러나 초장 끗발이 파장 맷감이요, 영감 상투 굵어 봐야 문지방 넘을 때 알아본다더니, 일본이 꼭 그랬다. 병들어 비실대는 사자 운 좋게 때려눕히고, 염통에 쉬슬어 성질만 사납던 북극곰 엉덩이 한번 호되게 걷어찰 때까지는 좋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유분수지, ‘박멸 미영귀축(米英鬼畜)’이라니 무리라도 너무 암팡진 무리였다. 과학 기술, 전쟁 기술, 식민지 놀음 모두에서 저희 스승이요, 후견자요, 선배인 그 두 나라에 초장 끗발만 믿고 칼끝을 들이댄 일이 그랬다.
하기야 이번에도 한동안은 초장 끗발이 통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영국이 누구고 미국은 누군가. 특히, 아으, 그 미국의 물량(物量). 그때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터진 대전을 치르면서도 남는 구축함 오십 척으로 태평양 무슨 제도(諸島)를 영국으로부터 사들일 수 있던 게 미국의 엄청난 생산물량이었다.
거기다가 어디 미영(米英) 뿐이던가. 옛적에 엉덩이 호되게 걷어차 멀찌감치 내쫓았다 싶었던 북극곰, 그사이 환골탈태해 북쪽에서 넘실대니 이름하여 소련이다. 그동안 서쪽이 바빠 동쪽으로는 연방 일본에게 헤픈 웃음 흘리고 있었으나, 스탈린그라드에서 묘수(妙數) 나자 금세 동쪽을 보는 눈길부터 달라졌다. 차르와 귀족에게서 뺏은 빵으로 ‘인민’을 어루었건, 언〔凍〕 볼 주먹으로 치고 헐벗은 정강이뼈 군홧발로 내질러 짜내었건, 한 이십 년 군대깨나 모으고 총칼깨나 마련했으니 필경엔 동쪽으로도 써먹을 게 뻔했다.
말이 난 김에 하는 소리지만 섬오랑캐 저희 자충수(自充手)는 또 어땠는가. 조개 주우려고 바닷물 퍼내는 게 낫지, 만주로는 모자라 진창 같은 화북(華北), 화남(華南)에 출병 하더니 급기야는 태평양이 좁다고 한껏 전선을 벌렸다. 남의 일이라 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 놓고도 본토에 종자(種子) 할 인총이 남았으니, 우리말로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가 다행이었다.
그 파장판에 그들이 당한 참상을 길게 얘기하는 건 삼가자. 군자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법이 아니거니와, 이 얘기의 목적도 거기에는 있지 않다. 애당초 우리가 그들 얘기를 꺼낸 것은 패전 뒤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으니.
마지막까지도 본토 결전, 본토 결전 하며 바락바락 악을 쓰다가 원자탄인가 뭔가로 정신 번쩍 들어 손들고 보니 이미 판은 복기(復棋)도 못해 보게 쓸린 뒤였다. 그러나 항복 뒤에 그들이 겪은 낭패 중에서도 가장 큰 낭패는 권력의 공동화(空洞‘匕) 현상이었다. 앞장서 악쓰던 놈은 전범(戰犯)으로 잡혀가고, 엉큼한 놈은 큼직한 오리발 하나 구해 들고 어슬렁거리고, 겁 많은 놈은 꼬리 팍 내리고 숨어버리니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따로 없었다.
금촌(金村)이란 자는 바로 그런 때를 틈타 관서(關西) 지방에 나타난 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불세출의 영웅이며 애국자며 장군이며 이념가라 자처했다. 그는 일찍부터 군부의 불장난과 그 불장난에 놀아나는 천황(天皇)이 조국 일본을 망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주로 망명한 그는 반천황(反天皇) 구국 결사대란 유격대를 조직해 그릇된 조국의 군부와 싸우게 된 게 애국자요 영웅으로
서의 출발이었다. 그런 그의 전설과 신화는 뒷날로 갈수록 요란뻑적 지근해졌다.
먼저 그의 사격 솜씨부터 살펴보자. 처음 관서 지방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의 총 솜씨는 나무에 달린 사과 낱이나 떨어뜨리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깡통이나 쏘아 맞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차츰 날아가는 외기러기 눈깔을 쏘아 맞혔다던가 만 피트 상공의 적 전투기 조종사의 마빡을 뚫었다는 식으로 부풀더니 1980년대 들어서는 마침내 일석 이조(―石二,鳥) 신화까지 나왔다.
일석이조 신화는 갈공산 전투인가 뭔가 하는 유서 깊은 전투에서 총알 하나로 적 우두머리 둘을 한꺼번에 잡은 얘기다. 그날 전투는 매우 치열하여 쌍방이 모두 전사하고 이쪽은 금촌 장군, 저쪽은 제국주의 파쇼 군대 사단장과 그 부관만 남았는데, 불행히도 금촌 장군의 소총에는 총알이 하나뿐이었다 한다. 이에 영명한 금촌 장군은 총구에 천하의 보검인 군도(軍刀)날을 대고 그 둘을 겨냥해 쏘았더니 총알이 두 쪽으로 갈라져 둘 모두의 심장에 가서 박히더란 기막힌 얘기였다
금촌 장군의 기마술에 관한 전설도 사격 솜씨에 못지않다. 안장 없는 말을 타고 남만주의 산악을 평지처럼 치달았다는 얘기에서 시작된 신화는 차츰 달리는 말에 탄 채 땅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들었다는 식으로 발전해 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서는 말 배에 붙어 몇 십 리를 달리는 게 그의 전기(傳記) 영화에 선보이더니 요 근래에는 그가 암말 엉덩이 사이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걸 봤다는 기록문까지 나오게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 장면도 영화로 찍고 싶었으나, 스펄버그를 가르친 감독조차 그런 장면을 만들어 낼 자신은 없다고 손을 내젓는 바람에 문자로 된 기록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감동적인 동지애(同志愛)도 여러 갈래의 전설로 전해진다. 굶주린 동지들을 위해 한 달 내내 곡식 한 톨 입에 넣지 않았다던가, 추위에 떠는 동지들에게 벗어 주는 바람에 한겨울 내내 훈도시 한 장으로 버텼다는 따위가 그 초보에 나오는 서사다. 중급으로는 굶주리는 동지들에게 한 톨의 곡식이라도 더 돌아가게 하려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 속에 버렸다는 게 있고, 고급으로는 어느 핸가의 어려운 농성전 때 허벅다리를 잘라 동지들을 먹인 바람에 지금도 왼편 허벅지 아래는 의족(義足)이라는 주장이 있다.
금촌 장군의 탁월한 능력이나 인간적인 미덕으로 넘어가면 지금까지 말한 사격 솜씨나 기마술 따위는 또 한 수 처진다. 그 너그러움이며 참을성, 용기, 지혜, 박식에다 통찰력, 예견력, 분석력, 결단력은 『불멸의 횃불』이라는 전기(傳記)와 『영원의 금자탑』, 『세기와 더불어』라는 그의 어록(語錄) 에 하나같이 찬연한 단원을 이루고 있다. 전기는 추리고 추렸다는 게 스물두 권이요, 어록은 고르고 고른 게 일흔일곱 권이나 되는 데다, 재주가 짧고 시간까지 넉넉잖아, 여기에다 요약하지 못하는 게 실로 유감이지만 특별히 그쪽으로 관심 있는 분은 직접 원본을 구해 읽어 보시기 바란다.
하기야 너무 쉽게 원본을 구해 보란 말을 하니 어떤 이는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사실 예전에는 반일(反日)이니 멸일(滅曰)이니 해서 그런 것을 구하기는커녕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약삭빠른 출판 장사꾼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독자의 일시적인 호기심을 노려 마구잡이로 복사해 뿌려 대니, 발에 차이는 게 그 전기요, 손에 걸리는 게 그 어록이다. 뿐인가, 원래 그쪽에서 만들어진 책은 충견(忠犬) 같은 그쪽 관료들의 과잉 충성으로 우리가 읽기에 역겨운 데가 많이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 귀신 같은 출판업자들은 그 문제까지도 해결해 놓은 경우가 많다. 우리 독자들을 역겹게 할 부분은 알아서 빼고 적당하게 편집해 제법 읽을 만하게 만든 뒤 판다고 한다. 출판업자로서는 장군을 대신해 가장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금촌 장군을 소개하는 데 앞서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가, 이념가로서의 면모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의 정액 속에 섞여 있을 때부터 혁명가였으며, 방년 아홉 살이 되어서는 드디어 소비에트식 사회주의만이 조국 일본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요, 답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풍찬노숙 이십여 년 그 사상을 갈고 다듬은 그는 서른넷의 나이로 관서 지방에 귀향할 때 이미 그 사상을 창시한, 막슨가 탁슨가 하는 천재적인 유태인에 못지않은 사상가로 자라 있었다.
그 뚜렷한 근거가 서력 1960년대에 접어들어 그가 창안했다는 자체 사상(自體思想)이다. 선배 격인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도 혀를 내둘렀다는 그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위대한 사상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듣기로 그 사상에 따르면 그곳 인민은 모두 그의 자식이며, 그들이 먹을 것, 입을 옷, 살 집은 모두 그가 준 것이고, 때로는 그곳의 해와 달도 그가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거기다가 그 사상의 구조가 얼마나 정밀하고 논리적인지, 최근에는 우리 똑똑한 아해들 중에도 자사파(自思派) 란 게 생겨 그 사상의 위대함을 즐기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금촌은 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조국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는 관서 지방에 준(準)통치 기구까지 마련했다고 한다. 미국과 소련이 전쟁 도발의 책임을 물어 일본을 동서로 분할하는 바람에 소련군의 점령 지역이 된 지방이었다.
금촌의 관서 정권 수립 시기에 대해서는 그 뒤 일본 국내에서 일게 된 분단 책임에 관한 시비와 더불어 이설이 많다. 목자(木子) 박사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관동(關東) 지방에 세운 정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어떤 이는 서슴없이 금촌의 관서 정권이 먼저라고 한다. 앞서 준(準)통치 기구라고 한 인민위원회를 근거로, 그 위원회가 도도부현(都道府縣) 시정촌(市町村)마다 설치된 걸 바로 정권의 수립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촌이 정식으로 서(西) 일본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은 목자의 대일본 민국 수립을 선포한 몇 달 뒤여서, 어떤 사람은 먼저 단독 정부를 세운 책임을 목자의 관동 정권에 묻기도 한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사실 금촌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지금까지 전한 것은 그래도 대개는 금촌에게 긍정적인 쪽이지만, 그의 반대자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사뭇 다르다. 남의 흉은 길게 말하는 법이 아니니 대강만 말해 보자.
그 반대자들에 따르면, 그의 반제(反帝) 유격 활동부터가 생판 거짓말이 된다. 할 일 없는 건달로 만주를 떠돌다가 마적 패에 가담한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다니다 치른 몇 번의 조우전을 그렇게 떠벌렸다는 주장이다. 이념가, 혁명가로서의 면모도 마찬가지로 그의 사회주의 사상이랬자 기껏 만주에서 마적 토벌에 쫓긴 그가 소련으로 넘어가 그곳 외인부대(外人部豚)에 투신한 뒤에 얻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나마도 소련군의 정훈(政訓) 교육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해 과연 그를 사회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는 말도 있다. 관서 인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도 말 같잖은 말이란 지적들이다. 관서에는 원래 명망가(名望家)들이 많은 데다 사회주의 계열로도 그보다 몇 배나 관록과 명성을 쌓은 국내파(國內派)가 여럿 있어 그는 거의 무명(無名)의 신인에 가까웠다는 게 그 근거다. 소련 점령군이 우격다짐으로 끌어낸 군중을 그렇게 과장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의 정권 수립에 관해서도 의심은 많다. 이념에 턱없이 민감하고 흑백논리에 잘 들뜨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경박한 편 가르기에 나서 그를 어느 정도 도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보다는 괴뢰정권 수립에 급급한 소련 점령군의 총칼이 더 힘이 됐을 거란 얘기다. 남의 나라 일이라 그 시비를 일일이 가릴 수는 없지만 ― 하여튼 금촌이란 인물은 대강 그렇다.
그러면 관동(關束) 지방에 나타난 목자(木子) 란 인물은 누구인가. 여러 가지로 뜯어 맞춰 보면 이 목자 또한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말 많기로는 금촌에 못지않다. 역시 금촌의 선례에 따라 조목조목 짚어 나가 보자.
목자는 혈통부터가 금촌과 달리 화려하다. 어떤 이는 고대(古代)의 방계(傍系)일 뿐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당시 일왕실(日王室)의 근친이라고 해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가 가깝든 말든 일왕가(日王家)의 혈통과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일생 그것을 은근히 내세웠으며, 미국에서는 한때 일본의 왕자를 자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런 종류의 인간에 예외 아니게 애국자, 구국(求國)의 화신을 자처했는데 그 구국의 행각은 대강 이러했다. 일찍이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조국 일본을 위해 몸 바치기로 결심하고 태어난 그는 세상이 놀랄 만한 신동으로 자랐다. 그러다가 나이 열다섯 되던 해 왕가가 점차 군부(軍部)의 손에 넘어가는 걸 보고 조국의 위기를 직감한 그는 먼저 국내에서의 반(反)군부 투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의 방대한 전기(傳記)가 「투쟁의 서막」이란 이름의 장으로 서술하는 바를 보면, 그 무렵 그는 주로 ‘반(反)군부·평화 협회’라는 진보적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그 단체는 또 〈평화신문〉이란 최초의 순 가타가나(일본 글) 신문을 만들어 여러 가지 사회 운동을 벌였는데 그 공로는 실로 혁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로운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는 법이라던가 그도 곧 엄혹한 시련에 빠졌다. 한창 대륙 침략의 열정에 들떠 있던 군부 과격파가 내각을 장악하면서 목자 그룹에게 조직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거기서 ‘반군부·평화 협회’는 반란 단체로 규정되고 목자는 그 수괴(首魁)급으로 체포되어 끔찍한 고문을 겪은 뒤 사형을 언도받았다.
목자가 어떻게 교수대를 면하고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설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일왕(日王)이 혈육의 정으로 특사를 내렸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차후 일체의 정치 활동을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군부의 용서를 받았다고도 한다. 극적인 것으로는 체포 안 된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옥을 했다는 것도 있고, 그에게 악의 품은 후문으로는 동지를 팔아 그 한목숨을 구했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전기는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 때문에 함부로 사형에 처할 수 없게 된 군부가 사형 대신 출국을 간청해 왔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또한 더 이상 국내에서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해외 투쟁으로 방식을 전환해 그 망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단은 공식적인 기록을 믿어 주기로 하자.
목자의 미국 망명 시절은 그의 전기(傳記)에서 「길고 외로운 투쟁」이란 장으로 장황하게 서술돼 있다. 거기에 따르면 방년 스물둘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간 목자가 먼저 힘을 쏟은 것은 배움이었다. 그는 턴스프링이란 명문 대학에 들어가 뒷날 그의 공식 호칭이 된 박사 학위를 따고 난 뒤에야 구국 활동으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그가 어떤 전공을 택해 무슨 박사를 땄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전기는 뒷날 정치가로 대성한 그답게 그의 학위를 정치학 박사로 밝히면서 「천황가와 군부의 결탁」이란 논문 제목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가 대단할 것 없는 신도(神道)의 지식을 영어로 대강 얽어 어리숙한 미국의 동양학자를 홀리고 동양철학으로 박사를 딴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껏해야 학생 칠십 명 정도의 시골 교회 부속 신학대학에서 논문도 없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전공이야 어찌 됐건 그가 박사 학위를 땄다는 것에는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를 박사로 부르는 데는 지장이 없을 듯하다.
그 뒤 불의(不義)한 조국이 패망할 때까지 삼십여 년 ― 박사는 오직 조국에 남아 있는 동포의 자유와 권리 회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한때는 남가주(南加州)에 망명정부를 세워 세계의 지지를 호소하며 조국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있는 군부 파쇼정권과 싸웠으며, 그 망명정부가 간악한 정보 정치에 의해 와해된 뒤에는 주로 외교전(外交戰)을 펴 불의한 조국의 패망을 앞당기는데 전력하였다……. 그가 통치하는 관동의 대일본 민국 문부성이 공식으로 인정하는 기록들은 대강 그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상반된 주장은 여럿 보인다.
그 첫째가 망명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을 시작한 뒤 해외로 망명한 일본의 민간 지도자들에 의해 망명정부가 성립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초기 한때 목자 박사가 개입했던 것도 사실이나, 마치 그가 지도자로 시종일관 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일시 요직에 앉은 걸 기화로 재미 교포들이 모아 준 구국 성금을 유용(流用)했다가 탄핵받아 해임된 뒤 다시는 망명정부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뒷날 일본이 패망한 뒤 귀국한 망명정부 인사들이 한결같이 목자 박사를 백안시한 걸 보면 그 주장이 훨씬 사실에 가까운 듯하나 남의 나라 일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또 목자 박사를 편들어 말하는 사람은 그 망명정부가 오래잖아 일본 군부 정권의 공작 정치에 와해된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이미 말했듯 패망 직후 일본에 돌아온 정치세력 중에는 버젓이 망명정부를 앞세운 일단이 있었다.
목자 박사가 구미(歐美) 여러 나라를 상대로 화려하게 펼쳤다는 외교전(外交戰)에 대해서도 곧, 만만치 않은 이설(異說)이 많다. 말이 구미지 실은 그가 구라파로 건너가 무슨 외교 활동을 한 적은 없고 다만 워싱턴에서 그것도 미 국무성을 상대로만 활동했는데, 그게 외교에 속한 활동인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목자 박사의 활동 내역은 대강 이렇다.
목자 박사가 몇몇 자신의 영향력 아래 든 재미 동포를 조직해 단체를 만든 적은 있었으나 그게 한 번도 외교권을 행사할 만한 규모가 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체가 워낙 빨리 분열하기 때문에 미처 제대로 클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얘기가 좀 빗나가는지 모르지만 그가 개입하기만 하면 어떤 단체든 분열하고 마는 것은 당시 일본교포 사회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한번은 하와이에 있던 어떤 일본인 단체가 둘로 나누어져 목자 박사를 수습차 파견했더니 얼마 후 그 단체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전의 두 파(派)에다 목자 박사의 파(派) 하나가 더 늘어난 탓이었다.
따라서 목자 박사의 외교 활동이란 것은 주로 개별적인 것인데, 어떤 사람은 그걸 ‘타이프라이터 외교’ 혹은 ‘투서(投書) 외교’라 비꼬아 부르기도 한다. 워싱턴 빈민가의 셋방에 타이프라이터 한 대를 놓고 무슨 작은 일만 있으면 끊임없이 미 국무성에 서한을 보냈기 때문이다. 항의, 요구 경고, 충고 등의 여러 형식을 한 그 끝에는 있지도 않은 이런저런 이름의 일인(日人) 단체를 내세우고 스스로 그 회장으로서 서명한 개인적 투서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목자 박사의 방식을 얕볼 것만은 아닌 듯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그런 서한을 받아들이던 국무성 관리들도 십 년, 이십 년 되풀이되자 차츰 목자(木子)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일본의 민간 지도자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종전 후 패전 일본의 관동 지방에 점령군을 보내고, 그곳에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세워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미 국무성은 맨 먼저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목자 박사가 환국했을 때 그 외교적 활동의 성과는 대단해 보였다. 그는 관서의 금촌 장군이 소련 점령군으로부터 받았던 것에 못지않은 대우를 관동의 미 점령군으로부터 받아 특별 군용기 편으로 동경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그를 환영하는 국민들의 열광도 대단했다. 미 점령군의 입김이 작용했다기보다는 그가 미점 령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걸 알아챈 정치 모리배들과 전범(戰犯)들이 이익과 보호를 구해 몰려든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환영 인파는 환영 인파 ― 그리고 그들은 곧 관동에 단독 정권을 수립하는 데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줌으로써 표현(表見)의 하자는 치유된다.
일본의 금촌 장군과 목자 박사는 대강 그러했다. 여기까지 듣고나면 요즈음 우리 사회 구석을 돌고 있는 고약한 소문에 대해 어지간히 속아 있던 이도 그 진원이 어딘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그 소문을 일본의 복사판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우리 옛말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란 것이 있듯이, 아무리 이웃 나라에 그런 일이 있었기로니, 우리에게는 생판 없었던 일이 그렇게 끈질긴 소문이 되어 떠돌 리는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진행되긴 했지만 근간에 있었던 우리 현대사학회(現代史學會)의 대대적인 점검은 그 바람에 있었다. 우리의 저명한 현대 사학자들은 켜켜이 앉은 세월의 먼지를 떨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의 근거로 가능할 만한 소지가 있는 인물들과 사건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ㅡ 놀랍게도 있었다. 일본과는 경우를 달리하지만 우리에게도 장군과 박사가 오기는 왔었다. 그리고 바로 그 발견이 자칫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음도 아울러 말해 둔다.
25년 전쟁 ― 아는 이는 알고 있겠지만, 서력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가 침략자 일본과 싸워 이 땅을 한 치 한 치 피로 물들이며 그들을 내쫓은 전쟁 ―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 원정 군사령관 이찌끼[―本]는 불타는 일장기(日章旗) 곁에서 배를 가르고, 나머지 조선 원정군 패잔병은 우리 남북군(南北軍) 에 항복한 며칠 뒤 소련군 극동 사령부와 미군 태평양 사령부에서 각기 경축 사절이 왔다. 그런데 바로 그 경축 사절에 묻어 그 어이없는 우리 장군과 박사가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가만히 앞뒤를 재 보면 미국과 소련의 경축 사절단이란 것도 수상한 구석은 있었다. 이십오 년간이나 피 흘려 싸워 제 땅 제 나라를 되찾은 우리에게야 그 마지막 승리가 감격스럽기 그지 없겠지만 미소(米蘇) 저희들에게야 그게 무에 그리 사절단까지 보내가며 경축할 만한 일이겠는가. 좀 심한 짐작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관서, 관동으로 분할 점령해 재미를 본 그들이 은근히 우리에게도 그런 재미를 기대하고 경축을 구실 삼아 정탐을 보낸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다. 소련군도 미군도 사절단이랍시고 보낸 게 맨 첩보 전문가, 정치 공작 전문가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이 겨레가 어떤 겨레인가 저 경박한 일본인들같이 미소(米蘇)가 멀쩡한 제 땅에 선을 긋는다고 동(東)이네 서(西)네 갈라설 리 없고, 민주가 어떠니 공산(共産)이 어떠니 하며 꾄다고 좌(左)니 우(右)니 다툴 리 없었다. 거기다가 우리는 일본과 달리 전쟁 도발의 책임 같은 것도 없으니 설령 불측한 기대가 있었다 해도 요새 아이들 말로 혹시나,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 극동사령부의 경축 사절단 백여 명이 육로(陸路)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서력 1945년 팔월 중순이었다. 이미 말했듯 첩보 전문가, 정치 공작 요원들로만 짜여진 사절단이었는데, 우리의 장군은 바로 그들 틈에 끼어 있던 여남은 명 현지인 보조 요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그때의 목격자가 남긴 기록을 빌려 우리의 장군이 처음 이 땅으로 들어설 때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 기록에 따르면, 그때는 더위가 한창인 팔월 중순인데도 장군은 소련식의 위엄을 뽐내느라 개털 모자를 귀밑까지 내려 쓰고 놋쇠 단추가 줄줄이 달린 소련군 외투를 목깃까지 여미고 있었다고 한다. 또 여느 사람은 너무 더워 발걸음을 옮기기조차 힘이 드는데 그는 긴 가죽 장화의 번쩍임과 밑창에 박힌 징 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보폭(步幅)이 평균 넉 자는 되었다 한다. 거기다가 사람들만 보면 다와리시(동무), 어쩌구 하며 손을 번쩍번쩍 쳐드는 게 한낱 보조 요원답지 않은 기세라 꼭 뭔 일을 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고 전하는 목격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 좋던 기세도 닷새를 넘기지 못했다. 차량 행군을 한껏 늦춰 회령 쪽으로 들어온 지 닷새 만에 평양에 이른 소련군 사절단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 닷새 숙영 때마다 올빼미처럼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수집한 첩보를 종합한 결과 혹시나, 했던 것은 역시나, 안 될 일로 판단이 난 까닭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어떤 겨레인가.
그 바람에 맥이 빠진 소련군 사절단은 소득도 없는 길을 더 가고 싶지 않아 평양에서 서울로 어물쩍 경축 메시지나 띄우고 제 땅으로 돌아가려 했다. 일본처럼 갈라 먹기가 틀린 바에야 구태여 찜통 같은 길을 시원치도 않은 자동차로 몇 백 리나 더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때 인솔자인 스티코프 준장 앞에 나선 게 꼬붕 몇을 거느린 우리의 ‘장군’이었다.
“단장 동지, 너무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의 관서 지방처럼 이 땅도 북쪽 절반쯤은 위대한 붉은 군대의 전리품이 될 수 있습니다.”
“틀렸소. 그동안 수집한 첩보를 종합하건대, 이곳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일본과 다르오. 첫째는 이 땅의 사람들인데, 아무리 보아도 일본인들처럼 제 땅을 동강 내는 데 흐락호락 따라 줄 것 같지 않소. 공연히 건드렸다가 옛 연고까지 들먹여 만주까지 내놓으라 덤비면 모택동 동지만 골치 아프게 된단 말이오. 둘째는 점령의 구실이오. 일본이야 전쟁을 일으킨 죄가 있으니 우리[米蘇〕 가 분할점령해도 할 말 없겠지만, 이 나라는 오히려 피해 당사자 아니오?
그런 이 나라를 무슨 구실로 분할한단 말이오?”
스티코프가 핀잔 주듯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 환장한 장군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장 동지. 나는 저들과 같은 피를 나눠 받고 또 이 땅에 살아 봐서 잘 압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판단은 성급하신 것 같습니다. 첩보가 과장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들은 겉보기에는 슬기로운 척, 잘 뭉치는 척하고 있지만 본성을 들여다 보면 형편없습니다. 저들이 이민족의 지배에 떨어지는 경우를 보면 열에 아홉은 저희끼리 싸워 먼저 저항 세력을 처치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적을 맞아들이는 형식입니다. 또 저들의 본성은 모래와 같아서 옛적에는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나라가 셋씩이나 서서 피투성이 싸움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번에 요행히 일본을 물리쳤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천에 하나 있는 예외일 뿐입니다.”
우리의 장군이 우긴 내용은 대강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로 보면 그것은 스스로가 우리와 피를 달리하고 있음을 밝힌 꼴밖에 안 된다. 이왕 피 얘기가 나왔으니 이쯤에서 한번 그의 혈통에 대해 따져 보자.
나이 든 어른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이란 우리식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모양도 겉으로 봐서는 우리와 비슷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가계(家系)까지 제법 소상하게 대고 있어 자칫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우리 피가 섞인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순수한 우리 겨레는 아니라는 게 오늘날의 정설이다.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첫째로 그와 우리의 피가 다른 점은 그의 염통에는 작은 용이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지막 황제께서 자결하시고 하늘에서 이천만 마리의 작은 용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모두 가슴으로 그 용을 한 마리씩 받았으나 어찌 된 셈인지 구는 예외였다. 그의 염통에 짙게 괸 되[胡〕피가 그 용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고, 달리는 그 핏줄기가 바로 되(胡)튀기여서 애초부터 그 아비는 아들에게 물려줄 용을 가슴으로 받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그다음 그의 피가 우리와 같지 아니함을 드러내는 것은 평화 전쟁 또는 제1차 수복 전쟁이 실패한 뒤의 행적이다. 그는 장백산으로 들어가 북군(北軍)으로 싸우지도 않았고 이어도로 건너가 남군(南軍)의 대열에 들지도 않았다. 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 이 땅 저 땅을 헤매다가 소련군 외인부대에 편입돼 그날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무릇 환웅과 웅녀의 피를 이어받은 겨레라면 예외없이 밟은 길을 유독 그만 벗어났다는 게 그의 피가 우리와 다름을 증명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피에 대해 의심이 들게 하는 또 다른 근거는 바로 그가 소련군 경축 사절단장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가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자라면 어찌 남 앞에서 우리 본성을 ‘모래와 같다’고 비하하고, 우리 역사의 유년에 있었던 부끄러운 분열상(分裂狀)을 함부로 들출 것인가.
스티코프는 처음에는 영 장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장군이 자꾸 우겨대자 차츰 마음이 달라졌다. 첩보야 어떠하든 제가 나서서 한번 해 보겠다는데 굳이 말릴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만이요, 들키면 장난이라고, 잘하면 소비에트는 코에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되니 한번 도박을 걸고 싶어졌다.
“좋소. 소좌 동무 한번 해 보시오. 하지만 우리에게 대단한 지원을 기대해선 안 되오.”
마침내 스티코프는 그런 다짐과 함께 장군의 청을 들어주기에 이르렀다. 장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원은 별로 필요없습니다. 호위병 약간과 조선인 요원들만 제게 남겨 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우리를 얕보아도 한참 얕본 소리였는데, 그가 그렇게 된 이유에는 몇 가지 종류를 달리하는 설명이 있다.
그중 가장 볼품없는 것은 음주 만취설(說)이다. 돌아가기로 작정하는 바람에 느슨해진 통제를 틈타 훔쳐 마신 소련군 보드카에 너무 취해 헛소리를 한 거라는 주장인데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 까닭은 깨난 뒤에도 자신이 한 말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금촌 영향설이다. 일본에서 금촌이 거두고 있는 눈부신 성공에 자극을 받았다는 것으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귀 기울일만한 데가 있다. 소련군 극동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자신과 크게 다른 처지가 아닌 금촌이 저희 나라에 돌아가 비록 관서만의 반동가리지만 정권까지 장악하는 걸 그의 눈으로 보았으니 그 같은 야심이 생길 법도 하다.
마지막은 혈통설(血統說)이다. 그것은 주로 분단에 대한 그의 무감각에 바탕한 것으로, 피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는 앞장서서 이 땅을 동강 내는 일을 자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뚜렷이 결론지어진 바는 없어도 그 세 가지 중에 답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모두 합쳐져 그를 내몰았다는 게 온당한 설명일 듯싶다.
어쨌든 장군이 무슨 대병력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라 스티코프는 그가 원하는 걸 좀 넉넉하게 들어주었다. 소련군 병사 열 명과 조선인 보조 요원 일곱 명에다 트럭 한 대와 성능이 좋은 마이크까지 얹어 준 게 그랬다. 그 뒤 얼마간 평양을 중심으로 벌어진 ‘장군소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쪽의 박사가 이 땅에 들어온 경위는 북의 장군과는 좀 다르다. 그가 미군 경축 사절단과 함께 온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거기 소속된 요원은 아니었다. 한 민간인으로서 미국의 의도를 알아차리자마자 재빨리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목격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이승만이란 우리 이름을 쓰고 있었고 옷차림이며 모습도 당시의 우리네 늙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며 행동거지에 이르면 전혀 아니었다. 그의 혀는 이미 미국식으로 뒤틀려 우리말보다는 그쪽 말에 훨씬 익숙했고 손짓 발짓에서 걸음걸이까지도 우리네보다는 그 나라 사람과 비슷했다. 거기다가 눈알
푸른 그의 아내에 이르면 아무래도 그를 우리 중의 하나라 여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가 언제 미국에 건너갔으며 얼마나 그 땅에 머물렀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 없마 짐작으로는 우리와 일본 간에 25년 전쟁이 벌어지기 얼마 전의 어수선하던 때에 실속 없이 양(洋)바람이 든 우리 젊은이 몇 명이 그리로 건너간 적이 있다는데 그도 그중의 한 사람인 듯싶다. 그리되면 그가 그 땅에 머문 것은 대강 사십 년이 넘어, 우리말을 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꼬부라져 버린 그의 혀나 눈알 푸른 그의 아내를 설명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어떻게 미군 태평양사령부의 경축 사절단 파견과 그 뒤에 숨겨진 워싱턴 당국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국무성의 잡역부로 일하다가 귀동냥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심성 모자라는 국방성 관리가 택시 안에 흘리고 간 서류 봉투를 운 좋게 주운 덕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그 기막힌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국무성으로 달려가 그 무렵 신설된 극동국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두어 번의 거절 끝에 어렵사리 면담이 이루어지자 거창한 자기소개와 함께 말하였다.
“조선 사람 그렇게 쉽게 보아서는 아니됩네다. 당신네 코 큰 사람들만 가서는 분할 점령은커녕 일시 주둔도 어려울 겁네다. 나, 싱만리를 앞세워야만 워싱턴 당국의 뜻이 이루어질 거라 이 말입네다.”
극동국장은 물론 그 엉뚱한 동양 늙은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떼를 쓰며 덤비는 게 싫어 신중하게 고려하겠노란 약속과 함께 돌려보내려 했다.
“나, 싱만 리 그렇게 간단한 사람 아닙네다. 워싱턴에 힘 있는 친구들 많이 있어요. 그들을 통해 백악관을 바로 찾아볼 수도 있습네다. 이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된다 이 말입네다.”
박사는 한참이나 더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다가 그 말을 덧붙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는 태평양전쟁이 막 승리로 끝난 참이라 국무성 극동과는 너무 바빴고, 박사 또한 매우 인상적인 사람이긴 해도 그 바쁜 극동국장이 그의 말까지 명심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들을 때는 한번 검토해 보리라 싶었으나 갑자기 긴박해진 중국 문제에 휩쓸려 깜박 잊고 말았다.
박사가 그 특유의 끈질김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는 자신이 무시당했다 싶자 그 앙갚음과 아울러 자신의 이른바 ‘힘 있는 친구들’을 최대한 끌어댔다. 그가 한 앙갚음의 시작은 길고도 격렬한 투서였다. 그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 장관, 하원의장을 비롯해 국무성 극동과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 부처의 장(長)들에게는 모조리 극동국장의 업무 태만을 비난하는 글을 보냈다. 명의는 한결같이 있지도 않은 조선인 단체의 회장이나 의장으로 돼 있었는데 어쩌면 박사는 이미 그때부터. 일본의 목자(木子) 박사 흉내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힘 있는 친구들에 이르면 일본의 목자도 우리의 박사보다는 한 수 아래다. 당시 우리 박사는 워싱턴 전역에 체인망을 가진 슈펴마켓 주인과 백악관 이발사, 그리고 국무 장관 부인 친정의 정원사를 친구로 삼고 있었다. 또 슈ㅍㅓ마켓 주인은 지역구 하원 의원을 비롯해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백악관 이발사는 매일 대통령의 얼굴을 매만질 뿐만 아니라 그 비서관과도 매우 낯익게 지냈으며, 국무 장관 부인의 친정에서 수십 년째 일하고 있는 정원사는 무엇보다도 그 부인을 통해 국무 장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이 되려면 뜨물에도 애가 생긴다는데 그렇게 힘 있는 친구들이 모두 나섰으니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워싱턴 당국의 최종 결정은 사실 박사의 투서나 그 ‘힘 있는 친구들’의 조력보다는 소련 극동사령부의 사절단 파견 결정에 자극받은 것이란 설(說)도 있다.
어쨌든 박사가 우여곡절 끝에 미(米) 태평양사령부의 경축 사절단에 끼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북의 장군이 평양에 온 지 두 달 뒤의 일이었다. 우리의 장군과 박사는 대강 그런 경위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어느 곳에 왔다 갔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소문이 남는 것은 아니다. 오게 된 경위야 어떠했건 우리의 장군과 박사도 이 땅에서의 행적이 별게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요란뻑적지근한 소문은 남기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우리의 장군과 박사는 그렇지가 못했다. 애초에 먹고 온 마음이 따로 있으니 아무리 이 땅의 형편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더라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순서에 따라 이번에도 북쪽에 왔던 장군이 한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들부터 살펴보자. 당치도 않은 게 지도자로 나서려면 먼저 비틀고 끼워 맞추기를 해야 되는 게 역사다. 우리의 장군도 그것만은 신통하게 알아, 먼저 그 짓부터 시작했다. 그가 한 줌도 안 되는 졸개들을 시켜 비튼 것은 우리의 25년 전쟁사였다.
장군의 졸개들은 소련군이 남겨 주고 간 고성능 마이크를 들고 이 땅 북쪽 곳곳을 누비면서 우리의 처절한, 그리고 끝내는 영광스럽게 끝난 25년 전쟁사를 깡그리 부인하고 대신 어둡고 한심한 식민지사(植民地史)를 내밀었다. 곧 우리는 총 한 방 쏴 보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 뒤 삼십육 년이나 그들의 쓰라린 지배를 받았노란 조의 왜곡으로 오래전에 몇몇 한자(韓子)들이 지어 퍼뜨린 적이 있는 못된 소문의 재탕이다. 차이가 있다면 새것이 옛
것보다 좀 더 세련되었다는 정도일까.
그리하여 만들어진, 있지도 않은 우리 식민지사의 한 모퉁이에 끼어든 장군의 전설과 신화는 참으로 휘황찬란하였다. 금촌처럼 책으로 묶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그리되기만 했다면 우리 장군의 전기(傳記)만도 두터운 장정본으로 서른 권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우리가 원래 비슷한 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장군이 일본의 금촌을 본보기로 삼아서인지 줄거리는 서로가 많이 닮아 있다. 중복을 피한다는 뜻에서, 여기서는 다만 그 차이만 잠깐 살펴보자.
우리의 장군과 일본의 금촌이 다른 점은 첫째로 그들이 맞서 싸운 상대이다. 금촌이 동족인 군부 파쇼 세력과 싸운 데 비해 우리의 장군은 이민족인 침략자와 싸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격전은 둘 모두에게 공통되지만 그 전개 양상은 우리의 장군 쪽이 훨씬 진진하다. 무슨 봇도랑〔洑〕 전투에선가 우리의 장군은 일제(日帝) 침략군 수만 명을 잡아 포를 떴다고 하는데, 같은 민족끼리라면 아무리 나쁜 편에 선 군대라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룬 걸 자랑하고 나서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다음 우리의 장군과 일본의 금촌이 다른 점은 소련군과의 관계다. 금촌은 일본 관동 지방을 점령한 소련의 군정 아래서 비교적 쉽게 괴뢰정권을 수립 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장군은 그렇지가 못했다. 애초에 소련군이 우리 땅을 점령한 적이 없고, 더구나 군정(軍政)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 한 터라 우리의 장군은 다만 몇 안 되는 호위병과 그저 비슷한 혈통의 졸개들만 데리고 일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군정청의 도움 부분을 말로만 때우다 보니
장군의 신화가 금촌보다 몇 배나 휘황찬란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우리의 장군과 금촌의 차이점은 이념가, 혁명가로서의 본질이다. 나중에 자체 사상(自體思想)이란 걸 만들어 약간 개판을 치기는 해도 금촌은 어디까지나 공산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소련군 내의 정훈(政訓) 수준이건 말건 그래도 금촌이 배우고 익힌 원리는 그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군은 정규군에 편입되지 못하고 다만 정보부 소속 민간요원이었을 뿐이어서 그런 정훈 교육조차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를 잘 알고 지낸 적이 있는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장군은 아주 뒷날까지도 마르크스와 레닌과 엥겔스가 사돈이나 처남 남매간인 줄만 알았으며, 공산주의는 화투의 공산 광(光)을 최고로 여기는 사상쯤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 증언이야 믿을 수 없다 쳐도, 그가정말로 공산주의자라 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게 우리 현대사가(現代史家)들 사이의 통설이다.
그러나 앞서 든 세 가지를 빼면 장군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와 벌인 행각은 일본의 금촌과 모든 면에서 너무도 닮아 있다. 어쩌면 요즈음 이 땅에 도는 그 고약한 소문이 일본의 현대사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장군과 일본의 금촌이 한 짓거리들이 닮아 있어서일 것이다.
북의 장군이 되[胡〕 튀기 졸개들을 시켜 깡깡이, 꽹과리에 때때나팔까지 한창 신명 나게 불어 젖히고 있을 무렵 우리의 박사도 남쪽으로 들어와 일을 벌였다. 그러나 박사의 출발은 장군에 비해 훨씬 불운했다.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장군은 소련군 사절단의 지원을 받는 반면 박사는 미군 사절단과의 불화 위에서 그 어림없는 장사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사와 미군 사절단이 불화하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박사가 처음부터 그들과는 소속을 달리하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었다. 미(美) 태평양 하고도 극동 사령부 나름대로는 우리를 정탐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팀을 짜서 보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뒤늦게 난데없는 민간인 하나가 날아오니 아무리 그가 워싱턴 당국을 업고 있다해도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 정탐 결과에 따라서는 자신도 한반도 남쪽에서 맥아더가 일본에서 누리는 바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있던 사절단장 하지는 우리의 박사에게 은근히 경쟁심 이상의 적의까지 느꼈다.
박사의 성격적인 결함도 그들과의 불화를 깊게 하는 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턱없는 오만과 고집에다 이 땅과 우리에 대해서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식의 독선이 바로 그랬다. 박사는 마치 그 사절단이 처음부터 자신을 돕기 위해 파견된 특수부대인 것처럼 다루었고, 자신은 그 실질적인 지휘자인 양 그들 위에 서려고 했다. 그 전 몇 달 일본에서 승리의 단맛을 한껏 보고 온 미군 사절단으로서는 거의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다.
거기다가 하지가 본국에 남아 있는 지인(知人)을 통해 알아본 결과도 우리의 박사에게는 그리 유리하지 못했다. 그 뒤에는 미국 정가(政街)의 어떤 거물도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게 지인들의 한결같은 회신이었기 때문이다. 박사가 쥐뿔도 없으면서 껍죽대는 것이란 생각이 들자 하지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처음에는 박사의 말에 귀라도 기울이는 척하고 숙소도 단장실 곁에 잡아 주던 사절단의 태도가 차츰 쌀쌀맞아지더니 급기야는 박사를 한 쌈에 넣어 주지도 않으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지간하면 넉살로 버텨 보려던 박사도 일이 그쯤 되자 더는 참지를 못했다. 어느 날 하지와 대판 싸우고 보따리를 싸 워싱턴으로 후르르 날아갔다.
하지를 비롯한 사절단은 제까짓 게 가 봤자, 했지만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박사가 돌아간 지 열흘도 안 돼 그들은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너무 깊이 믿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대사학회의 연구는 비교적 자세하게 그때 워싱턴으로 돌아간 박사가 한 ‘활동’에 대한 추적을 해 놓고 있다. 거기 따르면 박사는 먼저 슈퍼마켓 주인을 선술집으로 불러내 남의 일 얘기하듯 말했다.
“일이 안 되더군. 도둑질을 해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 나는 자네들에게 적어도 뉴욕 시의 세 배는 되는 시장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네마는 태평양사령 부의 돌대가리들이 통 들어 먹어야지.”
“엉, 그게 무슨 소리야? 태평양사령부의 돌대가리들이라니? 또 그들이 뭘 어쨌기에?”
시장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장사꾼이 그렇게 물었다. 박사는 조금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자신이 이 땅에서 당한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은 어조뿐이었고 내용은 과장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이 땅 북쪽은 이미 소련이 차지해 소련 장사꾼들이 슬슬 재미를 보기 시작하더란 말까지 슬쩍 보태자 아무것도 모르는 그 미국 장사꾼은 단박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둬서는 안 되겠군. 당장 매카시 의원을 만나야겠어. 하지 그놈부터 모가지를 떼어 놓아야지!”
그러면서 당장에 선술집 문을 박차고 나서려 했다. 박사가 그런 슈퍼마켓 주인을 잡아 위스키 한 잔을 더 권한 뒤에 타이르듯 말했다.
“그 의원 나리가 힘이 있는 건 알지만 너무 혈기로만 나서지 말게. 먼저 사람들을 모으라구 사람들을. 자네처럼 새로운 시장에 관심 있는 친구들을 말이야. 그들과 함께 몰려가 입에 거품을 물어야 겨우 듣는 척이라도 할 걸세.”
그런 다음 지나가는 말처럼 슬며시 덧붙였다.
“친구끼리니까 하는 말이네만 만약 이번에 내가 갔던 일이 잘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게. 내 뜻대로만 됐으면 비록 반동가리 땅에서지만 나는 대통령이 됐을 거네. 그러면 나를 위해 애써 준 자네를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랜 친구인 자네를……. 적어도 그 땅에서의 슈퍼마켓 영업권은 자네 혼자서 몽땅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슬쩍 하는 말이지만 돈독이 오른 장사꾼 하나를 돌게 하기에는 충분한 제안이 감추어진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넘어간 슈퍼마켓 주인이 그날부터 물불 안 가리고 뛰니 하원 의원 한 사람을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덩달아 들떠 미국의 찰못된 극동 정책을 성토하는 전국의 장사꾼들로 매일 백악관과 국무성 앞이 미어터질 판이었다.
박사가 백악관 이발사와 국무 장관 처가의 정원사를 만나서 한 일도 대강은 슈퍼마켓 주인을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박사는 사절단의 비협조를 과장되게 말한 뒤에, 이발사에게는 이 땅 남쪽에서의 이발권을, 그리고 정원사에게는 조경 사업(造景事業) 독점권을 넌지시 약속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이번에도 효과는 만점이었다. 후끈 단 이발사는 친구인 청소부며 잡역부들뿐만 아니라 어슷비슷 알고 지내는 비서관들이며 심지어는 대통령에게까지 이 땅으로 파견된 ‘돌대가리 군인들’을 헐뜯었다. 또 정원사는 정원사대로 국무 장관 부인이 된 옛날의 아씨를 찾아가, 아무래도 장관께서는 극동 정책의 시행 과정에서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고 계신 듯하다는 여론을 심각하게 전하며 태산 같은 걱정을 늘어놓았다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국무 장관은 짐작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어찌 됐거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하찮은 일이라도 곁에 두고 부리는 사람이 게거품을 물고, 아녀자의 말이라도 매일 끼고 자는 아내가 베갯머리송사를 해 대니 기억쯤은 하게 되었다.
그때쯤 해서 박사가 무슨 멋진 마감질처럼 펼친 게 이미 전에도 크게 효과를 본 적이 있는 투서 작전이었다. 상대는 소련과의 긴장관계를 틈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극우(極右) 신문과 승전 뒤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 고양이 가죽만 보아도 호랑이 오백 마리를 보았노라고 휘갈겨 대는 노랑 신문들이었다.
소련의 극동사령부는 경축을 핑계로 사절단을 보내 한반도 북쪽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태평양사령부가 보낸 사절단은 무얼 하고 있느냐, 이러다간 북쪽뿐만 아니라 남쪽까지도 몽땅 소련에게 먹히고 말겠다, 그 땅의 명망 높은 망명 정객을 앞세워 펼쳐 보겠다던 대웅 전략은 어찌 되었느냐, 극우 신문에 보내는 투서의 내용은 주로 그랬고, 한반도 남쪽을 겨냥하고 간 미국의 사절단은 단장부터 말단 수행원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부패하고 타락했다, 그들은 그곳의 술과 미녀에 취해 미국의 국익을 깨끗이 잊어버렸다, 특히 그 단장 하지는 부패하고 타락한 데다 야심까지 있어, 그곳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매우 유리한 그곳 출신 망명정객을 돕기는커녕 방해하고 있다, 국무성의 공작금으로 예쁜 정부(情婦)를 일곱 명씩이나 둔 주제에……, 노랑 신문에 가는 투서의 골자는 대강 그랬다
이번에도 결과는 박사가 노린 것 이상으로 나왔다. 극우 신문과 노랑 신문이 그런 박사의 투서를 몇 배나 부풀리어 재미를 보자 점잖은 신문들도 그냥 있지 못했다. 외면하는 척하면서도 슬금슬금 그 기사들을 인용하자 이내 미국은 돼먹잖은 극동 정책과 그 선발대격인 경축사절단을 비난하는 여론으로 들끓었다.
본국(本國)이 그 모양이 나고 보면 이 땅에 와 있던 사절단에도 영향이 미칠 것은 뻔한 이치였다. 박사가 떠나자 앓던 이라도 빠진 듯이 시원해하던 사절단은 채 열흘도 안 돼 갑자기 딱딱해지기 시작한 본국의 훈령(訓令)이 갈수록 경고조로 바뀌자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경고가 소환과 처벌의 위협으로까지 발전하자 비로소 일이 심상찮음과 아울러 책상을 둘러엎고 떠난 우리 박사를 떠올렸다.
이에 하지는 다시 본국의 지인들에게 박사의 행적을 알아보게 했다. 회답은 여전히 박사의 연줄이 대단찮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처음처럼 자신에 차 있지는 못했다. 박사가 만난 사람이나 활동 형태가 워낙 남의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이전에 띄운 정보를 고집하고 있기는 해도 뭔가 꺼림칙한 데는 있다는 어조들이었다. 하지로서는 적이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사가 이 땅으로 되돌아온 것은 그런 하지의 불안이 한껏 부풀어 있을 때였다. 그 무렵 들어 구체적으로 박사의 이름을 들어 가며 현지인 지도자와 협력 관계를 소홀히 한 점을 꾸짖는 본국의 훈령이 부쩍 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떠날 때보다도 몇 배는 거만한 태도로 사절단 숙소를 찾아온 박사는 다시 이름깨나 들어 본 듯한 본국의 상하 의원 몇과 신문 편집장 몇의 협력 촉구 서신을 디밀어 정치 경험 없는 그 직업 군인을 한 번 더 기죽인 뒤 말했다.
“워싱턴 친구들 걱정이 많습데다. 트루먼 씨도 이곳 일에 큰 관심을 가진 듯하고 내가 때마침 가지 않았더라면 장군은 아주 어렵게 됐을 뻔했습네다. 더군다나 신문 만드는 친구들이 얼마나 극성인지.”
그렇게 시작해서 한동안 얼르고 달래다가 슬며시 자기 의자를 단장석 윗자리로 옮겨 버렸다.
그러나 하지도 영 맹물은 아니었다. 미국이 태평양을 자기네 호수로 만들 작심을 하면서부터 벌이기 시작한 이 전장 저 전장을 떠돌아다니며 주름이 는 그라, 눈치놀음이나 감 잡기에도 기본은 있었다. 이 늙은 노랑 것이, 하고 울컥 속이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고 슬슬 보따리나 싸기 시작했다.
실은 그렇찮아도 보따리를 싸려던 그들이었다. 그 몇 달 이 땅 남쪽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정탐해 보았지만 그들의 결론 역시 소련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별 가망 없음'으로 나왔다. 그야말로 강철같이 단결하여 왜적에게 짓밟힌 삼천리 강도를 한 치 한 치 피로 물들이며 되찾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런 우리를 어정쩡한 이념으로 유혹하여 분열시키고, 그런 이 땅을 동강 내어 한 토막을 어물쩍 삼켜 보려던 사령부의 책상물림들이야말로 뭣도 모르고 탱자탱자 하는 등신들임에 분명하였다.
하지는 박사와의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정력을 낭비하는 법 없이 그 같은 정보를 본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박사가 들쑤셔 일으킨 근거 없는 여론에 휘말렸던 워싱턴 당국도 차츰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그리하여 장기 체류로 공연한 경비만 나는 사절단의 철수가 결정된 날, 하지는 통쾌한 기분으로 그 사실을 박사에게 알렸다.
“박사, 다시 워싱턴으로 가서 힘 있는 친구들을 좀 만나 봐야겠소이다. 우리 사절단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그때 하지가 기대한 것은 박사의 우거지상이었다. 그런데 박사의 표정은 뜻밖에도 태평이었다.
“현명한 결정입네다. 이 땅에서의 일은 이 땅 사람들에게 맡겨야지요.”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를 걱정하는 눈치는커녕, 오히려 잘됐다는 듯 그렇게 받았다. 거기다가 더욱 눈 튀어나올 일은 철수할 무렵 사절단에게 날아온 본국의 훈령이었다.
“잔여분 공작금과 장비 일체는 싱만 리에게 인계하고 철수할 것.”
결국 박사를 가망 없는 땅에 홀로 남겨 골탕을 먹이게 된 게 아니라 자기들만 오히려 그 박사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몰려 사령부로 불려 가게 된 꼴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사이 경축 사절단을 가장한 어릿한 그들보다 몇 배는 똑똑하고 쓸 만한 협조자들을 이 땅에서 찾아낸 박사가 몰래 손을 쓴 결과였다.
그러면 박사가 이 땅에서 찾아냈다는 그 협조자들은 누구였을까. 제1차 수복 전쟁 또는 평화 전쟁에서 실패한 우리 가운데 일부가 잠시 이 땅을 떠난 적이 있다는 얘기는 이미 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장백산 아니면 이어도로 떠나 북군(北軍) 아니면 남군(南軍)으로 섬나라 침략자들을 협공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 땅이 그대로 비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자(韓子)들은 피를 따라 기뻐하며 이 땅에 남았고, 되〔胡〕 튀기, 양(洋)튀기도 그대로 남았다. 박사가 협조자로 찾아낸 것은 그들 중에서 바로 한자와 양튀기였다.
한자와 양튀기들이 박사 주위로 몰리는 데는 다 까닭이 있었다. 한자들은 이 땅에 남아 침략자인 일본인보다 더 몹쓸 짓을 많이 한 죄가 있고, 양튀기들은 박사 뒤에 미국이 있다는 데 강한 피의 이끌림을 받아서였다. 몇 달 늦기는 했지만 결국 박사도 북의 장군에 못지않은 졸개들을 이 땅 남쪽에서 얻은 셈이었다.
그 뒤 몇 달, 이 땅은 그들로 하여 남쪽과 북쪽이 아울러 소연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장군 소동’과 서울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박사 난리’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그랬으니 이번에도 장군 소동부터 살펴보자. 장군의 신화가 여러 면에서 일본의 금촌을 흉내 낸 것 같다는 얘기는 이미 했다. 하지만 원래 가짜가 더 번쩍거리고, 실속 없는 것일수록 포장이 더 요란하다더니, 장군이 바로 그랬다. 뒤따라가는 자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신화를 짓고 전설을 꾸며 대니, 실상을 제쳐 놓고 그 졸개들의 얘기만 들으면 ‘민족의 태양’이나 ‘겨레의 어버이’ 정도로 끝날 게 아니라 ‘천지 만물의 주재자’라 해도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었다.
거기에 따르면, 우리 삼천만이 이를 사리고 피를 뿜은 25년 전쟁의 영광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는 남북군(南北軍)이 이 땅 곳곳에서 치른 모든 전투의 선두에 있었으며, 탁월한 영도력과 전략으로 항상 우리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 주었다. 때로는 분신술(分身術)을 부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살수(薩水) 싸움과 행주(幸州) 싸움을 동시에 지휘하기도 했고, 때로는 도력(道力)으로 왜인들의 소굴인 동경(東京)에 지진과 불비〔火雨〕를 안기기도 했다.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침략군을 죽였는지 적어도 그 신화와 전설에 따르면 이 땅에서 장군의 탁월한 작전에 걸려 죽은 일본군만도 대일본 제국의 육군을 다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혁명가, 이념가로서의 장군도 눈부신 바 있다. 장군은 공산주의 철학의 완성자요, 투철한 실천가며, 마르크스의 진정 한 전인(傳人)이었다. 당시 삼십 대 중반에 지나지 않은 나이가 벌써 육십 년 전에 죽은 마르크스와 연결 짓는 데 장애가 되었지만, 그 문제도 곧 어렵잖게 해결되었다. 무덤을 쪼개고 나온 마르크스의 삭다 만 유골이 스탈린에게 잘못 전해져 있던 의발(衣鉢)을 빼앗아 우리의 장군에게 내렸다는 주장으로. 글쎄, 말로 꾸며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처음 한동안은 장군의 졸개인 되[胡〕 튀기들에게 뭔가가 될성부르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그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얘기가 워낙 재미있어 적잖은 사람들이 귀 기울여 주었고, 더러는 박수에 푼돈까지도 던져 주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게 개인의 우상화(偶像化) 작업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사람들이 그들을 장터에서 애기를 파는 전문 얘기꾼으로만 안 까닭이었다.
우리의 장군에게도 처음 몇 달은 신나는 세월이었다.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이 수월찮게 모여들었고, 또 스스로도 불안하게 여기며 친 허풍까지 감탄하며 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자신에게 유리하기만 한 오해였다.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인 것은 그가 빌려 입은 소련군 좌관(左官) 군복과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닦은 가죽 장화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 짙게 화장한 얼굴이었다. 그를 외국서 연기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신파(新派) 배우쯤으로 안 까닭인데, 아 그거야 요즘도 탤런트나 가수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 들지 않는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지어 보였다는 감탄의 표정 또한 알고 보면 그에게는 별로 유리할 것도 없었다. 그 감탄은 사람이 이야기를 꾸며 내 이를 수 있는 허퐁의 최고봉을 본 데서 우러난 것인 까닭이다.
그런데도 그 고약한 소문은 마치 북쪽의 ‘인민’들이 우리의 장군을 열렬히 환영하며 받아들인 것처럼 꾸며 대고 있다. 역사의 희극적인 막간극(幕問劇)도 못 되는 그 소동을 턱 없이 부풀리어 우리를 욕되게 하는 헛소리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자들에게 앙화 있을 진저, 그것도 말이라고 듣고 전하는 헛똑똑이들에게도.
그 무렵 하여 남쪽에서 벌어진 ‘박사 난리’도 그 대강의 줄거리는 북쪽의 ‘장군 소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사를 새 주인으로 모셔 들인 한자와 양튀기들은 박사보다도 그들 스스로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25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저지른 친일 부역의 죗값을 물지 않기 위해서, 또는 미국이 들어오면 얻어걸리게 될지 모르는 핏줄의 이득을 위해.
그들 역시도 첫 번째로 손댄 것은 역사였다. 그들은 자진해서 오히려 찬연한 우리의 25년 전쟁사를 깡그리 부인하고 그 자리에 답답하고 비굴한 식민지사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해방은 온전히 피국과 소련의 군장 보따리 [行李] 에서 나온 선물이란 어이없는 주장으로 밑자리를 깐 뒤, 따라서 그 두 강대국은 당연히 이 땅에 지분을 가졌다는 해괴한 논리를 넌지시 웃기로 얹었다.
그때 우리는 막 길고 힘든 싸움을 끝낸 참이라 재미와 웃음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떠돌이 동포 하나가 눈알 푸른 아낙을 데리고 나타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수작을 해 대니 성이 나기보다는 재미부터 났다. 거기다가 지난 전쟁 동안 한 싸가지 없는 짓거리들만으로도 끽소리 못하고 엎드려 있어야 할 한자와 양튀기까지 그를 도와 할 소리 안 할 소리 떠들어 대자 남쪽 사람들은 아무 주저 없이 웃을 준비로 들어갔다. 하도 터무니없는 수작들이라, 남쪽도 북쪽처럼 깜박 속은 까닭이었다. 곧 박사와 한자, 양튀기들이 미안함이나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오랜 싸움에 지친 우리를 위해 산뜻한 코미디 한 프로를 준비하는 것쯤으로.
따지고 보면 그때가 박사에게는 좋은 때였다. 서툰 그의 우리말이 늙은 만담가(漫談家)의 사람 웃기기 위한 고안(考案)으로 오인되었건, 눈알 푸른 그의 아내가 삭막한 그 시대에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서였건. 그가 나서면 사람들은 어김 없이 모여들었고 이야기도 제법 귀담아들었다.
그런 박사 주위에 쇠파리 떼처럼 모여 웅웅거리던 한자와 양튀기들에게도 한동안은 괜찮은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뒤집은 역사 비튼 논리도 재담(才談) 의 한 방식으로만 알았고, 그런데도 그들이 제 김에 신이 나서 입에 거품을 물면 이번에는 그걸 물 건너 사람들이 말하는 그 블랙코미디쯤으로 짐작했다. 따라서 그들만 나타나면 심심파적 삼아 모여들곤 했는데, 그들은 그걸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했다.
하지만 장난도 한두 번이고 농담도 분수가 있지, 차츰 장군과 박
사가 하는 소리가 우스개가 아니란 게 알려지자 형편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땅은 미소(米蘇)에 분할 점령된 일본이 아니고, 우리
는 싸가지 없는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지금까지의 얘기 순서와 맞아떨어진 것이지만 낭패도 먼저 본 것은 장군이었다. 장군이 되튀기 졸개들과 함께 북녘을 휘젓고 다닌 지 한 석 달이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차츰 그들에게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장군의 분장(扮裝) 에 싫증이 나고, 그 졸개들의 헛소리도 더는 우습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우리의 장군과 그 졸개들은 미련스러운 오해와 어림없는 환상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점점 모여드는 사람이 줄어들고, 몇 안 모인 사람마저 그들의 얘기를 빈정거리게 돼도 그 가망 없는 작업을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금촌이 누리는 권력의 단맛을 잠시나마 구경한 게 그토록 사람을 해까닥 돌게 한 듯하다.
그러다가 참담한 끝장이 왔다. 결국 장군과 그 졸개들이 획책하는 것은 이 땅과 겨레의 분단이며, 그들이 전하려 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약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음이 명백해지자 북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야유하기 위해 장군과 그 졸개들 주위로 몰려들기도 하고, 때로는 돌팔매질까지 해 정신이 들게 해 주기도 하다가, 드디어는 엄혹한 제재로 그 소동을 막 내리게 했다. 닭똥으로 치약을 삼고 말 오줌을 양칫물로 하여 거짓말한 입을 씻긴 뒤 개피[犬血]를 덮어씌워 장군을 국경 밖으로 내쫓고, 그를 따라다니던 되튀기들은 물푸레나무 도리깨로 오뉴월 보리타작하듯 흠씬 두들긴 뒤 그런 쓸데없는 피가 더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모두 불까기〔去到를 해 버렸다.
남녘에서 박사가 당한 낭패도 북녘의 장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아무리 심심파적거리라도 여러 번 되풀이되면 싫증이 나기 마련이라, 박사네 패거리도 장사를 벌인 지 석 달이 넘으면서부터는 하마 이전 같지가 못했다. 그런 데다 눈치는 없으면서 고집만 쇠고집인 박사와 그 졸개들이 오히려 갈수록 더 열을 올리니 결과는 뻔했다.
남녘에서도 북녘과 거의 비슷한 반응이 진행되다가 일은 드디어 막판에 이르렀다. 결국 박사와 그 패거리들 역시 꾀하는 것은 이 땅과 겨레의 분단이요, 퍼뜨리려는 것은 낡고 부패하고 타락한 물 건너의 미신이라는 게 모두에게 명백해졌다. 거기다가 어떤 섣부른 양튀기가 이 땅을 미국의 쉰한 번째 주(州)로 만들자고 한 주장이 사람들을 격분시켜 박사와 그 졸개들에게 마지막 날이 왔다.
남녘 사람들은 박사를 소 오줌으로 위세척을 시키고 잿물로 관장을 시켜 컴컴한 속을 씻긴 뒤, 조각배 한 척에 노 두 개를 주어 태평양에 띄웠다. 눈알 푸른 그 아내와 함께 미국까지 저어 가게 함이었는데, 그래도 석 달 양식은 실어 주었다.
그렇지만 박사의 졸개들을 처리한 방식은 북녘과 많이 달랐다. 남녘의 한자와 양튀기들은 워낙에 수가 많아 북녘처럼 불까기를 한다 해도 뒤끝이 남을 듯해서였다. 그 바람에 남녘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이 땅 밖으로의 추방이었다. 곧 한자는 제 아비의 핏줄을 따라 일본으로 내쫓고, 양튀기도 각기 그 핏줄을 따라 미국과 유럽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렇게 ― ‘장군 소동’과 ‘박사 난리’는 일단 끝이 났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나 아프리카에서 하던 수작으로 이 땅과 겨레를 나누어 삼키려던 미국이나 소련의 ‘혹시나’ ― 도 그걸로 한 끝장을 보았다. 실제로 당시 그 두 나라의 원수(元首)였던 스탈린과 트루먼의 회고록을 보면 한결같이 그때 그들이 직접 이 땅에 손을 대지 않고 장군과 박사를 내세운 데 대해 가슴을 쓸고 있는 듯한 구절들이 있다. 우리 시골말로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 다행이란 소리겠다.
장군과 박사의 뒷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지만, 우리 현대사학회의 추적 결과는 이렇다. 그때 이 땅에서 쫓겨난 장군은 소련군 정보 요원으로 복직했다가 나중에는 외인부대로 옮겨 대좌(大佐)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항일 유격전 경력을 너무 자랑하다가 소련군 월맹 지원단으로 파견돼 이십 년 전 미군의 하노이 대공습 때 폭사했다고 한다.
한편, 간신히 태평양을 건너간 박사는 미국 정부의 배려로 시골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워낙 실력이 모자라 석달 만에 학생들에게 쫓겨난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다가, 역시 이십 년 전쯤 여든 몇의 나이로 늙어 죽었다는 게 우리의 추적 결과다.
전에도 이미 말했지만, 역사에 가청(假定)은 당치 않다. 그러나 워낙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라, 한 번쯤은 장군과 박사의 뜻대로 됐을 때의 이 땅과 우리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겠다.
만약 그때 우리가 겨레 간의 뜨거운 정과 슬기로 그 두 사람을 여지없이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이 땅은 어김없이 일본처럼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의 행복은 어림도 없다. 그 두 체제는 나뉘어진 우리를 주도권 다툼으로 더욱 이간시켜 서로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을 것이다. 거기다가 그럴듯한 이데올로기에 경망하게 들뜬 사람들이 나타나 촐싹거리면 저 일본처럼 동족상잔은 필연적이다. 언제부터 공산이고 언제부터 민주라고 아비와 자식이 돌아서고, 형제가 서로 눈 흘기며, 이웃이 이웃의 가슴에 죽창을 찔러 넣는 판세가 나면, 그 피로 분단은 더욱 고착될 것이며, 그렇게 나뉘어진 겨레는 적어도 몇 십 년 피를 달리하고 말을 달리하는 세계의 어떤 족속보다 더 멀고 미운 적이 될 것이다. 일본의 관동 정권과 관서 정권이 그러하듯 나뉘어진 겨레 사이의 그 허무맹랑한 증오와 의구심을 악용한 권력이 양쪽을 각기 지배하며 온갖 횡포를 저지를 것이고 ― 아아, 그리하여 일본의 현대사가 겪고 있는 참혹한 불행은 그대로 우리에게서도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이 요즈음 들어 겪고 있는 통일 문제를 중심한 갈등은 가정(假定) 속에서조차 섬뜩하다. 아무리 남의 나라 일이라도 지나쳐 보기 애처로울 뿐 아니라 잘못된 본보기로는 유용한 만큼 지루하더라도 여기서 한 번쯤 더듬어 보자. 지금 우리의 행복을 다시 확인하고, 그 방어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읽고 들어 아시는 분이야 다 아시겠지만, 그래도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조금은 설명조가 되더라도 용서 하시기를.
원래 일본에서의 통일이란 관동·관서 정권 모두에게 심심하면 불러 보는 좀 심각한 노래 같은 것이었다. 죄 없이 백성 겁주거나 얼 뺄 일이 있으면 서로 써먹는 동침(東侵), 서침(西侵) 이란 말처럼, 자기 ‘인민’이나 ‘국민’을 다독거리거나 감탄시킬 필요가 생기면 금촌 패거리도 목자와 그 후계자들도 어김없이 통일을 내세웠다. 하지만 요즈음 일본 열도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통일 논의는 그전과는 약간 질을 달리한다. 전에는 관동·관서 정권 모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써먹느라 한편이 떠벌리면 한쪽은 짐짓 귀를 막는 식의 일방통행이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관동과 관서의 정권 모두에게 그 통일이란 카드가 절실하게 필요해진 까닭이었다.
관서 정권에 통일이란 카드가 필요해진 까닭은 무엇보다도 금촌의 장기 집권과 관계있는 듯하다. 금촌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그해부터 40년이 넘는 오늘까지 계속하여 관서 지방을 다스려 왔는데, 요즈음은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아들 직월(直月)에게 다시 그 절대 권력을 승계시키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1980년대 들어서부터 관서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대를 이어 충성하자.”란 현수막이 바로 그런 움직임을 보여 주는 뚜렷한 예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어수룩한 관서 인민들이라 해도 그런 중세적 수작에는 말들이 없을 수 없고, 그래서 금촌에게도 비상한 카드가 필요했다. 통일은 그런 금촌이 내밀 수 있는 카드 중 가장 끗발이 높은 것이 될 것이다.
물론 금촌이 그동안 써먹은 카드는 그 외에도 여럿 있다. 위기의식의 조장, 전 인민의 조직화, 자체 사상 충효(忠孝) 개념의 정치화 따위가 그 중요한 목표이다. 위기의식의 조장은 주로 ‘일본 전쟁’으로 알려진 동서 전쟁(東西戰爭) 뒤 한 이십 년간은 아주 유용하게 써먹은 카드였다. 중소(中蘇)의 지원을 받은 관서 정권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그 전쟁은 한때 금촌의 야망대로 되는가도 싶었다. 그러나 유엔군을 앞세운 미국의 개입으로 좋다 만 꼴이 됐는데, 그때 관서 정권은 정말로 호된 맛을 봤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수도격인 경도(京都)에는 성한 집이 꼭 두 집 남았을 정도였다. 결국 전쟁은 우여곡절 끝에 휴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금촌은 그 뒤로도 이십 년은 넉넉히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을 내세워 관서의 인민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휘어잡을 수 있었다.
전 인민의 조직화도 시작은 ‘일본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일종의 동원 체계로 시작된 인민의 조직화는 곧 정치적인 통제수단으로 전환되었다. 오가작통(五家作統) 이니 뭐니 해서, 아시아의 전제 국가들이 그 폭압의 절정기에 일쑤 써먹던 수법을 상기해 보면 뭔가 짚이는 게 있을 것이다.
자체 사상(自體思想)에 대해서는 앞서도 잠깐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외양 소개에 지나지 않았던 만큼, 이번에는 그 내면적 구조를 살펴보자.
뭐니 뭐니 해도 그 사상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두어 마디로 뭉뚱그리면 그것은 민족과 주체성쯤이 될 것이다. 민족과 주체성, 듣기만 해도 얼마나 신나고 그럴듯한 말인가. 더구나 방금도 외세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어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절실하고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세계의 주변 국가들에게서 되풀이 나타나는 통치의 양태를 크게 이분(二分) 하면 군사주의와 문민주의(文民主義)가 될 것이다. 또 문화의 양태는 전통적 문화에 집착하는 문화적 국수주의와 문화의 비교 우위(比較優位)를 인정하는 세계주의로 대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사주의 통치는 효율성과 보상의 원리에 기초하며 통치자에게는 종종 말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경원되는 경향이 있다. 거기 비해 문민주의 통치는 정통성과 합법성의 원리에 기초하며 일쑤 노정되는 비능률성과 무질서로 권력 핵심에게 골머리를 앓게는 해도, 일반 민중들에게는 민주(民主)와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문화적 국수주의와 세계주의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이란 매혹적인 외양을 갖추지만, 종종 거기에는 문화의 정체나 퇴영이란 역기능의 그늘이 있다. 거기 비해 세계주의는 진보와 발전이란 현란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비교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주변 국가에서는 일쑤 사대주의(事大主義) 양태를 띤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통치 형태와 문화 형태의 결합 방식이다. 적어도 역사를 통해서 되풀이 확인할 수 있는 그 결합 방식은 군사주의 통치와 문화적 국수주의, 문민주의 통치와 문화적 세계주의이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도 당시의 핵심인 대륙세력에 대해 가장 저항적이며 민족 자주를 내세운 정권은 어김없이 군사주의 정권으로 그 대표적인 예는 원(元) 의 침략에 70년이나 집요하게 맞선 고려의 최씨 정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문화적 세계주의는 왕조(王朝)가 문민화(文民化)한 후의 정권 아래서 이른바 사대주의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군벌 출신인 개국 태조(開國太祖)의 군사주의 통치가 문민정치로 전환되는 고려의 광종(光宗) 이후, 그리고 근세조선의 세종 이후에 나타나는 문화 형태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관찰이 일리 있는 것이라면 금촌의 자체 사상은 그 통치 형태에 따른 필연의 선택이 된다. 금촌의 관서 정권이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군사주의 통치 형태란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 부인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곧 금촌의 자체 사상은 그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경향과 무관하게 선택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족과 주체성이란 말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해서 금촌의 자체 사상은 관서의 ‘인민’들뿐만 아니라, 관동의 ‘국민’들에게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방금도 관동의 진보주의 대학생 일부에게는 그 주체주의를 비틀어 만든 자체 사상이 무슨 신줏단지처럼 모셔지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했던가.
그렇지만 현대 세계사에도 유례가 드문 장기 집권과 대만의 장개석 외에는 그리 성공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부자 세습(父子世襲)을 위해 금촌이 고안한 것 중에 가장 절묘한 것은 효(孝) 개념의 정치화가 될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일본의 관서 인민들은 금촌을 ‘어버이 두령 동지’로 부르도록 교육받아 와서, 요즈음은 그게 공식 명칭을 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을 존경해 붙이는 호칭은 수천 수백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금촌이 유독 어버이란 호칭을 가장 앞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권력의 유지를 위한 고안(考案) 중에서 가장 흔해 빠진 것은 권력자 개인의 카리스마화(化)이다. 지도자의 무오류성(無誤謬性), 완전성을 골자로 하는 그 조직적인 프로파간다는 세계 여러 곳에서 권력의 장기화(長期化)에 아주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그보다 한 수 위인 것이 일찍이 아시아의 전제 왕조들이 고안해 낸 효(孝)의 정치화이다. 그들은 군부(君父)라 하여 정치적인 지도자에 어버이의 의미를 더하고, 그 신민(臣民)에게 아이 적부터 충효(忠孝)를 가르쳐 두 존재의 통일성을 고정관념으로 키워 가게 했다.
카리스마는 그 무오류성과 완전성에 대한 존경과 신뢰 위에 존재하지만 어버이 개념은 그런 선전조차도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굴복의 강요이다. 설령 오류가 있다 한들 어버이를 어쩔 것인가.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한들 어버이를 어쩔 것인가. 그 바람에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한번 왕관을 쓰면 절대적인 복종의 대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인데 금촌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런 피지배 계층의 멘탈리티였다.
하지만 금촌과 그 추종 세력의 고안이 아무리 정교한 것이라 해도 요즈음 - 20세기도 다해 가는 대명천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들볶아도 사십 년이 넘다 보니 전쟁 걱정은 시들해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 가는 데도 여행 허가서를 얻어야 하는 조직화 또한 세월이 길어지다 보면 신물이 나기 마련이다. 자체 사상이 그럴듯하다 하나 손에 쥐어 주는 게 없고, 어버이 놀음도 이미 수천 년 당해 온 사기라 곧 수상쩍어질 판이다.
거기다가 자급자족이니 자립 경제니 하는 자(自) 자 항렬 구호만 너무 찾다 보니 한동안은 관동보다 잘나가던 경제에도 한계가 왔다. 국제화다, 첨단화다, 다국적기업이다 해서 세계가 두루뭉수리로 돌아가는 판에 쌀 서너 섬 윗목에 놓아 두고 내 배 다칠라 하며 문 닫아 걸고 앉았기도 하루 이틀이었다. 뒤늦게 개방이다 외국 자본 유치다 법석을 떨어 본들, 쌀 빨리 먹자고 더디게 자라는 벼 이삭 잡아 뽑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앞수 몰리고 뒷수 막히니 기중 낫다 싶어 내민 게 통일이란 카드였다. 잘되면 연방제네, 어쩌네 하며 관동 것들까지 호려 전 일본을 적화하는 수도 나고 못돼도 벌써 못 견뎌 몸들을 비비 꼬고 있는 관서의 ‘인민’들 얼이라도 한동안 빼 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관동 정권에게는 왜 통일 놀음이 필요했을까 관동 정권의 담당자들이 요 근래에 와서 부쩍 통일 놀음에 열을 올리게 된 것도 냉정히 따져 보면 관서의 금촌에 못지않게 절실한 이유가 있다.
다 알다시피 관동 정권의 수립은 목자 박사의 주도 아래 이뤄졌지만, 그 뒤 사십 년 동안의 우여곡절은 관서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 금촌과는 달리 목자의 집권은 겨우 십이 년 만에 끝나고, 그 뒤로도 서로 조금씩 질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네 번씩이나 번갈아 정권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은 조금씩 달리해도, 필요할 때마다 통일 놀음을 벌인데 있어서는 목자 이후의 다섯 정권에 공통된 현상이다. 우선 목자의 통일은 시종일관 멸공(滅共) 서진(西進) 통일로서, 오늘날 많은 일본학(日本學)의 권위자들이 설명 하는 바로는 진정 한 통일보다는 분단의 고착화에 더 큰 뜻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대(對)국민 충격요법의 한 방식으로, 어떤 때는 대(對)미국 공갈용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통일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래도 관동에서의 통일 논의가 제대로 모양을 갖췄던 것은 목자의 망명 뒤 수립된 제2기 정권 초기였다. 목자의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던 학생층의 주도로 이루어진 통일 논의도 다분히 충동적이고 감상적인 데가 있었지만, 그 진정성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한 단계 발전한 논의였다.
하지만 그 논의는 당시의 집권층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데 한계가 있었다. 정권을 잡는 데 많은 빚을 진 학생 계층의 주장이라 맞대 놓고 반대는 못 해도 이제 막 관동이라는 밥상을 받아 든 격인 집권층으로서는 떨떠름하고 껄끄럽기 그지없는 메뉴가 끼어든 셈이었다. 그래서 울도 웃도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에 논의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고, 마침내 사회 분위기는 관동의 극우 보수 세력에게 생존권이 위협 당하는 위기 상황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 필연의 결과가 관동의 제5기 정권인 목정(木正) 군부 정권이었다. 쿠데타로 제2기 정권이 수립된 지 일 년 만에 전복한 목정(木正) 장군은 군부와 일부 극우 세력의 지지 아래 관동에 새로운 정권을 세웠는데, 통일 논의가 가장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치세(治世) 전반(前半)에 해당되는 제3기 정권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일었던 여러 갈래의 통일 논의를 모두 이적(利敵) 행위로 간주해 단호히 처벌했고, 관제(官製)논의를 제공하는 데도 아주 인색했다.
그러나 세월도 상황도 변화하기 마련, 끝내는 목정(木正) 정권에게도 통일 놀음이 필요해질 때가 왔다. 십 년이나 장기 집권하던 목정이 집권 연장을 의해 ‘제2유신’을 외치면서 뭔가를 보여 줘야 했기 때문이다.
흔히 유신 정권으로 더 잘 불리는 관동의 제4기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 출발부터가 통일 놀음에 의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력(西曆) 1970년대 초의 어느 날 대일본 국민들은 관동 정권 비밀 정보국장의 갑작스러운 담화에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용인즉,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같은 해를 이고 살 수 없는 적으로만 알았던 관서 정권의 수도 격인 경도(京都)를 다른 사람도 아닌 비밀 정보국장 그 자신도 다녀왔다는 것이며, 또한 관서 정권 쪽에서도 둘째 두령 격인 부수상이 동경(東京)을 방문해 관동 정권의 수뇌들을 만나고 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왕래에서 그때껏 범죄와 동일시되었던 통일이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며, 결과로는 상호 비방 금지, 전쟁 포기 등이 쌍방에 의해 합의를 보았다고 했다.
당연히 동서(東西) 일본의 국민들은 경악에서 깨어나자마자 기쁨과 흥분으로 들떴다. 그때 일본에는 대략 천만이 넘는 동서 이산가족이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그 불행한 민족이 기뻐하고 흥분할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었다. 민족의 이질화(異質化), 산업의 파행적 발전, 국토의 기형적 개발, 외세의 침탈 따위 동서 일본이 함께 앓아 온 고통들이 모두 그 분단에서 비롯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몇 달은 금방 뭐가 될 것처럼 왁작거리는 동안에 흘러갔다. 하지만 어차피 깨어지게 되어 있는 환상의 세월이었다. 순진하게도 동서 양쪽 스피커가 하는 말을 믿고 휴전선을 무시하려 했던 어느 청년이 뒤통수에 아카보 소총과 카빈 소총을 동시에 맞고 나자빠진 사건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듯이 관동 관서의 합의는 똑같이 ‘진의(眞意) 아닌 의사 표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비밀 회담이나 막후 협상이 그러하듯, 이번에도 어느 쪽이 먼저 그 모양새 나던 합의를 어기기 시작했는지는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미뤄 보아 먼저 화를 내고 테이블을 박찬 것은 관서 정권 쪽인 듯하다. 적어도 그 통일 놀음은 그들이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닌 데다 시간이 갈수록 관동 정권의 속셈이 수상쩍어졌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속셈은 따로 두고 혹시나 해서 관동 정권이 마련한 테이블에 앉았으나, 결과는 역시나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동 정권이 자기들을 이용하려는 기색마저 보이니 화가 날 것은 뻔한 이치였다.
하지만 관동 정권이 기다린 게 바로 그거였다. 화난 김에 지른 관서 정권의 몇 마디 거친 소리를 동침(東侵)의 구체적인 조짐으로 몇 배나 뻥튀기해 관동의 허파에 바람 든 국민들을 후려 덴 뒤 벼락같이 내민 게 이름하여 ‘제2유신’이다.
백 년 전 저희 조상이 막부(幕府)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한 것처럼 자기들도 고국의 위기에 즈음해 비상한 결단을 내린 것이라지만 모든 게 실은 각본대로였다.
그때의 통일 놀음에 삼선(三選) 개헌으로도 모자란 목정(木正) 정권의 한판 잘해 먹은 사기극이란 건 오늘날 관동의 어린 학생들조차 다 안다. 그 뒤 목정은 불만을 품은 부하 장군에게 살해될 때까지 두 번 다시 통일 문제를 힘주어 말한 적이 없었다.
목정에 이은 관동의 제5기 정권에서도 통일은 심심찮게 국정 연설이나 담화문의 메뉴로 쓰였다. 이렇다 할 준비도 없고, 모의 과정도 충분하지 않은 채 정권을 인수받아 내외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게 제5기 정권이었지만, 적어도 통일 놀음만은 염치없게 써먹지 않았다는 게 그 정권에 대한 관동 사람들의 기억인 듯하다
그다음에 이제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관동의 현 정권이 벌이는 통일 놀음이다. 아직도 많은 것이 진행 중이라 함부로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제6기 정권에 해당되는 현(現) 관동 정권의 통일논의도 여러 번 당해 본 뒤끝인 관동 사람들에게는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는 듯하다. 특히 관동의 재야인사들은 그것이 군부 출신인 현 정권 수반의 정치적 콤플렉스가 짜낸 낡은 묘수(妙手)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이미 역사에 편입된 앞서의 여러 정권들과는 달리 제6기 정권은 현재 관동을 장악하고 있는 정권이고, 그들의 정권 출범 벽두에 대형 현수막처럼 내건 통일도 아직은 지속적인 추구를 다짐하고 있는 한 나라의 정책인 만큼 그게 지금껏 해 온 놀음의 하나라거나 아니라거나에 대해서는 막말을 삼가자. 이웃 나라의 현 정권에 대한 예의로도 그렇고, 아직은 끝장이 나지 않고 진행 중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그 어느 쪽이든 지금 관동 지방을 휩쓸고 있는 갈등과 혼란을 보는 우리의 눈길에서 연민과 동정이 지워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도.
작년 이맘때쯤인가, 관동의 현 정권 수반이 통일을 지향한 일곱가지 조항을 발표했을 때, 솔직히 우리도 약간은 흥분되었다. 아무리 이웃 나라의 일이지만, 너무도 그림 같은 조항들이었기 때문이다. 관동이 이렇게 자랐는가. ― 일본의 현실에 대해 찰 모르는 이들까지도 그렇게 감탄의 말을 쏟을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런 느낌을 받게 된 데는 적지 않은 근거도 있다. 사실 요 근래 몇 년 관동의 발전은 외국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놀라운 데가 있었다.
군부 독재 정권의 보상적(補償的) 특성에 기인했던 3, 4, 5기 정권 아래서의 관동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매판자본 시비도 일고 외채 문제로 시끄러운 적도 있지만, 부존자원도 자본도 기술 축적도 모두 시원찮은 상태에서 관동의 경제는 이십 년 내리 두 자리 수의 경제성장 지수(指數)를 유지했고, 숫자 늘음이건 뭐건 GNP도 아시아에서는 우리 다음가는 고소득으로 올라섰다. 거기다가 1988년에는 반동가리 난 일본 관동정권의 수도 동경에서 터억 올림픽까지 치러 냈으니 우리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관동 정권의 그 같은 제의가 있자 관서 정권도 노상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잖아도 지금쯤은 통일 놀음을 제대로 한판 벌여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는데, 관동 정권이 때맞춰 건드려 준 셈이었다.
이에 관서 정권은 자기들의 다급함을 눈치채이지 않으려 딴전으로 뜸을 들이는 한편 그들의 오래고 경험 많은 대동 적화(對東赤化) 전략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그 첫 솜씨가 관동의 사회단체 대표에 대한 초청장 발송이었다.
외신(外信)에 따르면 금년 초 금촌은 현(現) 관동 정권의 원수(元首)를 비롯해 세 개 야당 당수, 두 개 재야 단체 대표, 그리고 두 개 종교 단체 대표에게 통일 문제를 의논하자는 명목으로 초청장을 띄웠다고 한다. 얼핏 보면 작년에 있었던 관동 정권의 제안에 응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적잖은 노림수가 감춰진 대응이었다.
정권 수립 이후 사십 년이 넘도록 금촌의 절대 권력 아래 단일 체제를 유지해 온 관서 정권에 비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한 관동 정권은 애초부터 정치력의 결집에는 불리한 체제였다. 미국식 민주주의란 게 원래가 다원화(多元化)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데다 정통성을 의심받는 정권이 사십 년에 여섯 번이나 뒤바뀌는 동안에 분열과 대립은 더욱 격렬해져 관동에는 공공연히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회단체가 줄을 잇는 판이었다. 거기다가 최근 이십 년의 군부 정권은 감옥에 다녀온 게 훈장으로 여겨질 만큼 반정부 세력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소홀했던 분배 정책은 경제의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층민(基層民)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반체제 단체가 의지할 수 있는 언덕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금촌이 초청장을 보낸 것은 바로 그런 단체의 대표들이었다.
보수적이라 욕을 먹건 말건 야당은 본질적으로 현 정권과 권력 장악을 경쟁하는 만큼 금촌이 기대할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금촌이 그 대표를 초청한 사회단체도 관동의 현 정권을 타도할 수만 있다면 누구하고도 손잡을 각오가 돼 있는 반정부 단체이고 얼른 보아서는 구색을 갖춘 것에 지나지 않아 보여도 종교 단체 또한 마찬가지로 그 같은 고려에서 선택되어 있었다.
금촌이 초청장을 보낸 것은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 지도자들로 구교야 ‘교회는 하나’라는 원칙에 묶여 있어 대표가 저절로 추기경으로 결정 나지만 신교는 중구난방이라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금촌이 고른 것은 관동 정권에서 가장 감정이 많은 단체였다. 거기다가 그런 금촌의 선택을 더욱 잘 드러내는 게 관동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믿고 있는 불교 지도자를 초청 대상에서 뺀 일이었다. 호국 불교의 전통에다 그 은둔적 성격으로 현실 참여에는 소극적인 불교에는 별 볼일이 없다는 뜻이겠다.
어쨌든 그런 초청 인사들이 경도(京都)에 모여 관서 쪽 관제(官製) 단체 대표자들과 연석으로 통일 문제를 의논한다고 상상해 보라. 방 안마다 관서족의 우세요, 투표마다 금촌의 뜻대로 결정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군다나 관동 정권의 원수가 밸 없이 그 연석 회의에 참가했다고 해 보자. 그때 그는 관동을 대표하는 여덟 명 중의 하나가 될 뿐이 아니겠는가.
금촌의 그 같은 초청장에 대해 관동 정권은 당연히 발끈했다. 그 결과가 신경질적인 반박 성명과 아울러 관서 정권과의 개별적 접촉을 금지하는 반공법 (反共法) 폐지의 보류였다. 일부에서는 관동 정권의 그 같은 대웅을 일관성이 없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관서고 관동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진정이라고는 개미 뭐만큼도 안 담긴 통일이란 빈 깡통을 심보 컴컴한 놈과 속 엉큼한 놈이 들고 부딪치니 소리가 어찌 요란하지 않겠는가. ― 라는 어떤 독설가(毒舌家)의 촌평도 한 번쯤은 귀담아들어 볼 만하다.
그런데 소동이 처음 일어난 것은 그런 싹수 노란 주고받기가 오간 지 한 달도 안 돼서였다. 일민맹(日民盟, 일본민족주의연맹)인가 뭔가 하는 단체가 먼저 금촌의 초청에 응하겠다고 나선 일이었다. 어버이 두령 동지께서 오라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리오. ― 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군부 독재 잔당’인 제6기 ‘물정권’이 꿰맞춘 것보다도 훨씬 볼만한 통일 방안이 관서와 금촌에게 있다고 믿은 것만은 틀림없었던 듯했다.
그들이 물길로 경도를 향해 떠나리라 발표하자 관동 지방은 적잖게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구경거리에 신나 하고, 못 가진 어른들은 빈 주머니 만지며 헛꿈도 꾸어 보고, 가진 어른들은 자다가 가위눌리고, 정부는 이미 해 놓은 소리 때문에 오히려 더 약이 올라 이리 저리 왁작왁작 시끌시끌했다.
하지만 결국 갈 수는 없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관동 정권이 경찰을 풀어 길목을 막으니 일민맹(日民盟) 간부들은 동서 경계선인 각문관(角文館)까지도 못 가 보고 버스째 붙잡혀 되돌아왔다. 옳고 그름이 어디에 있건, 이웃 나라 서생(書生)이 보기에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희비극이었다. 세상에 순수와 아름다움과 정의만으로 찬 사람이 있다더냐. 세상에 탐욕과 잔인성과 권력욕만으로 뭉쳐진 인간이 있다더냐. 인간이 그렇게 양분되어 태어나지 않는 바에야 칼로 베듯 하는 시비의 구별은 의미도 없거니와 옳지도 않다. 다만 그들을 보고 다시 한 번 가슴 쓸며 확인하는 것은 분단되지 않은 나라에서 그런 소동 안 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일 뿐이었다.
통일 논의와 관계해 관동에서 두 번째로 벌어진 소동은 문사(文士)들에 의한 것이었다. 금촌으로부터 초청받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문인들이 통일의 선봉을 자임(自任)하고 경도로 가 보겠다고 떼지어 나섰다. 관서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통일의 물꼬를 트겠다는 주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없지만 요즈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게 관동 문인들이란 말이 있다. 이십 년의 군부 정권에다 분배의 불평등 핵(核), 공해(公害) 따위 세계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든 문제가 그 좁은 땅에 다 몰려 있어, 이놈 치고 저놈 나무라다 보니 하루가 마흔여덟 시간이라도 모자란다는 얘기였다.
거기다가 더욱 신나는 것은 정치판과 문학판의 판세가 정반대로 뒤집혀 있는 점이다. 정치꾼들은 경찰과 군대 같은 제도를 장악하고 있는 여당과 친정부 인사가 아직도 우세하지만 문학판에서는 벌써 칠팔 년 전부터 그게 뒤집혀 있었다고 한다. 곧 친정부나 중간파는 어용이나 보수(관동에서는 보수란 말이 욕설이 되어 있다.)로 몰려 눈치 보기 바쁜 데 비해 반정부파만이 진보와 새로움의 미덕을 독점한 채 목소리를 높여 온 탓이다.
그런 현상은 외형상의 군부 정권이 끝나 가는 제5기 정권 말기에 더욱 두드러져, 반정부파가 기존의 문인 단체를 어용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문인 단체를 만드니 관동 문인의 80퍼센트가 그리로 돌릴 정도였다. 그 모두가 골수 민주 세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관동 문단의 판도를 짐작하는 데는 훌륭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재작년 선거로 민선 대통령이 들어서고 정부와 여당이 거꾸로 민주화를 부르짖게 되자 관동 문인들은 좀 혼란되었다. 그때껏 그들이 힘을 모아 외쳐 온 것은 군부 타도, 민주 회복이었는데, 갑자기 그 구호의 호소력과 설득력이 반이나 줄어든 까닭이었다.
거기서 관동의 민주 문인들 사이에는 잠시 논란이 일었다. 일부는 제6기 정권의 골격이 아직 많은 부분 제5기 정권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고, 대통령도 군부 출신이란 점에 착안해 빛이 좀 바래긴 했지만 군부 타도, 민주 회복을 그대로 쓰자고 주장했고, 다른 일부는 민족 통일로 구호를 바꾸자고 나왔으며 나머지 소수는 반핵 운동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논란을 자연스럽게 끝내 준 게 제6기 정권이 내놓은 문제의 그 선언(그쪽에선 9·9 선언이라 불린다.)이었다. 그 어설픈 선언이 민주 문인들의 선택을 통일로 유도한 셈이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진정으로 민족의 통일을 열망하는 관동의 민족주의 문인들에게는 모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든 날짐승이든 무리를 잘 지어야 한다. 까마귀 떼 사이에 황새 몇 마리가 섞여 있다 해서 아무도 그걸 황새 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거기다가 집단이 되고 운동성을 띠면 원래의 순수성은 전략이니 효율성 제고니 해서 어느 정도 왜곡되고 변질되기 마련 아닌가.
민주 문인 단체가 성명을 통해 경도행(京都行)을 발표하자 관동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관동 사람의 일부는 그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갈채를 보내고 그 뜨거운 민족주의에 감격 했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양심 의 표상이며 민족혼의 결정이며 일본의 지성 (知l生)이 지닐 수 있는 모든 미덕(美德)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꿈 하나로 이와테 산(혼슈[本州] 북쪽의 고산(高山))과 구니미다케 산(규슈[九州] 남쪽의 고산(高l山))이 얼싸안고 춤을 출 줄 알았으며, 그들의 민족혼에 찬 노래 한 구절로 비와호(경도(京都) 곁의 큰 호수)와 동경만(東京灣)의 물이 하나로 합쳐질 줄 믿었다. 아카보 소총도 M16도 그들의 살갗은 뚫지 못하고, 미그25도 F16도 그들의 뜨거운 염원에 부딪히면 격추되리라 보았다. 관서 인민공화국 군대도 관동민주공화국 군도 동서의 문인 교류만 이뤄지면 바람 앞의 짚검불이요, 그리하여 튼 통일의 물꼬는 내무서도 경찰서도 흔적 없이 휩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찮았다. 동경(東京)에는 삼천 명 가까운 문인들이 있다. 반체제니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해서, 넓어야 반경 백 킬로미터도 안 되는 도시에 살면서도 저희끼리는 몇 년씩 얼굴을 맞대지 않고 지내면서 수백 킬로미터 서쪽 경도(京都)에 있는 문인들과 교류하는 것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냐? 같은 체제 안에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면서 체제를 달리하는 쪽과는 얼싸안을 수 있다니 뭐가 잘못된 거 아니냐? 통일이란 게 민족의 결속을 의미한다면 먼저 관동의 문인끼리부터 부둥켜안아야 되지 않느냐? 지척에 있는 동료는 벰 보듯 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어찌 그리 잘 믿느냐? 그런 게 대강 관동 문단을 잘 아는 사람들의 의문이었고, 문단 밖의 현실주의자들은 또 이렇게 빈정거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진지하게 추구된 꿈이 우리 역사를 진전시킨 적도 있지만, 헝클어 놓은 적도 많지 않으냐. 펜이 칼보다 강하다지만 그건 칼 쥔 놈이 해 보는 소리지 언제 펜과 칼이 정면으로 부딪쳐 이겨 본 적이 있느냐. 통일 그거 좋은 거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지 마라. 돌 던지는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맞는 개구리는 죽을 지경이라지 않더냐. 너희들은 꿈으로 기분으로 해 보는 소리지만, 그거 잘못되면 모가지가 날아가고 재산이 날아가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못하게 살아야 되는 사람이 동과 서에 작게 잡아도 천만씩은 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쥐고 있는 게 총칼이고 돈이고 힘 아니냐. 겁탈할 재간도 없이 지분거리면 계집 콧대만 높아지고, 넘지도 못할 담 자꾸 기웃거리면 그 집 개새끼 성질만 버려 놓는다. 공연히 주적거려 일 어렵게 만들지 말고, 눈치 보아 짬 보아 될성부를 때 나서거라.
그러나 시비야 어찌 됐건 결과는 일민맹(日民盟)과 비슷했다. 그들 역시도 각문관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닭장차 신세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그 두 사건은 뒤이은 통일 소동으로 보아 장으로 치면 초장이요, 막으로 치면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 봄 들기 바쁘게 일본의 관동 정권은 성나고 기막혀 허파가 뒤집힐 외신(外信) 몇 줄을 받았다. 연초 금촌의 초대를 받은 관동의 목사 한 사람이 정부의 거듭된 엄포에도 불구하고 멀리 길을 돌아 경도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봉헤이[文平]라고 하는 반체제 운동의 지도급 인사인 목사였다.
봉헤이 목사는 대(代)를 잇는 목회자(牧會者)요, 민족 민주 지사의 가문 출신으로 관동의 ‘제2유신’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이었다. 군부 정권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당한 경력이 있고 연초에는 가장 강력한 재야 단체인 일민맹(日民盟)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새로운 활동이 기대되던 그 방면의 원로라고 한다. 나이는 벌써 일흔이 넘었지만 불같은 기백으로 민주 회복의 늙은 기수(旗首) 역을 담당해 왔다는데 갑자기 그렇게 통일의 선봉으로 노익장의 순발력을 보였다.
법석은 먼저 경도에서 벌어졌다. 금촌을 비롯한 관서 정권의 권력 핵심들은 분단 뒤 처음으로 찾아든 제대로 된 선전거리를 효과적이고도 인상적인 무대를 갖춰 맞아들였다. 금촌 자신이 공항까지 영접을 나가고 상징적인 포옹이 거룩하게 나눠지고 감동의 눈물이 온 사람, 맞는 사람에게서 줄기줄기 흘렀다. 아쉬운 대로라면 그리고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런 사람 하나쯤은 납치라도 해 올 판에 봉헤이 목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관서 쪽의 눈물은 진정일 수도 있겠다.
고의였든 아니였든 봉헤이 목사도 그런 관서 정권의 기분 한번 화끈하게 맞춰 주었다. 마치 망명이라도 온 것처럼 관동 정권과 그 수반은 아무개 정권, 아무개로 부르면서 금촌에게는 깍듯이 수령 동지를 붙였고 일본의 통일은 다만 관동의 반동 세력 때문에 안 되는 것으로 단정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관동에는 수백만의 에국 학도와 민주 시민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다는 보고를 함으로써 그들이 마치 금촌을 지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마침내는 몇 년 전 금촌이 내놓아 관동 정권에게는 명백히 거부된 통일안과 비슷한 것에 합의한 뒤 일통투(日統鬪)인가 하는 촌스러운 이름의 관제 단체와 공동 성명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일이 그쯤 되자 외신을 통해 보고 있던 관동에서는 그 몇 배나 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설마설마하고 보고 있던 관동 정권은 이제 허파가 뒤집힐 지경을 넘어 눈알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실제로 해외 토픽란에 보면 그 무렵 관동의 정부 청사 마당에는 관련 부처 고관들의 놀라거나 성나 튀어나온 눈알이 자갈처럼 굴러다녔다 한다.
관동의 일반 국민들 사이에 벌어진 찬반의 논의도 소동이란 말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았다. 둘만 만나도 붕헤이 목사요, 셋이 만나면 통일이었다. 아침에 만나도 그 얘기요, 저녁에 만나도 그 얘기였으며, 지하철에서, 목욕탕에서도 그 얘기였다. 확인은 못 했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그 무렵에 관동의 개새끼들까지도 멍멍이나 왕왕 대신 붕헤이, 봉헤이, 통일, 통일 하고 짖어 댔다는 소문이 있다.
부질없기로야 남의 시비를 가려 주는 일보다 더한 게 있을까만, 이왕 얘기를 낸 김이니, 그 찬반(贊反)의 내용들이라도 살펴보자.
관동 당국에 의해 ‘붕헤이(交乎) 밀입서(密入西) 사건’으로 공식 명명된 그 일이 터지자 그곳 젊은이와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 다수는 어김없이 봉혜이 목사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은 그 사건을 분단 사십오 년 제일의 쾌거로 치켜세우기에 주저치 않았으며, 그게 통일에 기여하는 바는 혁명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봉헤이 목사님의 결단은 그 한 몸으로 민족의 염원을 보듬어 안은 것이며, 그 실행은 통일이란 민족적 과업을 향한 거룩한 출발이었
다. 돌아오면 닥칠 파쇼·반동·악질 군부 정권의 박해에 개의치 않고 떠난 것은 자신을 던져 민족을 구하겠다는 애족혼(愛族魂)의 극치이며, 금촌과의 포옹 원수를 사랑하라던 기독(基督) 그 자신보다 더욱 완벽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지지는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차츰 개인 숭배로까지 발전해 그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사(家族史)까지도 미화(美化) 되었다. 역시 목사로 재직하다가 군국주의 정권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 탄압을 피해 관서에서 만주로 망명했던 그 선친(先親), 패전 후 다시 관서로 돌아왔으나 금촌과 공산당의 박해를 못 이겨 관동으로 옮겨야 했던 그 자신과 다시 관동의 목자(木子) 독재 정권 및 군부 정권의 박해를 못 이겨 이제는 낯선 미국 땅을 유랑하는 일부 그 아랫대, 그 삼 대(三代)에 걸친 수난사는 실로 전해 듣는 이마저 숙연해지는 데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 자신도 한때 미국의 풍요와 평온에 안주할 기회가 있었으나, 진작에 마다하고 관동으로 되돌아와 그 서슬 푸른 ‘제2유신’ 시절에 의(義)를 위한 투쟁의 첫발을 내디뎠으니 아마도 그는 그의 하느님이 동방의 불행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특별히 지어 보내신 사람 같다는 게 그 지지자들의 결론이었다.
그러하되, 참으로 알지 못할래라 사람의 눈과 귀여, 머릿속이여, 대상이 되는 인격도 행위도 다만 하나인데 그 판단과 해석은 또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관동에는 또 그만큼의 봉헤이 목사를 싫어하고 그의 서행(西行)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애꾸눈인 사람을 옆모양만 보면 그는 장님이거나 성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관동에는 사람의 옆모양만 보고(그것도 자신이 보고 싶은 쪽만) 판단하는 게 유행하는지, 봉헤이 목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또 너무 다르다.
우선 그들은 봉헤이 목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미화하던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부터 비난의 포문을 연다. 우선 그들은 봉헤이 목사의 선친이 위대한 목회자(牧會者)로 미화되는 것부터 반대한다. 군국주의 시절에도 진정한 목자(牧者)는 수난받는 그 양 떼와 더불어 본토(本土)에 남아 있었으며, 관서가 적화되었을 때도 진정한 목자는 그 양 떼와 남아 순교까지 당했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양 떼를 버린 목자를 찬양하는 것은 양 떼와 함께 남아서 죽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것만큼이나 억지다. 그 아랫대도 그렇다. 관동에 왔으면 그대로 눌러살지, 그곳이 좀 불안하다고 제 나라를 버리고 미국까지 가? 혹시 그 일가 원래 조금만 불편하면 제 살던 곳 버리고 뛰는 피 아냐? ― 그렇게 나가다가 나중에는 붕헤이 목사 신상에까지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 사람 혹시 좋은 것만 너무 따라다니는 사람 아냐? 생각해 보라구 동서 전쟁 전 관동의 많은 사람들 공산당 의심받을까 봐 기도 제대로 못 펼 때 피난 온 관서 사람 거기다가 기독교인 얼마나 당당했겠어? 또, 동서 전쟁 때는 그 사람 유엔군 통역했다며? 우리가 굶주림에 떨고 있을 때 권총 차고 양키 장교 식당에서 잘 지냈겠지. 우리 괴롭던 50년대, 60년대 그 사람은 어디 있었나? 미국 유학 거 좋지, 가족 대부분이 이주하고……. 그러다가 우리 정계 데뷔는 1974년, 고생은 꽤 했지만 그 뒤 십여 년 만으로 그만한 자격 생길까? 우리가 사십오 년씩이나 피땀 흘려 가꿔 논 이 마당을 제것처럼 휘저을. 다 안다구, 다 알아. 거 뭐 일민맹(日民盟)인가 하는 단체, 연초에 통합할 때 주도권 다툼깨나 있었다면서? 노욕이 뻗쳐 어떻게 한번 쥐어흔들고 싶은데 젊은 패들이 고문이란 실속없는 감투만 씌워 한쪽에다 밀어붙여 버렸다면서? 혹시 이번 경도행 그거 어떻게 한번 만회해 보려고 짜낸 묘수(妙手) 아냐? 금촌이나 목정에게서 한 수 배운…….
그 경도행의 효과를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 무엇보다 그 동지들에게 몹쓸 짓 했어. 자리 보구 다리 뻗으랬다고 아직은 보수 세력 눈이 시퍼런데 그래 놓으면 그 동지들은 어쩌란 말이야? 더구나 의논도 제대로 안 하고 갔다며? 통일도 최소한 몇 년은 후퇴시켰어. 좀 궁상맞은 소리 같지만, 당장은 동서 양쪽 정권이 소리소리 함께 통일을 외쳐 대고 있으니 좀 지켜보는 것도 괜찮잖아? 아무래도 총칼 가진 놈 무시하고 될 일은 아니잖은가 이 말이야.
눈알 푸른 사람들 속담에 불행은 반드시 떼를 지어 온다는 게 있다더니 올해 관동 정권의 운세가 바로 그런 것 같았다. ‘봉헤이 밀입서 사건’이 아직 채 가라앉기도 전에 ― 그 후 돌아온 붕헤이 목사는 관동의 공안당국에 의해 수감되었다. ― 관동 정권은 다시 새로운 돌풍에 휩쓸렸다. 이른바 ‘모리(森) 양 밀입서(密入西) 사건으로, 이번 초여름에 터진 그 사건은 아마도 올해 일본이 겪고 있는 통일 소동의 한 절정이 될 듯싶다. 이번에는 모리(森) 성 쓰는 관동의 여대생 이 관동의 일대맹 (日大盟, 일본대학생연맹)을 대표해 경도로 날아간 일이 바로 그랬다.
그런데 이 모리 양의 밀입서에 대해서는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해야 될 것 같다.
앞서 지나가는 얘기로 관동의 올림픽을 말한 적이 있는데 실은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올림픽을 유치한 제5기 정권이 정말로 오늘날과 같은 그 효과를 계산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유치 초기에는 지식인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작년에 동경에서 우리에게조차 뜻밖일 만큼 성공적으로 치러진 88올림픽은 관동 정권에게는 여러 가지 굉장한 이득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서 정권에게 쓰라린 것은 그 대회의 눈부신 대외 홍보 효과였다. 그 전에
도 관동 정권은 공업화다, 수출 몇 백억 불이다 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세계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관동 정권이 총력을 기울여 동경을 거대한 전시장처럼 만든 결과 찾아온 세계는 깜짝 놀랐다. 오늘날 관동의 대일본 민국을 아시아에서는 우리 다음의 선진국으로 공인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올림픽 덕분이었다.
이에 앙앙불락하던 관서 정권이 꿩 대신 닭이라고 유치해 들인 게 바로 세계청년축전이라는 행사였다. 주로 사회주의 국가의 청년들이 모여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국제 대회로 올림픽보다는 규모도 지명도(地名度)도 어림없지만, 잘만 하면 관서의 일본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해서 곧 죽어 가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쯤은 세계에 알릴만했다.
모르긴 해도 관서 정권이 그 대회를 준비하는 데 들인 공도 관동 정권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들인 공보다 적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일사불란한 체제라 한 몇 년 공을 들이니 경도 또한 남에게 보이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되어 갔다. 관동처럼 참가국과 참가자 숫자에도 안간힘을 다해, 한번 가 봐도 괜찮은 대회가 될 만해졌는데 ― 작년 관동 정권의 9·9 선언이 금상첨화의 힌트 하나를 주었다. 그 축전에 관동의 대학생 대표를 끌어들인다는 묘책이었다.
최근 관동 공안 당국의 발표를 보면 모리 양의 입서(入西)는 관서 정권의 치밀한 공작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관동의 학생운동권 내막을 살펴보면 뭐 그렇게 기를 쓰지 않아도 관서 정권의 뜻대로 관동 대학생 대표가 경도에 나타났을 듯싶다. 왜냐하면, 관동의 학생운동 주도권은 관서 정권이 일대맹(日大盟)에 초청 의사를 공표할 때 이미 자사파(自思派: 자체사상파)에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의 조국이 부르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하기야, 세계에서 이름난 반공 국가요, 더구나 아직까지도 군부정권 시비가 심심찮은 관동의 대학생 운동이 어떻게 좌파 중에도 가장 과격한 자사파에게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의심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꼭 이해 안 될 것도 없다.
어떤 관동 시인의 노래 중에 “버스를 갑자기 우로 몰면 승객은 좌로 쏠린다.”는 게 있다. 동의 군부 정권이 실시한 극우적인 정책들에 대한 반발이 일반 민중들을 오히려 좌파로 기울어지게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한번 의식이 좌파로 길을 잡자 그다음 운동 지도부는 그 주도권 다툼 과정의 상승작용으로 급속히 과격화하였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관동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사회주의란 말조차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러나 차츰 공산주의까지 서슴없이 말해지더니 5기 정권 끝 무렵 엔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공연히 인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근년에는 그것으로도 부족해 과격 선명 경쟁이 일어나더니 마침내 주도권은 가장 과격한 자사파에게로 낙착을 보았다. 만약 금촌의 아들 직월(直月)이 자체 사상보다 새로운 사상을 꿰맞추기만 하면 관동 학생운동의 이다음 주도권은 틀림없이 그 사상으로 무장한 일파에게 돌아갈 것이다.
어쨌든 관서 정권의 초청 의사가 이르기 무섭게 자사파에 주도된 일대맹은 참가 의사를 밝혔다. 이래저래 속을 썩이던 관동 정권은 그때부터 이미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막자니 동서교류 추진이란 9·9 선언의 한 항목이 걸리고, 보내자니 뻔한 관서정권의 수작에 걸려드는 게 싫었다. 자기네 정부 입장 알 만한데도 준비 없이 쏟아 낸 선언 한 구절 걸고 들어가 억지를 써 대는 일대맹 아이들도 염치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자고 그런 방비도 없이 멋 부린 선언부터 먼저 쏟아 내 그 지경으로 몰린 관동 정권도 딱했다.
하지만 아무리 멋쩍어도 맥없이 손 놓고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정부가 끝내 허락하지 않자, 일대맹이 결행한 게 바로 모리 양 밀파였다.
모리 양이 누구이며, 어떻게 선발됐고, 어떤 길을 돌아 경도까지 갔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하는 건 그만두자. 하도 기발한 착상이라 우리 신문에도 몇 번 소개됐으니 웬만하면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허퐁 치기 좋아하는 사람은, 소련 비밀경찰 열 명 찜쪄 먹고도 미국 중앙정보부원 하나는 입가심으로 해치울 만한 게 일대맹의 모리 양 밀입서 작전이라고 한다.
그 뒤 관서에서 있었던 북새통과 관동의 호들갑에 대해서도 생략하겠다. 이미 말했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은 어린아이 하나 간 걸 투고 외국 원수라도 온 듯 각부(各部) 요인에 여든이 넘은 금촌까지 나서서 주접을 떤 꼴도 가관이지만, 기자 회견까지 하고 돌아다니는 일대맹 간부 한 명 못 붙들어 모리 양이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간지도 제대로 모르던 관동 정권의 무능도 한심스럽다.
하지만 그 소동에 끼어들어 하마터면 배보다 더 큰 배꼽 될 뻔했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얘기는 좀 해야겠다. 그 역시 오랜 군부 정권의 산물로 관동에는 한 십여 년 전부터 정의 사제단이란 비정규적인 사제들의 모임이 있었다. 천주교의 정식 기구는 아니나 지난 십 년 꽤 볼만한 일을 많이 한 단체였다.
모리 양의 경도 도착이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관동 전체가 그 찬반의 다툼으로 벌컥 뒤집혀 있을 무렵, 그 사제단은 외국에 나가 있던 신부 한 사람을 관서로 파견했다. 치밀한 사전 계획과 정확한 자금 조달 체계에다 세계를 반 바퀴나 돌아 경도까지 간 당찬 아가씨지만, 그 사제단에게는 어디까지나 한 마리 길 잃은 양일 뿐이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관동은 다시 한 번 뒤집혔다. 특히 그 신부가 연설을 통해 관서 정권이 되풀이 주장해 오던 통일 원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관동 정권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권유함과 아울러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 안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란 위협까지 곁들이자, 그때껏 눈치만 보고 있던 보수 세력도 일제히 성토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신부 편을 드는 사람들이 맞받아침으로써 한동안 관동은 그 시비로 악머구리 들끓듯 했다.
그 신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성경 해석을 통해 논지를 세워 나갔다. 통일이란 게 워낙 건드릴 수 없는 지상(至上)이라 반통일 세력 소리를 안 들으―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란 구절에 의지해 교리의 초월성과 세계주의, 그리고 평화와 비폭력 원칙을 강조하며 그 신부와 그가 속한 사제단이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고 꾸짖었다. 어떤 이는 그들의 지나친 정치화를 비난했고, 심하게는 그 사제단이 중세적(中世的)인 교권(敎權) 우월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물어보나 마나 그 신부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먼저 성경 해석의 문제에서 자신들이 정당함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기독(基督)의 드러난 언행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확실히 적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틀림없이 초월성이 현실성보다 더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게 바로 세속에서의 삶에 대한 방관이나 무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리의 세계주의적 특성도 분명히 인정되나 민족 공동체를 저버리란 뜻은 아니고, 평화와 비폭력도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극거로서 기독이 덜 헬라화(化) 된 갈릴리를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한 것,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채찍으로 내쫓은 것, 착한 사마리아인을 치켜세운 것 따위를 들었다. 그들에 따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는 구절로 기독의 사상에 어떤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야말로 피상적인 성경 해석이며 십자가 위에서의 진실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보다는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쪽에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 어느 편과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우리들이라 뱃속 편하게 그 시비에 가담할 수도 있지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누가 그런 시비에 최종적인 판정을 내려 줄 수 있단 말인가. 공산주의의 사상적 근원을 원시 기독교의 공동 생활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 만큼, 말려들어 봐야 골치만 아픈 게 그 시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비와는 무관하게 아무래도 딱하게 된 것은 그 신부와 사제단일 듯싶다. 뒤이어 표명된 주교단의 의견과 관동 평신도 협회의 결의가 생판 거짓이 아니라면, 그들의 성경 해석이 옳아도, 틀려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의 사제단의 성경 해석이 옳다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방향 착오를 일으켰거나 주제넘은 짓을 한 게 된다. 내 코가 석 자라고 엉망인 가톨릭 내부를 놔두고 정치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수 있겠는가. 일껏 기독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결행해 놓은 일에 ‘유감 운운’의 의견을 표명한 완고하고 보수적인 주교단, 아무래도 성경을 잘못 해석한 듯하니 빨리 갈아 치워야 할 것이다. 교회를 현세 기복(祈福)의 장소쯤으로 여기는 저 홍몽 천지의 평신도들, 그 우매한 대부분은 재교육시키거나 파문해야 한다. 뿐인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선배 보프 신부를 불러다가 공연히 겁준 교황청도 그냥 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버려둔 채 정치의 불의에만 목청 높이고 있다면 이는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요,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못 보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뻬주겠다.’는 격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들의 성경 해석이 틀렸다면 그 자체로 낭패이고 ― 요새 아이들 말로 ‘용코로’ 딜레마에 걸린 셈이다.
모리 양에 대한 시비는 대략만 전하겠다. 저희끼리는 중요한 시비이고, 모리 양이 관동으로 돌아간 지금은 실정법(實定法) 문제까지 얽혀 앞으로 한동안은 박 터지는 쌈질을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어차피 강 건너 불이다.
모리 양을 지지하는 쪽의 의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옳다, 네가 바로 잔다르크라는 것이 될 것이다. 부디 파쇼 군부 정권에게 항복하지 마라. 그들의 장작더미 위에서 타 죽으면 네가 바로 구국(救國)의 성녀(聖女)다…….
하지만 프랑스에게 구국의 성녀는 영국에게 재앙의 마녀(魔女)가 된다. 관동의 보수 세력(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관동 분들 화내지 마시길.)은 말한다.
지난 한 달 관서 지방을 짤랑거리고 다니며 사람 허파 뒤집는 소리만 해 댈 때는 철없는 계집아이가 아니라 정말로 작은 마녀(魔女) 같았어…….
그 밖에 통일과 관계해 요즈음 일본이, 특히 관동이 겪고 있는 갈등과 혼란의 원인이 된 사건은 수없이 많다. 미쓰이[三井] 재벌 총수의 관서 방문, 사이코[西鄕] 의원의 밀입서(密入西) 사건, 기토오[木藤] 관방 장관의 경도 방문설 따위가 그것인데…… 남의 나라 얘기가 너무 지루한 것 같아 줄이기로 한다. 궁금한 게 많은 분은 도서관으로 가서 요미우리나 마이니지 금년 치를 읽어 보시도록.
그렇지만 아무리 강 건너 불이고 당장 우리가 속 태울 것 없는 남의 나라 일이지만, 가까운 이웃으로 그 소동을 보는 감회마저 없을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느끼는 것은 ― 미움도 원한도 세월이 지나면 속절없이 씻기고 마는가. ― 이 불행한 이웃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다. 동서로 나뉜 것만도 괴로운데, 다시 그 동서가 조각조각 나 대립하고 다투니 그 민족이 겪는 고통이 오죽할까. 더군다나 그 갈등과 불화가 민족이 다시 하나 되기 위한 것이라는 아이러니에는 동정을 넘어 애잔한 연민마저 느낀다.
그다음은 ― 남의 불행을 우리가 즐기고 있다고 성내지 않는다면 ― 충고의 유혹도 있다. 특히 관동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무엇보다도 사고(思考)의 일관성을 가져라. 왜 어떤 부분에는 그렇게 현실적이고 치밀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환상적이며 무모한가. 어째서 어떤 부분에는 그렇게도 냉정하고 회의적이면서 어떤 부분은 또 그토록 맹목적인 믿음으로만 대하는가. 왜 어떤 쪽은 그렇게 비관하면서 다른 쪽에 대해서는 그토록 터무니 없이 낙관적 인가. 진정으로 당신들이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편향될 대로 편향된 시각부터 교정 하거라.
우리하고 정식의 국교 관계가 있어 살펴보기에 훨씬 용이한 관동의 각 세력이 지닌 편향성만 예를 들어 보자. 그쪽 정부 여당의 편향성은 예부터 이름이 나 있다. 예컨대, 어떠한 통일 논의건 그 옳고 그름은 논리가 아니라, 논의의 주체가 이편이냐 저편이냐에 따라 판정돼 왔다 하지만 그 반대편이라고 해서 조금도 나을 것은 없다.
우리가 보기에 관동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세계 해석을 아직도 전근대(前近代)적 극단론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다. 곧 악으로만 뭉쳐진 인간성과 선으로만 뭉쳐진 인간성, 전적으로 낙관적이거나 전적으로 비관적인 것으로만 나눠진 세계, 그것이 그들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도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로 한번 선의 판정을 받으면 그 인간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것으로만 이해되고, 한번 악으로 규정되면 그에게서는 손톱만큼의 선도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도 그와 마찬가지로 양분되어 한번 낙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세계는 끝없이 낙관적으로 전개되고, 한번 비관적으로 단정된 세계는 그대로 비관적으로 끝장 보게 결정돼 있다는 식이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자기들이 지지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와 선으로만 뭉쳐 있고, 그 통일 논의는 낙관적인 결말이 보증돼 있다. 그러나 반대편은 말 그대로 악과 탐욕만의 덩어리이며, 그 통일 논의는 오직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뿐이라고 단정한다. 현실과 이상을 너무나 자의적으로 분배한 탓으로, 거기에 우리의 일관성에 대한 충고가 나오게 된 것이다. 불행한 이들이여, 현실과 이상을 골고루 분배할 줄 알아라. 세상에는 악으로만 뭉쳐진 인간이 없는 것처럼, 선으로만 뭉쳐진 인간은 없느니, 이기(利己)에 찬 자본주의적 고안(考案)도 위대한 발명으로 인류의 복리 증진에 공헌할 수 있는 것처럼, 치밀한 논리와 빛나는 이성으로 짜 맞춰진 이념이 오히려 인류의 족쇄로 기능할 수도 있느니.
그다음 우리가 특히 관동 사람들의 통일 논의에 해 주고 싶은 것은 진지성이다. 그들의 분단은 이미 사십 년이 넘었고, 또 한차례 죽고 죽이는 싸움까지 치른 터였다. 따라서 그러한 분단의 해소는 준(準) 혁명적 상황이 될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 관동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통일 논의에는 그러한 준혁명적 상황에 걸맞은 진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듣는 이는 저마다 화날 테지만, 기껏해야 좀 심각하고 거창한 놀이, 아니면 이도 저도 막힐 때 내던지는 정략적 카드, 또는 다급한 땜질을 누가 진지하다 '괄하겠는가.
남은 최루탄 가스 속을 박 터져 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기껏해야 좀 심각하고 거창한 놀이라니, 거 아무리 풀 건너 양반들이라 해도 너무하잖소? 관동 정부의 형무소와 경찰은 폼으로 있고, 간첩죄 보안법은 사람 못 죽이는 줄 아시오? 뭐 최루탄 가스는 샤넬 향수쯤 되고 경찰봉은 안마기 대용품인 줄 아시오? 라고 관동의 재야와 급진 학생들은 우리에게 항의해 올지 모른다. 물론 우리도 그들의 행위 그 자체가 진지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들의 통일안이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며, 정부가 그것만 인정해 주면 통일은 떼 놓은 당상이라는 식의 행동 방식이 영 미덥지 못할 뿐이다.
우리 보기에 당신네 통일은 먼저 당신네 사천만이 내부적으로 일치하여 몇 년이고 진지하게 머리 쥐어뜯으며 답을 짜낸다 해도 온전한 답일 가능성은 적다. 거기에 또 수없이 수정과 가감이 곁들여져야만 근근이 그 꼬일 대로. 꼬인 민족의 대사(大事)를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로서는 그 객관성과 합리성을 승인하기 넉넉잖은 몇 사람이,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된 이념과 설익은 지식의 책상물림 몇이, 머리 맞대고 얽어 논 그 통일안을 정답으로 우기고 사회 전반에 강요하고 들어? ― 거기에 그들의 진지성에 대한 우리의 의심이 있다.
만약 그들이 겸손하게, “우리가 이런 방안을 생각해 보았는데 종합 담안 작성에 참고로 하시지요.”라고만 하고 나왔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 게다. 아니, 좀 대담하게 우리 것이 거진 정답 같으니 어디 당신네 답하고 같이 국민투표라도 부쳐 봅시다 하고만 나와도 우리는 그들의 진지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적인 합의 과정에는 무관심하게 ― 또는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강요하며 ― 제 것만 옳다고 우기니, 국민 무시하기로는 저희 정부나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진지성을 믿지 못하고 있다. 비록 바다 건너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밖으로는 세계 정세에 순응하고 안으로는 민족의 점증하는 열망에 부응하여 금번의 통일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책임 있는 각료는 물론 사계의 권위들을 망라해 내놓은 이 통일안에 대해 무슨 카드니 땜질이니 하며 진지성을 의심하는 귀(貴) 국민들의 태도는 실로 유감이다. 이는 국제 예양에도 어긋나는 바이므로 귀(貴)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함과 아울러 그 시정을 엄중히 요구한다.”
어쩌면 이 글을 읽은 일본의 관동 정부는 외무부를 통해 이런 항의 각서를 전달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국제 예양상으로는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할 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도 귀(貴) 정부의 진지성에 대해 전적으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안출(案出) 기간이 짧고, 담당자의 선임 과정에 이의가 있다 쳐도, 기능주의에 입각한 당신네 통일안 또는 명분론(名分論)에 집착한 반대편의 통일안에 못지않게 볼만한 데가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 방식이나 과정에 이르면 역시 진지성을 의심받을 구석은 많다. 무조건 당신네들 것만 정답이라 우기지 말고 적극적인 대(對)국민 설득에 나서 보는 게 어떤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가지고 일정 기간 보완을 거친 뒤에,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을 거친 다른 통일안과 나란히 국민투표에 부쳐 보는 건 어떤가. 그런 적극적인 합의 도출의 과정이 없는 한, 당신네 전(前) 정권의 형태를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진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쯤이면 그 항의 각서에 대한 대강의 답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지금 정신적 내란(內簡ι) 상태에 빠져 있는 관동 정권에게 하고 싶은 충고는 목적 못지않게 수단과 과정도 중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 동서(東西) 일본의 통일이 피로 피를 씻는 동족상잔이나, 어느 쪽에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사람을 수천 수백만 만들어 내지 않는 길은 두 체제 모두의 승리에 의한 것(말이 좀 안 맞는 듯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방법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이어야 할 듯싶다. 통일이 비록 민족의 절대 지상의 과제라 할지라도 그 값이 너무 비싸다면 살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겨레가 다 죽고 땅이 몽땅 뒤집히는 통일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따라서 지금 관동에서 먼저 있어야 할 일은 통일이란 목표 그 자체뿐만 아니라(기실 그 목표에 대한 합의는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다.)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과 과정에 대한 국민 의사의 통일이다. 의식은 천 동가리 만 동가리 갈라져 있고, 지역 간, 계층 간의 불화는 토막 난 땅을 다시 몇 토막으로 갈라놓고 있는 판에 관서와 통일만 서두르는 것은 무언가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러한 내분을 방치한 채 동서의 통일만을 서두른다면 그 목적은 뻔하다. 관서의 칼을 빌려 관동 내부의 원수를 쓸어버리려는 음모를 통일이란 이름으로 위장하는 것이거나, 또 다른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통일이란 거창한 명제에 묶어 두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편도 관동의 국민 대다수가 생각하는 진정한 통일과는 거리가 먼, 그리하여 ― 그 통일은 일방의 일방에 대한 섬멸이란 형태의 끔찍한 것이거나, 쌍방 모두가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고 난 뒤 함께 나자빠지는, 양패 구상(兩敗具傷)의 터무니없이 값비싼 무엇이 될 것이다.(물론 우리에게는 그런 일본을 삼킬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그러하되, 부질없다, 남의 시비를 가림이여. 무망하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를 물 밖에서 깨우치려 함이여. 시비는 거들어 오히려 커지고, 이미 위와 허파에 물이 차는 이에게 헤엄치는 법을 일러 주는 일은 놀림이나 다름없다. 자칫 남의 불행을 즐긴다는 혐의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얘기로 돌아감이 옳으리라.
만약 그때 ― 저 빛나는 25년 전쟁이 승리한 아침에 ― 우리가 슬기롭고 차분하지 않았던들, 우리가 그 엉뚱한 장군과 박사를 그토록 냉대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던들, 오늘날 일본의 동서가 겪고 있는 불행은 반드시 남의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때 우리의 장군과 박사가 소련과 미국에게서 지급받아 마구 흩뿌린 이념의 깃발을 우리가 경박하게 집어 들었다면, 겨레는 그 깃발의 색깔에 따라 나뉘었을 것이고 종당에는 땅까지 남북으로 토막 나고 말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땅이 나뉘고 겨레가 나뉜다면 일본이 겪은 저 참혹한 동족상잔을 우리라고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으며, 그 뒤 사십 년이나 진행된 저들 민족 동서 간의 이질화(異質化) 또한 우리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리하여 뒤늦게 통일 논의가 일었을 때 오늘날의 일본보다 그 진통과 갈등이 적으리라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장군과 박사를 거부했고, 그리하여 우리가 넘어야 했던 역사의 마지막 고비를 훌륭히 넘겼다. 앞서의 그 어떤 고비도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크나큰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겨야 할 것이었지만 특히 이 마지막 고비는 결정적이었다. 자칫하면 소비에트 제국의 변경과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으로 분단될 뻔했던 이 땅은 그로써 구함받고, 자체 사상(自體思想)이란 그럴듯한 포장의 해괴한 신왕조(新王朝) 이론과 자유민주주의 때깔 나는 화장의 교묘한 신식민(新植民) 논리에 조각조각 났을 겨레의 얼 또한 그 결단으로 무사히 보존된 까닭이다. 오늘날처럼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룬 국토며, 쓸데없는 대치의 전비(戰費)로 낭비되었을 뻔한 재화가 우리의 경제적 번영에 공헌한 것은 또 얼마인가.
그러나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가멸 때 가난함을 대비하라는 것이 옛 성현의 가르침이다. 비록 옛날의 장군과 박사는 갔지만 그들은 앞으로 심심찮게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게 언제 어느 곳에서건 우리는 예전의 그 슬기와 단합으로 그들을 제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어쩌면 이 땅, 우리 안에서도 그런 장군과 박사가 생겨날지 모른다. 그 또한 끊임없이 경계할 일이며, 그래도 나타나면 아예 발붙일 구석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가슴 안에서도 그 장군과 박사는 빚어질 수 있다. 안 된다. 안 된다. 세 번 안 된다. 그때는 차라리 그 가슴을 담고 있는 작은 나[小我]를 부숴버려라. 우리 모두의 오늘을 위하여. 우리의 이 불꽃 같은, 숨 막힐 듯한 행복을 위하여.
(1986년)
2016년 12월 5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