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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독일 역사상 첫 여성, 첫 동독 출신, 첫 이공계 출신 총리로 선출된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이하 메르켈)가 11월 말 정치고문 베아타 바우만과 함께 쓴 회고록을 냈다. 한글판은 '자유: 1954-2021년을 회상하다/앙겔라 메르켈 지음/박종대 옮김/한길사 펴냄/3만8000원'이다. 부제인 '1954~2021'은 그의 출생부터 총리 퇴임까지를 의미한다.
그녀는 유럽에서는 드물게 16년간, 5860일간 총리직에 머물면서 국민들로부터 '무티(mutti·엄마)'로 불렸다. 편안하고 소탈한 엄마같은 총리라는 의미다.
총 5부로 구성된 책은 1∼2부에서 동독에서의 삶을, 3부에선 독일 통합의 과정을, 4∼5부에선 총리로서 독일을 이끈 경험을 담았다.
rbk, RGru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 등을 참고해 메르켈 총리의 회고록에서 나온 러시아 관련 부분을 요약한다. 크렘린 홈페이지에서 메르켈로 검색해 찾았다/편집자.
◇앙겔라 메르켈은 누구?
2017년 소치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사진출처:크렘린.ru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메르켈은 생후 6주 만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 크비초로 이주했다. 동독에서의 기억은 그녀에게 '불쾌한 냄새'로 각인돼 있다. 그녀는 동서독의 통일 이전에 GENEX의 '우편 서비스'(서독인들은 이 서비스를 통해 동독의 친인척들에게 소포를 보냈다/편집자)를 통해 함부르크에 있는 할머니로부터 각종 소포를 받았는데, 비누나 커피 등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평소에 쓰던 동독 제품에는 소독제, 연마제, 왁스 냄새가 강해 삶 자체가 '불쾌한 냄새'로 채워져 있었다고 했다.
종교인을 차별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메르켈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대학 적성검사에서 기대했던 등급을 받지 못했다. “물리학은 자연과학이며, 아무리 동독이지만 2 더하기 2는 4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물리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후 과정도 순탄치는 못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1978년) '칼 마르크스' 주제는 자신이 관심이 없는 '과학적 공산주의'의 기초를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강의 시간에 물리학 문제를 풀다가 들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녀는 “그날 강당에서 당한 벌칙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고, 굴욕적이었고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인생도 송두리째 바뀐다.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를 떠나 시민단체 '민주주의 각성'에 가입했고,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독일 통일 후 '민주주의 각성'이 서독의 기독교민주당(기민당)과 합치면서 그녀는 하원의원이 됐고, 여성청소년부·원자력부 장관 등을 거쳐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동독 출신 총리에 올랐다. 2021년 그녀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일상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남편과 이혼하고 담배를 입에 물게 된 일은 물론, 첫 남편의 성을 따르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정치에 발을 들인 선택의 순간, 또 장관 시절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 신문에 크게 실리면서 금연하고,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 우물쭈물했던 일화, 자신의 치부를 공격받을 때 버티고 인내했다는 경험들을 실었다.
◇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 - 2006년 톰스크
메르켈이 푸틴 대통령을 만난 것은 2000년 6월이다. 당시 기민당 지도부의 일환으로 베를린에 온 그를 만났다. 2002년 2월에는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그를 또 만났다.
2007년 푸틴 대통령-메르켈 총리 대화 모습/사진출처:크렘린.ru
메르켈에게 기억에 남는 만남은 그녀가 총리에 취임한 지 몇 달만(2006년 4월)에 이뤄진 제8차 독일-러시아 정부 협의회에서다. 그녀는 독일 정부 및 기업 대표자들과 함께 러시아 톰스크로 갔다.
그녀가 톰스크에 도착한 4월 26일, 푸틴 대통령이 저녁 식사(만찬)에 초대했다. 만찬에는 두 정상과 외교 담당 보좌관들만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아예 통역들은 다른 테이블로 보내고 독일어를 썼다.
“그의 독일어 구사 능력은 나의 러시아어보다 나았다. 나의 러시아어 실력은 동독 시대에 머물러 있어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적 단어들을 잘 몰랐다."
"소고기 스테이크이냐, 곰 스테이크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용기를 내 곰 스테이크에 도전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쫄깃쫄깃하고 매우 맛있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 정상의 대회는 기본적으로 시각이 달라 사사건건 부딪쳤다.
“우리는 이전부터 서로 다른 입장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정치 체제 문제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나는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정치적 자유(민주화)가 점점 더 제한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러시아에서 비정부 기구(NGO)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이 막 발효된 직후였다. 그는 바로 반박했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그의 반박은 협의체 일정이 끝나고 메르켈 전 총리와 함께 톰스크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도 이어졌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특유의 목조 주택들이 들어선 마을을 가리키며, '여기에 사는 주민들은 돈이 별로 없다. 속기 쉽다. 2004년 가을 '오렌지 혁명'을 일으킨 우크라이나 시민단체(NGO)는 미국으로부터 돈을 받아 이런 주민들을 부추긴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결코 그같은 일(오렌지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NGO 활동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동독 주민들이 미국의 돈을 받고 '평화 혁명'(베를린 장벽 붕괴)의 유혹에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동독) 스스로가 원했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좋게 변화시켰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원했던 것도 그것이다'고 응수했다."
메르켈은 우크라이나의 변화에 대해 계속 말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 러시아 헌법의 차이점을 논의하는 것으로 주제를 바꿨다.
“그는 '두나라 헌법은 모두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중임도 안되지만, 러시아는 한번 쉬면 또 연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헌법에 따라 연임한 뒤, 후임자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더라도 다시 돌아올 테니 계속 나를 믿으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톰스크 도착 이튿날 독일과 러시아 기업 대표들이 참석한 포럼(독-러 정부 협의회)이 열렸다. 양측은 발트해를 관통하는 해저가스관 '노르트(노드) 스트림 1' 건설을 비롯해 자동차 산업 협력,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 등에 대해 논의했다. 메르켈에게는 독일-러시아 간의 에너지 협력이 중요했다. 당시(2005년 기준)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수요의 41%, 원유의 32%를 수입하고 있었다.
“러시아(소련)와 독일 간의 에너지 협력은 냉전 시기를 포함해 40년 이상 안정적으로 이뤄졌다.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은 상호 의존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장기적으로 보장돼야 했다. 그래서 독일의 바스프(BASF)와 러시아의 가스프롬(Gazprom)은 그 자리에서 시베리아의 유즈노-루스코예(Yuzhno-Russkoye)의 자산 교환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2007년 흑해 연안 휴양지 소치 방문
(톰스크 회동) 9개월 후인 2007년 1월,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의 흑해 연안 휴양지 소치에 있는 대통령 별장을 방문했다.
"대화 중에 푸틴 대통령은 나에게 '소련의 붕괴가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2005년 국정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2003년 이라크 전쟁과 폴란드·체코에 배치한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MD)을 비난하는 등 미국의 행동에 화를 냈다. 나는 그에게 '2001년 9월 11일 뉴욕 테러 이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MD 개발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스템이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라고 우겼다.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20세기의 가장 큰 재앙은 동독의 존재(동서독 분할)였으며, 냉전의 종식은 나의 삶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과 대화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메르켈이 소치 방문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은 푸틴 대통령의 애완견인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의 '코니'사건이다. 독일 측은 사전에 러시아 측에 '총리가 개를 무서워한다'고 알렸다. 그럼에도 푸틴 대통령은 회담장에 '코니'를 풀어놓았으니, 메르켈이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푸틴 대통령은 외국 손님을 방문할 때도 종종 코니를 데리고 갔다.
2021년 메르켈 총리에게 꽃다발을 전하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던 중 '코니'가 방에 들어왔다. 나는 '코니'를 무시하려고 했는데, 꽤 가까이 와 있었다. 푸틴 대통령의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카메라 기자들에게 집중하면서 '곧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일종의 힘의 과시였을까? 그러나 나는 푸틴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주 그랬던 것처럼, '설명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말라'는 영국 귀족의 규칙을 그때도 지켰다."
메르켈은 푸틴 대통령에게 우커마르크(Uckermark) 박람회에서 '개에게 한번 물린 적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는 '내가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또 그녀의 외교 보좌관은 이 사실을 러시아 측에게 미리 알리기도 했다.
"그날 푸틴 대통령의 행동이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코니'가 물지 않는다는 설명과 함께 (코니를 닮은) 큰 개 인형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환한 표정으로 인형을 받아 옆에 있던 크리스토프 호이스겐 보좌관에게 줬다. 그는 그 인형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까지 계속 안고 다녀야 했다."
푸틴 대통령은 2016년 독일 일간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코니'사건에 대해 메르켈 총리에게 사과했다. 최근에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메르켈 총리의 회고록 이야기를 듣고) 기자들에게 "그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좋은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다”고 사과한 뒤 "(메르켈이) 다시 방문한다면 절대로 개를 근처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메르켈은 또 푸틴 대통령의 독선에 놀랐다고 밝혔다.
"2007년 푸틴 대통령이 뮌헨 국제안보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국제 질서의 일극 구조를 비판했는데, 그는 빠르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연설문을 직접 썼을 것이다. 그는 연설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토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와 몰도바, 조지아(그루지야)의 미해결 분쟁에 대해, 세르비아의 나토 폭격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007년 G8 정상회의 지각 사건
2007년 6월 6일~8일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부시 미 대통령과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MD)에 대해 논의했고, 메르켈 총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폴란드와 체코에 MD시스템 배치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러시아와 함께 아제르바이잔에 레이더 기지를 공유하고, 터키와 이라크 또는 해상에 미사일 방어 시설을 배치할 것'을 제안했다. 또 'MD 시스템이 러시아가 아닌 불량 국가를 대상으로 한다면, 체코와 폴란드에 배치하지 않고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 제안을 고려할 것'이라고 답했다."
2년 후 부시 대통령의 뒤를 이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MD 배치 계획을 바꿨다. 해상 기반의 요격 미사일이 폴란드 배치 계획을 대체하고, 체코 배치안은 완전히 취소됐다.
주목을 끈 대목은 푸틴 대통령이 G8 정상들의 기념 촬영 시간에 늦어 메르켈이 역정을 냈다는 부분이다.
2007년 G8 정상회의 기념 사진/사진출처:크렘린.ru
“카메라 기자들은 정상들이 대화하는 사이에 자유롭게 사진을 찍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은 푸틴 대통령 단 한 명이었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시간에 늦는 것이다. 그는 왜 그랬을까? 누구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에게 진짜 문제가 있었던 걸까? 겉으로는 차분한 표정으로 다른 정상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화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푸틴 대통령은 그날 '지각대장'이라는 별명답게 기념 촬영에 45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푸틴 대통령은 '당신의 잘못이거나, (독일의 유명한 프리미엄 맥주인) 라데베르그(Radeberge) 잘못'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1980년대 드레스덴에서 KGB 장교로 복무하면서 그 맥주를 즐겨마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라데베르거 맥주 한 상자를 자신의 방으로 배달해달라고 요청했다.그는 '당신이 선물한 맥주를 마시느라 늦었다. 안 마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친절을 베푼 대가로 받은 것이다.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미국 대통령도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 가입 거부
2008년 봄에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나토(NATO) 정상회담이 열렸다. 나토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회원 가입 열망을 환영했지만, 그들에게 행동 계획을 제시하지 않아 가입 문제는 무기한 연기됐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나토 가입을 반대한) 나를 우크라이나 사태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는 2008년 나토 가입에 반대했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과 나를 키예프(키이우) 외곽에 있는 '부차'(러시아군의 대규모 학살 사건이 벌어진 곳으로 주장/편집자)로 초대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2008년 이후 14년 동안 러시아에 양보(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반대)한 베를린과 파리의 입장이 현재의 군사 갈등을 초래했다고 끊임없이 암시했다."
"우리가 (나토 가입에 동의했다면) 훨씬 더 일찍(2008년) 군사적 충돌을 목격했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그것(나토 가입)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당시에는 우크라이나도 2022년 2월만큼 나토 가입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진 않았다. 크림반도에는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러-우크라 간의 주둔 협정은 2017년까지였다. 러시아 군대와 그런 관계를 맺은 나토 가입 후보국은 없었다. 또 나토 가입을 지지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소수에 불과했다. 푸틴 대통령의 의도를 분석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MAP(나토 회원국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행동계획) 지위를 논의하는 건 중대한 과실이라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에 MAP 지위를 부여하면 푸틴 대통령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며, 푸틴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 상황 전개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비상사태(러시아의 침공)가 발생하면, 나토 회원국이 헌장 제5조에 의거해 병력과 무기를 동원해 군사적으로 러시아에 대응하고,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느냐? 총리로서 내가 독일 연방의회에 승인을 요청하고, 과반수 지지를 얻어낸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부쿠레슈티 정상회담 전날, 부시 미국 대통령은 키예프를 방문해 우크라이나 측에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MAP 지위에 동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한 독일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내가 진짜 나토 회원국 다수의 압력에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2003년 이라크 전쟁과 그것이 유럽연합(EU) 협력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나토가 분열했던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건설적인 협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토내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푸틴 대통령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회원 가입을 논의하는 건, 매우 경솔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외무부 장관(현 독일 대통령)인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와 협의했고, 서유럽의 다른 지도자들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지도자 대부분은 미국 노선을 지지했다."
"나는 부쿠레슈티 정상회담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반대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영어로 '두 나라가 언젠가는나토 회원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구 덕분에 우리는 타협점을 찾았다. 부시 대통령은 이를 최종 결의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고, MAP 지위 부여는 연기됐다."
“정상회담에서 큰 스캔들을 피했지만, 우리 나토가 대러시아 전략에서 한마음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다. 중부 및 동부 유럽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나라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소련의 통치 하에서 고통을 겪었고, 통일된 동독과 같은 운발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나라에 대해 미래의 회원 자격을 약속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잘못된 결정이다. 그것은 (러시아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2015년 크렘린 회동
2015년 2월 메르켈 총리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2014년 2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후 발발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무력 충돌을 끝내기 위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만찬 시작 전에 푸틴 대통령은 우리(독-불 정상)에게 각각 러시아어-독일어, 러시아어-프랑스어로 된 고대 군사학 사전을 선물했다. 그는 내가 며칠 뒤 미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러시아어-영어로 된 사전도 건네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리를 만나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만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푸틴은 러시아를 지역 강대국이 아닌 미국과 대등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가 미국의 최대 지정학적 적이냐'는 질문에 '러시아는 지역 강대국'이라고 답변했다."
◇러-우크라 분쟁의 뿌리에 대해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EU) 간에는 2007년부터 협력 협정 체결에 관한 협상이 진행됐다. 독일은 회원국 중 처음으로 2011년 협력 문서에 동의했다. 그러나 EU는 우크라이나 측에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고, 최종 서명은 여러 차례 연기됐다.
협정 서명을 위한 (발트연안의) 리투아니아 빌뉴스 정상회담이 예정된 2013년 11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EU와의 협정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키예프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소위 '유로마이단'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2014년) 2월 말,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나는 마이단에서 일어난 사건을 동정심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2014년 2월 21일,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은 EU 중재를 통해 사태 해결을 위한 6개항 합의에 서명했고, 이틀 후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임명됐다. 나는 푸틴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반드시 대응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크림반도의 러시아 병합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로) 독-러 교류가 줄어들었지만, 나는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그는 그때 모든 국제 규칙을 어기고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크림반도를 합병함으로써 소련 시대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약속한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의 의무를 위반했다."
"나는 외교적 노력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키예프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일부 미국 상원의원들이 '독-러 간의 긴밀한 경제 관계로 인해 추가 제재 도입을 늦추고 있다'고 의심하고 모스크바에 대한 제재 강화를 주장했지만, 나는 반대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이 문제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분쟁 해결을 위해 러-우크라-독-불 4국 정상들이 모인 '노르망디 형식'의 회담에 임하면서 나는 사태의 군사적 해결 방안은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가 군사적으로 러시아에 이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2014년 8월 23일 우크라이나 지도부와 만난 뒤 '협상과 외교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첫번째 민스크협정(민스크 1)이 2015년 초 '시간 낭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미국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에 동의할 태세였다. 나는 '무기 이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고, 그것이 군사적 해결을 희망하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또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없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의 폭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딜레마였다. 나는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노르망디 4인방'의 또 다른 만남만이 사태 확대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세 번째 만남은 2015년 2월 민스크 독립궁에서 열렸으며, 약 17시간 동안 진행됐다(이 협상은 도네츠크,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대표가 참여한 우크라이나 접촉그룹 회의와 병행, 진행됐다/편집자)"
노르망디 형식의 정상회담은 2019년 말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열렸다.
2019년 파리에서 열린 노르망디 형식의 4자 회담. 왼쪽부터 젤렌스키 , 마크롱, 푸틴 대통령, 메르켈 총리/사진출처:크렘린.ru
"2021년 3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푸틴 대통령과 영상 통화를 하던 중 나는 처음으로 그가 민스크 협정에 관심을 잃은 것 같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민스크 협정을 완전히 파기하는 것은 위험했다. 게다가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달 뒤(4월) 우리에게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10만 명 이상의 러시아 군인이 있다'고 알려줬다.”
"나중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노르망디 형식'의 또 다른 회담 공개적으로 제안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COVID 19)의 대유행 기간에 개인적인 접촉을 피했기 때문에 협상은 불가능했다."
"푸틴 대통령이 2021년 6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제네바 초청을 수락한 것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코로나 사태로 1년 넘게 우리(유럽 정상들)를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며 피했고, 나는 '민스크 협정'은 이미 끝났다고 확신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새로운 접촉점이 필요했는데, 그가 미국 대통령과 만나기로 한 것이다. 코로나 시절에 예외적인 조치였다."
"나는 그 즈음(6월)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수많은 갈등을 직접 논의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이 참석하는 유럽 이사회 개최를 제안했다. 그러나 마테우스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카자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의 강력한 반대를 부딪쳤다."
"2021년 8월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실망감이 컸다. 푸틴 대통령은 나에게 시급한 현안을 얘기하는 대신에 차기 독일 정부를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돌이켜 보면 총리 임기가 끝날 때까지 러시아와 접촉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은 코로나 사태가 없었고, 화상 회담이 아니라 대면, 1대1이 아니라 노르망디 형식으로 협상이 이뤄졌다면 막았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민스크 협정의 관에 '못을 박은'것은 코로나19였다. 민스크 합의가 전적으로 지켜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혈 분쟁에서 사망자가 줄어드는 등 성공적이었다. 동시에 노르망디 형식의 협상과 병행해 우크라이나는 서방 국가와 나토에 무기를 요청하는 '투 트랙 전략'을 썼다. 그 결과, 나토는 2016년 7월 포괄적인 대우크라 지원 패키지를 결정했다. 독일은 비록 참여하지 않았지만, 일부 나토 국가의 무기 공급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계 분리주의자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메르켈은 2022년 12월 7일에 디 자이트(Die Zeit)와의 회견에서 '민스크 협정으로 갈등은 동결되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모든 사람에게 분명했다”며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에게 시간을 주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실망스러웠다"고 지적했다.
"2022년 2월 24일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나토 회원국, 특히 유럽 회원국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우리는 유럽의 나토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억제력을 구축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한다. 냉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핵 잠재력에 대한 억지력은 모든 나토, 즉 미국과 함께해야 달성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실수이며, 나토 회원국과 우크라이나 간에는 상호 신뢰가 부족하다. 우리는 훌륭한 자원을 갖고 있지만 무제한은 아니다. 누구도 뒤에 숨을 수 없다. 오히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현실적으로 결정하는 게 정치적인 과제다. 우크라이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계획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런 일(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면 우크라이나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고, 지지자들과 함께 결정할 수 있다. 공통의 이익을 가진 사람은 공동의 길을 찾기 위해 계속 싸워야 하고, 그래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는 평화와 자유 속에서 주권 국가로서의 미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
"유럽에서의 전쟁은 확대되고 있으며 유럽·미국-러시아 관계가 악화될수록, 모스크바는 베이징으로 더욱 쏠린다. 1971년, 1972년에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 그의 국가 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는 냉전 시절 미국의 주요 적이었던 소련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국을 미국으로 더 가깝게 끌어들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우리는 지금 정반대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러시아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이웃 국가(중국)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글로벌 세력 균형이 바뀌고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지도 아래 중국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미국과 함께 세계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욕망 그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세계 강대국 지위에서 한 국가의 독점은 없다. 문제는 중국의 방식이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소위 '통일'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국가들은 '하나의 중국' 정책에 따라 대만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지키는데 의문을 제기한다. 중국은 또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주변국에 대해 일방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이같은 공격적인 행동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미국을 뒷받침할 수 밖에 없다. 국제질서의 규칙을 어긴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전이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규칙 기반'의 다자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과의 협력도 의미한다.”
"한 국가가 특정 제품에 대해 하나의 국가에만 완전히 의존하게 되는, 잘 알려진 위험의 제거와 경제 관계의 단절 사이에는 미세한 경계가 있다. 경제 단절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를 막으려면 협상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인류의 문제를 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대화가 필요하며,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그렇다."
◇트럼프와 푸틴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유세 과정에서 메르켈 총리의 난민 수용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다.
"(트럼프는) 내가 2015년과 2016년에 너무 많은 난민을 받아들여 독일을 망쳤다고 주장했고, 독일이 국방비를 너무 적게 지출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미합중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선거전에 독일 총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놀라웠다."
앙숙인 두 사람의 관계는 2017년 3월 17일 백악관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에서 '악수 패싱' 논란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귀속말로 다시 한번 악수하자고 말했다. 나의 은근한 제안에도 그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자신의 행동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자 했고, 나는 내가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척해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에게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는 분명히 푸틴에게 빠져 있었고, 그 후 몇 년간 그는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특성을 지닌 정치인들에 끌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기 전 부동산 사업을 했는데, 이후에도 모든 것을 부동산 사업가의 눈으로 판단했다. 그에게 모든 국가는 경쟁 관계였고, 한 나라의 성공은 다른 나라의 실패를 의미했다. 나는 EU과 한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을 예로 들며,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을 이야기했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자신이 협상에 나서지 않은 모든 협정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날 회담을 통해 트럼프와는 전 세계 공통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없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렸다."
퇴임 전까지 메르켈과 트럼프는 불편한 관계였다.
◇가장 난제였던 난민 수용 정책
메르켈은 총리로 있으면서 중동지역의 난민 수용을 적극 옹호했다.
"2015년 9월 4일 금요일은 유럽 역사에 기록적인 날이었다. 당시 시리아 내전을 피해 매일 수천 명의 난민이 발칸반도를 거쳐 서유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헝가리는 펜스까지 설치하며 유입을 막았다. 그날 아이패드로 부다페스트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으로 걸어가는 수많은 난민 행렬을 보았다. 마침내 결정의 시간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자정 독일은 페이스북을 통해 난민 입국 허용을 발표했다.
◇한국방문
2010년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동독의 독재 정권에서 살았던 나의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해주길 청했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의 난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인들이 평화로운 독일 통일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직접 느꼈다.한국인들도 언젠가 평화와 자유 속에서 통일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