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참상 알린 히긴스 女 기자 최초 퓰리처상 수상
38선 전운 감돈다는 소식에 전쟁 발발 직전부터 종군기자
활동
세계 23국 300여 명 특파원 입국
종군 기자 18명 전장에서 희생
폭파된 대동강 철교로 기어올라
탈 출하는 피란민 찍은 AP 맥스 데스포 기자 퓰리처상
기사사진과 설명
통영상륙작전을 극적으로 표현해
스타가 된 미국의 마거릿 히긴스 기자. |
전쟁은 역사를 만들고 전쟁사는 종군기자의 손끝에서 기록된다. 그들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총동원해서 기사를 쓴다. 현장을 발로 뛰고 눈으로 보며, 귀로 심장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죽음 앞에서 신음하는 장병들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간다.
목숨 걸고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역사를 빛내주고 때로는 기자 자신도 포연 속에 사라진다. 종군기자의 실상이다.
6·25전쟁을
알린 최초 보도는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5분에 나왔다. 이보다 먼저로는 6시40분에 전쟁 언급 없이 ‘외출 중인 모든 장병은 즉시
귀대하라’는 메시지만 전달한 라디오 방송이 전부였다. 한국의 종군기자는 6·25전쟁 발발 직전부터 활동했다. 38선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외신기자들이 이를 취재하기 위해 입국하기 시작했고,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종군기자를 모집, 2주 동안 훈련을 시키며 대비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 23개국에서 300여 명의 특파원이 들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대거 한국 전선에 몰려들었다.
종군기자의 60%가 미국 기자였지만 중공 기자 12명, 소련 기자도 2명이 왔다. 한국인 외신기자로는 AP 신화봉, UP 서인식, INS
이용호, 뉴욕타임스 김용문의 활동이 돋보였다. 종군기자 18명이 희생됐다.
잭 제임스 기자, 6·25
발발 최초 보도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는 한영섭이었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40여 명으로 늘었다. 종군기자들은 전장의
생생한 모습을 취재해야 하기 때문에 각급 부대에 파견돼 목숨을 걸고 현장을 따라다녔다. 이동 중에 적의 기습을 받기도 했고 참호 속으로 적
포탄이 날아왔을 때는 병사들과 함께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기자 바로 옆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쓰러져가는 전우를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 현장에서 오감으로 느끼며 기사를 쓴다. 때로는 쓰러진 전우의 총을 대신 잡고 적과 싸우기도 했다. 기자의 하루는 병사보다 더
길었다.
6·25전쟁 발발을 최초로 전 세계에 보도한 UP통신의 잭 제임스 기자는 특종으로 영웅이 됐고, ‘귀신 잡는 해병’을 쓴
미국의 마거릿 히긴스(여) 기자는 통영상륙작전을 극적으로 표현해 스타가 됐다. AP의 맥스 데스포 기자는 유엔군의 평양철수작전 때, 폭파된
대동강 철교 위로 피란민들이 개미 떼처럼 기어올라 자유의 땅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았다.
‘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종군기자들의 보도는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디 벨트’지 등 유력 보수 언론들은 아시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보도하면서 ‘북한 공산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한국을 기습 공격했다. 침략자는 분명 북한이다’라는 사설을 실어 유럽사회에 공산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그러면서 당시 분단국인 독일에서도 ‘점령군(미군)이 철수한 후 공산군이 침략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우려를
나타냈다.
히긴스, 이곳이 ‘위험하다’고 말하면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
강조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특파원인 히긴스 기자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곧 전장에 뛰어들었다.
한강대교가 폭파될 때 나룻배를 타고 피란민과 함께 강을 건넜을 정도로 6·25전쟁을 깊이 경험했으며, 워커 장군이 이곳은 위험해 여자가 있을
곳이 못 되니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쫓아냈지만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를 따라 다시 한국 전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유명한 장진호 전투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주인공이 됐다. 히긴스는 이곳이 ‘위험하다’고 말하면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동아일보의 김진섭 종군기자는 평양 입성의 감격스러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0월 18일(19일의 착오) 정오가
지나 적도 평양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는 아직 광적으로 발악하는 괴뢰들의 총성이 끊일 사이 없으나 이곳에 속속
들어오는 장병들은 모두가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후 1시가 지날 무렵 대동강 역으로부터 돌진해오는 탱크부대의 기세는 당당하다.
제1사단이었다. 백선엽 사단장과 제12연대장 김점곤 대령, 탱크부대 박진석 소령 등이 앞으로 나섰다. 미 기갑 제1사단장 게이 소장은 한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점령하게 된 것을 높이 치하한다며 백 장군을 위시한 각 지휘관과 악수를 하고, 선두부대였던 제12연대장 김 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뒤이어 유엔 종군기자들이 입성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작전으로 독일을 무너뜨리던 그 광경과 똑같은 감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한국언론자료 1987)
조선일보의 최병우 종군기자는 휴전협정 조인식장에서 ‘기이한 전쟁의 정지’라는 보도문을
내보냈다. ‘꿈만 같던 조인식은 11분 만에 끝났다. 너무 비극적이었다. 유엔군 측 기자 100명, 일본 기자도 10명이 넘는데 한국기자석은 딱
2명. 27일 오전 10시 정각에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 이하 대표 4명이 입장하고, 서편에는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 일행이 들어와
악수, 목례도 없이 자리에 앉더니 쌍방의 대표는 탁자 위에 놓인 각 18통의 협정서에 서명만 계속 해 내려갔다. T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의 동편에는 참전 유엔 18개국의 대표들이 정장으로 일렬로 참석하고, 서편에는 북괴군 장교들, 남쪽에는 중공군 장교들이 앉아있었다. 양편의
수석대표가 서명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의 폭격기가 주변에 쏟은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증오에 찬 원수끼리 급하게
서명만 하고 10시12분에 마치고 기념촬영도 없이 헤어졌다.’(이것이 특종이다. 2006)
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과 애환 함께해
러시아어를 잘하는 미국 INS의 하임오프 기자는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다가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본사에 타전해 특종을 터트렸으며, UP통신의 앨버트 캐프 기자는 미 공군 조종사로부터 소련 전투기와 공중전을 여러
차례 벌였다는 얘기를 듣고 유엔 당국에 확인을 요청했지만, 외교적인 일이라 답변을 피했다는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또 마이클 브라운 미국
VOA 방송기자는 유엔군에 배속된 태국·터키·호주·뉴질랜드군 등을 많이 취재했는데 중공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군인은 터키와 에티오피아 군이었다고
증언했다.
종군기자는 보도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찢기고 상처받아 고통스러워하는 국민과 애환을 함께했다. 전쟁 중에
폐허가 된 도시와 수많은 전쟁고아를 본 종군기자들이 고아를 입양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종군기자들의 최고의 취재
대상은 포로생활을 하다가 사선을 넘어 귀환한 포로들에게 집중됐다. 기자들은 백마고지와 같은 격전지에서 수많은 전사자의 시체가 깔린 가운데 담당
장교가 일일이 신원을 확인하고 전사보고서를 쓰는 장면을 보고 감탄했다. 또 어떤 종군기자는 쌓인 눈 속에 사람의 손목이 드러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치워보니 공산군에게 학살된 민간인들의 시체가 길가에 그대로 버려져있었다고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다. 전후 60년이 지나 한국 땅을
밟은 종군기자들은 폐허 속에서 급성장한 한국의 모습을 보고 놀랐으며, 유엔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