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환란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일 뿐- 사도행전(11)
행4:28~31
수색이 가득한 한 젊은이가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너무나 괴롭습니다. 근심, 고통이 없는 곳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 곳이 꼭 한군데 있습니다”
“오! 그래요? 지금 가보고 싶습니다”
“예. 그곳은 시립공동묘지입니다”
공동묘지에 있는 분들은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이 지냅니다.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근심, 걱정,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닥치자 아브라함은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내를 바로왕에게 빼앗겼습니다. 얼마나 큰 마음의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큰 흉년이 닥치자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나오미에게 얼마나 큰 슬픔과 절망을 안겨다 준 사건이 되었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다 시험, 근심, 걱정,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골치아픈 것이 없는 곳에 가서 살겠다면 빨리 공동묘지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시험과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며 사느냐 이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습니까? 대단히 칭찬해주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여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했습니다.
왜 재판을 했을까요? 베드로와 요한은 원래 갈릴리 촌뜨기 어부 출신입니다. 학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와서 기적을 행한 거예요. 그것도 성전 문 코앞에서. 거기다가 5000명 군중 앞에서 유창하게 설교까지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거예요. “이놈들을 놔두었다간 큰일 나겠다!” 이래서 체포하여 재판을 벌였습니다.
재판을 열기는 했는데 마땅한 죄목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네 죄는 네가 알렸다!”고 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앉은뱅이로 있다가 기적으로 일어선 증인이 베드로 곁에 서 있습니다. 이러니 마땅한 죄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대제사장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겁박을 준 후 풀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산헤드린공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산헤드린공회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왜 좋은 일, 착한 일을 했는데 죽을 위험에 빠져야 합니까? 이런 교인들이 있습니다. “난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그리고는 폭발을 합니다. 이럴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겠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기도를 마쳤다는 뜻입니다. 위급한 문제를 당하면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이러면서 정신이 반쯤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럴 때 엎드려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리리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가 20km나 되는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피곤하셨던지 잠을 주무셨습니다.
얼마 못 가 큰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광풍”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메가(μεγα)입니다. 우리가 핵폭탄의 위력을 표현할 때 메가톤급이라고 말하지요? 바로 그 “메가”입니다.
폭풍이 메가톤급이다 보니 배가 뒤집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공포에 떨며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왜 아우성을 쳤습니까?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닥친 사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은 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큰 광풍을 만났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요동치는 삶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당신이 가실 “목적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풍은 단지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당하고 있는 광풍이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사건이라고 받아들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분은 반드시 그 광풍을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빌기를 다하매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1절 중반을 보겠습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충만하다는 말은 “가득 찼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로는 플레로(πλήρω)인데 “순종한다.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께 100% 순종하는 사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이용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몽골에서 7년 동안 선교사 활동을 하시다가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몽골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 “벌러르”라는 귀머거리 처녀가 있었는데 이용규 선교사님이 사역하는 교회에 나와 귀가 열렸다고 합니다.
당시 몽골에서는 우리나라 돈 10만 원이면 한 달을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주일날 아침에 소에게 풀을 먹이려고 들로 끌고 나갔다가 소를 잃어버린 거예요. 10만 원이면 한 달을 사는 나라에서 소를 잃어버린 거예요. 큰일 났습니다. 그런데 11시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11시가 되어 선교사님이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그 처녀가 땀에 흠뻑 젖어 교회에 왔더라는 거예요. 선교사님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 냐?”고 물으니 소를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소(牛)가 아닌 예배를 택한 이 처녀의 믿음을 부끄럽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손님이 와있더래요. 어떤 손님이 찾아왔을까요? 소가 제 발로와 서 있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선택한 이 처녀는 하나님과 소를 다 얻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한 문제를 “먼저” 선택했다가 하나님도 잃고 소도 잃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