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64
12월4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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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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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S3IZhdgDGI (김석훈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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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은총의 상처요 축복의 고통>
어린 시절부터 제가 지녀왔던 별로 좋지 못한 습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꼭꼭 감추었습니다.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 상처라도 생기면 빨리 이야기를 해서 치료를 받으면 좋을 텐데, 끝까지 숨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크게 덧나서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병은 자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를 낫게 하려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아무리 명의라도 환자가 상처부위를 꼭꼭 감추는 데야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육신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우리 정신이 입은 충격, 우리 영혼의 상처의 치유도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자이신 하느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처 안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이 상처를 어떻게 치료해나갈 것인가? 이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나갈 것인가? 누가 과연 이 상처를 싸매줄 것인가?
이런 우리가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 측은지심의 하느님, 인간의 상처를 보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따지고 보니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상처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좌절, 우리의 실패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우리의 입은 깊은 상처로 인해 하느님 구원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역설적이지만 참으로 놀라운 은총의 상처요 축복의 고통인 셈입니다. 이렇게 큰마음으로, 긍정적인 자세로, 열린 시각으로 우리의 상처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깊은 상처를 입고서도, 심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하게 우리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를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를 이겨낼 힘을 지닐 수 있습니다. 결국 심한 상처 속에서도 평온한 얼굴로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나갈 수 있습니다.
거듭되는 불운과 상처 속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상처가 다가올 때 마다 소중한 하느님 체험의 장으로 여기게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이상 상처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거라. 사랑은 두려움이 없단다.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낸단다. 어서 빨리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내 사랑의 집으로 들어 오거라. 나는 너를 위해 여기 네 옆에 있다. 내가 너를 도와주마. 내가 네 상처를 치유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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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5_5Miv8xO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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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역할은 양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왜 뽑으셨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파견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수 온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군중에게 당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었다.”라는 동사는 “흐립토”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지쳐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삶에 지쳐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 많은 목자가 존재합니다. 부모님도 자녀에게 목자고 학교 선생님도 목자이며 물론 사제들도 목자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기를 세워주는 것인데, 가끔은 이들이 양들의 기를 꺾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체가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운은 바로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들도 그것을 받지 못하니 남에게도 줄 수 없습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3천 원짜리 김치찌개 파는 이문수 신부’의 에세이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의 내용입니다. 이문수 신부는 낙담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청년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청년 밥상 ‘문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식주의’라는 곳에서 인용합니다.
“김치찌개 3천 원, 무한리필 공깃밥은 공짜. 개업 이후 거의 매달 적자를 내는 이 식당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저의 원래 직업은 ‘가톨릭 신부’인데요, 어쩌다 보니 4년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치찌갯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식당 사장이 되기로 한 건 고시원에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저 역시 한때 ‘배고픈 청년’이었습니다. 한 달간 세 끼를 모두 라면만 먹거나 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습니다. 입시도 취직도 더 힘들어진 지금의 청년들은 그때의 저보다 두세 배는 더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테지요.
저는 누구나 언제든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길 1년여. 후원금 3천만 원으로 밥집을 열 공간을 찾다가 지금의 이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산 전경이 보이는 옥상을 보자마자 청년들이 이곳에서 잠시나마 숨을 쉬고,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로 정하고, 가격은 대학교 학식의 평균 가격인 3천 원으로 정했습니다. 학당을 하다 보니 신부로서 일만 할 때와 다르게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오픈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당을 찾았습니다. 얼른 팔팔 끓는 찌개를 대접해 몸을 녹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저를 수줍게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더군요.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제가 식당에 관해 설명했더니 아이가 1년 넘게 모은 저금통을 기부하고 싶다고 해서요.’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세상에, 나중에 세어보니 10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열 살짜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요. 누군가를 위한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그 정성과 선량함이 저를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50대 여성이 어둑해진 저녁에 식당에 들어와서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러고는 계산을 하겠다면 카운터 앞에 섰습니다.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여기 계신 손님들 것까지 다 계산해 주세요, 신부님. 손님은 그렇게 모두의 밥값을 계산하고 가셨습니다. 각자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청년들은 비로소 누군가 밥값을 대신 내주고 갔다는 이야길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너무나 놀랍다고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죠. ‘저도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을 꼭 도울게요. 아마 그 손님께서 가장 듣고 싶으셨던 말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김치찌개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 지기로 사는 삶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도 있었습니다. 식당을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버겁더라도 점포를 늘릴 것인가 고민하던 시점에 ‘유퀴즈’ 섭외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방송에는 게스트 몇 명 중 하나로 짧게 나갈 테지만, 식당이 분점을 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렵게 녹화를 마치고 4월 21일에 본방송이 나갔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습니다. 후원 문의로 전화가 불이 났고, 가게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지요. 모두 파김치가 되어 뻗어 있는데 한 직원이 저를 다급히 부르더군요. ‘신부님….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제 눈앞에 놓인 것은 유재석 씨가 아무 말도 없이 5천만 원의 후원금을 입금하신 통장 내역이었습니다. ‘아무리 유재석 씨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주시죠?’
유재석 씨의 기부가 기뻤던 이유는 액수 때문이 아닙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부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을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신 것이죠. 저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식당이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돈보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말이지요.”
유재석 씨나 이문수 신부님이나 모두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기를 살려줄 수 있을까?’입니다. 이런 분들이 오히려 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참 목자들입니다. 저에게 참 목자는 유학할 때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었습니다. 제가 로마라는 곳에 다시 공부하러 가게 되었을 때 저는 한 목자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죠르지오 마짠티’라는 교수입니다. 제가 석사 때 성경을 공부할 때는 기가 많이 꺾여 있었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은 기를 많이 꺾으시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논문을 열심히 써가면 그냥 쓰레기라고 하시며 몇 장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커다랗게 빨간 볼펜으로 엑스를 그리고 툭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돌아가기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의 신학 교수였던 마짠티 교수님은 기가 넘쳤습니다. 찢어진 옷을 입고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석사 때 성서 교수와 다른 사람 논문 심사 때 논쟁이 벌어졌는데, 마짠티 교수는 신약에 “새로운 계약”이란 말이 희랍어로 그대로 나온다고 했고 성서 교수는 그런 말은 안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옆집 할아버지 같은 저희 교수님이 희랍어 성경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말을 찾아내 증명해 보이니 성서 교수는 오히려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들여 함께 살고 학교에 와서는 주류 세력들에 주눅 들지 않고 그렇게 싸우시고 학생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당신이 밤을 새우시며 우리 논문을 고쳐주셨습니다. 학생들은 그분의 편이었고 학교의 높으신 분들은 이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그 신부님을 매우 좋아했는데 언어가 딸리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손수 다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엑스를 하고 화를 내던 성서 교수님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나갈 때는 성서신학을 포기하고 교의 신학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학교로도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 교수님께 배우고 싶었습니다. 로마라는 두려운 곳에서 저에게 기운을 불어넣을 참 목자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덕분에 저는 기죽지 않고 5년 동안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처럼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목자는 기가 살았고, 어떤 목자는 기가 꺾여 있을까요? 삼구 때문입니다. 죄는 성령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따라서 육체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기가 꺾여 있어서 남에게 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꾸 양들의 기를 살리려고 하면 나에게 나가는 것이 나를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사랑이 목자의 기까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나 오히려 거저 주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흩어진 양들의 기를 살리는 참 목자로 파견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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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5-10,1.6-8 :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그분은 하느님의 복음과 병의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가지고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으며 아무리 작은 마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둘 다니셨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우리는 선행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욕을 먹고 선행을 그만 둔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영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내 주십사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 다음에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은 모두 거부하였고, 다른 민족들은 모두 돌아 왔는가? 아니다.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을 가졌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상과 닮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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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로드아일랜드로 낚시를 다녀왔습니다. 새벽 2시에 출발해서 6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선장님은 참 엄격해서 잡은 물고기가 허용 크기보다 작으면 모두 놓아 주었습니다. 잡은 사람의 눈에는 커 보이는데 선장님은 굳이 길이를 재지 않아도 물고기의 모습만 보고 놓아 주었습니다. 다행히 허용범위를 넘어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배 위에서 싱싱한 회를 맛보았습니다. 낚시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바위틈에 바늘이 걸리면 조심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미끼를 자주 갈아 주어야 합니다. 잡았어도 조심하지 않으면 배 위로 올리는 동안 잡은 물고기가 바다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손으로 입질하는 물고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장님의 도움으로 초보자인 저도 한 마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제처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도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려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나태함,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 기존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이기심이 장애물처럼 앞에 놓여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면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은 더러운 영들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저는 주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한 자매님은 ‘풍성한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쉬는 교우 댁을 방문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나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앞으로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시어머니는 ‘내가 개신교회에 나가니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앞으로 성당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방문하기 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보를 전해 드릴 때 주보에 전화번호와 좋은 글을 써서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던 형제님도 많이 누그러지셨고, 개신교회에 다니던 할머니도 웃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이 세상 한번 뿐이고, 죽으면 어찌 될지 모르니 신앙을 가져 볼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이웃들도 그럼 성당에 한번 나가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기도와 전교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그 자매님의 말씀이 제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크고 화려한 성당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제와 주교,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따뜻한 미소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작지만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쌀쌀맞게 대하는 쉬는 교우들에게 주보를 전해주고, 다시 한 번 찾아가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원망할 일이 있어도,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주님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도 주님을 따라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에게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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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저는 늘 이렇게 단순하게 기도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나 한 낱말을 찾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기도 문구처럼 하루 한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찾은 말씀을 외우고, 하루 종일 되뇌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을 때, 처음으로 저에게 크게 와닿은 말씀이 오늘 복음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였습니다. 이 말씀을 외우고 되뇌이면서 후배들과 함께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한 후배가 자기는 이번에 졸업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여행비가 없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행 경비를 물으니 13만 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가족들로부터 받은 용돈이 13만 원 있었고,
마침 그때 되새기던 말씀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였기에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조용히 13만 원을 그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였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후배들이 졸업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경비를 내주었던 그 후배는 돌아와 인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배를 속으로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화가 날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었더니 한 달쯤 지나자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라는 말을 하려면 ‘엄마’라는 말을 만 번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제나 대부모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귀에 만 번은 들려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스스로 만 번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입이 열려 비로소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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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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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매일의 생활>
오늘 복음(마태 9,35-38)에서 보면, 예수님은 평범한 일반 남여 군중들을 보셨을 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셨다. 그 표현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부터 동정과 자비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마태 14, 14에서는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마태 20, 34에서는 소경을, 마르 9, 22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다.
루카 7, 13에서보면, 나인 이라는 곳에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실 만큼, 과부의 정경을 불쌍히 여겨 그 아들을 살려 주시는가 하면, 마태 15, 32에서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염려하시어 빵의 기적을 베푸시는가 하면, 마르 1, 41에서는, 친구와 친척들의 품으로부터 추방당하고, 홀로 죽음과 고독 속에서 병고에 시달리며 삶을 포기하여 절망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 문둥병자의 아픔을 동정하시어 완치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함께하시는 모습이다. 그들의 고통을 보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위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한 일반 대중을 보는 눈은 달랐다. 바리사이인들은 : 일반 대중이란, 없애 버리고, 태워버릴 겨와 같은 것으로 보았으나, 예수님은 : 그들을 베어들이고, 구원 받아야 하는 추수할 것으로 보셨다.''
바리사이 인들은 자기들만이 제대로 율법을 지키고 살기에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교만에 차, 일반 대중을 죄인 시 하여 죄인들의 파멸을 바랐으나,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신다는 것이다.
추수는 추수할 일꾼이 있어서 제때에 베어들이지 아니하면, 추수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인 우리의 협조와 참여를 필요로 하시며 바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의 음성은 아주 적은 지역에밖에는 미치지 못했다. 팔레스티나 지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온 세상 모든 사람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고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학생들이 배울 수가 없듯이 누군가가 바다와 산을 건너 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으면, 그 소식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사람이 '나는 매일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내리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할 때, 힘이 없다.
또한 우리가 헌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인도해야할 사람들을 맡겨 주시고 계시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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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대하 사도요한 신부님]
날씨가 추워지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가 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할까, 어떤 일이 있을까? 벌써부터 생각하시고, 계획을 짜시는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탄생을 맞이하여 주님께 드릴 선물도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도 어떨까요?
오늘 주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하십니다. 우리 주위를 한번 잘 둘러 보시면 목자없이 길 잃고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군중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군중들을 보시고, 참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하느님의 다스림 안으로 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당신 혼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도와줄 협조자가 필요했고, 사도를 뽑았습니다. 그래도 추수할 일꾼들이 많이 필요했기에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추수할 일꾼, 주님의 일을 도와줄 협조자가 여러분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지금 청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 잃은 당신의 자식들을 찾아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길 잃은 자식들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가정의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났지만, 미사 참례하지 않고, 주님의 몸을 영하지 않는 그 사람이 지금 길 잃은 양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주님과 함께 살아보자고 청하는 것도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남에게 피해만 주고, 자기 입을 더렵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지금 길 잃은 양 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같이 성당에 한번 가보자고, 성당에 있는 십자가를 한번 보자고 권해보는 것도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 자신일 수 있습니다. 성당에는 나오지만, 근성으로 미사를 드리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정 안에서 믿음을 저버리고, 신자라고 하지만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내 자신이 길 잃은 양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통회하고, 고해 성사를 본 다음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세상의 유혹에 놓여 있기에 방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자신부터 본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나와 같이 길 잃은 사람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추수할 일꾼, 주님의 일꾼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각박하고, 삭막한 일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젊고 유능한 청년 사업가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벽돌 한 장이 날아와서 그의 고급 승용차를 때렸습니다. 화가 난 그는 차에서 내려 벽돌을 던진 한 소년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 변상을 받아야겠으니 너희 부모님께 가자" 그러자 소년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제가 벽돌을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차를 세우지 않았을 거예요. 저기 제 형이 휠체어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청년 사업가는 목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소년의 형을 휠체어에 올려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 사업가는 차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상처 난 차를 볼 때마다 그를 향해 도움을 청해오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위의 얘기는 각박한 세상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이며, 우리에게 무언가 느끼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은 지금 어떠합니까?
주님으로부터 벽돌을 맞기 전에 나의 이웃을 먼저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와주고 치유해 주어야할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느냐고 말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자그마한 나의 관심이, 자그마한 나의 손길이 큰일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찾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분의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마름을 달래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픔을 낫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다 이루지 못한 일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때입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 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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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니?>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나름대로 편집한 기적사화집성문(8-9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제자들을 위한 파견설교(10장)에 연결되는 대목이다.
첫 부분에 나타나 있듯이 마태오는 예수께서 지금까지 펼치신 활동들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의 온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 표시로 악령을 쫓아내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눈코 뜰 새 없으신 거대한 활동상이 단 몇 마디로 요약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예수께서는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더 많은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신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간파하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직접 12제자를 뽑아 사도로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 가운데로 파견하신다.(10,1-5)
목자 없는 양떼 같이 시달리고 허덕이는 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아쉬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왜 예수께서 한꺼번에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비단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순과 부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역사의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단 한번의 기적으로 모든 부족함이 채워진다면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다. 예수께서 기적만으로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하셨다면 굳이 온 마을을 두루 다니실 필요도 없겠거니와 아예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처럼 한 마디 말씀으로 타락한 세상을 얼마든지 바로 세우고 구원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의미를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오늘 복음이 무엇을 선포하고자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을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활동(열정) -> 목자의 부족(절망) -> 제자들의 파견(희망)”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분주하고 열정에 찬 선교활동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다. 양떼는 많은데 이를 돌보아 줄 목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은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모든 양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라고 독려하신다. 무슨 말인가? 이는 곧 예수께서 혼자 일하시지 않고 제자들의 협조가 필요함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이다.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전적으로 예수께 속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시어 사도로 삼아 절망에 빠진 세상에 이들을 파견하심으로써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 단지 12명의 사도로 절망적인 현실이 구제될 수 있겠는가? 물론 불가능하며 중과부적이다.
그것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말씀을 수 적인 부족으로만 생각할 때 그렇다. 우리는 통상 부족함을 양적인 것에 한정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질적인 부족이 더 심각하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쓸만한 것이 적다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말이다.
물론 수적 요청이 간절할 때도 많지만 질적인 풍요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파견설교(10장)를 귀담아 듣는다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실행에 옮기기에도 어려운 엄격한 선교상의 여장규칙을 언급하신 것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문제는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다.
사실 ‘12명의 사도단’에 세례 받은 우리 모두를 포함시킨다면 수적으로 부족할 것은 없다. 문제는 질에 있다. 그 질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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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고 하고,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도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혹은 자비심”,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사실, 우리는 그분의 이 마음을 ‘이미’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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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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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마태10,8)
오늘 복음(마태9,35-10.1.6-8)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십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에게도 당신의 일을 내맡기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끝맺습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지금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큰 병폐 중에 하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가엾은 마음인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이에 크게 역행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너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온 병폐입니다.
'주고 받는 것'(보편적인 선을 주고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친교(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주고 받는 것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는 것은 '비그리스도의 모습'이며, '비구원의 모습'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거져 받았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주시는 것을 잘 받고, 잘 나누어야 합니다.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기쁘게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은 기쁘게 나눌 줄도 압니다. '주고 받음이라는 역동성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고, 받은 것을 너와 함께 잘(기쁘게)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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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할 수 있는데 하고 있는가>
마태오 9,35─10,1.5ㄱ.6-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할 수 있는데 하고 있는가>
할 수 있는데
하고 있는가
볼 수 있는데
보고 있는가
들을 수 있는데
듣고 있는가
느낄 수 있는데
느끼고 있는가
기도할 수 있는데
기도하고 있는가
일할 수 있는데
일하고 있는가
따를 수 있는데
따르고 있는가
함께할 수 있는데
함께하고 있는가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랑하고 있는가
가여워할 수 있는데
가여워하고 있는가
아파할 수 있는데
아파하고 있는가
기뻐할 수 있는데
기뻐하고 있는가
보듬어줄 수 있는데
보듬어주고 있는가
갈 수 있는데
가고 있는가
하늘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데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있는가
고쳐줄 수 있는데
고쳐주고 있는가
일으켜줄 수 있는데
일으켜주고 있는가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는데
깨끗하게 해 주고 있는가
쫓아낼 수 있는데
쫓아내고 있는가
거저 줄 수 있는데
거저 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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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두 대의 비행기가 뉴욕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에 돌진해서 거의 3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폭력은 종교에서 나온다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역사상 암으로 죽은 이들보다 종교 때문에 죽은 이들이 더 많다.”
그러나 어떤 종교도 살인, 폭력이 정당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원천과 교리를 거스르는 짓이었습니다. 즉, 인간적인 판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를 신의 뜻인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많은 폭력적인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신약성경과 분리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 역사의 틀 안에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때문에 폭력이 난무하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세속적인 생각이 폭력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참 종교인은 사랑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의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신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과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파견하는 제자들에게 기적의 권능을 주십니다. 즉,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수확은 하느님 일의 완성을 상징하는 구약 사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데 협조할 일꾼이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참 종교인이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살인과 폭력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거짓 종교인이 아닌,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참 종교인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참 종교인을 통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완성할 일꾼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오늘 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실현될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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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봐야 합니다.>
지금 스스로 최악의 어려움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점을 보게 됩니다.
1) 객관적으로 보면 본인들이 인지하는 만큼 최악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2)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상황을 악화하는 일만 반복하여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보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단정하는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가 더 힘듭니다. 모든 방법을 다 해봐도 안 되는데 어떻게 최악의 상황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모든 방법을 동원했을까요? 우선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마음부터 없애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안 될 텐데….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결과는 뻔해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나만 힘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1cm 더 나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별을 보고 있습니까? 시궁창을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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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써야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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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주 예수님!”>
-배움, 치유(治癒), 닮음, 참나(眞我)-
어제 12월 첫 주 금요일 저녁성무일도후 성체강복시의 감미로움 주님 체험에 감사했습니다. 특히 성무일도중 다음 시편 성구들이 마음에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영혼의 위무慰撫와 치유治癒에 시편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힘, 우리 숨는 곳,
어려운 고비마다 항상 구해주셨기에,
설령 땅이 뒤흔들린단들,
산들이 해심으로 빠져든달들,
우리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바닷물이 우짖으며 소용돌이쳐 보아라.
밀려오는 그 힘에 산들이 떨어 보아라.
만군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 바위이시다.”(시편46,1-4)
시편46장 12절까지 계속되는 동안, ‘만군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 바위이시다’라는 세 번이나 연속되어 나온 성구가 주님의 평화로 마음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옛 자작시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무려 23년전 수녀님에게 빨깐 칸나 꽃들을 선물 받고 즉석에서 써드린 윗시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때 성탄절에도 칸나꽃 같은 빨간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들었습니다. 마침 성가 ‘임하소서 임마누엘’(93장)을 부르면서 대림시기 ‘마라나타maranata’ 성구의 순 우리말, “오소서, 주 예수님!”을 호흡에 맞춰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아람어 마라나타를 호흡에 맞춰 기도해도 좋지만, 숨을 들이마시면서 “오소서”, 내쉬면서 “주 예수님!”해도 참 좋을 것입니다. 호흡은 기도입니다. 이렇게 성구를 호흡에 맞춰 반복하여 기도하다보면 마음 중심 깊이에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깊은 내적고요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보다 큰 은혜는 점차적으로 주님께 배움과 더불어 치유가 일어나고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teacher’이자 명의名醫의 ‘치유자healer’이십니다. 바로 제1독서의 이사야 말씀은 얼마나 감미롭고 아름다운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자 스승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이래서 마음의 고요에 이르게 하는 ‘오소서, 주 예수님!’ 성구를 호흡에 맞춰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시길 권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귀’로 가까이에서 속삭이듯 말씀하시는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명의의 치유자이신 주님의 솜씨는 얼마나 놀라운지요! 만병의 근원이 ‘무지’에서 기인한다면 만병 통치는 치유자이신 주님의 ‘사랑’을 만날 때 이뤄집니다.
“또 당신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바로 이것이 이사야의 참 아름다운 하느님 꿈이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 또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역시 주님께 배우고 치유받고 닮아가면서 참나가 되어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소원이자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스승이자 명의의 치유자로서의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원한 착한 목자는 이런 주님뿐입니다. 연민의 사랑 가득한 참 목자이신 주님의 면모는 스승이자 치유자로서 잘 드러납니다.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고백하게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시기이자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분부는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만나 배우고 치유된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참으로 영육으로 치유되고 살아난 우리들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얼마나 좋고 고무적입니까! 살아있다하나 실상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 많고 병없는 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이런저런 중독으로 영적 나병중인 이들도 많고 무지와 탐욕, 질투, 허영, 위선, 이념들의 마귀들린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온전한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대다수가 목자없는 양들처럼 하느님 중심을 잃고 방황하며 뿌리없는 부평초浮萍草처럼, 유령처럼, 헛것처럼 살아갑니다.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착한 목자 주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비극이자 불행이요 재앙입니다. 문제는 이런 영적 현실에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통해 착한 목자 주님은 이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 치유해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깨우침과 더불어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당신을 닮은 참나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처럼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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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H3bchKHx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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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사랑을 잃은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
대림시기이다.
우리의
사랑을 다시
성찰한다.
서로를
마비시키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연민은
핑계가
아니다.
연민마저
자신의
상황을 핑계대며
빠져나가는
왜곡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우리들
이기심이다.
이기적인
사랑을
극복하게하는
연민의 참된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참된 사랑을
가르쳐주신다.
참된 사랑은
병든 마음을
먼저 고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손수 우리들
병든 마음을
고쳐주신다.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되찾아주신다.
사람을
배반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길을 잃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복음이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자신이
누군 지를
알게하신다.
병들고
허약하여
쓰러지고
아파하는
우리들이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야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연민과 생존의
갈등 사이에서
찾아야 할
사랑이 있다.
사랑은
자기 것만을
지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한다.
절실하고
절박한
이들을
향하여 있는
맑은 사랑
맑은 대림이다.
마음이 혼탁하면
뒤따라 오는
모든 것들은
더욱 혼탁할
뿐이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성탄의 사랑이
우리들 삶에
이루어지길
기도드린다.
길 잃은
양들은
자기합리화를
멈춘다.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께
첫걸음을
내딛는
실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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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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