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담-의연함의 무게
벌마로(김윤식)
3학년이 되면서 자유를 만끽하던 이전과 다르게 영우의 생활에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대학입학이라는 관문이 남아 있어서 공부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고, 영우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다른 여유를 부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보자는 약속을 하고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독서실 이용권부터 신청하고 부족한 과목 위주로 과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부터는 전력을 다해서 공부만을 해야 했기에 그동안 영우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시절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책과 씨름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며 1년의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어느덧 푸른 여고시절은 다 지나고 대학 입학시험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을 쪼개고 아껴서 책과 씨름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왔다. 그동안 공부했던 실력을 다해서 시험을 치렀다.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을 억누르며 기도하는 자세로 며칠이 지나고 합격자 발표의 날이 왔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은 멎을 것처럼 답답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숙명여대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 버스 안에는 많은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도 각자의 소망을 기대하면서 합격자 발표를 보러가는 학생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학교에 도착한 영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벽보를 살펴봤다. 영우의 수험번호가 보이지 않았다. ‘앞뒤 번호는 있는데,,,’ 믿기지 않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낙방이다. 학교 담벼락에 붙은 벽보를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고 또 찾아봐도
영우의 수험번호는 없었다. 너무 절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버스 정거장에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영우 앞에 멈췄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가 떠난 그 자리에 영우는 그대로 서 있다.
이대로 집에 가기엔 너무 비참했고 막막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추운 날씨 탓에 잔뜩 웅크린 채 옷깃을 여미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매서운 겨울 찬 공기가 온몸을 파고들어 심장을 통해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다 보니 서로 부딪치기 일쑤였고
영우는 무리들 속에 묻혀 복잡한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 속에서 영우의 존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 발길에 차이며 이리저리 뒹구는 플라타너스 나무열매가 자신의 처지와 닮아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영우는 세상에서 가장 추운 날씨를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합격을 확인한 다른 친구들은 아무리 강한 바람도 추운 줄 모르고 행복해하고 있을 텐데,,,’ 지금 영우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게 파괴되어 버렸고 세상일은 자신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하루종일 거리를 방황하다 어찌어찌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떻게 집에 왔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
“얼굴을 보니까 잘 안 된 모양이구나”
“엄마!,,,”
“괜찮다 내년에 다시 하면 되지”
“엄마 미안해”
“괜찮다니까 씻고 저녁 먹자”
엄마는 언제나 긍정적이다. 엄마의 긍정적인 성품은 당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형성된 가장 이상적이고 잘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다.
영우엄마는 열아홉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달랑 숟가락 두 개로 시작해서 자식 낳고 가정을 일구고 살면서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셨다.
한국전쟁 중 피란길에도 어린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30리 길을 걸어서 배급을
타다 먹이면서 정작 자신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버텼었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역경과 부딪칠 때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해 내셨고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하게 해 주셨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잔소리가 많다거나 간섭이 심하다거나 하지 않으셨고 자식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하셨다. 그런 점은 영우의 아버지도 비슷했다. 두 분의
성품이 비슷해서 자식들 때문에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영우와
그의 형제들은 독립심이 강했고 각자의 삶을 알아서 개척하는 능력을 스스로 키웠다. 어찌 보면 방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우네 가정은 이웃 다른 집에 비해서
무탈하고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고, 근방 10리 안에서 1등가는
부자로 집안을 일궈 내셨다.
영우의 어머니는 한평생 고난과 역경을 몸소 겪으면서 살아오셨고 예고없이 닥쳐오는 절망과 실패를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을 터득하셨기 때문에 어지간한 실패는
툭툭 털어 버리는 대범함이 몸에 배어 있었던 거였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영우에게 의숙이가 전화를 했다. 노량진에서 보자는
제안에 흔쾌히 약속하고 침울한 기분이라도 달랠 겸 버스에 올랐다. 친구들과 만남의 장소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빵집이었는데, 이제는 다방으로 바뀌었다. 의숙이가 노량진에 무슨무슨 다방으로 나오라고 할 때 잠시 당황했다. ‘아! 이제 빵집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아니구나!’ 새삼 느꼈고 의숙이의 어른 흉내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이층에 있는 다방문을 쑥스러운 듯 열고 들어갔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의 향기를 맡으며 실내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조금은 어두웠지만 곳곳에 켜있는 촛불이
새로워 보였고 은은한 전등불빛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금새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서 의숙이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용주와 진영이도 있었다.
“와! 영우다. 보고 싶었어”
“애들아! 오랜만이다 반가워”
영우가 조금은 의도적으로 반가운 모습을 보였고 친구들도 환하게 맞이해 주었다. 의숙이 용주 진영이는 자신들이 원했던 대학에 모두 합격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영우는 친구들의 환영이 좋았고 처음 맛보는 다방 커피도 달콤했다. 친구들은 커피를 마시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영우도 지금 이시간 만큼은 낙방의
고통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영우는 점점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친구들은 대학생활의 기대감과 궁금함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고, 때론 자신들이 다니게 될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하며 졸업을 해서 유명인이 된 선배들 이름을 꺼내면서 자랑하였다. 영우는 그런
대화내용이 생소했고 궁금하지도 않았고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친구들은 신이 나서 웃고 떠들었고 영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할 말을 잃어갔다. 지금 이 순간 영우의 존재감은 친구들의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 속에 매몰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커피 잔은 이미 빈 잔이고 물컵만 몇 번씩 채우며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영우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먼저 말꼬리를 끊으며 예쁜 포장지로 정성껏 포장해서 준비해 온 선물을 용주에게 건넸다.
“합격 선물이야, 축하해!”
용주가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었다. 포장 속에는 털장갑하고 수필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래 고마워, 너도 내년에는 꼭 합격해서 자주 보자”
“응! 그래 그럴게”
털장갑은 영우가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손뜨개질로 만들었고, 수필책은 영우가
좋아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서점에서 샀다. 책갈피 속에는 네잎 클로버가 숨겨져 있었는데, 영우가 지난여름방학 때 들판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반나절 만에
찾아낸 귀한 풀잎이다. 네잎 클로버가 눈에 띄는 순간 용주에게 선물할 생각에
기뻤고 정성껏 말려서 비닐코팅까지 해서 간직하고 있었던 거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영우도 대학에 합격해서 용주가 준비한 선물도 받고 서로를 축하하는 이벤트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심정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퇴색되어 버렸다. 영우가 준비한 선물은 그 빛을 잃었고 선물을 주면서 즐겁다거나 기쁘다는
마음보다 오히려 먹먹함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연기처럼 피어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영우는 혼자가 됐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예전처럼 지내기엔 어느새 거리가 생긴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영우는
그렇게 느꼈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영우는 고민도 없이 내년을 기약하며
재수학원에 등록을 하고 책을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서자 전화벨이
울렸다.
운옥이한테서 온 전화다. 급하게 수화기를 들고 운옥이 이야기를 듣다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주르륵 떨어 뜨렸다. 운옥이는 들뜬 목소리로 자기 얘기부터 했다.
운옥이에게서 들은 새로운 소식은 운옥이도 인하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는 것과 안양으로 딸기를 먹으러 함께 갔던 서울공고 남자애들은 안양에 있는 현대계열의 만도라는 회사에 취업했다는 내용이다. 운옥이는 그 애들과 연락을 이어 갔었나 보다. 그렇게 친구들은 하나둘 자신들의 진로를 확정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