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2-15
그 때 이층 계단을 밟아 오르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
왔다. 불안한 시선을 던지던 창가의 여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
을 얼른 숙였다. 그와 함께 사남일녀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올
라와 자리를 잡고 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주루 안이 갑자기 나타난 그들로 인하여 소란스러워졌다.
창가의 여인이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녀가 막 계단
을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이봐, 잠깐만. 뒷모습이 낯익은데?』
여인의 뾰족한 음성이 그녀의 걸음을 붙들었다.
굳어버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어 서 버린 여인 곁에
다가온 삼십 대의 미부(美婦)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까
르르 하고 웃었다.
『호호호호, 이게 누구야? 화소음, 네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
제껏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었을 줄이야..... 오늘 뜻밖에도 내가
큰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창가에 앉아 시름에 젖어 있던 그녀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육
초량에게서 몰래 떠나온 화소음이었다.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녀
는 절강성 항현 남쪽의 봉황산기슭 불성암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곳에 몸을 의탁하고 수양하며 육초량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겠다
고 했던 것이 지난 가을이었는데, 겨우내 홀로 걸어 겨우 호북성
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음 전주!』
화소음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녀를 막아선 삼십대의 풍염
한 흑의 미부는 음검(陰劍) 음요옥(陰妖玉)이었다. 음요옥이 싸
늘하게 일갈했다.
『맹주님께서 그동안 너를 키워준 은혜가 막중한데 감히 냄새나
는 사내놈에게 홀려 맹주님을 배신하고 본맹에 등을 돌리다니,
너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음 전주님, 제발... 사부님의 은혜야 소녀의 한 목숨을 다 바
친다고 해도 부족하지만, 소녀는 이미 사부님의 노여움을 사 사
문으로부터 버려진 몸.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랍니다. 부디
소녀를 보내 주십시오.』
간절한 얼굴로 두 손마저 모아 애원하는 화소옥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음요옥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흥, 그렇게는 안 된다. 네가 육초량 그 애송이 놈을 따라 달
아난 것을 아시고 맹주께서는 이미 전 문도들에게 너와 그 자를
보는 대로 잡아들이거나 척살하라고 명하셨다.』
『아-』
화소음이 처연하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소녀의 무공을 폐하시고, 육 공자를 잡기
위해 소녀에게 모진 고초를 내리셨습니다. 그로써 사부님과의 인
연은 벌써 끝난 것. 소녀를 그저 처음 보는 하찮은 계집으로 여
기고 보내 주십시오.』
『안될 말. 너를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본 이상 어찌 맹주님을
속이고 너를 놓아준단 말이냐. 순순히 나를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음요옥이 손짓하자 호시탐탐 화소음을 노리고 있던 사인의 장
한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거칠게 그녀의 여린 팔을 붙잡았다.
『놔라!』
화소음의 아름다운 얼굴에 한 줄기 분노가 어렸다. 예전 같으
면 감히 자신 앞에서 얼굴을 똑바로 들지도 못할 자들이었던 것
이다. 그녀가 거칠게 뿌리쳤지만, 장한들의 완강한 팔힘을 당할
수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뒤에서 덥석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흐흐흐.... 화 소저. 예전 같으면 내가 이렇게 화소저를 안게
되리라고 언감생심 꿈이라도 꾸었겠소?』
다른 자들도 저마다 음흉한 눈빛으로 화소음의 온몸을 훑어보
며 음소(陰笑)를 흘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음요옥의 눈에도 기이
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화소음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이 크나큰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
물이 흘러 내렸다.
『호호호.... 그들 중 아흑의 것이 가장 쓸만하지. 힘이 좋기는
역시 두십랑이고.... 어떠냐 소음, 원한다면 그들과 마음껏 즐기
게 해주마.』
『이,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화소음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장한 중 아흑이라 불린 자
가 덥석 그녀의 젖가슴을 잡아온 것이다. 두십랑의 손이 화소음
의 치마를 들추고 매끄러운 종아리를 더듬어 오르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기만 하던 화소음이 비틀거렸다. 수치
가 지나쳐 곧 기절해 버릴 듯했다.
『흐흐, 여기서 그냥 누우려고? 그것도 좋겠지.』
두십랑이 이제는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번들거리는 눈을 게슴츠
레하게 뜨고 웃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가라앉은 일성이 그들의 달아오른 욕정
에 찬물을 끼얹었다.
『흐흐, 어르신들의 흥을 깨뜨리다니 용서할 수 없는 놈이로구
나!』
『귀찮다. 아흑 네가 가서 어서 저 물건을 처리해라. 그리고 빨
리 일을 시작하자. 나는 더 못 참겠다.』
여전히 화소음의 치마 속을 더듬으며 두십랑이 재촉했다. 아흑
이라는 자가 사납게 검을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죽엇!』
일검에 난도분시할 작정인 듯, 추호의 인정도 없이 사방을 그
물처럼 죄며 찔러드는 아흑의 검이었다. 어둠 속에서 사나이의
눈이 살기를 띄고 빛났다.
피잇-!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탁자 위에 있던 젓가락 하나가 쏘아져
나왔다. 가느다란 대나무 젓가락에 불과한 그것이었지만, 아흑의
검세를 젖히는 크고 강한 힘은 쇠뇌보다 더했다.
퍽!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아흑의 이마 한 복
판에 깊숙이 꽂혀 부르르 떨고 있는 젓가락이었다. 그것을 확인
하려는 듯 눈을 한껏 치뜬 아흑이 끅끅거리며 서서히 뒤로 넘어
갔다.
그가 탁자를 박살내고 통나무처럼 쓰러지고 나서야 번쩍 정신
을 차린 자들이 일제히 어둠 속의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헛, 저 죽일 놈이!』
삼인의 장한들이 화소음을 팽개치고 단숨에 십여 보를 건너뛰
며 검을 쳐냈다. 어둠을 가르며 삼면에서 떨어지고 찔러 오는 검
세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사나이의 투박한 손이 젓가락 통을
잡는 듯했다. 그리고 가볍게 흔들린다 싶었는데,
피이잉-!
어둠을 흔드는 날카로운 파공성을 따라 세 개의 가느다란 대나
무 젓가락이 뇌전처럼 허공을 가르고 날았다.
『안 돼!』
크게 놀란 음요옥이 부르짖으며 몸을 날렸으나, 이미 세 가닥
의 빛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삼인의 장한들이 앞서 죽은 아흑
과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이마 깊숙이 대나무 젓가락을 꽂은 채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악독한 놈, 죽어랏!』
한 번의 도약으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온 음요옥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사나이의 미간을 찍었다. 검봉이 미처 이르기 전
에 싸늘한 검기가 살갗을 쓰리게 하며 파고들었다. 그 한 수만으
로도 그녀가 대단한 고수임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땅-!
유등 아래의 희미한 불그림자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가락 하
나가 가볍게 그녀의 검신을 치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으르렁거리
며 울려 퍼졌다. 사나이의 일지에 부러질 듯 크게 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검의 탄력을 빌어 허공에서 몸의 위치를 바꾼 음요옥이
다시 음양도도(陰陽棹渡)의 수법으로 검을 휘둘러 어둠을 종횡으
로 갈랐다. 싸늘하고 더욱 악독해진 검기가 몸부림치듯 크게 일
렁이며 사방을 베어 갔다.
여전히 유등 아래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앉아 있는 사나이
가 묵묵히 좌수를 뻗어 검인을 잡아갔다.
『흥!』
음요옥이 냉랭한 코웃음을 날리며 더욱 검에 내력을 실어 넣었
다. 쇠를 무 자르듯 하는 보검을 맨손으로 잡아오는 사나이의 무
모함이 가소롭기만 했다. 그녀가 손목에 불끈 힘을 주어 검을 비
튼 순간이었다.
끼기기기-
쇠붙이가 서로 긁히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귀를 아프게 했
다. 놀랍게도 음요옥의 검이 단단한 집게에 물린 듯 사나이의 손
아귀 안에 꽉 틀어 잡혀 있었다.
『허억!』
음요옥의 눈이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나이의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 같았는데, 땅! 하는 맑은 소
리를 내며 그녀의 보검이 간단히 절단되어 버렸다.
『누, 누구...?』
부러진 검을 들고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음요옥의 얼굴에 비로
소 공포가 가득 떠올랐다. 이와 같이 맨 손으로 자신의 보검을
꺾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살계를 열기로 한 이상 용서할 수 없다.』
낮게 깔리는 무거운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사나이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위맹한 모습이 유등 불빛에 뚜렷한 음영을
그리며 드러났다. 그것을 본 음요옥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
졌다.
『악, 강사옥!』
성큼 다가선 강사옥이 부러진 검편을 그녀의 가슴속에 깊이 박
아 넣었다. 부릅떠진 음요옥의 눈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공포
가 가득 일렁이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미 인간으로서 살아 있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
다.』
독백하듯 무심하게 말하는 그의 앞에서 고통과 두려움으로 일
그러진 눈을 감지 못한 채 음요옥이 서서히 무릎을 꺾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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