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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통문화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부안군 시작)
전라북도 서원 (95)
고창군(9)
계산서원
상하면 검산리
1704년(숙종 30)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지대(金之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군 청도면에 남계서원(南溪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사우(祠宇)의 명칭을 충효사(忠孝祠)라 하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위폐는 뒷산에 묻고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으며, 1907년 후손들이 강당인 쌍수당(雙修堂)을 중건하였다.
그 뒤 전라북도 무장향교(茂長鄕校) 관내 유생들이 발의하여 198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고, 명칭을 계산서원으로 정하였으며 김응룡(金應龍)·김몽룡(金夢龍)·김희방(金希邦)을 추가 배향하였다.
기산서원
아산면 대동리
<아산의 풍경 : 서원 사진 확보 중>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사우로, 1932년에 신현중(申鉉中)이 창건하고 신한균(申漢均), 김두안(金斗安), 강수흠(姜隨欽) 등을 향사해 오다가 뒤에 신명동(申命東), 신지인(申志仁), 신택렬(申宅烈), 김용수(金容洙), 신현중(申鉉中) 등을 추배(追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동서원
신림면 가평1리
면암 최익현 선생(勉庵 崔益鉉 先生)과 수남 고석진 선생(秀南 高石鎭 先生)의 문인(門人)이며 함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한 고순진(高舜鎭), 고예진(高禮鎭) 형제(兄弟)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門人)들과 흥덕향교 및 전국 유림들이 두 선생의 숭고(崇高)한 도학(道學)과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추모하고자 1924년 3월에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던 중 일제(日帝) 강압으로 중지(中止) 되었다가 1928년 전국 유림들이 다시 사우(祠宇)를 완공(完工)하였다.
도암서원
공음면 칠암리
1613년(광해군 5)에 김질(金質)의 효성과 학문을 기리어 그가 살던 집터에 창건하였다. 이후 1835년(헌종 1)에는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킨 증손 김경철(金景哲)을 배향하였으며, 1857년에는 김경철의 아우로 임진왜란 때에 왕을 호종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김익철(金益哲)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6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동산서원
성내면 동산리
<성내의 풍경 : 서원 사진 확보 중>
이필(李苾)[1682~1746]이 1718년(숙종 44)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1585~1657],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1633~168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다. 그 뒤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1661~1733],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1633~1722]을 추가 배향하였다.
1721년(경종 1) ‘동산(東山)’이라 사액되었으나 8년 뒤, 1729년(영조 5) 서원은 철액(撤額)되었다.
1773년(영조 49)에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다시 중창하였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유허지만 남아 있다.
운곡서원
아산면 운곡리
1766년(영조 42)에 모양(牟陽) 당산에 세워졌으며, 1797년(정조 21)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유림들과 후손들에 의하여 1905년 복설되었고, 1924년에 복원되었다.
월암서원
고창읍 월암리
1946년 지방 유림에 의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전기에 활약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1497~1579], 송은(松隱) 임신번(林信蕃)[1494~1567]의 사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창건하였다
화강서원
고창읍 주곡리
<주곡리의 풍경 : 서원 사진 확보 중>
유학자 전우(田愚)[1841~1922]를 주벽으로 하여 유영선이 1924년에 건축한 4칸의 현곡정사(玄谷精舍)를 기반으로 1955년 유림이 창건하였고, 그 다음 해 용암사(龍巖祠)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동서원
대산면 매산리
고려 때 문신이었던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을 주벽으로 이조 판서 김인우(金仁雨), 사은 김승길(金承吉), 매은 김오행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광산 김씨 문헌록』에 의하면, 1898년 이전부터 초가 형태로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1912년 강당인 정모재(靖慕齋)와 서재인 명성재를 중건하였다. 건축학적 측면에서 전형적인 서원 건축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주요 건물인 고창 화동서원 정모재는 중건 기록이 남아 있다.
군산시(4)
문창서원
옥구읍상평리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1868년 훼철되었다. 1969년 전교 고수장(高洙張)을 중심으로 옥구 유림들이 문창서원 재 건립을 발의하였다. 문창서원 담장 앞에는 재 건립 관련 내용을 새긴 비석을 1970년에 세웠다.
염의서원
옥산면 당북리
1685년에 창건하여 1804년(순조 4)에 사액을 받았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 재건립하였다.
옥산서원
옥구읍 상평리
1929년에 국권을 잃은 상황에서도 충효와 예를 숭상하는 전통문화를 유지하고자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군산지역과 관련된 일화를 갖고 있는 최치원과 지역의 선현 등 모두 14분을 배향하고 있다.
치동서원
옥구읍 오곡리
전횡을 모신 사당인 어청도의 치동묘에서 유래한 것으로, 1926년 군산시 서흥남동에 치동원을 건립하고 전횡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 1951년 고려 말 유학자인 전야은, 전뢰은, 전경은 선생을 추배하였다. 그러나 치동묘가 군산시 도시 계획에 저촉되자 1983년 현재의 위치에 치동서원을 다시 건립하였다.
김제시(12)
구암서원
용지면 구암리
<주곡리의 풍경 : 서원 사진 확보 중>
1827년(순조 27)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구암서원이 위치한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는 옛날 우주황씨의 집성촌으로, 중시조인 개국 공신 황거중은 죽은 지 약 400여 년 뒤인 1842년(헌종 8)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이곳에는 황거중을 주벽으로 하여 지역의 명현들인 행은(杏隱) 황응청(黃應淸),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동계(棟溪) 황극효(黃克孝), 겸암(謙庵) 정복환(鄭福煥) 등이 종향되어 있다. 1868년(고종 5) 철폐된 후 1902년(고종 39) 지금의 자리에 단을 설치하여 중건하였고, 1967년 단이 있던 자리에 사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서원
성덕면 모라리
1574년(선조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지화(柳志和)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순조 때에 남궁 제(南宮濟)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으나 1970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곡서원
진봉면 신포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2년(고종 9)에 훼철되었다. 1901년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에 복원하였다.
1634년(인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강원기(康元紀)·함부림(咸傅霖)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2년(고종 9)에 훼철되었다. 1901년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에 복원하였다.
백산서원
백산면 하서리
1928년에 지은 목조 건물로서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청곡(靑谷) 윤찬을 비롯하여 구봉(九峰) 윤여임(尹汝任), 죽계(竹溪) 백선남(白善男), 죽음(竹陰) 윤자선(尹滋善), 담재(澹齋) 윤자민(尹滋民) 등의 위폐를 모시고 있으며 1947년 경에 중수하였다.
백석서원
갈공동
1652년(효종 3) 유집(柳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승방산에 세워졌던 하나의 사당이었다. 1696년(숙종 22)조속(趙涑)을 추가배향하고, 그 뒤 유도(柳棹)를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고 1902년 지금의 자리에 단(壇)을 설치하였으며 1946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현서원
백산면 하정리
1784년(정조 8) 처음 창건될 때에는 강승(姜昇)[1430~1500]·김시습(金時習)[1435~1493]·남효온(南孝溫)[1454~1492]을 배향을 위해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생건마을에 건립되었다.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에 의해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훼철당하였다가, 1924년에 지금의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백산중학교 입구에 재건되었다.
용암서원
교동
1575년(선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간(趙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계맹(李繼孟)·나안세(羅安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712년(숙종 38)윤추(尹推)·이세필(李世弼)·나응삼(羅應參)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그 뒤 조윤침(趙潤琛)을 모셔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향을 계속해오다가 1911년에 복원하였다.
율산서원
명덕동
<명덕동의 풍경 : 서원 사진 확보 중>
호남의 대 유학자 금재(欽齋) 최병식(崔秉心) 선생의 학문과 덕망을 숭모하고자 제자 라지는 선 선생이 자신의 향리인 죽림 후원에 사재를 헌납하여 1984년 7월에 건립한 서원이다. 1984년 10월 금재 선생 영위(靈位) 봉안 후 매년 추향 샤로 배향해왔다. 1997년 부지 확장을 통한 서원 중건 후 단청 및 조경공사를 했다. 2001년 7월 라지는 선 선생이 향년 96세로 타계하시니 지역 유림들의 절대적 추대로 2003년 8월 정재(正齋) 라지는 선(羅鎭旋) 선생 영위가 봉안되며 배향됐다.
저산서원
공덕면 회룡길
1577년(선조 16)에 창건되었으며 본관이 남평(南平)인 문극겸(文克謙)·문달한(文達漢)·문익점(文益漸)·문찬과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형제인 별암(鱉岩) 유지강(柳之綱)·정암(靜岩)유지기(柳之紀) 등을 배향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대원군 서원 철패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04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지음서원
하동
<하동의 풍경 : 서원 사진 확보 중>
1634년(인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나쾌(羅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기도 이천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자 1752년(영조 28)김제 지봉(芝峰) 아래로 옮겨 세우고 이귀(李貴)·고봉익(高鳳翼)·나처대(羅處大)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9년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향사를 계속해오다가 1911년 유허지(遺墟地)에 복원하고 그 뒤 나수눌(羅守訥)·나희후(羅喜厚)를 추가 배향하였다.
학당서원
백산면 하정리
1654년(효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처(安處)·정담(鄭湛)·안경지(安敬之)·안징(安徵)·안위(安衛)·안철(安徹)·나팔기(羅八紀)·나신도(羅伸道)·안국용(安國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산면 학당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1년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654년(효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처(安處)·정담(鄭湛)·안경지(安敬之)·안징(安徵)·안위(安衛)·안철(安徹)·나팔기(羅八紀)·나신도(羅伸道)·안국용(安國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산면 학당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1년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동서원
만경읍
<만경읍의 풍경 : 서원터 사진 확보 중>
1602년(선조 35)에 창건되어 이서상(李瑞相)·이광춘(李光春)·이영춘(李榮春)·최주극(崔柱極)·최주항(崔柱恒)·임명항(任命恒)·임명용(任命龍) 등을 배향하였으나, 1870년(고종 7)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재건되지 못하였다. 폐사지인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에는 현재는 빈 터만 남아 있다.
남원시(9)
매계서원
사매면 관풍리
1781년(정조 5) 대신리 상신마을에 설립하여 8현을 봉향(奉享)하다가 순조 을해 년에 기지(基地)의 저습으로 지금의 오수면 둔기리로 이건(移建)하여 덕계(德溪)로 개칭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 되었던 것을 1992년 남원 유림들이 복설을 의결하여 관풍리 794-6번지에 건립을 착공하여 1993년 4월15일 준공을 하고 매계서원으로 환원하였다.
용장서원
주생면 상동리
1302년(충렬왕 28) 처음 세웠을 때는 서원의 이름을 용성사(龍城祠)라 하였다. 그 후 1402년(태종 2년)에 용장 서원(龍章書院)이라 개칭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정조 때 지금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그 후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훗날에 다시 세웠다.
용호서원
주천면 호경리
일제강점기인 1927년 원동 향약계를 주축으로 하여 남원 유림 김종사 및 여러 유림 선비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974년 서원의 시설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설립 당시 처음에는 주자영을 봉안하여 배향하였다.
유천서원
주생면 영천리
1830년(순조 3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방사량(房士良)·방귀온(房貴溫)·안전(安瑑)·안창국(安昌國)·방응현(房應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은 못하고 안탁과 안창국의 위패는 안씨 문중에서 옮겨가고 방사량·방귀온·방응현의 위패는 유허지에 묻고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계속하여 왔다.
정충서원
주생면 정송리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한 황진, 고득뢰와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안영의 세 충신을 위해 1649년(인조 27)에 건립하였으나 사우는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다.
창주서원
도통동
1579년(선조 12)에 방응현(房應賢) 등 유림의 공의로 노진(盧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지방(機池坊, 현 금지면)에 고룡서원(古龍書院)을 세워 위패를 모셨다.
정유재란으로 다른 건물은 소실되고 사우(祠宇)만 보존되어오다가 1600년에 ‘창주(滄洲)’라 사액되어 창주서원으로 개칭,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그 뒤 1960년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풍계서원
대강면 풍산리
1788년(정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황희(黃喜)·오상덕(吳祥德)·황위(黃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자, 오상덕·황휘의 위패는 유허지에 묻고 황희의 영정만을 봉안하여 제향을 계속해오다가 1909년에 복원하였다.
호암서원
덕과면 만도리
조선 숙종 초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서(李舒)·심구령(沈龜齡)·안성(安省)·소연(蘇沿)·소산복(蘇山福)·이실(李宲)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남원 진전방(眞田坊) 성산(城山) 아래에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9년(정조 13)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함과 동시에 호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유허지에 위패를 묻고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61년에 복원하였다.
환봉서원
금지면 방촌리
1843년에 발행된 영양천씨 수보에서는 천만리 장군의 묘소가 남원임을 분명히 명기해 놓고 있다. 따라서 문중의 관심도 크게 높아져 1856년에 이르러서는 사우건립을 위한 예조의 허가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착공은 지지부진하였는데 그 후 1868년(고종5년)에 이르면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이 전격 공표되면서 당분간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기존의 서원도 대부분 폐쇄되는 마당에 신규 개설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우건립은 별도로 하고 1869년부터는 남원지역 유림과 함께 본손이 참여하는 춘계제향이 성대하게 개최되었으니 이 행사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무주군(4)
도산서원
안성면 사전1길
1813년(순조 13)에 건립되어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 1908년(순종 2) 도산 여학당(道山與學堂)으로 변경하고 사립 학교(私立學校)를 설립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하였다. 1919년 안성 공립학교(安城公立學校)가 개설되면서, 서원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중에서 1970년에 사당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산서원
무풍면 현내리
1821년(순조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하연(河演)의 선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창건과 동시에 ‘타진사(妥眞祠)’라고 사액되었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7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물을 짓고 백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분양서원
무풍면 지성리
달성서씨 문중의 서당으로 쓰이던 풍성당(豊城堂)을 무풍면 지성리로 옮겨 수리한 뒤 1901년 분양정사(汾陽精舍)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5년 동쪽에 숭모사(崇慕祠)를 추가로 짓고 1973년에 분양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죽계서원
안성면 죽전리
숙종 39년(1713년)에 건립된 서원이다. 금산김씨 시조이자 고려 때의 이름난 무신(武臣)이었던 김신(金侁, ?~1274)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의 무신 장필무(張弼武, 1510~1574)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두 아들 장의현(張義賢), 장지현(張智賢, 1536~1593)도 이곳에 배향되었다. 고종 6년(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건물의 일부만 남았다.
부안군(4)
계양서원
계화면 양지길 12
사산서원
주산면 사산리
피정 채충경 등 6현을 향사하던 사우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5년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 복설하고, 채충경 이하 4현을 향사하고 있다.
숭모서원
보안면 하일석리
<보안면 풍경>
숭모사는 원래는 1812년(순조 12) 무주 오도산 아래에 창건되어 도산사라 칭하고 박힐을 주벽으로 하여 박희권, 박린을 배향했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당하자 현재의 위치로 몰래 이봉하였다가 1959년 7월에 사우를 지어 숭모사라 개칭하고 박지영을 추배하였다.
옹정서원
부안읍 옹중리
<옹중리 풍경. 유허지 사진 자료 수집 중>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생명(崔生明)·최계성(崔繼成)·손홍적(孫弘積)·김석량(金錫良)·최활(崔活)·최명룡(崔明龍)·김단(金湍)·채달주(蔡達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78년(정조 2)에 중건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유허지에는 팔현(八賢)의 위패매안기념비만 남아 있다.
효충서원
화서면 계곡길 4
<고희 유물관>
고희(高曦)를 향사하던 곳으로 1820년(순조 20)에 사우와 영각(影閣)을 중수하고 1977년 유림의 건의로 고사렴(高士溓), 고홍건(高弘建), 고두황(高斗煌) 3위를 추배하였다. 1982년 유물관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창군(4)
남산서원
순창읍 가남리
<가남리의 풍경, 서원 사진 자료 확보 중>
순창으로 은거한 충신 권효의 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안동 권씨(安東權氏) 문중과 향유들이 1800년(정조 24) 창건하였다. 1807년(순조 7) 권효의 위패를 봉안 향사하다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무이서원
팔덕면 청계리
<서원이 있던 터>
순창 설씨(淳昌薛氏)와 옥천 조씨(玉川趙氏)의 문중에서 유학의 진흥을 위해 1788년(정조 12) 6월 건립하였다. 주벽은 중국 송나라 학자 회암(晦庵) 주희(朱熹)[1120~1200], 배향 인물은 경재(敬齋) 설공검(薛公儉)[1224~1302], 근재(謹齋) 설인검(薛仁儉)[1228~1306],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1390]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지계서원
적성면 지부리
<구암정>
1788년(정조 12) 순창 유림들의 공의(公議)에 의해 양배, 이유겸, 양사민, 양응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선현을 향사하며 지방의 유교 교육을 진흥하다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1년 양배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구암정(龜巖亭)을 세웠으나 서원은 재건하지 않았다.
화산서원
유등면 오교리
<김천일을 모신 사당>
1607년 9월 8일 순창군 유림의 공의(公議)로 신말주, 김정, 김인후, 고경명, 김천일 등의 학문과 덕행,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이듬해 위패를 봉안하였다. 서원은 사액 서원의 전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사액 서원과 같은 모든 의례가 시행되었다. 그 후 박상, 유옥, 신공제, 양사형, 김시서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완주군(11)
구호서원
북동읍 구미리
1730년(영조 6)에 지방유림이 박상충(朴尙衷)·이성중(李誠中)·박은(朴訔)·송유저(宋有著)·임사수(林士壽)·박소(朴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77년(정조 1)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98년에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중건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이듬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백산단(柏山壇)이라 명명하였다.
1904년에 구호단(龜湖壇)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박종열(朴宗說)·임치우(林致愚)·유기섭(柳基燮) 등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970년에 복원과 아울러 구호서원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승서원
소양면 신원리
조선 중기의 문신 홍남립(洪南立), 류화, 홍이장 등을 배향을 위해 구이면 학천리에 건립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26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웠다.
반곡서원
비봉면 반곡서원길
1613년(광해 5)에 국함(鞠涵)이 강당(講堂) 환성재(喚醒齋)와 정자(亭子) 화양정(華陽亭)을 건립(建立)하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한 것이 시발(始發)이다. 1610년(광해 2)에 송영구(宋英耈)가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가서 공부자(孔夫子) 영정(影幀)을 가지고 왔다가 보관하기 어렵자 국함(鞠涵), 국침(鞠沈)에게 촉탁(囑託)하니 국렴(鞠濂)이 강당(講堂)뒤에 정궁(幀宮)을 지어 봉안(奉安)하고 마을 이름을 양곡리(楊谷里)에서 반저동(泮渚洞)으로 고쳤다. 1668년(현종 9) 문인(門人)들이 중심이 되어 정궁(幀宮) 앞에 사우(祠宇) 반곡사(泮谷祠)를 창건(創建)하고 국함(鞠涵), 국침(鞠沈)을 향사(享祠)하였다.
그 뒤 1968년(고종 5)조령으로 훼철(毁撤)되고 정궁(幀宮)만 남게 되어 1892년(고종 29) 고산향교 경내로 정궁(幀宮)을 이건(移建)하였다. 1904년(고종 41)에 설단(設壇)하여 향사(享祠)하다가 1937년 국유(鞠襦)를 제향(躋享)하고 1960년 국명(鞠溟)을 추향(追享)하였다. 1967년 정부보조금과 사림(士林)과 본손(本孫)의 협찬금으로 정궁(幀宮)의 유허(遺墟)에 사우(祠宇)를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현서원
고산면 서복리
1668년(현종 9)에 창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3년 복설되었다. 처음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임윤성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1941년 후손들이 위패를 천곡서원으로 옮겨갔고 현재는 구영만 배향하고 있다. 경내에 있는 정안당(靜安堂)은 1682년(숙종 8)에 구영의 형 구휘가 고산향교 남쪽에 세웠던 것인데, 1688년(숙종 14)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이후 1840 년(헌종 6)에 보수하였고, 1866년 헐렸던 것을 1922년에 재건하였다.
보광서원
구이면 평촌리
1720년(숙종46)에 창건하였으며 19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이듬해인 1869년 훼철되었다가, 1971년 다시 건립하였다.
최근에 이도형이 찬한 '보광사비'가 세워졌다.
봉강서원
봉동읍 구만리
1754년(영조 3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방간(李芳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완주군 용진면 모란리에 모란서원(牡丹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52년(철종 3)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봉강서원이라 개칭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으나, 1899년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복원되어 이헌구(李憲球)를 추가배향하였다.
천곡서원
화산면 종리
조선 중기의 문신 구영(具瑩, ?~1663년)과 임윤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나 사당이 소실되어 모두 백현서원으로 옮겼다. 1941년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임윤성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임윤성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였다.
청하서원
구이면 중인리
김장생(金長生, 1548~1631년), 박동립, 박동현(朴東賢, 1544~1594년) 유조를 배향하고 있으며 다. 설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이듬해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66년 복원과 동시에 김장생(金長生)을 주벽(主壁)으로 추가 봉안하였다
학천서원
구이면 원기리
이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동래 정씨의 정수홍 등을 봉안하기 위해 가묘(家廟)로 건립하고 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모두 헐어냈다가 1896년 중건하였고 1990년에는 강당을 재증축하였다.
호산서원
삼례읍 후정리
정확한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말이 없어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창건 이후 정몽주, 송시열, 김수항, 유학자 김동준(金東準), 정숙주(鄭叔周,1607∼1665년) 등 5위의 선현을 배향하였으며 이후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헐렸다. 일제강점기 때 재건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서원 경내에 있던 신앙재와 강당이 불에 타 1958년 다시 세웠다.
화산서원
소양면 신원리
이언적(李彦迪,1491~1553년), 송인수(宋麟壽,1487~1547년), 육대춘을 배향하고 있다. 본래 1624년(인조2) 전주시 중화산동에 창건하여 1662년(현종3)에 사액서원이 되고 왕명으로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쓴 묘정비를 세웠다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이듬해에 훼철되었다. 이후 1988년 지역 내 유림들과 옥천 경암공파 자손들이 힘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사우를 옮겨왔으며 1994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익산시(3)
오강서원
석암동
1852년(철종 3)에 김시흥(金時興)을 주벽으로 하고 김향(金珦), 김관(金觀)과 김문기(金文起), 김준(金遵)을 배향을 위해 현재의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에 창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시책에 따라 철폐되고 그 후 1884년(고종 2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설단(設壇)을 하여 반산원(盤山院)이라 하였다. 그 후 1961년 이곳에 배향된 김문기의 후손들에 의해 사당 3칸, 강당 4칸을 중건하여 오강서원이라 하였다.
화산서원
금마면 용순리
1657년(효종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2년(현종 3)에 ‘화산(華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1695년(숙종 21)에 송시열(宋時烈)을 추가배향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지방유림이 유허지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68년팔봉(八峯) 유림이 사우를 복원하고 소두산(蘇斗山)·소휘면(蘇輝冕)·황자후(黃自厚)를 추가배향하였다
화암서원
금마면 기양리
1552년(명종 7)경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공수(李公遂)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23년(인조 1) 소세량(蘇世良)·소세양(蘇世讓)·이약해(李若海)를, 1719년(숙종 45) 소동도(蘇東道)·소영복(蘇永福)·소광진(蘇光震)을 추가배향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9년(고종 6)경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의 전답은 익산향교로 귀속되었다가, 1977년 군내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임실군 (11)
관곡서원
지사면 관기리
1820년(순조 20)에 지방유림들이 최윤덕(崔潤德)·이형남(李亨南)·이적(李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58년 후손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계서원
둔남면 둔기리
1793년(정조 17)에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매계마을에 세우고 이름을 ‘매계서원’이라 하였다가 1805년(순조 5) 지금의 장소로 이건(移建)하고 이름을 ‘덕계서원’이라 하였다. 그 뒤 19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93년에 이르러 원래 창건지에 복설되었다.
덕암서원
지사면 원산리
1607년(선조 40)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최양(崔瀁)·박종수(朴從壽)·정지년(鄭知年)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유림에 의하여 그 이듬해 제단을 쌓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65년에 복원하였다.
삼계서원
오수면 둔덕리
1793년(정조 17)에 창건되었다.
성곡서원
덕치면 사곡리
<오도산풍경>
숭모사는 원래는 1812년(순조 12) 무주 오도산 아래에 창건되어 도산사라 칭하고 박힐을 주벽으로 하여 박희권, 박린을 배향했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당하자 모안면하일석리로 몰래 이봉하였다.
신안서원
임실읍 신안리
1588년(선조 21)에 한호겸(韓好謙)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제자가 신안사(新安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69년(현종 10)에 중건하였으며, 1788년(정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송경원(宋慶元)·한필성(韓必聖)·한명유(韓鳴愈)·강백진(康伯珍)·송시태(宋時態)를 추가 배향(配享:학덕 있는 사람의 神主를 모시는 것)하였다.
1819년(순조 19)에는 함평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 안치된 주희(朱熹)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주벽(主壁)으로 봉안함과 동시에 ‘신안(新安)’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52년(철종 3)에 이서(李舒)를, 1860년에 김수(金洙)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주희의 영정 1본과 모사본 1본은 용담(龍潭)의 삼천서원(三川書院)으로 옮기고, 김수의 영정은 서울 본가로 보냈으며, 서원의 전답 6마지기는 매각 처분하여 임실향교로 귀속시켰다.
그 뒤 1901년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享祀:제사)를 계속해오다가 195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천서원
지사면 영천리
1619년(광해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처순(安處順)·정환(丁煥)·정황(丁熿)·이대유(李大)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6년(숙종 12)에 ‘영천(寧川)’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나 광복 후 후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주암서원
지사면 방계리
1654년(효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덕지(崔德之)·최연손(崔連孫)·장급(張伋)·장경세(張經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그뒤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중주서원
덕치면 일중리
<일중리의 풍경, 서원 자료 확보 중>
1859년(철종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현(朴鉉)·박강생(朴剛生)·박심문(朴審問)·박중손(朴仲孫)·박달(朴橽)·박증영(朴增榮)·박훈(朴薰)·박영(朴英)·박충원(朴忠元)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이듬해 유림이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전라남도 장흥군 세덕사(世德祠)로 9현의 위패를 옮겨 새로 봉안하였으며, 유허지(遺墟址)에는 매단비(埋壇碑)만 남아 있다.
학정서원
청웅면 구고리
<고구리의 풍경. 서원 사진 자료 확보 중>
1660년(선조 3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번(朴蕃)·박훈(朴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청웅면 구고리 남쪽 아구정(迓鷗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에 아구정 북쪽 주천동(酒泉洞)으로 이건, 김천일(金千鎰)을 주벽으로 모시고 홍붕(洪鵬)을 추가 배향하여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30여 년 유지해 오던 중 화재를 당하였다.
1656년(효종 7)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짓고 ‘하정서원’이라는 사액을 예조에 청원하였으나 같은 해 김천일의 원호(院號)가 다른 곳에 사액되어 중복할 수 없으므로 사액서원의 예로 향사토록 하고 관제물 물목(官祭物物目)을 봉하여 현감 제주(縣監祭主)로 향사하라는 하교가 내려졌다.
같은 해에 이흥발(李興勃), 1659년에 조평(趙平), 1855년(철종 6)에 김원근(金元根)을 각가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에 의하여 위패를 그 유허지에 매안(埋安)하고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유지해왔다.
현주서원
지사면 현계리
1704년(숙종 3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능간(李凌幹)과 정염(丁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뒤 1707년에 김복흥(金復興)·변유(邊瑜)·정견(丁涀)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듬해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광복 이후에 복원되었다.
장수군(6)
도암서원
장계면 송천리
1815년(순조 15)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경광(李絅光)·이성구(李聖求)·유심춘(柳尋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83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동서원
산서면 사창길 35
조선 1847년(헌종 13)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던 것을 1957년 복설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김해김씨의 선조 가운데 김준손, 김기손, 김일손, 김대유, 김치삼, 김정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복설하면서 김극일을 추배하고,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김종직을 추배하고 김극일을 주벽으로 하였다.
압계서원
산서면 학선리
1789년(정조 1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육려(陸麗)·임옥산(林玉山)·박이항(朴以恒)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98년(정조 22)에 박이겸(朴以謙)과 1799년에 전설(全渫)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강당 울흥재(蔚興齋)를 건립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하여 왔다. 그 뒤 1958년에 후손의 협력으로 복원되었으나, 전설은 후손의 의견에 따라 향사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1960년대 전라북도 유림회의 공의에 따라 문암 육홍진(陸洪鎭)을 추가 배향하였다.
용암서원
천천면 춘송리
1818년(순조 18)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성(安省)·양성린(梁聖麟)·김영갑(金永甲)·한인기(韓仁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용암사(龍巖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5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으며, 1977년 양석하(梁碩廈)를 추가 배향하였다.
월강서원
계내면 월강리
1826년(순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장(白莊)·송보산(宋寶山)·김남택(金南澤)·최경회(崔慶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그 뒤 1948년에 복원하였다. 1974년에는 백여옥(白如玉)·김남중(金南重)·송수산(宋壽山)을 추가 배향하였다.
창계서원
장수면 선창리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희(黃喜)·황수신(黃守身)·유호인(兪好仁)·장응두(張應斗)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55년에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 강백진(康伯珍)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시 (3)
반곡서원
완산구 동서학당
1777년(정조 1) 지방유림들이 윤황(尹煌)·이영선(李榮先)·서필원(徐必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98년 유허지에 강당을 세우고 학도를 모아 교육을 해왔으며, 그뒤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38년에 복원하고 1950년대 이후 네 차례의 보수를 하였다.
용강서원
덕진구 원동
1822년(순조 22)에 전주 유림의 공의로 유의손(柳義孫)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전주인 유한종(柳漢宗)이 현재 용강서원(龍岡書院)의 전신인 용고서원(龍皐書院)을 설립하여 유의손의 위패를 모셨다. 용고서원은 유의손을 주벽으로 하고, 황강원(黃岡院)에 있었던 유분(柳扮)의 위패를 용고서원으로 옮겨왔으며, 유숭조(柳崇祖)·유헌(柳軒)의 위패가 추가 봉안됨으로써 전주유씨 4현을 향사(享祀)하였다. 이후 용강서원으로 개칭했을 때 송진문(宋振門)·이익렬(李翊烈)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923년에는 유경수(柳景秀)·송은서(宋殷緖)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01년(고종 38)에 유림이 재건하여 용강서원(龍岡書院)이라 개칭하였으며 강당을 복원하였다.
황강서원
완산구 효자동
원래 전주 곤지산(坤止山) 아래에 있었으나,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그후 중건되었으나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된 것을 1898년 재건하였다,
서원의 사당에는 이문정(李文挺)을 주벽(主壁:사당의 으뜸이 되는 위폐)으로 하여 이백유(李伯由), 이경동(李瓊仝), 유인홍(柳仁洪), 강해우(姜海遇) 등을 배향하고 있다. 이문정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정당문학(正堂文學)의 벼슬을 지냈고 한때 왕에게 배불정책(排佛政策)을 간하기도 하였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대(文學臺)라는 강당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유허지가 현재의 황강서원이다.
정읍시 (9)
고암서원
상평동
1695년(숙종 21) 6월 지방유림이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같은 해 9월 ‘考巖(고암)’이라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85년(정조 9)에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를 추가배향하였으며, 당시에는 장의(掌議) 1인, 재임(齋任) 2인, 원생 60여인이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지만 그 뒤 유림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남고서원
북면 보림리
1577년(선조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항(李恒)과 김천일(金千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5년(숙종 11)에 ‘남고(南皐)’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하여왔다.
그 뒤 1899년에 강수재(講修齋)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서원을 복원하는 동시에 김점(金坫)·김복억(金福億)·김승적(金承績)을 추가 배향하고, 1974년에 다시 소산복(蘇山福)을 추가 배향하였다.
노양서원
흑암동
조선 후기의 서원으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1689년 기사환국 때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되었고,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는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그 후 송시열과 두남 박세경(朴世經) 을 기리기 위하여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세웠고, 1695년(숙종 21) 사액이 내려졌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에 지방 유림들이 발의하여 1958년 사우(祠宇)를 다시 세워 노양서원이라 이름 붙였다. 1959년 10월 송시열의 위패를 주벽에 모시고, 박세경을 함께 배향하였으며, 1962년 3월 송시열의 영정을 모셨다. 노양서원의 사우는 1992년 중건된 맞배지붕집으로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이며, 1993년 내삼문을 개축하였고, 1996년 강당(산앙재 山仰齊)이 중건되었다.
도계서원
덕천면 도계리
1673년(현종 14)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희맹(李希孟)·김제민(金齊閔)·최안(崔安)·김지수(金地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숙종 23)김제안(金齊顔)과 1840년(헌종 6)김흔(金昕)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13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1962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됨과 동시에 김섬(金暹)과 김습(金習)을 추가배향하였으며 의성김씨종중의 소유이다.
동죽서원
덕천면 상학리
1844년(헌종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희정(崔希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산(書山)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0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함과 동시에 동죽서원으로 개칭하고 조광조(趙光祖)를 추가 배향하였다.
두암서원
소성면 애당리
<소성면의 풍경>
장열사(壯烈祠) 옆에 있는 사우로 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되어 김해 김씨 京파의 중조이신 고려조 삼중대광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과 문민공(文愍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삼위를 봉사하였다 그러다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해 두암사라 하여 김목경을 추배하고 있다.
김목경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여 조정에서 ‘금녕군’의 호를 받았으며 후일에 세속을 떠나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그의 후손들이 묘를 찾지 못하여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함께 제를 올렸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33년 전 우연히 지석을 발견해 금녕군의 묘를 확인하고 후손이 장열사에서 따로 모셔 두암사를 짓고 모시게 됐다. 두암사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이라 한다.
무성서원
칠보면 무성리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고, 고려 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과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현가루(絃歌樓)·명륜당(明倫堂)·강수재(講修齋)·흥학재(興學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옥산서원
소성면 애당리
1956년에 중건했으며, 의촌(義村) 김남식(金南式)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시은(市隱) 김이성(金履成)과 인일정 김성은이 배향되어 있다.
용계서원
칠보면 시산리
1701년(숙종 27) 향현사(鄕賢祠)의 서원으로 창건되어 관곡 최서림(崔瑞琳 1632∼1698)을 향사하였다. 최서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인으로 166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94년 공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진 교육에 힘쓴 선비이다.
1750년(영조 26) 최서림의 문인인 동곡 김정호(金挺昊 1673∼1742)와 백계 은정화(殷鼎和 1650∼1724)를 모셨으며, 1757년 오천 한백유(韓佰愈 1675∼1742)와 안식와 김습(金習 ?~1638), 월곡 유종흥(柳宗興)을 추배하였다.
용계서원에 향사되어 있는 인물들은 거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였던 이들이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10년 다시 세워졌다.
창동서원
이평면 창도리
1965년 이곳 유림들의 발의로 창건, 김택술(金澤述:1884∼1954)을 배향했다. 건물은 사우(祠宇)·강당· 고직사(庫直舍)·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후창집(後滄集)》을 비롯한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다.
1909년 치환으로 열지(裂指: 손가락을 찢어 환자에게 피를 먹이는 것)했고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여 효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평면 불망실(不忘室)에서 후진을 교육하며 철저한 배일사상을 고취하여 항거했고 1954년 사론(士論)으로 계양사에 추배되었다.
진안군(6)
구산서원
마령면 임진로
1828년(순조 28)에 송보산(宋寶山)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16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949년에 다시 설단(設壇)되어 봉사하다가 1967년에 이르러 중건되었고 1967년에 진안유림의 발의로 김문기(金文起)와 송림(宋琳)이 추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천서원
용담면 월계리
<삼천서원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 용담향교>
1667년(현종 8) 용담현령(龍潭縣令) 홍석(洪錫)이 본현(本縣)의 안자동(顔子洞)·정자천(程子川)·이천(伊川)·주자천(朱子川)·와룡암(臥龍岩)이라는 지명으로 인하여 중국의 안회(顔回)·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제갈량(諸葛亮) 등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5년(숙종 21) ‘三川(삼천)’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당시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희성재(希聖齋)·사숙재(私淑齋)·심락당(尋樂堂)·재천루(在川樓) 등이 있었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영계서원
마령면 원강정1길 42
최양(崔瀁), 이인현(李仁賢), 이정란(李延鸞), 전계종(全斷宗)을 배향한 서원으로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었다가1867년(고종 6)에 서원 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 뒤 1870년에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0년에 다시 설단(設壇)되었다가1948년에 복설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천서원
주천면 주양리
주천서원은 주천 광산김씨 문중의 사당으로서 서원이 아니라, 사(祠)였다. 1924년 김대현이 전국의 사우와 유림을 방문하여 협조를 구하여 광산김씨 문중에서 주천사를 창건하였다. 1975년 9월 14일 성균관장의 인준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화산서원
안천면 백화리
황희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자손인 황보신, 황징 등을 배향하고 있는 중배실 황씨들의 사당이다. 그 서원은 중배실의 남쪽 앞마을로서 진안~무주간 도로의 북쪽 500m, 백화초등학교 북쪽의 나지막한 산기슭 언덕빼기에 있는 대추말의 길가에 자릴 잡고 있으며 그 부근엔 역시 황씨 집안의인물들인 황교찬과 육씨 부인의 효자각과 열녀각이 있다 화산서원은 그 서원의 강당에 있는 현판들의 기록에 의하면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고 1970년 2월에 또 중수되었다. 특기할 것은 1970년대 말까지도 이 서원에 딸린 하인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