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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통문화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충청북도 서원 (33)
괴산군 (4)
계담서원
감물면 감물리
1824년(순조 24)에 계담마을 뒷산에 창건하였다. 중종 때의 문신인 한림공파 안명세를 모시고 세마공 안술을 추배하였다. 그 후 1865년(고종 2)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0년에 순흥 안씨 양도공파 종회 안동준 회장의 노력으로 세덕사를 건립하여 계담서원을 복원하였다.
군방서원
청안면 문방리
1688년(숙종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경행(辛景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60년(영조 36)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07년에 신경행의 8대조인 고려 태학사 장(藏)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지방유림과 자손들이 협력하여 복원하였다.
화암서원
칠성면 송동리
1622년(광해군 14)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이문건(李文楗)·노수신(盧守愼)·김제갑(金悌甲)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38년(영조 14)허후(許詡)·전유형(全有亨)·박세무(朴世茂)·이신의(李愼儀)를 추가배향하였으며, 그 뒤 박지겸(朴知謙)·허조(許慥)·유근(柳根)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6년박동찬(朴東燦)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화양서원
청천면 화양동길
조선 숙종(肅宗) 22년(1696)에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창건되던 해에 사액(賜額)을 받고 숙종 42년(1716)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달았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영이 내려졌다.
그것은 이 부락에 있던 지정음식점 같은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권이 주어져서, 돈이 있는 요역기피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나라는 그만큼 피해를 보고 가난한 백성들만이 그 역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 1862년 3월에는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 ·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과 전라도 지방에까지 출몰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여서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에도 역시 김좌근의 주청으로 금지되었다. 이 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1999년 우암 송시열 유적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417호)로 지정된 후 2004년 송자사 · 승삼문 2동을 복원하였고, 묘정비는 숙종 42년(1716)에 건립되었던것이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었으나 광복후 찾아 다시 건립하였다.
보은군 (2)
계당서원
삼승면 선곡리
<최태하의 가옥>
최흥림(崔興霖)이 을사사화를 피하여 이주한 뒤 조식(曺植), 성운(成運) 등과 교류하였으며 주변의 인재들을 모아 교육을 시킨 장소이다.
금화서원
삼승면 선곡리
1758년에 지방유생 강재문(姜在文) 외 105인이 발기하여 최운(崔澐)·성운(成運)·조식(曺植)·성제원(成悌元)·최흥림(崔興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으나 광복 후 지방유림회에서 적극 주선하여 1967년에 복원하였다.
상현서원
장안면 서원리
충암 김정(1486∼15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명종 10년(1555)에 ‘삼년성서원’으로 세웠고 광해군 2년(1610)에 국가 공인의 사액서원으로서 ‘상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헌종 13년(1672)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성운·성제원·조헌·송시열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된 뒤에 1896년 ‘장례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으며 1986년 해체·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동군 (1)
송계서원
매곡리 수원리
1664년(현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위(曺偉)·박영(朴英)·김시창(金始昌)·박응훈(朴應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707년(숙종 33)에는 남지언(南知言)·박유동(朴惟棟)을 추가배향하였다.
1726년에 ‘송계(松溪)’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맡아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위패를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설단(設壇)하여 매년 음력 3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 뒤 1954년경안삼준(安三俊)·남형우(南衡祐)·박제원(朴濟元) 등을 중심으로 한 유림이 유허비와 비각을 설립하였다.
옥천군 (2)
덕봉서원
청산면 하서리
<화서리의 유래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자 율곡(栗谷)과 이이(李珥)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옥천에서 태어난 학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숙종 27)에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사액(賜額)을 받지는 못하였고, 1868년(고종 5년) 흥성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모두 헐렸고 그 뒤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목담서원
동이면 금암리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헌(趙憲)·한일휴(韓日休)·신지익(申之益)·송국헌(宋國憲)·연최적(延最績)·지여해(池汝海)·이동형(李東亨)·변상회(卞尙會)·신영식(申永植)·박문고(朴文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 뒤 지방유림이 계획을 세워 관계기관의 도움으로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1960년에 중수하였다.
음성군 (2)
운곡서원
삼성면 용성리
1602년(선조 35)에 정구(鄭逑)가 충주목사로 부임하자 이곳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운곡서원으로 개편하고 주자(朱子)의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61년(현종 2)에 정구를 추가배향하였으며, 1676년(숙종 2)에 ‘운곡(雲谷)’이라 사액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4년에 복원되고 1963년에 중수되었다.
지천서원
생극면 팔성리
조선 중종 때김세필(金世弼)이 현재의 위치에 서재(西齋)를 짓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죽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세필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으로 개조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配享)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
그 뒤 1893년에 유림과 후손들이 협의하여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향사(享祀:제사)를 지내오다가 1906년에 복원하였으며, 김자수(金自粹)·김저(金)·김억(金嶷)·김정현(金鼎鉉)·김홍욱(金弘郁)·김종현(金宗鉉)·박상(朴祥)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1963년에 중수하고, 1986년에 보수하였다.
증평군 (2)
구계서원
증평읍 남차리
<구계서원 터>
1613년(광해군 5) 신경행(辛景行)을 비롯한 고을의 유림들이 조성한 서원으로 구암서원이라고도 한다. 이준경(李浚慶), 서사원(徐思遠), 박지화(朴枝華), 이득윤(李得胤), 이당(李塘) 등 5명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 초석 일부만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 기왓조각 등이 발견된다.
금당서원
도안면 금당리
<도안면의 풍경>
정후사(靖厚祠)는 정후공 연사종(靖厚公 延嗣宗)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본래 1813년(순조 13) 연사종을 추향하고, 후손인 안음현감(安陰縣監) 연충수(延忠秀), 의민공(毅愍公) 연최적(延最績), 동중추(同中樞) 연세홍(延世鴻)을 배향한 양양재(羊羊齋)를 금당서원(金唐書院)이라 불렀다. 1869년(고종6)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됐다가 1915년 정후공의 영정만을 모신 정후사가 재건됐다.
진천군 (2)
백원서원
이월면 노원리
<김덕숭의 마을 풍경>
1597년(선조 30)에 이종학(李鍾學)·김덕숭(金德崇)·이여(李畲)·이부(李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9년(현종 10)에 ‘백원(百源)’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청주시 (16)
검당서원
<자료 미확보>
검암서원
상당구 가덕면 병암리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헌(趙憲)·한일휴(韓日休)·신지익(申之益)·송국헌(宋國憲)·연최적(延最績)·지여해(池汝海)·이동형(李東亨)·변상회(卞尙會)·신영식(申永植)·박문고(朴文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 뒤 지방유림이 계획을 세워 관계기관의 도움으로 1958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1960년에 중수하였다.
구계서원
분평동
1647년(인조 25)에 지방유림이 괴산군 청안면 석곡리에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이준경(李浚慶)을 주벽(主壁)으로 서사원(徐思遠)·박지화(朴枝華)·이득윤(李得胤)·이당(李塘)의 위패를 모셨다.
선현의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 지방유림이 뜻을 모아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1982년에 중수하였다.
국계서원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비중리의 풍경>
1701년(숙종 27) 청원군 내수읍 국동리(菊洞里) 국동마을에 박증영(朴增榮, 1464~1493), 변경복(卞景福, 1538~1629), 이덕수(李德洙, 1577~1645), 이수언(李秀彦)을 봉향하고 설립한 서원이다. 1871년(고종 8)에 철폐된 것을 1960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기암서원
상당구 낭성면 갈산리
1699년(숙종 25)에 강백년(姜栢年)의 위폐를 봉안하고 세운 서원으로 1826년(순조 26)에 오숙(吳熽)을 추향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철폐된 것을 1984년 오창읍 기암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고 ‘갈산사’라 불렀다. 이후 1987년에 강당을 새로 지어 충효의 도장을 마련하였다.
노봉서원
서원구 현도면 하석리
<화석리 풍경>
1615년(광해군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인수(宋麟壽)와 정렴(鄭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8년(현종 9)에 사액되었으며,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덕천서원
상당구 가덕면 노동리
유희령(柳希齡)과 유흥룡(柳興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694년(숙종 20)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우신언(禹愼言)과 정응창(鄭應昌)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묵정서원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1695년(숙종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식(申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수산리에 쌍천서원(雙泉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42년 유림과 후손이 협력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명칭을 묵정서원으로 개칭하였으며, 신덕린(申德隣)·신포시(申包翅)·신장(申檣)·신용(申湧)·신집(申潗)을 추가 배향하였다.
백록서원
흥덕구 옥산면 환희리
1710년(숙종 3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상(權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광복 후 유림과 후손들이 협력하여 복원하였으며 1965년에 보수하였다.
봉계서원
상당구 남일면 월오리
<자취를 알 수 있는 서원의 주초석>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우옹(金宇顒)·신용(申湧)·신집(申潗)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권상(權常)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송천서원
창원구 오창읍 양지리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사렴(金士廉)·최유경(崔有慶)·이정간(李貞幹)·박광우(朴光佑)·이지충(李之忠)·조강(趙綱)·이대건(李大建)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옥산면 송천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1년에 ‘송천(松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이제신(李濟臣)·이인혁(李寅爀)·최석정(崔錫鼎)·남구만(南九萬)·박문수(朴文秀)·이종성(李宗城)·이효석(李孝碩)·김여량(金汝亮)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 지방 유림이 복원계획을 공의하여 오던 중, 국고 보조를 받아 1975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신항서원
상당구 용정동 이정골
1570년(선조 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경연(慶延)·박훈(朴薰)·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에 한충(韓忠)·송상현(宋象賢)·이색(李穡)·이이(李珥)·이득윤(李得胤)을 추가 배향(配享:학덕 있는 사람의 神主를 모시는 것)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화(兵禍)로 훼손된 것을 곧이어 복원하였으며, 1660년(현종 1)에 ‘신항’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毁撤)되었다.
광복 후 지방 유림의 발기로 당시 충청북도 지사 정낙훈(鄭樂勳)과 청원 군수 서정국(徐廷國)이 출자하여 복원하였으나 시설이 미약하고 퇴락하여, 1985년 원장(院長) 유용기(柳龍紀)를 비롯한 유림의 협력으로 다시 중건하였다.
쌍천서원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무성리의 풍경>
1695년(숙종 21) 신식(申湜, 1551~1623)을 배향하고 세운 서원이다. 1871년(고종 8)에 철폐된 것을 1915년 유림에서 복설하였고, 1989년에 고령신씨 문중에서 다시 세운 뒤 영정을 봉안하였다.
옥화서원
상당구 미원면 옥화리
1717년(숙종 42)에 이득윤(李得胤), 윤승임(尹昇任), 박곤원(朴坤元), 윤사석(尹師晳)의 위패를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다. 1871년(고종 8)에 철폐된 것을 1989년에 다시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89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양회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숭현사(崇賢祠)’라는 편액을 걸었다. 마당 앞에는 ‘옥화서원(玉花書院)’이라는 편액을 내건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우록서원
서원구 현도면 우록리
<참고 자료 확보 중>
죽계서원
청원구 북이면 용계리
1738년(영조 14)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평대군(安平大君)·화의군(和義君)·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서 광복 후 지방유림의 노력으로 복원하였다.
충주시(3)
누암서원
중앙탑면 창동리
1695년(숙종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가금면의 누암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를 추가배향하였다.
1702년에 ‘누암(樓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724년(경조 4) 사액이 취소되었다가 1725년(영조 1) 회복되기도 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건물만 보전되어왔다.
그 뒤 사우(祠宇)가 퇴락하고 송시열·권상하·민정중의 영정을 분실하게 되자, 1935년 정호의 후손들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정호의 위패만을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팔봉서원
대소원면 문주리
1582년(선조 15) 창건하였고 1672년(현종 13) 임금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8년 목조사원식(木造寺院式)의 전통양식으로 복원하였다.
하강서원
금가면 하담리
1786년(정조 10) 5월 창건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07년(고종 44) 유허지에 하강단소(荷江壇所)라고 설치하여 봉단(奉壇)하다가 1974년 5월 옛 모습대로 서원을 중건, 복원하였다. 1991년 7월 서원 내의 강당과 모현정 중수에 착공하여 12월 완공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