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2-19
『아아...』
절망과 치욕으로 울부짖는 화소음의 나신을 옥풍규가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고 난폭하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반항할 새도 없
이 무기력하게 쓰러져 누운 채 화소음은 사납게 밀려드는 그의
힘을 느껴야 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이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운명이라면 이처럼 가혹한 운명이 또 있을 수 없다고 생
각했다. 초점을 잃어버린 채 검은 하늘에 떠 흐르는 달무리를 담
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감겼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려 풀잎을 적셨다.
낄낄거리고 웃는 그녀를 보며 옷을 주워 입은 옥풍규가 침을
뱉고 한껏 경멸을 담은 어조로 비웃었다.
『쳇, 미쳐 버렸군. 쓸모 없는 년 같으니...』
넋을 놓고 주저앉아 낄낄거리는 그녀의 가슴을 한 번 더 우악
스럽게 쥐어 본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거든 강사옥 그 자에게 전해라. 더 이상 나를 이용할 생각
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휘적휘적 사라져 가는 그를 등뒤에 두고서
화소음은 흐느끼듯 그렇게 가라앉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
다.
* * * *
어두운 숲을 향해 끝없이 빠져들 듯 화소음이 위태롭게 휘청거
리는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알몸이 음침한 숲의 어
둠에 씻겨 창백하게 빛났다. 귓가에서 헐떡이던 옥풍규의 더운
숨소리가 그녀에게서 한 가닥 남아 있던 이성마저도 빼앗아가 버
렸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머리
속에 가득하던 온갖 생각들이 하얗게 지워지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에서
왔던 것인지...
화소음은 백치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로 그저 앞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본능이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도
망쳐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만이 남아서 그녀를 이끌었다. 웃고,
중얼거리며 화소음은 점점 숲 속 깊이 침몰해 갔다. 가시덩굴에
긁혀 피부가 상하고,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
다.
밤 부엉이가 낮게 울며 머리 위를 날아갔다. 두견새의 구슬픈
울음소리도 들렸고, 먼 곳에서 다가온 이리의 처량한 부르짖음도
길게 꼬리를 끌고 스쳐갔다. 사월 밤의 으스스한 추위도, 어두운
숲 속의 적막한 두려움도, 그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녀였지
만, 한 가지만은 아직도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때로 웃고, 때로 흐느끼면서 쉬지 않고 가슴속의 그 말들
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봉황산으로 가야 해. 육가가께서 그리로 찾아오실 거야.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야 해....』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속의 따뜻한 영혼이 시키는 대로 그저 그렇게 웅얼거리며 웃
고, 울었다. 이제는 말라버린 눈물자국을 타고 다시 한줄기 뜨거
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걷다가 죽고, 죽으면 그 혼백이라
도 일어나 또 걷기라도 할 듯이 그녀는 하염없이 어둠을 향해 걷
고만 있었다.
저 앞의 어둠 속에서 어둠의 한 덩어리인 듯 주저앉아 있는 거
친 사내가 보였다. 그의 번쩍이는 눈이 벌써부터 화소음을 뚫어
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화소음은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곧장 다가오기만 하는 그녀를 주시하던 사내가 풀
썩 웃었다.
『이건 재미있는 밤이군.』
점점 다가오는 화소음의 나신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사내가 그
녀의 눈을 보고는 움찔했다. 텅 빈 공허한 시선이 그를 지나쳐
어둠 속으로 향해져 있었던 것이다. 초점이 없는 눈이었고, 생기
가 실려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사내가 씹고 있던 칡뿌리를 뱉어
내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온 화소음이 비로소 사내의 기척을 느낀
듯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발했다.
『누구세요? 육가가, 당신인가요? 벌써 오셨군요.』
사내가 가슴에 부딪칠 듯 다가온 화소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
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철문금이요.』
화소음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했다. 들었다고 하더라도 중원
제일의 살수로 이름 높은 마도(魔刀) 철문금(鐵門金)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육초량의 이름이었고, 그의 모습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철문금을 바라보고 있었
지만, 그 눈 속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아, 당신은 육가가가 아니군요.... 미안해요.... 당신도 나를
원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세요.』
마도 철문금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짙은 나뭇가
지 사이로 기울어 가는 달을 바라보았다. 만월이었다.
『그렇군. 오늘이 보름이었나?』
새삼 그것을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리던 철문금의 눈빛이 스산
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이를 갈듯 낮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알만해. 적음상 그 색마가 기어이 이곳까지 온 게로군.』
『들어주실 건가요?』
화소음이 꿈꾸듯 몽롱한 눈으로 철문금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철문금의 눈에 연민이 스쳐갔다.
『청부를 하려는 거요? 나는 돈만 받는데... 다른 건 좀 곤란해.
게다가 적음상 정도 되는 자라면 값이 꽤 비쌀 거요.』
그는 화소음이 그 자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화소음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졌다.
『그들처럼 나에게 해도 좋아요.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나를 죽
여주세요. 아, 나는 육가가를 다시 볼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죽
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철문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
얼거렸다. 적음상 한 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충격이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을 이처럼 폐인으로 만든게 분명했다. 철문금의 얼
굴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겉옷을 벗어 그녀의 알몸을
감싸준 그가 스산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그들을 모두 죽여주겠소. 누구인지 말해 보시오. 외
상으로 해 드리리다.』
그러나 화소음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육가가만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데... 그는, 그
는... 좋은 사람이에요.』
비로소 정신을 잃고 품안으로 무너지듯 쓰러져 오는 그녀였다.
철문금이 난감하다는 듯 화소음을 받아 안고 고개를 저었다. 이
여인에게서 지금 무엇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가엾은 여인이로군. 나와 함께 갑시다.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
들끼리만 모여 서로 의지하며 다툼 없이 살아가는 나의 천국으
로...』
조심히 그녀를 안아든 철문금이 성큼성큼 걸어 숲을 벗어났다.
멀리 어둠에 잠겨 있는 득승산의 봉우리가 보였다.
『빌어먹을 놈들... 강북에서 쫓겨나 이곳에 자리잡고 나서부터
늘 소란스럽다.』
무림맹을 두고 하는 욕이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득승산이 강호
인들로 들끓더니 기어이 색화랑 적음상까지 설쳐대는 복마전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 분하기만 했다. 그의 거처는 득승산의 동
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는 그곳도 위험해졌다고 생각하
자 무림맹에 대해 더욱 분통이 터졌다. 한 번 그들의 총단이 있
는 남쪽 산비탈을 흘겨본 철문금이 입맛을 다셨다.
『또 이사를 가야 하나...?』
중얼거리던 그가 품에 안겨 어느새 깊이 잠들어 버린 화소음을
내려다보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5>
흐르는 세월을 쫓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득승산의 사월은 커다
란 아픔의 흔적마저 지워버린 채 가는 줄도 모르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지금은 오월 초. 초하(初夏)의 더위는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것이라 나그네의 몸을 쉬 지치게 했다.
하남성 개봉부는 황하의 십리 폭 탁한 물길을 건너기 위한 요
지였다. 자연히 그곳은 수륙양로의 요충지가 되어 예전부터 상업
이 번창한 대도시가 되었다. 종일 폭염이 이글거리던 오월 초이
래의 저물녘이었다. 흠뻑 땀에 젖은 모습으로 개봉부에 들어선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검은 피부의 남자는 손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
로 넘겨 묶었고, 뽀얗게 먼지가 앉은 마의에 투박한 손을 갖고
있었다. 훌쩍 큰 키와, 떡 벌어진 그의 어깨에서 느낄수 있는 것
은 건드리면 곧 베어올 듯한 호전적인 사나움이었다. 어느 한 군
데 세련된 곳이 없이 투박하고 거친 그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같
은 생각을 공통적으로 떠올렸다.
수행자(修行者)였던 것이다.
막 산에서 내려온 야수 같은 그와 동행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
의 여인이었다. 쭉 뻗은 늘씬한 몸매를 헐렁한 마의로 가리고 있
었으나, 본래 타고난 아름다움마저 다 가릴 수는 없었다. 사람들
이 어울리지 않는 그 두 사람의 여객(旅客)을 힐긋거리며 혀를
찼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쉬지 않고 종알대는 여인의 화사한 얼굴
과, 무뚝뚝하게 가라앉아 있는 사내의 투박한 얼굴은 좋은 대조
를 이루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욱 큰 호기심을 가져다 주었
다. 그들은 북경을 향해 북상하고 있는 육초량과 냉여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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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초량이 여우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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