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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행을 위한 독서인가, 독서를 위한 산행인가?
이 글은 작자인 정구(1543〜1620)가
36세 때인 1579년(선조 12) 9월 10일부터 24일까지 약 15일간에 걸쳐 이루어진 가야산 등반노정을 기록한 것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산행과정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산행을 하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니 책을 읽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정구와 가야산을 유람한 벗들은 모두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마다
그곳에서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 절은 화재를 겪은 뒤 새로 지었는데 이제 막 마무리된 것이라 했다. 절에서
보니, 구름 낀 산은 농염하고 아름다우며 바위 계곡은 깊고 고요하여 기상이 담박하고 시계가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그 광경은 해인사와 견줄
정도가 아니었다. 한훤당 선생이 일찍이 이 절에서 글을 읽어 덕을 닦고 도를 쌓았으니 공의 도는 아마도 이러한 환경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아, 우리들은 단 하루도 여기서 묵으며 책을 펴 보지 못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정구와 그 일행이 해인사를 지나 내원사에
이르렀을 때, 정구가 내원사에서 느끼는 기운과 감회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곳의 경치와 그곳에서 느끼는 기상이 해인사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며, 한훤당 김굉필이 그곳에서 공부를 했는데 자신은 단 하루도 그곳에 묵으며 책을 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과 같이 함께 갔던 벗 가운데 곽준이 있었다. 곽준은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름난 의병장으로서 활약하다가
황석산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순절한 사람이다. 그도 그곳의 한적한 기운이 좋아 훗날 그곳에 와서 글을 읽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다음날 몇
리를 더 가서 정각암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또 독서하기 좋은 곳이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지팡이를 잡고 몇 리를
걸어가니 정각암(淨覺菴)이란 암자가 있었다. 내원사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 경관은 한층 더 나아 보였다. 어제 양정 곽준은 내원사의
한적한 기운이 좋아 후일 거기에 와서 글을 읽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이곳을 보고는 더 좋아했다. 공숙 이인제가 농담삼아, “양정, 여기서도
앞으로 독서하겠다는 다짐을 해볼 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정구와 산행을 처음부터 함께했던 이인제와 곽준이 정각암이란 곳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일행은 하루 지난 뒤에 내원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정각암이란 곳에 이르자, 그 경관이 내원사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그러자 공숙 이인제가 곽준에게 농담삼아 “앞으로 여기서 독서하겠다고 다짐해 볼 만하다”고 했다.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가 독서인으로서의 체모에
걸맞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또 정구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구는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과거에 매달리거나 벼슬하는 일이 없이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는 학자로서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은 공부를
했는데,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心經)>을 중시했다. 외출할 때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가야산에 오르면서 <근사록>을
우선적으로 챙겼다.<근사록>은 <심경>과 함께 신유학의 기본서로 인식되던 1175년 주희(朱熹: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네 학자의 글에서 학문의 중심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뽑아 편집했다. 제목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1일 본격적으로 산에 오른 지 이틀째인 13일에는 해인사에 도착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근사록>
몇 판(板)과 <남악창수집>의 서문을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14일에는 내원사에서 새벽에 일어나 강당에 앉아 <근사록>을
읽었다.
l4일. 맑음. 새벽에 일어나 앞 강당에 앉아서는 <근사록> 몇 판을 읽었다. 구름과 산을 바라보며 잡념을 비운
채 선현이 남긴 가르침을 음미하노라니 저절로 정신은 하나로 모아져 깨달음이 생겼다.
산에 올라가서 성리학의 기본서를 읽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산에 가면서 그가 <근사록>과 함께 가지고 간 <남악창수집> 같이 산과 관련된 글을 가져가 참고로
읽는 일은 있었지만, 평소 공부하는 성리서를 가지고 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근사록>도 주자가 편찬한 것이고, <남악창수집>은 주자가 중국의 남악, 즉 형산에 올라가 읊은
것으로 후대 유산 하는 사람들이 매우 중시하던 글이었다. 그는 유람을 함에 있어서도 주자의 저작을 읽으며 주자의 학문을 공부했다. 이처럼 주자를
존숭한 까닭에 그는 주자의 생애가 담겨 있는 주자의 행장도 가지고 가서 읽었다.
그는 17일 “아침에 ‘주자행장’을 함께 읽었다”고
했다. 산행을 함께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정구의 주도 하에 ‘주자행장’을 읽은 것이다. 그는 이처럼 주자를 쉼없이 공부했는데, 이 산에서 주자의
다른 생애기록인 <주자연보>를 읽었고, 아울러 주자의 ‘무이산기’를 읽었으며, <남악창수집>을 또 읽었다. 그리고 주렴계와
장재 두 선생의 시를 읽었다.
이윽고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함께 서성거리며 여기저기 바라보다가 또 <주자연보>를 펴놓고
주부자(朱夫子)의 ‘무이산기(武夷山記)’와 <남악창수집> 서문 및 주(周), 장(張) 두 선생의 시를 읽었다. 그 구절 가운데는 오늘
관람하는 사정과 흡사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 마음 원대한 도를 기대함이지,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을 탐하는 것이겠는가. [直以心期遠
非貪眼界寬(직이심기원 비탐안계관)]’와 같은 시구를 보니, 어찌 오늘 산에 오른 우리들이 법으로 삼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산을 오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 시의 의미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평소 이와 같은 시문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특히 오늘 가야산 제일봉의
정상에서 한 번 읊조려 음미하는 것이기에 그 뜻과 맛이 한층 가슴에 와 닿았다.
이를 보면 정구의 가야산 유람은 애초부터 독서가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주자를 좋아하여 주자의 연보 가운데 있는 ‘운곡기’를 또 읽었다며 “책과 독서 다시 등촉을 잡고 재사(齋舍)로
돌아와 소장되어 있던 <주자연보(朱子年譜)> 중 ‘운곡기(雲谷記)’를 꺼내 한 번 읽은 뒤에 그것도 여행 짐 속에 넣었다. 매우
피곤하여 이날 밤은 곤하게 잠을 잤다”고 했다. 이쯤 되면 정구가 독서를 얼마나 즐겼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주자와 관련된 글읽기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산행 중에 깍듯이 예를 차리다
위에서 산행 중에 진지하게 독서를 하는 모습을 통해 학자의
산행은 일반인의 산행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자의 산행의 진면목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보다 그 읽은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평소 바른 행실을 하다가도 마음을 풀어 놓고 산에 오르거나 들에 뛰어 놀 때 흐트러지기가 쉽다.
그러나 정구의 품행은 산에 올라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정구의 <유가야산록>에 대한
평가에서 ‘여행 중에도 거경(居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음) 공부를 폐하지 않고 있어, 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고 정구의 이러한 모습을 잘 평가하고 있다.
마침 선영(先瑩)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말에서 내려서는 그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강(寒岡)으로 가서는 어시헌(於是軒)에 올라 잠시 옷섶을 풀고 쉬었다. 뒷산에 올라 경치를 보니, 달빛은 더욱 맑고 솔 그림자는 어른거리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흰 바위는 한결 더 희어 보이고 푸른 개울 물소리는 차가운 기운을 전해 왔다. 잠시나마 천지를 둘러보며 이리저리
소요하였더니 가슴속은 한가로워지고 세속의 잡념은 말끔히 사라진 듯했다.
정구는 11일 출발하여 하루 지난 뒤 자신의 선영이 있는
곳에 당도하자, 말에서 내려 선영을 향해 절을 했다. 선영이 있는 곳에 올라 그곳의 경치를 즐기고, 마음이 편안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처럼 11일 저녁 그곳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그 이튿날 아침에도 그곳에 올라가 절했다. “l2일. 아침에 일어나 다시 뒷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바삐 식사를 하고 출발하면서 길을 돌아 선영에 성묘하였는데, 선조를 그리는 슬픔이 가슴을 눌렀다”고 했다.
이튿날 그는
그곳에 올라가서 성묘를 하고 돌아왔으며, 선조를 그리는 슬픔이 가슴을 눌렀다고 했다. 바삐 식사를 하고 출발하면서 성묘를 했다고 했으니, 산행을
가는 바쁜 가운데에서 선영을 돌아본 것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깊이
선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선영을 지나는 마음이 잘 드러난 것은 다음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일. 맑음. 닭 울음소리에 일어났다. 아직도 싸늘한 달빛은 시내를 비추고 맑은 바람은 얼굴을 스쳤다. 율무죽을 먹고 즉시
짐을 챙겨 출발하였다. 공숙은 창산(昌山)으로 갔는데 그의 부모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선영(先瑩) 곁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정주신과 박경실 두 사람은 서원(書院)으로 향해 가고 배 동자도 어버이의 병환 때문에 하직하고 돌아갔다. 호평(虎坪) 앞 냇가에
이르러 또 말에서 내려 지나갔는데, 그곳은 내 외가의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 갈 때 들렀던 선영을 돌아오면서 다시 지날 때의
모습이다. 이때는 선영에 다시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말에서 내려서 걸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호평 앞 냇가에 이르러서도 말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그곳은 외가의 선영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자신의 선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외가의 선영에 대해서까지 산행을 다녀오는 피곤한
사이에서도 잊지 않고 경의를 표시했다.
그는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병진(兵陳)·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했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한 이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오복연혁도(五福沿革圖)>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 <퇴계상제례문답(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예학을 깊이
탐구했던 그는 자신의 친외가뿐만 아니라 방친의 제삿날에도 술을 마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흰 구름이 저 화왕산(火王山)과
대니산(戴尼山) 위에 아련히 떠 있었다. 그곳에 어버이가 계신 백유, 공숙 형제와 양정이 거기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버이를 잃은
나는 슬픔으로 목이 메어 눈을 바로 들고 볼 수 없었다. 제군은 각자 술을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셨다. 하지만 나는 방친(旁親)의
제삿날을 접하였으므로 마시지 않았다. 두루 둘러보다 저마다 너무 지쳐 바위에 누워 잠시 잠을 청하며 쉬었다.
이상과 같이 그는
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서 이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진정한 학자였다. 그의 이러한 학자의 면모는
자신의 몸을 닦는 데에 그치지 않고, 치국평천하의 기초로서 백성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유
이인개는 먼저 성불암 앞에 있는 대(臺)로 올라가고 나는 바로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암자의 위치는 정각암과 비슷했다.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거처하는 승려가 없었다. 마루와 방 안에는 먼지가 그득 쌓여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엊그제 심원암(深源菴)에 가서도 기거하는
승려가 없어 들어가지 않았는데, 지금 또 그 경우를 만난 것이다. 흉년인 데다가 부역이 많아 산속의 승려도 생활하기 어려워져 곳곳이 비어 있는
것이리라 여겨졌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산속의 승려도 이러할진대 백성들의 생계와 사정은 어떠할지 알 만하다. 가난한 마을은 집만 덩그렇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 절 해인사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 창건한 것으로 여러 번 중수를 거쳤다 한다. 절의
규모는 웅장하였고 그 화려함은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다. 백성의 힘이 또한 이 절에 허비되었다 하겠다.
그는 절의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절이 폐허가 되면 된 대로 그의 생각은 백성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이어졌다. 절의 규모가 크면 그 절을 짓느라 백성들이 힘들었을 것이라
염려했고, 폐허가 된 곳에서는 절도 이러한 데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하겠느냐고 염려했다. 그리고 학자로서 괴이하고 허탄한 것을 배격한 것을 볼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타고는 사인암(舍人巖)으로 갔다. 물이 맑고 물살이 빨랐으며 산봉우리가 가파르고 높았다. 옛날에 일찍이
어떤 사인(舍人) 벼슬을 한 사람이 이곳의 아름다운 수석을 사랑하여 이 바위 아래에 자리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곳이 바로 몸을 놓아버린다는 사신암(捨身巖)이다. 이곳에 온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잊어 인간 세상의
육신을 놓아버리고 이곳과의 인연을 영원히 맺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런 설은 시골 마을의 속된 말로서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산에는
특히나 불합리한 근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토대로 미신적이거나 괴이한 이야기들이 많이 생성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데, 정구의 경우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인암이란 바위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를 사인 벼슬을 한 사람이 그곳에 와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사진 윤호진(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남명학연구소장)
첫댓글 정구(1543 ~1620)가 36세 때인 동료들과 1579년(선조 12) 9월 10일부터
24일까지 약 15일간에 걸쳐 이루어진 가야산 등반노정을 기록한 것이다.
산행 중에 진지하게 독서도 하고 선영에 성묘도 하면서 동료들과 우의도
다졌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구는 임란때 기록한 龍蛇日錄에
저희 15대조 林下할아버지와 교류가
잇었던 것으로 여러번 언급되어 있어서
가깝게 느껴지는 분이기도 합니다.
함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