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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취하신 어린 양(계 5장 6-14)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5: 6-14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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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허영의 세상 속에서 한 주간 살다가 주일이 되면 갑자기 하늘의 환상으로 옮겨 가는 것은 쉽지를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계시록은 눈뜨면 우리가 보는 세계가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가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요한은 지금 환상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4장에서 요한은 성령에 감동해서 열린 하늘 문을 통해서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5장 1절에서는 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들려져있는 책을 보았습니다.
2절에서 또 다른 장면으로 옮겨져 갔습니다.
거기서 힘 있는 천사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라고 힘 있는 천사가 소리칩니다.
하지만 천지간에 적막감만 감돕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기로 통곡하는 요한을 위로하는 한 장로가 등장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오늘 본문 6절에서 시작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또 보니” 제3의 환상의 세계로 요한은 들어가고 있습니다.
앞에 보았던 장면이 바뀌면서 또 보고 있습니다. 환상 중에 요한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양의 모습을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5장의 주인공인 어린 양이 오늘 본문 6절에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 이미 승리자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장로가 와서 요한에게 승리자 예수를 소개하기를 “유다지파의 사자(獅子)”라고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사자(獅子)라고 하는 말은 짐승들 가운데서 강자인 사자(獅子)를 가리킵니다.
백수(百獸)의 왕자인 사자(獅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서 그가 정복자이시고 왕자라는 사실을 회상시켜 줍니다.
그러나 본문의 새로운 환상에서는 그 사자(獅子)에 대해서 상세히 말하는 대신 그 승리자의 모습을 어린 양의 모습으로서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양은 마치 죽임을 당한 것 같이 보입니다.
계시록 5장을 보면 진행이 빠른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한 사실을 가지고 지리멸렬하게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장면전환이 빠릅니다.
승리자 예수를 소개하면서 앞 장면에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소개해 놓고 그 다음 순식간에 그가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양 가운데서도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자와 어린 양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얼핏 보면 대조적인 모습 같지만 서로 보완하는 비유입니다.
말하자면 6절은 5절의 계속적인 설명입니다.
“유다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인” 그가 승리했다고 5절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6절에서는 그가 어떻게 승리하셨나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린 양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가 어떻게 승리하셨나를 보여줍니다.
“유다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인”
그가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일곱 인을 떼어서 두루마리를 펼치기에 합당한 자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대답이 어린 양의 모습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하는 부연 설명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어린 양으로서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여기 기독교의 신비가 있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의 비밀을 아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은 죽임을 당한 사자가 아니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 같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자가 아니라 그 목이 잘린 것 같은 어린 양이 서 있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일찍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한 말씀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승리하신 메시야이십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 역사와 의식 속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친숙히 알고 있습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추석에 송편을 익히 알고 있듯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 대해서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가까이 해본 경험이 없는 만큼이나 그 어린 양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알지를 못합니다.
요한의 환상의 기반은 다시 한 번 구약 성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을 잘 알기 위해서는 구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요한은 정말 한권의 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환상과 계시는 구약성경에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열면 여러분은 어린 양을 만날 것입니다.
인생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는 최초의 어린 양이 창세기 4장에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펴면 거기에도 어린 양 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유월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 가족 단위로서 양을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족이 그 양을 다 먹을 수 없으면 두 가족이 합해서 양 한 마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피로 양쪽 설주와 문 인방에 바르도록 한 것입니다.
한 밤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 밤에 애굽 온 땅을 두루 다니실 때에 피가 발려있는 집들은 그 장자를 멸하지 아니했습니다.
바로의 첫 아들로 부터 시작해서 맷돌을 돌리는 여종의 첫 아들뿐 아니라 짐승의 첫 새 끼에 이르기까지 애굽 땅에 죽음이 찾아 왔을 때에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어린 양 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는 절기가 생겨났습니다.
<유월절(逾越節)>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살펴보면 넘어 갔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이라니까 어떤 사람은 아카시아 꽃 피는 유월에 있는 절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PASS OVER” 했다는 거지요.
넘어 갔다는 의미에서 <유월절(逾越節)>입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에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 하리라. 그 피를 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신비로운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유월절>에 흘린 피는, <유월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장차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발려져 있는 문설주를 하나님이 보셨을 때에는 장차 십자가에서 흘릴 당신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를 내다보시고 그들을 죽음에서부터 구출하셨습니다.
이 날을 기억해서 이스라엘은 해마다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어린 양을 잡고 무교병 누룩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로 마련된 유월절 축제는 그들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설>이 더 큰 절기일지 <추석>이 더 큰 절기일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에게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유월절>이 제일 큰 절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새 나라를 세우신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써 <유월절>은 죽음을 면한 절기이고 동시에 애굽에서 벗어난 결정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어린 양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의 예언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사야는 비천하고 멸시받는 한 사람을 환상 가운데서 내어다 보고 있습니다.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한 사람을 내어다 보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 백성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5~7)
산 자의 땅에서 그가 끊어져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됨으로서 죄인이 받을 죄악을 담당하시고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당하셨기 때문에 죄인을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신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예언을 유대인 역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서 속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목은 오늘 우리들의 안목만큼이나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다가서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세상의 것만 보고 세상 소리만 듣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 갑자기 요한 계시록을 들으려고 하면 어렵듯이, 유대인 역시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삶이 완전히 세속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메시야”는 그들의 개념 속에 아예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원수를 쳐부수고 승리하시고 정복하시는 왕으로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이 이렇게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지만 그것이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고 하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서 메시야는 승리자로서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어떻게 유대인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헬라인의 문제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만큼이나 이방인들도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특히 로마인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노래하던 그들에게는 빌라도 총독에 의해서 처형을 당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어찌 그것이 1세기 사람들의 문제로서 끝나겠습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통한 승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지금 받게 될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발자취 대신 승리의 허상만 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어린 양,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 속에 기독교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떤 유대인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메시야 그는 당연히 승리하실 분이고 정복하실 분이고 영광을 받으실 분이고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가 설마 그처럼 사람 속에서 무시당하고 멸시 당하고 세상 권력의 밥이 될 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 기독교의 복음의 탁월성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먼저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피의 복음입니다.
남의 피를 흘려서 정권을 쟁취하는 것은 세상 나라의 속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권력은 남의 피를 흘림으로서 쟁취한 권력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함께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피를 쏟음으로서 세상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 도리를 잊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잘 되기를 사모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우리 몸에 채워 갈 고난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해 보셨습니까?
기독교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종교입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서 있는 그 어린 양의 모습 속에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승리하신 분이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이방인의 임금들, 로마의 임금들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백성을 주관하는 임금이었습니다. 그 집권자는 백성의 은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이 받던 칭호가 백성의 은인이라는 칭호였습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이것이 기독교의 비밀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며칠 앞둔 순간까지 누가 크냐고 제자들이 다투고 있을 때에 12제자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가 잘 되고 건강하고 우리가 번영하는 것을 구하지만 여러분을 부르신 구주께서는 일찍 죽임을 당하심으로서 승리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죽음을 통한 승리 그것이 기독교의 법칙입니다.
주님 자신이 스스로를 내어 주시기까지 죽임을 당하므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이 새로운 질서와 양식을 세상에 펼치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길을 먼저 걸으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가져오신 새 질서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비천하고 겸손한 가운데 오셔서 고난당하고 죽으셔야만 했던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종으로서 오셔야만 했습니다. 고난당하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영광의 왕으로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모든 대적을 그 발아래 복종 시키실 분이십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 권력의 밥이었습니다.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능으로 오실 때에 모든 입으로 그를 주라 칭할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질 것입니다.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왕이 되시기 전에 먼저 십자가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복음 아닙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먼저 된 자가 섬기는 자이어야 합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보살피고 섬기는 교회 그것이 참다운 교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일찍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을 인해서 처음 나오는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안다는 사실로 인해서 더 겸손하게 처신합니까?
영적으로 교만만큼 불치의 병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령한 세계를 보았다면 그것 때문에, 아직도 내세의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 예상하지 못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오늘까지도 거치는 돌이 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시고 이스라엘의 왕인 동시에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벽두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첫 장을 펴면 나다나엘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세례요한의 증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처음부터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상징 속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먼저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더디 믿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을 받아야만 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선(先) 고난(苦難), 후(後) 영광(榮光)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데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여러분의 삶 속에 채워 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먼저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그리스도인도 이런 고난에 동참하므로서 장차 오실 영광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고난은 그리스도가 다 받으셨고 우리는 영광에만 참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단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로서 우리는 그의 영광에 동참합니다.
그가 남기신 고난의 발자취를 밟아감으로서 오실 영광의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 장차 영광중에 그와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과 저의 부름은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의 뒤를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길은 환난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길입니다.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면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기독교는 환난을 통과한 사람들로 구성된 종교입니다.
“내 주여 이들이 어디서부터 나왔습니까? 모두 다 큰 환난을 통과한 자들 입니다”(계 7:13,14).
우리 모두 기독교의 복음을 그 삶에서 실천할 때에 핍박을 기대해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마다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구속한 것이니라.”
즉 흠 없고 점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되었다고 우리의 신분을 말씀합니다.
이 신약이 가르치는 핵심 진리를 요한은 여기서 유다 지파의 사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 속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승리자 예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일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들은 오늘의 고난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