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즈음에는 교과서가
국어,산수,사회,자연 네 권밖에 없었다.
음악 미술은 책이 없었지만 음악은 선생님의 풍금반주에 맞춰 애국가와 산토끼 노래를 배웠고
그림은 도화지에다 크레용으로 남이 그린 그림을 베껴서 그렸다.
어제 대학친구들 공용카톡에 번개산행 메시지가 떴다.
'10시 동백역 장산 등산'으로 나와 있었다.
밤중에 오늘의 일기예보를 봤더니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오후3시나 돼야 그치는 것으로 예보돼 있었다.
비가 그리 심하게 내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서 우산을 쓰고도 산에 올라갈 모양이다.
9시 미사에 참석하면서 아예 등산복 차림과 배낭까지 챙겨서 나섰다.
현관을 나서자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으므로 우산과 비옷까지 챙겼다.
산대장격인 대학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했더니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란다. 맑은 술을 좋아하는 놀부는
전날 과음을 했는지 도저히 못가겠다고 하더란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배낭을 울러메고 우산을 펴서 롯데 아파트 뒷길로 올라갔다.
다른 친구들은 동백역에서 만나서 올라오기로 돼 있어 중간지점인 체육시설이 있는 마당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소나무숲길은 물안개가 피어올라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길가에 핀 수국 꽃송이들은 빗물에 흠뻑 젖어 꽃닢 하나 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
약속장소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친구들이 우산을 쓰고 올라왔다. 빗방울이 제법 커졌으므로 배낭속에 든 비옷을 꺼내
배낭까지 둘러 씌웠다. 비에 배낭이 젖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외에도 우산을 들고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몇명 눈에 띄었다.
우중에도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산에 어지간히 미친 사람들이다. 나는 산에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눈 수술을 하고 한 달간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모임을 통해 친구들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다.
딱갈나무 잎 위로 빗방울이 또닥또닥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물안개가 피어나는 호젓한 오솔길을 우산을 쓰고 가는 풍경이
바로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오는 날 수채화'란 말은 전에부터 귀에 익었던 말이다.
여동생을 사랑한 오빠의 방황을 그린 1989년 제작된 곽재용감독의 멜로 드라마가 있고 다른 하나는 강인원이 작사 작곡한 노래로 가사와 곡이 젊은이들이 흠뻑 빠져 들것 같았다.
가사를 보면,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며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음악에 흐르는 그 카페에 쵸코렛색 물감으로
세상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네.
옥녀봉에 올랐더니 사방은 구름으로 가려져 바로 앞에 있는 바위와 소나무 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한 친구가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아 내가 옥녀봉 부근으로 찾으러 올라갔으나 둘러봐도 없었다.
나중에 전화가 왔는데 혼자서 딴길로 내려간다고 했다.
수채화란 원래 수채화 물감(water color)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유화에 비하여 보다 섬세하며 투명한 느낌을 준다.
비오는 날의 산악 풍경은 수채화라기 보단 수묵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수채화 그림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그림은 지워진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은 지우고 다시 그릴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