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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2-21
<2>
도대체 패배라는 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나이라고 생각하
며 냉여옥은 경이로운 눈으로 육초량을 바라보았다. 깊은 산중에
버려져 있는 숯구이 움막 안이었다.
어느덧 밝아온 아침 햇살이 여기저기 흉하게 벌어진 지붕의 틈
을 뚫고 하얀 빛살을 어지럽게 꽂아놓고 있었다. 그 아래 육초량
이 조용히 앉아 묵상삼매(默想三昧)에 빠져 시공을 초월한 듯 정
지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난 밤 내내 그는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깊이 가라앉
아 갔다. 강사옥과의 일전을 되새겨 보며 패배의 원인을 생각하
고, 새로운 검의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제일인으로 누구나가 꼽아 주는 철협 강사옥을 상대로 이
무명의 사나이가 그처럼 훌륭하게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일년 전만 하더라도 서장의 나형도에게
일도를 맞고 달아났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비천맹의 천검
호소청을 베었고, 사국천과 일전을 겨루더니, 드디어는 강사옥이
라는 초인을 상대로 하여 훌륭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냉여옥은 그런 육초량을 보며 머리 속에 온통 한 자루 철검만을
넣어두고 있는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기필코 내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
입술을 지긋이 물며 다시 한 번 그렇게 다짐하는 냉여옥이었
다.
* * * *
쿠쿠쿠쿠--
폭포는 이십여 장의 머리 위에서 일만 근의 압력으로 떨어졌
다. 그 장엄한 물줄기가 피워 올리는 물보라가 주위를 안개처럼
뽀얗게 감쌌다.
숯구이 움막에서 일리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 곳이었다. 그
수직의 폭포를 마주하고 한 사나이가 돌이 된 듯 서 있었다.
거칠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칡넝쿨로 질끈 동여맸
다. 걸치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진 그의 몸은 마치 청동의 조
각상을 보는 듯 웅장하기까지 했다.
육초량은 그렇게 알몸으로 폭포를 마주하고 서서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한 자루의 목검을 겨누고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물려
받은 순수한 알몸 그대로인 채, 원시의 강렬함으로 그는 그렇게
벌써 이틀째나 서 있었다.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
었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마저도 잊은 듯, 육초량은 먹지도 자지
도 않으면서 한 순간의 지점에 그대로 붙박혀 버린 사람처럼 장
엄하게 서 있기만 했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어느덧 나흘째의 날이
밝았다. 숨어서 그의 빛나는 고독을 바라보고 있는 냉여옥은 숨
이 막힐 듯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그의 팔을 잡아 흔
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닷새째였다.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리는 웅장한 폭포 앞에서 육초량은 그대
로 굳어 돌이 되어 버린 듯 싶었다. 냉여옥은 더 이상 그것을 지
켜보고 있을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 자신이 먼저 지치고, 가
슴이 굳어 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무얼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 안 되면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
다.
싸아아아--
(무엇일까, 이것은?)
엉거주춤 일어서던 몸을 멈추어 버린 냉여옥이 밀려드는 두려
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기(氣)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처럼 어느 한 곳을 향하여 불어가고 있는 그것의 기운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느껴지던 그 보이지
않는 파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갔다. 그러더니 드디어
온 산을 감싸고 있던 대자연의 거대한 기운이 이제는 사나운 질
풍처럼 으르렁거리며 육초량을 향해 무섭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
다.
위이이이--
거산(巨山)의 저 깊은 곳에서 토해지는 숨소리인 듯 은은한 휘
파람 소리와도 같은 것이 계곡 전체를 흔들며 몰려들었다. 그 엄
청난 기의 흐름 앞에서 냉여옥은 찢어질 듯 펄럭이는 옷자락을
움켜쥘 생각마저 잊은 채 넋을 놓았다.
그녀의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이 육초량을 향했다. 거대한 흐름
으로 쏟아져 나오는 대자연의 기가 집중되어 가는 정점에 눈부시
게 빛나는 육초량의 철탑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는 온통 거대한
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목검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 스스
로가 눈부신 발광체(發光體)인 듯, 목검이 느리게 원호를 그려갈
때마다 그것이 그려 놓은 찬란한 백광이 육초량의 몸에 띠처럼
감겼다.
위이이이--
소용돌이치는 기의 용트림이 점점 강해졌다. 너무나 큰 놀라움
으로 이미 사고(思考)와 지력(知力)을 잃은 채 멍해져 있는 냉여
옥에게 그 경이로운 광경은 그것 스스로가 저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듯했다.
『이야압-!』
시공이 정지되어 버린 듯한 어느 한 순간, 육초량의 입에서 뇌
성과 같은 기합성이 터져 나와 온 산을 쩌르릉 떨어 울렸다.
슈우우--!
그가 그어대고 있는 목검의 검봉을 따라 눈부신 백광이 뻗어나
가 횡으로 허공을 양단했다. 그 엄청난 광경에 냉여옥은 두려움
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대한 수직의 폭포가 허리를 잘리고 있었다. 육초량의 검이
쳐내고 있는 백색의 검강에 가로막힌 그것이 사납게 몸부림칠
뿐, 더 이상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저, 저것...』
냉여옥은 자신이 지금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기의 검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두려움과 놀람으로 부릅떠진 눈 속에 무심히 걸어오고
있는 육초량의 눈부신 나신이 가득 차 왔다.
* * * *
육초량이 냉여옥과 함께 개봉부에 도착해 있을 무렵, 옥청향은
북행하고 있는 그와는 반대로 호북성을 향해 남하해 가고 있었
다.
청수산의 바위틈 속에서 꼬박 하루를 숨어 기다렸으나 육초량
은 오지 않았다. 그를 추적해 갔던 괴한의 무리들만이 성난 이리
떼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몰려가고 또 몰려오곤 할 뿐이었다.
음습한 바위틈 속에 숨죽이고 숨어서 청향은 육초량에게 별 일
이 없기를 수백, 수천 번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곧
오겠다던 육초량은 그 날이 다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밤새 두려
움과 근심으로 떨던 청향은 육초량이 그들에게 해를 당하여 산
속 어디엔가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온산을 다 뒤지며 육초량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청향은 그가 결국 그
사납던 자들에게 견디지 못하고 사로잡혀 갔다고 생각했다. 그렇
지 않고서야 돌아오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하루를 더 산 속에서 떨며 기다리던 청향은 다음 날 산을 내려
왔다. 그녀는 육초량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생사를 확
인하고, 살아만 있다면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그를 꼭 찾아낼 생
각이었다.
그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설사 지옥의 염왕부라고 할지라도
찾아갈 단단한 각오로 강호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백아진(柏雅津)은 의양성(宜陽城) 남서쪽 삼십여 리 지점에 있
는 번잡한 나루였다. 그곳은 이수(離水)를 건너 호북으로 왕래하
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크고 작은 배들이 상인과 나그네, 무사
와 관리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나루에 내려놓고, 또 실으며
탕탕한 이수를 건너 끝없이 오갔다.
이수변의 우거진 녹양류(綠楊柳) 숲을 등뒤로 하고 서 있는 이
층의 홍황루(泓黃樓)는 숙박업을 겸하고 있는 백아진 최대의 주
루였다. 이수에서 충분히 잡아 올리는 석자 짜리 금홍리(金紅鯉)
로 만드는 찜과 탕, 전골 등의 잉어 요리와, 특산인 매화주로 그
곳의 인기는 이수 일대에서 가장 높았다.
오늘도 홍황루는 일 이층 할 것 없이 주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신경을 써서 듣자면 머리가 아파 올 정도로 소란스러운
홍황루의 이층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이 있었다.
워낙에 구석진 자리여서 그녀는 처음 얼마 동안은 주객들의 눈
에 띄지도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씩 입에서 입으로 전
해지는 탄성이 번져갔다.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알고 눈길을 던
진 사람들의 얼굴에 저마다 한결같은 놀라움이 어렸다. 처음 보
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어두운 곳에 있어도 스스로 밝게 빛날 그런 아름다움이었고,
불결한 곳에 있어도 스스로 정결하게 반짝일 그런 아름다움이었
다.
소란스럽던 주루 안이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는 숨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그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술 취한 자는 취한 대로, 정신이 맑은 자는 맑은 대
로 모두가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이 얼굴을 연꽃처럼 붉히고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옥청향 바로 그녀였다.
『데려와라.』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낮은 일성이 들려왔다. 주루의 한쪽
에서 원탁을 차지하고 둘러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여섯
명의 건장한 장한들 속에서였다.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주객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일제히 그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한 번 놀람의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위평(陳偉平)!』
누군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갈색 무복에 각
기 한 자루의 거대한 감산도(坎山刀)를 등에 메고 있는 다섯 호
한들이 눈을 부라렸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금색 단삼의 미
청년을 보고 엉겁결에 뱉어낸 그 말의 임자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작은 소란과는 아랑곳없이, 단삼의 미청년 진위평은 가
볍게 섭선을 흔들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옥청향을 바라
보고 있었다.
『나 공수백인(空手百刃) 진위평은 오늘에서야 나의 신부감을
찾았다. 가서 데려오라.』
공수백인 진위평. 그는 의양현에 자리잡고 있는 철장방(鐵掌
幇)의 소방주(小幇主)였다. 철장방은 하남 무림을 주름잡고 있는
거대한 방파였는데, 당금의 방주인 철장요신(鐵掌遼神) 진소진
(陳蘇珍)의 명성은 중원 무림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
큼 쟁쟁했다. 그는 지난 사십년 간 파옥신장(破玉神掌)이라는 독
보적인 절기로 무림을 종횡하면서 적수를 찾아보지 못했다는 절
정의 고수였다.
그가 하남성 의양현에 지금의 철장방을 세우고 늘그막에 얻은
자식이 공수백인 진위평이었다. 그 아비의 명성에 뒤질 새라, 진
위평은 호방한 성품과 세련된 풍류, 그리고 십이성 연마한 가전
의 절학으로 이미 하남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로 확고한 명성을
다져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일면 편협하고 고집스러우며 독선적인 면
이 또한 강했다. 그것은 철장요신 진소진의 지나친 편애 탓도 있
었고, 가문의 배경을 의식한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에나 그에게
한 발 양보함으로써 생긴 것이기도 했다.
진위평의 명이 떨어지자, 다섯 호한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적어도 이 의양현 일대 사방 일백 리 안에서는 그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었던 것이다.
주객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그 어찌해볼 수 없는 백면공자와
옥청향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옥청향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다섯 명의 호한들이 그녀의 앞에
떡 버티고 선 것이다.
『낭자, 이 몸들은 하남오웅(河南五雄)이라 하오. 철장방의 진
공자께서 청하셨으니 함께 가십시다.』
옥청향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 소녀를 상관하지 말고 즐기라고 하
십시오.』
오웅의 눈이 찌푸려졌다.
『안 될 말이요. 진 공자께서 청한 이상 거절할 수 없소.』
옥청향은 당황 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있
다는 것이 놀랍기만 한 그녀였다. 옥청향이 알 수 없다는 듯 고
개를 갸웃거리며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설마 이 나라의 황자(皇子)라도 되나요? 어째서 아무에
게나 명령할 수 있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는 거지요?』
오웅의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어렸다.
『낭자는 그가 공수백인 진위평, 진 공자라는 것을 모르시오?』
『진 공자인지 전 공자인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내가 어찌 그를 알며, 내가 그를 모르는데 그가 어찌 나에게 이
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이제는 제법 담이 생겼는지, 오웅을 바라보며 또랑또랑하게 말
하는 옥청향이었다. 그 당돌한 대답에 오웅은 어찌할 줄을 모르
고 발만 굴렀다.
『허어...』
『좋은 말을 좋게 받아들일 줄 모르는 철없는 낭자로군.』
오웅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멀리서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띈 채 섭선을 흔들며 바라보고 있던 진위평의 얼굴에도
한 줄기 노여움이 서렸다. 그러나 그들이야 어떻든, 옥청향은 갈
잎을 엮어 만든 갓 넓은 철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녀에게는 이미 정혼자가 있답니다. 무례하게 희롱하려 들지
말고 일찍 단념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수하 된 자의 도리일 것입
니다.』
조용히 일러준 청향이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흥, 모든 일이 그렇게 낭자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 적어
도 지금 이곳에서만은 진 공자의 뜻을 거슬릴 수 없소!』
호한 하나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옥청향의 옷소매를 거머
쥐었다. 옥청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서늘한 눈에 노기를
띄고 그 자를 노려보던 청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지요? 당신들은 한낱 치한들인가요? 사람들의 이목
이 두렵지도 않나요!』
옷소매를 뿌리쳤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자들이 아니었
다. 그들이 이제는 노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흉흉한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옥청향은 그제서야 더럭 겁이 났다. 그녀가
주루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
『도와주세요!』
간절하게 외쳤지만, 주루 안은 여전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
할 뿐 누구 하나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하남오웅의 사나운 눈길에 부딪친 자들이 저마다 황급히
고개를 떨구고 외면한 뿐이었다.
『비겁한 사람들.』
입술을 깨무는 옥청향의 눈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아, 육가가만 곁에 있었어도 이 무례한 자들로부터 이런 수모
는 받지 않았을 텐데...)
그녀가 문득 육초량을 다시 생각하며 우울해 할 때 옥청향의
옷소매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자가 호기를 부리며 크게 웃었
다.
『하하하... 감히 어느 놈이 가로막고 나서서 이 손을 놓게 할
수 있단 말이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것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냉랭한 비웃음
이 들려왔다.
『아니꼬운 놈!』
오웅의 번갯불 같은 시선이 소리난 곳으로 향했다.
한쪽 구석에서 야위고 깡마른 모습의 나그네인 듯한 중년인이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대가 감히 우리를 비웃었는가!』
옥청향의 옷소매를 붙들고 있는 자가 사납게 소리쳤다. 중년인
이 태연하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에게서 손을 떼던지, 네놈의 쓸모 없는 목숨을 떼어놓던
지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라.』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음성이었다. 중년인이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죽일 놈. 네놈에게 과연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
발끈하여 소리치던 자가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옥청향의 옷
소매를 잡았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부릅뜬 그의 눈이 자신의 이
마를 치켜다 보고 있었다. 어느새 날아들었던 것인지, 그의 미간
에 대나무 젓가락 한 개가 깊숙이 꽂힌 채 부르르 꼬리를 떨고
있었다.
모두의 눈에 불신과 경악이 어렸다. 그들 중 누구도 중년인이
손을 써서 대나무 젓가락을 날리는 것을 본 자가 없었다.
이마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 한 줄기 선혈이 콧수염에 매달렸
다 떨어지자 비로소 그 자가 중심을 잃고 모로 쓰러졌다.
이 뜻밖의 사태에 주루 안은 더욱 칙칙하고 숨막히는 정적 속
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들 속에서 오직 옥청향만이 자신을 붙들
고 있던 자가 왜 쓰러졌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죽은 자와, 다
시 한 잔의 매화주를 마시고 있는 중년인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으으, 이런, 죽일 놈이...』
하남오웅 중 이제는 넷밖에 남지 않게 된 자들이 등뒤에 두르
고 있던 감산도를 일제히 빼들고 중년인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
다.
그들의 거대한 칼이 전후좌우, 사면 팔방을 에워싸고 번쩍이며
떨어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깡마른 중년의 사나이는 입
가에 가져간 술잔을 태연히 기울이고 있었다.
『저런!』
그것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몸이 곧 조각조각 흩어져 떨
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옥청향도 뾰족한 비명
을 지르며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탁-!
중년의 사나이가 빈 술잔을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
충격으로 젓가락 통에 꽂혀 있던 대나무 젓가락 중 몇 개가 튀어
올랐다.
탁, 탁, 탁, 탁,
중년인이 장난을 하듯 가볍고 경쾌한 손놀림으로 손가락을 퉁
겨 그것들을 차례로 쳐냈다. 허공에 튀어 올랐던 젓가락들 중 네
개가 순식간에 퍽, 하고 꺼져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끄으으...』
『크흐...』
억눌린 비명과 함께 흉흉하던 도기(刀氣)가 일시에 사라져 버
리고, 사웅이 저마다 미간 깊숙이 젓가락 한 개씩을 꽂은 채 부
르르 떨었다. 옥청향이 눈을 떴을 때 사웅은 뿌리뽑힌 고목이 무
너지듯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3>
『고인이 왕림해 있다는 것을 몰랐다니!』
한 소리 노하여 외친 진위평이 탁자를 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대는 누구인가! 감히 본 방의 영역 안에서 나의 수하들을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용서할 수 없다!』
섭선을 들어 사나이를 가리키며 분노로 몸을 떨던 진위평이 그
것을 탁, 소리가 나도록 접어 허리띠에 꽂고 나서 성큼성큼 다가
갔다.
(아아,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옥청향은 경이의 눈으로 그 깡마른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에
게 다가간 진위평이 옷소매를 걷어올리며 호통치고 있었다.
『무명소졸은 아닐 터. 이름을 대라!』
중년인 앞에 버티고 선 진위평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노여움
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자신과 철장방에
대한 도전이요 모욕이라고 여기는 그였다. 그러나 사나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탁!
술병을 내려놓은 그가 태연하게 술잔을 잡아갔다. 진위평은 유
난히 깡마르고 긴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듯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사내가 예의 음울한 음성을
던져왔다.
『어린 놈. 돌아가서 네 아비에게나 그런 응석을 떨도록 해라.』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으윽-!』
한 소리 신음을 내뱉은 진위평이 이를 갈고 한 걸음 물러섰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고스란히 실어 내력을 끌어 모아 쌍장에
집중시키자 우우웅, 하는 은은한 뇌성이 들려왔다. 그의 손이 검
은 철광(鐵光)을 띄고 두 배 가까이 부풀어올랐다. 파옥신장(破
玉神掌)의 극성지경(極成之境)이었다.
쩌르릉-
그가 가볍게 쌍장을 부딪치자 마치 강철로 주조한 철권이 부딪
친 듯 무거운 쇳소리가 났다. 진위평의 살기가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중년의 사나이는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느냐는
듯 여전히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끼야압-!』
맹렬히 부르짖은 진위평이 쌍장을 동시에 내뻗었다. 차갑고 단
단한 기운이 날카롭게 찔러들었다. 천 근의 무게가 한 점에 집중
된다면 철판을 뚫을 만한 힘을 갖게 된다. 진위평의 파옥장은 그
러한 힘의 집중을 극성으로 이루어 낸 절기였다. 내뻗은 장력의
중후함을 한 점에 집중시킴으로써 위력을 십 배, 백 배나 크게
했으므로, 비록 자신보다 내력이 강한 자와 부딪친다 하더라도
옥을 부수듯 간단히 그것을 뚫고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다.
벼락처럼 뻗어온 파옥장의 첨예한 경력이 코앞에 밀려들자 비
로소 사나이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피웃-!
그의 왼쪽 손목이 가볍게 흔들렸다. 짧고 높은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진위평이 눈을 부릅떴다. 사내의 소매 속에서 한줄기 창
백한 백광이 쏘아져 나온 것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아니, 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하게 촌음의 순간에 반짝인 백색 빛
줄기였다.
진위평은 번개처럼 머릿속을 때리고 스쳐 가는 한 생각에 부르
르 몸을 떨었다.
(헉, 설마 그가...?)
그러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목젖 깊숙이 파고든
뜨거운 충격이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탈색시켜 버린 것이다.
『끄으... 마비...도...』
목청껏 외쳤지만 그것은 목에서 울려 나오는 끄르륵거리는 괴
이한 소리에 묻혀 버려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림이 되었다. 하남
무림의 기린아라는 진위평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의미 없이 두 손을 몇 번 허우적대는 것일 뿐이었다.
경악과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해 버린 그의 인후(咽喉) 깊숙
이 손가락 만한 얇은 비도(飛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그 한
자루의 비도는 한때 중원 무림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아 넣었던
마비(魔匕)였다.
사람들은 그를 마비도(魔飛刀)라고 불렀다. 독고월(獨孤月)은
그의 비도술(飛刀術) 한가지로 대강 남북 무림을 종횡하며 무패,
무적의 신화를 남기고 사라졌던 인물이었다. 몇 년에 불과한 짧
은 세월 동안이었지만 그가 강호인들에게 가져다 준 백옥비(白玉
匕)에 대한 공포는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잊혀
지지 않고 있었다. 우유빛으로 빛나는 반투명한 백옥의 비도 한
자루를 모두는 머리 속에 두려움으로 새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마비도 독고월이 왜 갑자기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었는지 의아해 했다. 비도술 한 가지로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다툴만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지워진 듯 사라져 어디에서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의양성(宜陽城)
남서쪽 백아진(柏雅津)이라는 이 외진 곳에서 다시 냉혹무정한
그의 백옥비가 나타났다.
그를 기억해 낸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못했고,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한바탕의 처참하고
깨끗한 살육에 놀라 움직이지 못했다. 그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마지막 술잔을 천천히 비우고 난 독고월이 몸을 일으켰다. 사람
들은 그의 야윈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미 숨이 끊어져 보잘것없는 주검으로 누워 있는 진위평 곁에
다가간 독고월이 그의 인후 깊숙이 박혀 있는 백옥비를 뽑았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채 싸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것을
다시 품에 갈무리한 그가 옥청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등줄기를
훑어 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독고월의 시
선이 죽은 자의 그것처럼 차갑고 무정하기만 했다.
느릿느릿 청향에게 다가간 독고월이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억양 없이 말했다.
『함께 갑시다.』
화들짝 놀란 청향이 주춤 물러섰다.
『왜, 왜죠?』
『필요하니까. 서로에게.』
『......』
『강호는 험한 곳이요. 내게 다른 흑심은 없소. 낭자의 목적지
까지 나는 낭자를 보호해 주겠소. 그 대신 낭자는 나에게 한 사
람을 불러다 주면 되는 것이요.』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안 청향이 비로소 두려움을 떨쳐
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말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그녀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에게 누구를 불러다 달라는 거죠?』
『그건 알 것 없소. 낭자가 있으면 그는 언제든 스스로 나타날
테니까.』
독고월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주루의 창 밖 이수변으로 향했
다. 냉혹무정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 깊은 고독과 우
울이 노을처럼 깔려들었다. 옥청향은 문득 이 사람도 마음에 깊
은 아픔을 지닌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러자 무섭기만 하던 그에
대하여 한 줄기 연민의 마음이 우러났다. 무심히 이층의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바라보던 옥청향이 호, 하고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들이 주루를 벗어나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왁자지껄 시끄러워지는 주루였다. 여섯 구의 싸늘
한 주검을 처리하느라 바쁜 종업원들과, 조금 전에 본 그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앞다투어 떠들고 술을 주문하는 주객들의 아우성
이 귀를 아프게 했다. 그런 소란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나이가 있었다. 색화랑(色花郞) 적음상(赤陰相)이었다.
독고월과 옥청향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는 음침한 그의 얼굴
에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소리 없이 떠올라 번쩍였다.
『지독한 놈. 용케도 냄새를 맡았구나.』
그가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중얼거림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도대체 말이 없는 사나이였다. 묵묵히 앞서 가는 독고월의 뒤
를 따르며 청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져 가기만 했다. 어디
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하루 종일 느릿느릿 걷기만 할 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독고월은 항상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소로(小路)만을 택해 걸
었다. 그것이 꼭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때로는 일부러 번잡한 주루에 찾아들어 한나절을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 때마다 청향은 뭇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시선을 받으며 불안해져야 했다.
벌써 그와 동행한 지 닷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 멋모르
고 청향을 희롱하려 들던 자들은 벌써 십여 명이 넘게 독고월의
백옥비에 목숨을 잃었다. 죽음을 부르고 다니는 여인. 청향은 어
느새 하남과 호북의 경계 부근에서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
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마비도(魔飛刀)가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의 탈속한 아름다움에 찬탄과 경이의 시선을 던지
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치 전갈이나 뱀을 보듯이 질겁하여 외면
하고 피하기에 바빴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옥청향은 점점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독고월이라는 그 비정한 사나이의 마비
(魔匕)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파고들 것만 같은 공포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했다. 치한들
의 위험으로부터는 완벽한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이제는 독고월
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훨
씬 더 무섭고 싫었다.
몇 날을 망설이던 그녀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에게 말했을
때, 독고월의 차가운 눈이 살기마저 띄고 번쩍였다. 갑작스러운
그 변화 앞에서 옥청향은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안될 말. 나는 아직 낭자를 놓아보낼 수 없소. 그 자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요.』
독고월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생
각한 옥청향이 목청을 높였다. 이제는 죽고 사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 자의 손에서 놓여나지 못한다는 게 더 무섭고 징그럽
게 여겨졌다.
『도대체 그 자란 누구를 말하는 거죠? 누군지도 모르면서 내가
어찌 그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낭자가 그 자를 불러오기 위해 수고할 것까지는 없소. 조만간
그 자는 스스로 찾아올 테니까. 그럼 낭자도 자유가 되는 거요.
며칠만 더 참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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