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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2-22
독고월이 탄식하고 나서 달래듯 말했다. 청향은 내친걸음이라
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이 사내의 확실한 대답을 들어 두지 않
는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듯 싶었다.
『그럼 그 자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를 붙잡아
두겠다는 건가요?』
『유감스럽지만 그렇소.』
독고월의 망설임 없는 대답을 들은 청향은 기가 막혀 말도 나
오지 않았다. 그런 청향을 안심시키려는 듯 독고월이 다시 차분
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실망할 건 없소. 이 일대에 낭자의 소문이 이미
퍼질 만큼 퍼졌으니 머지않아 그 자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요.』
『자신할 수 있나요?』
『물론, 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면 그는 꼭 올
것이요.』
옥청향은 비로소 자신이 미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도대체 그가 누구죠?』
뾰족하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러
나 독고월은 여전히 남의 말하듯 덤덤하게 대답해 왔다.
『적음상.』
『색화랑 적음상?』
옥청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강호에 나온 이래,
어디를 가든 귀가 따갑게 들려온 것이 색화랑이라는 자에 대한
악명이었다. 어느덧 그녀의 머리 속에는 그 자가 괴이하고 흉측
하고 징그럽게 생긴 괴물의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희대의 색마를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로 자신이 사용되고 있
다는 것이 어이가 없다 못해 가증스러웠다. 분노와 수치감이 그
녀를 바들바들 떨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이용물이 되지 않겠어요!』
입술을 물고 한을 실은 눈길과 함께 뾰족하게 외쳐 준 청향이
서슴없이 돌아섰다.
(정말 순순히 보내 주는 걸까?)
청향은 의아해 하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쫓아올 줄 알았
던 독고월은 그저 서 있을 뿐 아무 다른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
었다. 오솔길을 꺾어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청향은 있
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든 저 뱀처럼 차가운
자의 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숨이 턱에 차
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는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
는 바위그늘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땀이 비 오듯 했고, 다리는
천 근이나 되는 듯 무거웠다.
『헉헉... 다행이야. 잘 되었어...』
그 다리를 주무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는 정말 쫓아올 생
각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혼자서 두려워하고 망설
였다는 후회도 들었다. 이제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믿자 마음
에 여유도 생겼다.
『쳇, 별거 아니었잖아? 괜히 겁먹고 있었어. 바보 같으니라구.
..』
피식 웃는데 머리 위에서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를 업고 달린 것도 아닌데 겨우 이만큼 와놓곤 무얼 그렇게
힘들어하지?』
『악!』
뱀에게라도 물린 듯, 청향이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
어났다. 그녀가 등을 기대고 있던 바위 위에 독고월이 걸터앉아
한가롭게 다리를 흔들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진한 아가씨로군. 그렇게 해서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
『이제 알겠지? 내가 그대를 보내줄 때까지 그대는 결코 내 손
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적음상 그자만 잡으면 돼. 그
뒤에는 낭자가 가기 싫다고 해도 보내주겠어.』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
다. 청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납게 독고월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 * * *
- 나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딸이 있었지. 살벌한 강호의 삶에
염증을 느낀 나는 아내의 사랑과 딸아이의 재롱에 흠뻑 빠져 서
슴없이 초부(樵夫)의 삶을 택했다. 그 동안 쌓아 올렸던 명성과
신화를 내던지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어. 물론 쉬운 일은 아
니었지.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마음은 날아갈 듯 홀가분
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인적이 닿지 않는 깊
은 산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나만의 천국, 나만의 보금자리를 꾸
몄던 것이 팔 년 전이야. 화전을 일구고 사냥을 하면서 우리는
달콤한 행복에 흠뻑 취해 살았다. 한데 그 행복이 한 순간에 깨
져 버리고 말았다. 적음상, 바로 그 놈 때문에... -
독고월이 흉흉한 살기를 쏘아내며 이를 갈았다. 그 앞에서 청
향은 오싹 끼치는 소름을 참지 못했다. 유등 불빛이 가물거리는
조용한 객사 안이었다.
한동안 이를 갈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독고월이 거칠게 술병
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번에 비어버린 술병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어느 정도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힌 듯했다. 그가 끊
어졌던 말을 다시 계속했다.
- 생활용품을 구하기 위해 하산했던 사이에 놈은 내 딸을 죽
이고 처를 겁탈했지. 오년 전의 일이다. 처는 그런 사실을 적은
서찰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아이의 과자와 아내
에게 줄 꽃신을 사들고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잔인한 파멸의
잔해였을 뿐, 이제 더 이상 행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
었다. -
독고월이 격앙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듯 한동안 주
먹을 떨며 이를 갈더니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그의 음
성이 마른 나무처럼 버석거리며 갈라져 나왔다.
- 내 가정의 행복을 한 순간에 깨뜨려 버리고, 내 처와 딸을
죽게 한 그놈... 나는 복수의 일념으로 깊이 묻어 두었던 백옥비
(白玉匕)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난 오 년 동안 오직 놈을
잡기 위하여 중원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지. 나의 그
런 한(恨)과 지성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얼마 전 드디어 강소
성에서 놈의 종적을 발견했다. 그것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듯, 독고월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
선으로 옥청향을 건너다보았다.
『낭자를 보게 된 것은 죽은 처와 딸의 원혼이 나를 불쌍하게
여겨서 도와준 것일 게야. 그 놈은 그대를 노리고 반드시 나타난
다.』
『......』
『흐흐... 그 때가 악마 같은 그 놈의 최후가 되겠지.』
묵묵히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청향의 가슴속에 독고월에 대한
연민이 우러났다. 그와 같이 비참한 일을 당했다면 누구라도 이
사내처럼 비정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원
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망설이던 청향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을 보장해 줄 수 있나요?』
『물론,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독고월이 빠르게 말했다. 그의 눈에 한 줄기 감사하는 빛이 떠
올랐다.
<4>
오월에 접어들자 한 밤중까지도 낮의 열기가 남아 떠돌았다.
개봉부를 떠나 하남과 하북의 경계지점인 안양성(安陽城) 밖에서
육초량과 냉여옥은 피곤한 걸음을 멈추었다.
초라한 대로 그럭저럭 하루 밤을 보내기에는 별 불편이 없이
정갈한 여숙(旅宿)이었다. 마침 방이 하나밖에 없는 탓에 냉여옥
은 육초량과 함께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까닭 모를 설레임과 두근거림으로 내내 육초량을 훔쳐
보며 몸을 사렸다. 그러나 종업원이 날라 온 저녁을 먹자 그 무
정한 사나이는 침대를 차지하고 나서 그대로 코를 골아 버리는
것이었다. 냉여옥은 기가 막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밤이 깊었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멀리 안양성의 높은 성
벽을 타고 넘어갔다. 냉여옥이 엎드려 있던 탁자에서 살며시 몸
을 일으켰다. 잠시 육초량을 살펴보던 그녀가 품에서 자기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그 속에 살짝 손가락을 담갔다 꺼낸 그녀의
손톱 끝에 하얀 가루가 묻어 나왔다. 냉여옥이 조심스럽게 그것
을 퉁겨 냈다. 백색 가루는 들이쉬는 숨을 따라 흔적도 없이 육
초량의 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냉여옥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유등의 심지를 돋구고 탁자 앞에 앉아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한 통의 서찰이었다. 다시 한번 문안을 확인한 그녀가
그것을 접어 품속에 갈무리하고 일어섰다. 깊이 잠들어 있는 육
초량을 몇 번 흔들어 본 냉여옥이 창문을 열고 가볍게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안양성 북쪽 성벽 아래에 도착한 그녀가 달리던 몸을 멈추자
어둠 속에서 죽립의 사나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 냉여옥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었다.
『약은 틀림없이 전해 주었겠지?』
『지시하신 대로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그가 품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두 손으로 받
들어 올렸다.
『원주님께 올리는 그 자의 서찰입니다.』
『흥!』
쌀쌀한 냉소와 함께 그것을 받아 펼쳐본 냉여옥이 다시 한 번
차가운 조소를 날렸다.
『병신 같은 놈. 제까짓 놈이 감히 나에게 사랑을 운운할 수 있
나?』
역겨운 얼굴로 손바닥을 비벼 서찰을 태워 버리는 냉여옥이었
다. 손안에서 재가 되어 버린 서찰을 털어 낸 그녀가 자신의 서
찰을 다시 수하에게 건네주었다.
『가서 그에게 전해라.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난다.』
공손히 서찰을 받아 들고 깊이 머리를 숙인 자가 미끄러지듯
뒤로 날아갔다. 그가 사라진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냉
여옥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호호, 강사옥아, 강사옥. 너의 최후를 몸소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 원통하구나.』
* * * *
북경까지는 이제 보름 거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냉여옥이 유난히 게으름을 피웠다. 육초량은 마음이 자꾸만 급해
졌다. 이렇게 꾸물거려서는 언제 그녀를 북경에 데려다 주고 옥
청향을 찾아 나설 수 있을지 난감해졌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
는지 모르는지, 냉여옥은 여전히 늘쩡거리기만 했다. 안양성에서
하남의 경계를 벗어나 하북의 경내로 들어서는 데만 닷새를 버리
고 있었던 것이다.
『육가가, 오늘은 대아산의 계곡을 구경하러 가요. 가는길에 청
허사(靑虛寺)에도 들리고요.』
『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뵙고 싶다고 서두를 때는 언
제고, 이제는 조금도 급하지 않다는 거요?』
『아이 참. 그것은 거짓말이었다니까요. 당신이 소녀를 데려다
주지 않을까봐 그랬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요?』
곱게 눈을 흘기는 그녀에게 육초량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오월 중순의 어스름한 달그늘 아래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
었다. 하남성 개봉부 서쪽 십리지점에 있는 낡은 사당 앞이었다.
흐린 달빛을 빌어 서찰을 읽고 있던 사나이가 그것을 접어 소중
하게 품에 간직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옥풍규였다.
『잘 알겠소. 그녀의 계책대로 착오 없이 이행될 것이니 그대는
안심하고 돌아가 문안이나 잘 여쭈어 주시오.』
죽립의 사나이가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옥 공자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를 바라보던 옥풍규가 득의의 웃음
을 터뜨렸다.
『하하, 드디어 내가 날개를 활짝 펼칠 때가 되었다. 그동안 그
의 그늘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온 날들이었다.
짐승의 새끼도 크면 제 길을 찾아 어미를 떠나는 법. 강사옥 그
는 이제 늙었고, 세상은 젊은 힘을 필요로 한다.』
지긋이 어둠을 노려보는 그의 눈이 형형한 안광을 발했다. 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져 있는 그였다.
『나는 이제 나의 웅지를 편다. 냉여옥을 취함으로써 흑룡보와,
황실의 배경을 등에 업고 무림 천하를 도모하리라!』
밤 부엉이가 머리 위를 낮게 울며 날았다. 옥풍규의 눈이 어둠
속에서 더욱 새파랗게 빛났다.
* * * *
『태상, 태상께서 어인 일로 이 몸에게 술을 다...』
불빛 아래서 강사옥이 의아한 눈으로 옥풍규를 바라보고 있었
다.
『강숙부. 그동안 이 부족한 몸을 보필하고 선대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돌이켜 생
각해 보니 강숙부는 모든 일에 광명정대하였고, 이 외질은 참으
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소.』
『태상, 무슨 말씀을... 태상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역대 문주들
의 영령이 함께 하였기 때문, 나는 한 일이 없소이다.』
강사옥이 감격과 대견스러워하는 빛을 얼굴 가득 담고 옥풍규
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옥풍규가 강사옥의 거친 손을 덥석 잡았
다.
『생각해 보면 어린 나를 업고 천하를 주유하던 그 때의 고생이
오죽했겠소? 하지만 내가 부덕한 탓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외숙을
한 번 따듯하게 위로한 적도 없었구려.』
옥풍규의 절절이 진심이 담긴 말에 강사옥은 크게 감격했다.
『외질...』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는 그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자, 이 석 잔의 술을 받으시고 못난 외질을 꾸짖어 주시구
려.』
옥풍규가 강사옥의 잔에 손수 가득히 술을 따랐다. 떨리는 손
으로 잔을 받은 강사옥이 그것을 눈앞에 들어 올렸다.
『이 한 잔은 신검문의 부흥을 위해 마시겠소이다.』
그가 통쾌하게 잔을 비웠다.
『이 두 번째 잔은 강호 무림의 안녕을 위해 마시겠소이다.』
옥풍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석 잔 째의 술을 따라
주었다.
『이 세 번째 잔은 태상의 큰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마시
겠소이다.』
석 잔의 술을 마신 강사옥이 무릎을 꿇었다.
『사사로이는 외숙질지간이나, 크게는 신검문의 부흥을 함께 도
모하는 주종간이요. 이제 태상께서 이처럼 장성하여 후덕한 성품
을 지니게 될 걸 보니 실로 감개무량하외다. 지하에 계신 누님과
매형께서도 편히 눈을 감으셨을 것이요. 부디 신검문을 다시 일
으켜 작게는 가문의 치욕을 씻고, 크게는 강호에 길이 아름다움
이름을 남기는 대업을 이루시기 바라오이다.』
옥풍규가 허리를 굽혀 강사옥에게 마주 절하며 엄숙하게 말했
다.
『외숙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오. 가문을 일으키고 잃어버린 기
반을 되찾은 후에도 나를 도와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강사옥은 감격으로 목이 메었다. 평소에 옥풍규를 보며 그가
독선적이고 편협하여 자칫 대사를 그르칠까봐 늘 걱정하던 강사
옥이었다. 옥풍규가 큰그릇이 되지 못함을 한탄해 왔는데, 오늘
그는 훌륭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그동안 크게 뉘우쳐 대오각
성한 바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북 무림이 가문의 터전이고, 그곳의 동도들 모두가 가문의
식구나 다름없는데 내가 어찌 그들이 흑룡보의 포악에 떠는 것을
보고만 있겠소? 외숙께서는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오.』
강사옥의 등을 쓸어주며 옥풍규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날 밤, 개봉부를 빠져나와 북으로 향하여 급히 말을 모는 두
사람이 있었다. 철협 강사옥과 옥풍규였다.
『태상, 과연 하단부에 냉여옥 그 간교한 여아가 있는 것이 확
실하오?』
『그렇습니다. 하북에 있는 본 맹의 형제들에게도 이미 통지했
으니 우리가 도착하기만 하면 그들과 함께 곧 손을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곧장 하남과 하북의 경계를 돌파하여 달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를 사로잡아 냉군상(冷群相) 그 자의 간
담을 서늘하게 해야 하오.』
옥풍규의 말에 강사옥이 눈빛을 빛냈다. 지난번에는 육초량과
의 일전에서 승리를 취하지 못해 냉여옥을 눈앞에 두고도 잡지
못한 그였다. 강사옥은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겨 옥풍규에게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한 사람의 호위만을 동행하고 있다 하니,
강숙부가 나선 이상 이미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소.』
옥풍규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강사옥은 그것이 다만 냉여
옥을 사로잡을 희망에 부풀어 있어서 그러려니 여겼다.
* * * *
(저 자는...)
강사옥이 번쩍이는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북평원에 들어서서 더욱 박차를 가하여 말을 달리고 있는 중이
었다.
이제 곧 새벽이 오고, 한단부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이번만은 육초량을 그 아이를 해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냉여
옥을 사로잡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는 강사옥이었다.
떠나기 전, 옥풍규는 이번 행차를 아무도 모른다고 장담했다.
그만큼 은밀하고 철저하게 이번 일이 처리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멀리 어둠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라도 한 듯 흐린 달빛을 등지고 서성이고 있는 몇 사람의 그림자
들이 보였다. 그것이 강사옥의 신경을 거슬렸다.
(마중 나온 하북의 형제들인가?)
의아해하는 동안 쏜살같이 질주해 간 말들이 이미 그 그자들의
면전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십여장 밖에서 그들의 면면을 알아본
강사옥이 억!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강대협, 먼길 오시느라고 수고했소이다. 아미타불!』
『허어-!』
강사옥이 크게 놀라 말고삐를 급히 낚아챘다. 달리던 말이 앞
발을 번쩍 들고 힘차게 울부짖으며 멈추어 섰다.
『그대는 미가불?』
『아미타불... 안녕하셨소이까, 강대협.』
미가불이 합장하고 웃어 보였다. 강사옥은 기가 막혔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그는 뒤따라 온 옥풍규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도 당혹해 함
이 어려 있었다. 옥풍규가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고 성큼 내려섰
다.
『강숙부, 기밀이 새나간 듯하오. 하나, 그렇다고 망설일 수만
은 없지 않소? 저들은 몇 안되니 힘을 합쳐 치고 빠져나갑시다.』
강사옥은 천천히 말에서 내려오며 염두를 굴렸다.
(고수는 미가불 하나 뿐이다. 나머지 십여 명의 장한들이야 풍
규가 잠시 동안 혼자서 맡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전
력을 다하여 미가불을 꺾고 풍규와 합세한다면...)
강사옥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미가불 일행도 연락
을 받고 다급하게 달려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고작 십여 명의 수하들만을 대동하고 급히 앞을 가로막은 것이
다.
(저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모양이다.)
미적거리는 미가불 일행을 노려보며 강사옥은 그렇게 생각했
다. 이곳에서 미가불에게 붙잡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냉여옥은
멀리 달아날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는 속셈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강사옥이 성큼성큼 걸어 미가불의 면전으로 나섰다.
『오늘은 반드시 결판을 내고 맙시다.』
『허허, 노납도 바라는 바이오. 자 그럼 오시오!』
승포 자락을 훌훌 걷어 부친 미가불이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강사옥은 옥풍규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도 십인의 장한들을 맞아
눈을 부릅뜨고 검을 겨누고 있는 중이었다.
(저 아이는 비록 완전치 못하나 유마검급을 얻어 연성한 몸.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강사옥은 마음을 편하게 갖고 오직 미가불에게
만 정신을 집중했다. 눈앞의 깡마른 화상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고수였다.
『이야압-!』
하북평원이 쩌르릉 울리는 기합성을 터뜨린 강사옥이 성난 사
자처럼 도약해 들었다. 그의 장심에서 우르릉, 하는 뇌성과 함께
강맹한 일장이 섬전처럼 뻗어나갔다. 파운삼십육권 중 위력이 가
장 큰 벽타척수(擘拖拓手)였다.
그것을 본 미가불이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일장을
마주 밀어냈다. 그의 장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후끈한 열기가 먼
저 덮쳐왔다. 화염장이었다. 강사옥이 이를 악물고 일장에 더욱
맹렬한 진력을 쏟아 부었다. 그들의 장력이 서로 격돌하자 꽝!
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사나워진 기파가 주변의 풀잎들을 말
아 올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신형을 비
틀거리며 물러서고 있는 미가불이 보였다.
『탓-!』
강사옥이 어깨를 한 번 움찔하고 다시 벼락처럼 덮쳐 들었다.
그의 열 손가락이 허공을 격하고 찍듯 퉁겨졌다. 찌직, 하는 날
카로운 소리가 그 끝에서 들려왔다. 창백한 지력(指力)이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일제히 미가불을 찍어 가는 기세가 날카롭기 짝
이 없었다.
당황한 미가불이 연이어 다섯 걸음을 물러서며 이리저리 손을
뻗어 밀어내고 할퀴듯 잘라갔다. 그의 손이 어두운 허공을 저을
때마다 푸른 기운이 띠처럼 일렁이며 강사옥의 지력들을 끊어냈
다. 보기힘든 철선지(鐵線指)에 명옥장(明玉掌)의 절기들이었다.
* * * *
『헉, 헉, 이럴 수가... 왜 이런 일이...』
강사옥이 힘겹게 헐떡이며 불신의 눈을 치뜨고 미가불을 바라
보았다. 그와의 초수가 거듭될수록 급작스럽게 빠져나가는 진력
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자루에 구멍이 뚫려 그리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불과 십여 초를 전력을 다해 쳤을 뿐인데 진력이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설마
미가불에게 섭혼장(攝魂掌)이나 미기차력(微氣借力) 같은 사술
(邪術)이 있어서 자신의 내력을 몽땅 빨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하, 강대협. 그동안 많이 쇠약해졌구려.』
미가불의 빈정대는 말을 들으며 강사옥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 산공독!)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색무미(無色無味)한 산공독(散功毒)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누가 언제 그것을 사용했는지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그새 천천
히 다가온 미가불이 손에 내력을 집중시키고 무겁게 들어올렸다.
『극락왕생하시도록 불사를 올려 드리리다.』
낮게 속삭인 그가 강사옥의 헐떡이는 가슴을 눌렀다. 청색의
몽롱한 수강(手 )이 스며들 듯 강사옥의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콰르릉-!
뒤이어 은은한 벽력음이 귓전을 울렸다. 강사옥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 모아 그것에 대항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흐윽-!』
거센 핏줄기를 토해 내며 그의 신형이 연처럼 떠올랐다. 십여
보나 날려간 그가 옥풍규의 발아래 처박히듯 떨어졌다.
『태, 태상.... 나는 이미 틀렸소.... 어서 여기를 벗어나시오.
이것은 저 자들이 파놓은 흉악한 함정...』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강사옥이 눈을 부릅떴다. 가슴에 박혀드
는 싸늘한 검광을 본 것이다. 차가운 검날이 그의 단단한 가슴을
관통하여 못이 박히듯 마른 땅 속 깊이 박혀 버렸다.
『아, 이건... 풍규... 네가 왜...?』
자신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사람이 옥풍규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흐흐흐, 강숙부,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편히 쉬시구려.
남은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말이요.』
옥풍규가 머리 위에 버티고 서서 강사옥을 내려다보며 잔인한
웃음을 흘렸다.
『이, 이...!』
강사옥의 얼굴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산공독은 지난 밤 내가 따라준 술을 받았던 그 술잔 속에 발
라져 있었소.』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유나 알고 죽어 원
귀가 되지 말라는 듯, 옥풍규가 느물대며 말했다. 강사옥의 눈에
서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려 볼을 적셨다.
『왜, 왜, 너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옥풍규가 그런 강사옥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웃었다.
『흑룡보는 이미 본가의 기반을 다 넘겨받아 더욱 강해졌소. 오
합지졸들을 끌어 모아 급히 만든 무림맹의 힘으로는 이제 그들을
어찌해볼 수가 없는 터요. 나는 신검문의 회복이라는 꿈을 버리
는 대신 차라리 그들과 손을 잡고 진정한 무림의 맹주 자리를 넘
볼 생각이요.』
『아아-』
강사옥의 입에서 절망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자신의 피로
젖은 풀잎을 움켜쥐며 마지막 기력을 한 줌 숨에 실어 헐떡였다.
『오십 평생의 삶이... 이렇게 덧없이 끝나다니... 아, 강사옥
아... 너는 너무 어리석었다...』
눈을 부릅뜬 채, 철협으로 불리며 중원 대륙을 질타하던 초인
이 드디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유성 하나가 멀리서 밝아오는
새벽 하늘을 가르고 찬란한 꼬리를 끌며 대평원 너머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제 4 장 색화랑(色花郞) 적음상(赤陰相)
<1>
오월 보름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 위에 어지럽게 나
뭇가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딱딱한 나무 침상 위에 등을 돌리
고 누워 청향은 잠을 청하고 있었고, 독고월은 창가에 앉아 술잔
을 기울이고 있었다.
(놈은 오늘밤에 반드시 온다.)
그가 청향을 힐끗 바라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만히 일어나
창문을 열자 오월 보름의 달빛이 가득히 밀려들었다. 그 건너 창
밖의 숲이 음침한 어둠으로 괴괴하게 잠들어 있었다. 놈은 보름
밤이면 반드시 여자를 겁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저 우
주에 가득 찬 달빛이 놈의 음기를 참을 수 없도록 들끓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독고월은 가만히 품속에 있는 백옥비를 어루만졌다. 그의 분신
처럼, 그의 영혼처럼 언제나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열 두 자루의
얇은 백옥비가 싸늘한 감촉으로 그의 설레는 가슴을 가라앉혀 주
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너에게 곧 놈의 피맛을 볼 수 있도록 해주
마.』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독고월이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 속삭
였다. 그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숲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
았다. 어쩌면 적음상 그 악마 같은 놈이 지금 저 숲 속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놈, 무얼 망설이는 거냐, 곧 달이 진다. 그 전에 어서 오너
라!』
증오와 살기로 충혈된 눈을 한동안 숲에 던지던 독고월이 창문
을 닫고 돌아섰다. 그가 탁자를 지키고 앉아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랐을 때였다.
팍!
창문을 뚫어 오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독고월
의 술잔이 뒤로 날았다. 땅,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무엇에 맞았
는지 술잔이 두 조각 나 떨어졌다. 불빛에 술잔과 함께 떨어진
은침 한 개가 반짝였다.
『왔느냐!』
외친 순간, 독고월이 그대로 창문을 뚫고 밖으로 쏘아져 나갔
다. 그의 눈에 쏜살처럼 허공을 날아 사라져가고 있는 검은 야행
복(夜行服) 자락이 언뜻 들어왔다. 독고월이 힘차게 땅을 차고
그것을 쫓아 몸을 날렸다. 그의 야윈 몸이 쏘아진 살처럼 순식간
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독고월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과 동시에 창문 밑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가 비쾌하게 몸을 날려 창
문을 넘어 들어갔다.
『악, 누구-!』
청향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간단히 그녀를 제압해 허리에
낀 야행인이 이번에는 방문을 통해 객실을 빠져나가더니 바람처
럼 내달아 독고월이 사라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갔다. 이
모든 상황은 숨 한 번 들이키는 시간에 벌어진 벼락같은 일이었
다.
『적-음-상-』
멀리서 아련하게 독고월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적음상의 경신 공부는 놀랍기 짝이 없었다. 한 번 몸을 날릴
때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사물들이 놀라운 속도로 뒤로
던져졌다. 청향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정신이 다 없을 지
경이었다.
벌써 세 개째의 산봉우리를 넘고, 세 개의 골짜기를 지났지만
그는 호흡 하나 흩어져 있지 않았다. 밤새 쉬지 않고 달릴 듯하
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옥청향은 살며시 눈을 떠 주위를 살펴보았다. 달빛이 흐려 있
었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 왔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느 곳이 동
쪽이고 서쪽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걸
어 음침한 동굴 안으로 들어간 적음상이 청향을 내려놓았다. 그
녀는 흐린 달빛을 등뒤에 두고 동굴 입구를 막아서 있는 그의 모
습이 어떤 건지 알아 볼 수 없었다.
『당신은... 적음상... 인가요? 그는... 그는 지금 어디 있죠?』
두려움에 질린 청향이 두서를 잡을 수 없이 어지럽게 말했다.
독고월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에게 더 큰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정신 없이 동굴 구석으로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적음상
이 차갑게 웃었다.
『이곳은 네가 있던 곳으로부터 삼사십 리는 족히 떨어진 산 속
이다. 행여 독고월이 구해주러 나타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
라.』
『아!』
청향은 절망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를 가슴 졸이며 빌고 또 빌었건만, 나쁜 일은 막아도 기어이 찾
아오고, 좋은 일은 붙잡아도 오래 머물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적음상을 보던 그녀가 손을 들어 막으며 비명을 지르
듯 말했다.
『잠깐만요,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시간이 없다. 빨리 말해라.』
적음상이 걸음을 멈추고 힐끗 동굴 밖의 흐린 달빛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옥청향은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독고월이 찾아와 구해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독고월은 무섭기가 저승사자 같은 사람인데... 당신은 어떻게
그를 그처럼 쉽게 따돌릴 수 있었죠?』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는 듯 흐흐,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
린 적음상이 어깨를 우쭐대며 대답했다.
『저승사자는 무슨.... 멍청한 놈이지. 나의 간단한 속임수조차
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
『흐흐..... 쉬운 일이야. 창 밖에서 놈에게 비침(飛針)을 날린
직후, 겉옷을 벗어 돌멩이를 감싼 다음에 그것을 힘껏 담 밖으로
던졌을 뿐이다. 미련한 놈이 그것을 나인 줄 알고 죽자사자 쫓아
간 것이지. 흐흐.... 나는 그 틈에 이렇듯 손쉽게 너를 빼앗아올
수 있었다.』
『아...』
옥청향은 탄식하고 말았다. 그토록 간단한 조호이산지계(調虎
離山之計)의 계책에 독고월이 깜빡 속아넘어간 것이다. 적음상에
대한 적의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은 때문이었다.
『한 가지만 더!』
이제 되었다는 듯 다가오는 적음상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친 옥
청향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또 물었다.
『다, 당신은 독고월 그의 딸을 죽이고, 아내를... 했다고 하던
데 사실인가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죠?』
차마 자신의 입으로 겁탈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녀의 말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음상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흐흐.... 사실이다. 나 아니고 누가 또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아름다운 계집이었지. 그 깊은 산 속에 그런 계집이 있었을 줄이
야...』
그 때가 다시 생각난 듯 입맛을 다시는 적음상이었다. 그의 눈
에 진득한 욕념이 묻어났다.
『그 계집이 독고월의 마누라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한
마디로 재수가 없었을 뿐이지. 한 번 즐긴 일 때문에 그 귀신같
은 놈을 늘 꼬리에 달고 살아가야 하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어.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다 되었겠지?』
『아니, 하나만 더...』
『안 돼. 시간이 없다. 일을 끝낸 뒤에 백 가지, 천 가지의 궁
금증이라도 다 풀어주마. 그러기 전에 우선...』
성큼 다가온 적음상이 손을 뻗어 잡으려 했다. 엉덩이를 밀며
물러선 옥청향이 품속에서 재빨리 날 선 비수 한 자루를 꺼내들
었다. 그것을 보며 적음상이 흐흐, 하고 웃었다. 위급한 일이 닥
쳤을 때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지닌 비수였지만, 적음상
같은 자에게는 오히려 재미난 장난감만도 못한 모양이었다.
청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공에 대한 열망을 느꼈다. 공지
노스님이 몇 가지 가르쳐 주랴? 하고 은근히 물어왔을 때, 모르
는 척하고 배워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후회는 언
제나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그 때 그녀는 검으로 일어섰다가 검으로 망해 버린 신검문을
생각했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 많던 무사들
의 죽음을 떠올리며 강하게 도리질했었다. 무공이라는 것이 상대
를 해치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된다고 생각한 것
이다. 평범한 아낙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들딸 낳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 일찍 알아 버렸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애무하듯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바라보
고 있는 적음상의 번쩍이는 눈을 대하자 청향은 그 자를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고
작 떨리는 손으로 비수를 들어 보일 뿐, 그를 물러서게 할 아무
런 수단도 없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넘어선 절망을 가
져다 주었다.
『다가오지 마! 그 때는, 그 때는...』
청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수를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저 마귀 같은 자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보다 내 손으로 목숨을 끊
는 게 차라리 낫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눈앞의 악적 앞에서 고
작 보여줄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를 비참하게
했다.
하하, 웃은 적음상이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그와 동시에 청
향의 손에서 비수가 덧없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쩔그렁거리는 그것의 소리가 마지막 남아 있던 청향의 희망까지
떨어뜨려 버렸다.
그에게 마혈을 제압 당한 채,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두 눈을 꼭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죽고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현실이
그녀를 참담하게 했다.
『인생의 즐거움이 눈앞에 있는데 죽으려고? 그건 너무 잔인한
짓이지. 어쨌거나 산다는 건 좋은 일이야. 너도 곧 그걸 알게 될
걸?』
느긋하게 이죽거리며 다가온 적음상이 손을 뻗어 청향의 볼을
쓰다듬었다. 청향은 이마에 와 닿는 그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이렇게 맥없이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나는 네놈을 저주할 거야. 네놈은 내 껍데기를 가질 수 있을
지 몰라도 그게 허무하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걸? 나는 죽어서 귀
신이 되겠어. 네놈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게 하고 지옥의 유
황불 속에 던져 넣어 버릴 테야. 두고봐. 네놈은 오늘 일을 뼈저
리게 뉘우치고 후회하게 될 테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이를 갈며 저주하고 욕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적음상
이 불쑥 그녀의 품으로 손을 넣어 따뜻한 젖가슴을 가득 움켜쥐
었다.
『아!』
거친 그 손길에 비명을 터뜨렸던 옥청향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
리며 더욱 표독스럽게 적음상을 노려보았다. 적음상의 뜨겁게 달
구어진 눈이 그녀를 누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껍데기도 좋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것 뿐이야. 계집
이란 나에게 한 번 쓰고 버리면 그뿐인 존재지. 황녀(皇女)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무지렁이 촌민의 아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너처럼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미인도, 추괴한 추녀도 내게는 다
똑같은 껍데기일 뿐이다. 어때, 내 생각이. 여자를 두고 나처럼
평등하고 공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에 흠뻑 빠진 듯 눈마저 지긋이 감고 중
얼거리며 옥청향의 가슴을 주무르는 적음상이었다. 옥청향의 온
몸에 까칠한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힘을 다해 욕했
다.
『개자식, 비열한놈, 악마. 인간 쓰레기야 당신은. 당신 어머니
가 살아 있다면 부끄러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미 죽었다
면 땅 속에서도 얼굴을 들지 못할 걸? 당신이 이런 자라는 걸 당
신 집안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나? 치사하고 비겁한 인간.』
『무엇이?』
적음상이 번쩍 눈을 떴다. 온갖 욕을 해도 달콤한 음악을 듣는
듯 꿈쩍도 하지 않던 그였지만 비겁한 자라는 말만은 곱게 들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청향이 새파란 독기와 증
오를 담은 눈으로 발악하듯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비겁한 자식, 비겁자.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없는 치사한 놈!
뒤에서 남을 찌르는 짓이나 할 줄 알겠지. 너에게는 어린애하고
도 당당히 맞설 용기가 없을 거야!』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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