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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2-23
짝-!
사납게 눈을 부릅뜬 적음상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고약한 년!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구
나!』
옥청향은 차라리 그가 당장 자신을 찔러 죽이기를 바랐다. 그
녀가 더욱 악을 쓰며 욕해댔다.
『비겁한 놈. 사내도 아니야 너는!』
적음상이 흉흉한 살기를 띄고 손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잘 말했다. 그 말이 꼭 맞아. 그 놈은 비겁한 개자식이다.』
『억!』
크게 놀란 적음상이 청향을 밀고 와락 떨어지며 손목을 떨쳤
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그의 옆구리에서 한줄기 빛이 번쩍였다.
창! 하는 맑은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렸다. 절대쾌검(絶代快劍)이
라는 말이 어울리는 놀라운 일검이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킨 적음상이 땅을 박차고 몸을 던졌다. 동
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자의 손에서 다시 세 개의 비도가 창백
한 빛을 뿌리며 소리도 없이 쏘아졌다.
창-!
또 한 번 맑은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세 개의 비도를 쳐낸 것
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빨랐던지 한 번의 소리만 울린 듯했다.
『헛!』
독고월이 놀란 외침을 터뜨리며 뒤로 꺾이듯 몸을 뉘였다. 그
배 위를 타넘는 적음상의 흐릿한 그림자 속에서 다시 한 줄기 검
기가 뻗어 나왔다. 창! 또 한 번의 맑은 소리가 울렸고, 적음상
은 이내 흐린 달빛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독고월의 배를 타 넘으며 그에게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
다. 하지만 독고월의 손에서 소리도 없이 뻗어 나오는 비도가 더
위협적이고 급했다. 두어 자 남짓한 지척의 거리에서 쏘아져 오
는 비도를 거뜬히 쳐내는 그의 쾌검 절학은 번갯불을 열로 쪼갠
듯 눈부시기만 했다.
등이 동굴 바닥에 닿을 듯하던 독고월이 팔꿈치로 땅을 한 번
찍고 그 힘을 빌어 불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놀란 눈을 부
릅뜨고 있는 청향을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적음상이 사라져간
어둠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나갔다.
『적음상-!』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어느새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
고 있었다.
한동안 꿈을 꾼 듯 몽롱하기만 했다. 청향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믿을 수 없었다. 벽의 여기 저기에 박혀 반짝이
고 있는 백옥비들이 그녀에게 방금 전의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독고월이 결국 약속대로 자신의 안전을 지켜 준 셈이었다. 하
지만 마음 속에 가해졌던 그 무서운 공포와 충격으로 청향은 와
들와들 떨려오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큰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
는 망설이며 생각했다.
적음상을 잡든, 잡지 못하든 독고월은 자신의 비도들을 찾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따
라간다면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향은 고개를 저었다. 적음상이 싫은 만큼 이제는 독고월도
싫었다. 다시 그의 미끼가 되어서 강호를 떠도는 신세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흩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청향이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들 중 누구라도 다시 돌아오기 전에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2>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산을 내려왔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희
뿌연 안개에 싸여 있는 산을 돌아보자 지난밤의 악몽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빽빽한 잣나무 숲을 헤쳐 나온 청향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산기슭을 따라 제법 넓은 논이 물을 담고 있었는데, 두어 자는
족이 되게 자란 파릇한 벼이삭들이 가을의 풍년을 말해 주고 있
는 듯했다.
그 논 건너편으로 몇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
다. 키큰 사시나무들이 논길을 따라 줄지어 마을로 향해 있었고,
개 짖는 소리도 났다. 사람이 사는 마을을 보자 시장기가 찾아들
었다. 옥청향은 지친 걸음을 옮겨 조심스럽게 논둑을 타고 걸었
다. 발 밑의 풀섶에서 놀란 개구리들이 첨벙거리며 논으로 뛰어
들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정자나무 아래 모여 웅성거리는 촌민들이
보였다. 조금 더 다가가자 이제는 그들의 분노가 보였다. 청향은
무슨 일인가 하여 배고픔마저 잠시 잊고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발견한 사람들이 경계와 적의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
의 눈 속에 불타는 적의를 이해할 수 없어 머뭇거리는 데 촌장인
듯 싶은 백발의 노인이 다가왔다.
『낭자는 누구신가? 어디에서 오는 손인가?』
『저는...』
문득 무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망설이는 그녀를 보던 중년의 촌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썩, 꺼져 버려!』
옥청향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 노인
이 손을 들어 마을 사람들을 진정 시키고 말했다.
『밤사이 마을에 커다란 변고가 생겨서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
져 있다오. 낭자는 노여워하지 마시오.』
청향은 사람들 틈으로 거적에 싸인 물체를 보았다. 그것이 노
인이 말하는 마을의 변고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들이 이처럼 무례하게 구는 건
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터
져 나왔다.
『우리는 자급자족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적도 없
고, 남을 해친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나쁜 일을 당
해야 하나! 아춘은 다음달에 겨우 열여섯이 되는 귀여운 소녀다.
그 애가 대체 누구에게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냐!』
절절이 분노와 비통이 넘쳐나는 외침이었다. 청향은 정신이 멍
해지고 말았다.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꼭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
는 것이 아니라 울분을 터뜨릴 대상을 찾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
실을 깨달았다.
『들은 대로요. 한 밤중에 괴한이 홀연히 아춘의 집에 뛰어들어
놀라 잠에서 깬 그 아이를 붙잡아 갔소.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온
산을 샅샅이 뒤진 끝에 이 새벽에야 저 능선 너머 대랑곡(大狼
谷)에 버려져 있는 아이의 시체를 찾아냈다오. 음... 아이는 처
참하게 능욕 당한 채 버려져 짐승들이 반쯤 뜯어먹은 끔찍한 모
습이었소. 그래서 지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미칠 듯이 분노하고
있는 거요.』
노인의 말을 듣는 동안 옥청향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탈색되어
가더니 급기야 백지창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노인이 손가락
으로 가리키는 대랑곡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내려온 산 능선과는
반대쪽 능선 너머였다.
청향은 이 일이 색화랑 적음상이 저지른 것임을 알았다. 온몸
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술 취한 사람
처럼 비틀거리며 마을을 등졌다.
(어쩌면 내가 그 아이처럼 그렇게 처참한 주검이 되어 버려졌
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혼백이 놀라 날뛰었다. 개울가에 주저앉아서
청향은 두려움에 떨며 한없이 울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울던
청향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찬 개울물에 세수를 하였다. 정
신이 다시 맑아졌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청향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갈 데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혈혈단신 강호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 그녀를 다시 울적해지게 했다.
(육가가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문득 육초량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의 넉넉한 가슴과 팔에
안겨 모든 것을 잊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그를
찾아야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막막하게 했다.
(떠돌다 보면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청향이 천천히 골짜기를 따라 내
려갔다.
그 날 오후가 되어서 그녀는 겨우 주루가 있는 번화한 시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남루했고, 머리카락은 헝클
어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고왔던 볼은 흙칠을 하여 검게 변
해 있었다.
청향은 그렇게 해서 남들의 이목을 가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한 몰골이 되어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고 있었다. 그
녀는 마치 깊은 산 속 숯구이 움막에서 막 마을로 내려온 아낙
같았고, 혹은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떠도는 행려병자(行旅病者)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주루에 들어섰을 때, 그래서 점소이
가 꺼려하는 듯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던 것이다.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주문하자 곁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피했다. 하지만 점소이만은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완연
히 달라져서 사근사근해졌다. 청향이 그의 손에 한 냥의 은자를
건네준 것이다.
『음식값을 제하고 나머지는 가져도 좋아요.』
그 말 한 마디로 청향은 식사 후 점소이가 눈치를 보며 몰래
내온 좋은 차를 얻어 마실 수 있었고, 제법 깨끗하게 치워진 방
을 얻어 들어갈 수 있었다.
청향은 침대 위에 쓰러지기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너
무 놀라고 피곤한 몸이었다. 한 번 잠의 늪에 발을 들이자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듯 잠겨 들어갔다.
갈증이 났다. 몸에 신열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땀이 그녀
의 얼굴을 씻어내고 흘러내려 이불을 적셨다. 번갈아 찾아드는
오한과 열기로 떨며 그녀는 마른 입을 적셔 줄 한 모금의 물을
애타게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갈증이 점점 뜨거워져갔고, 의식은 그것과 비례하여 아득하게
가라앉아만 갔다. 문득 청향은 입술에 와 닿는 시원한 감촉을 느
꼈다. 의식 이전에 물을 목말라하는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꿀꺽 꿀꺽, 정신 없이 한 사발의 찬 물을 들이키고 나자 가슴
이 시원해졌다. 가라앉아 가던 의식이 조금 살아나 몸의 고통을
호소했다. 알음알음 앓던 그녀의 신음이 뚝, 그쳤다. 머리 위에
차가운 물수건이 얹혀졌던 것이다.
(누구...? 육가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설마 그가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하는 의문과 기쁨이 그녀의 눈을 뜨게 했다.
흐릿한 윤곽으로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조
금씩 초점에 잡혀들었다. 그리고 옥청향은 있는 힘껏 비명을 질
렀다.
『악-!』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소리였을 뿐, 그녀는 입술만 파르르 떨
고 있었다. 굳어버린 혀가 나무토막 같기만 했다. 너무나 큰 놀
라움이 그녀의 몸에서 말과 의지를 한꺼번에 빼앗아가 버린 것이
다.
* * * *
『나는 처음부터 색마는 아니었소.』
적음상의 고뇌에 찬 말을 들으며 청향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
다. 소리 없이 그녀의 침상을 찾아온 그는 어제 밤의 그 악마 같
던 자가 아니었다. 청향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자가 또 무
슨 못된 흉계를 꾸미느라고 이처럼 흉물을 떠는지 모른다고 생각
하자 더 두려워졌다.
적음상은 밤새 청향의 병간호를 해 주었다. 차가운 물을 먹여
주었고, 물수건을 열 번도 넘게 갈아주었으며 점소이를 채근해
땀에 젖은 이불을 바꾸게 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손수 주방에
내려가 알맞게 익은 잣죽을 가져와 먹여 주었다.
그의 부탁을 받은 의원이 달려와 진맥을 하고 간 후 점소이의
손에 약포를 들려보냈다. 적음상은 손수 그것을 다려 정성껏 청
향에게 떠 먹였다. 그렇게 사흘을 지극하게 간호하면서도 적음상
은 자신이 그녀에게 한 일에 대하여, 그 날 밤에 독고월에게 쫓
기고, 그 와중에도 산중의 소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향은 체념하고 있었다. 다시 이 색마의 손에 떨어졌으니 살
아날 길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마른 돼지를 잘 먹이고 간수하여
살찌운 다음에 잡아먹듯, 이 마귀 같은 놈도 자신에게 그렇게 하
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불끈 오기가 솟구쳤다. 어디 네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
나 해보자는 독한 마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해도 힘이
있어야 했다. 먹여주는 대로 받아먹고, 쓴 약을 차처럼 마셨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그녀였다.
힘이 되찾아지면 어떻게 하든 꾀를 내서 이 놈을 떼어버리고
달아날 작정을 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목이라도 매달아 죽고
말겠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태연해졌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어느덧 그녀는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되었
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점심 식사를 마친 적음상이 머리맡의 탁
자에 앉아 술을 자작하며 묻지도 않은 말들을 음울하게 주절거리
기 시작했다.
『나는 멸문된 것으로 알려진 쾌검문(快劍門)의 유일한 계승자
요.』
『아!』
청향이 처음으로 그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놀람의 탄성이 자
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소림에 있을 때, 공지 노승으로
부터 쾌검문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유수검문(流
水劍門)과 함께 중원의 이대 비문(秘門) 중 하나라고 했다.
-- 그들의 검학은 각기 중원 검학의 정수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은 일인에게만 비전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
서 영원한 숙적이기도 하다. 그 두 비문의 전승자는 가히 검 하
나로 천하제일을 다툴만한 무서운 자들이지. 그들이 서로를 의식
하여 공개적인 강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림인으로서는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
그 말을 할 때 공지 노승의 얼굴에는 은은한 경탄지색이 어려
있었다. 소림의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는 공지마저 감탄했던 그
들 비검이문(秘劍二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향은 아직까지도
그들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유수검문이 검의 화려함과 자유자재한 변화의 궁극을 추구한다
면, 쾌검문은 검의 오의(奧義)를 오직 무변(無變)의 쾌(快)에서
찾고자 하는 비문이었다. 눈앞의 이 색마가 그 이문(二門) 중 쾌
검문의 계승자라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적음상이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 담담한 얼굴로 청향을 바
라보았다. 청향은 새로운 눈으로 그런 적음상을 마주보았다. 그
의 어느 구석에서도 광기에 사로잡힌 색마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
었다.
어딘지 음울한 모습이 감추어져 있을 뿐, 지금의 적음상은 정
상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이 청향을 한편 안도하게
하면서도 더 불안하게 했다. 어느 순간에 그가 극도의 정서 불안
으로 광기에 사로잡혀 다시 흉포한 색마가 될지 알 수 없었기 때
문이다.
적음상이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며 마치 먼
옛날얘기를 들려주듯 담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유수검문과의 백 년을 두고 계속된 비무는 언제나 그 승패를
가릴 수가 없었소.』
그들의 전통은 각 문의 계승자가 정해지면 서로 만나 일검의
비무를 하는 것이었다. 서로가 자부하는 천하제일검의 자격을 입
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승부를 가려본 적이
없었다. 어느 한쪽도 상대에 대하여 모자라거나 남지 않았던 것
이다.
비무는 오직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그랬기에 무림에서는 아무
도 그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물론, 그들의 존재마저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공지 노승이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당대에
공지만이 유일한 입회인으로 그들의 비무를 참관하였던 때문이었
다. 말 그대로 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전설로만 전해져 오고 있
을 뿐인 비문(秘門)이었던 것이다.
『오랜 수련 끝에 드디어 나는 본문의 검의를 터득하고 후계자
가 되어 문호를 물려받았소. 팔 년 전의 일이요.』
적음상의 안색이 점점 침중해졌다. 몇 잔의 술을 거푸 기울인
그가 더욱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일년 뒤에 유수검문에서도 새로운 계승자를 배출했소.
약관의 미청년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바로 요즘 우객(雨客)으로
불리고 있는 초유성 그였소.』
그 말을 할 때 적음상의 얼굴은 비분을 참지 못하는 듯 붉게
달아올랐고, 숨결마저 거칠어졌다.
『그는 천부의 자질과 오성을 타고난 뛰어난 자였소.』
더욱 들끓는 마음의 고통을 달래려는 듯 술병을 입에 처박고
꿀꺽꿀꺽 마셔대는 적음상이었다.
『사문의 전통대로 우리는 공지 노승의 입회 아래 서로 비무를
하였소.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계속한 치열한 싸움이었소이다.』
『......』
청향은 어느덧 자신의 처지를 잊고 적음상의 말에 깊이 빠져들
어 눈빛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적음상이 상처 입은 짐
승처럼 신음하고 나서 겨우 말했다.
『결과는 나의 패배였소.』
『아!』
청향이 놀라 탄성을 발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적음상이 부끄
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일초 반식의 미세한 차이에 불과했으나 어쨌든 나는 졌고, 그
것은 곧 백 년을 두고 계속되어 온 싸움에서 쾌검문이 패했다는
의미였소.』
『......』
『이제 더 이상 천하제일검을 논할 자격을 잃었다는 것. 그것은
본문의 치욕이었고, 몰락이나 마찬가지였소. 그들이 의기양양하
여 돌아가고 나자 사부께서는 조사의 영령 앞에 참회하며 자결함
으로써 죄를 청했소이다.』
『어쩜... 그렇게까지...』
어느새 청향이 적음상의 무서움을 잊고 다가앉아 탄식하고 있
었다. 힐끗 그녀를 바라본 적음상의 눈에 적개심이 활활 불타올
랐다.
『커다란 충격 속에서 나는 초유성 그 자를 꺾고 본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폐관수련에 들어갔소. 아, 그러나 집념이
강하면 그만큼 심마(心魔) 또한 강해진다는 그 간단한 도리를 잊
고 말았으니...』
믿을 수 없게도 적음상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악문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그가 가엾다는 생각
이 문득 들었다. 적음상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때의 억
울함과 분함을 다시 생각하며 부끄러움마저 잊어버린 듯했다.
『조급히 대오(大悟)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연공하다가 나는
그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마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아... 자업
자득, 누구를 탓하랴마는, 하늘은 실로 나에게 너무나 큰 시련을
준 것이요.』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한숨만을 거푸 내쉬었다. 청향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요?』
『후후... 그대는 내 이야기가 퍽 재미있는 모양이오?』
『아니, 저, 저는... 다만...』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자 적음상이 씁쓸하게 웃었다.
『간신히 주화입마를 막았으나 심마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
소. 그것이 이미 내 영혼의 일부로 자리잡아 버린 때문이요. 나
를 사로잡고 내 영혼 속에 스며들어버린 심마의 모습이 어떤 것
이었는지 아오?』
『......』
『하..., 그것은 바로 색음(色淫)이었소이다.』
『아, 그런 일이...』
연공의 과정을 알 리 없는 청향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
다.
『처음에는 나도 몰랐소. 그러다가 보름밤이 되자 그것은 거부
할 수 없는 색정으로 내 영혼 안에서 발광하기 시작했소. 나는
미치고 말았소. 나는....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었소이
다.』
적음상이 괴로운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음하였
다.
『나는... 연공관을 뛰쳐나오고 말았소. 끝내 심마의 요구를 거
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하는 것... 나는 그럴 수 없었소. 나
때문에 돌아가신 사부님을 생각해서였고, 사문의 치욕을 생각해
서였소. 무작정 산 속을 치달리다가 한 여인을 겁탈함으로써 겨
우 심마에서 벗어날수 있었소. 그 처음의 여인이 바로 마비도 독
고월 그 자의 처였던 것이오.』
청향은 비로소 그와 독고월과의 사이에 놓인 비극의 전모를 알
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뒤로부터 매달 보름밤이면 나는 인성을 잃고 심마의 노예
가 되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알지 못한 채 발광하는 수
캐가 되고 마는 것이오.』
『아,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영원히 심마로부터 벗
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옥청향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물었다. 그의 불행을 가슴아
파하는 마음이 그의 악행을 증오하는 마음을 잠시 눌렀다. 적음
상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소. 영원히... 나는 죽을 때까지 한달에 한 번은 악마로 살
수밖에 없는 놈이요. 하하하.... 이 가혹한 형벌을 준 하늘이여,
네게 저주가 있으라. 하하하!』
적음상이 미친 듯 웃었다. 그리고 술병을 입에 처박고 벌컥벌
컥 마셔대다가 다시 우는 그를 보며 옥청향은 기어이 눈물을 흘
리고 말았다.
(불쌍한 사람...)
비로소 그가 독고월에게 쫓기면서도 산촌의 그 마을에 뛰어들
어 소녀를 납치하고 겁탈한 것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용서할 수
는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자 다시 분노와 증오가 솟구친
옥청향이 적음상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그 날 밤 어린 소녀를 납치해서 그 짓을...』
적음상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당신은 너무 잔인했어요. 어쩌면 어린 소녀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그리고 왜 그녀를 죽였죠? 그녀가 반항을 심하게 하던
가요?』
『나는...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소....』
적음상이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며 겨우 말했다.
『나는 다만 마혈을 제압해 놓았을 뿐, 그 일을 치르자마자....
또 달아나야 했소이다.』
『흥, 결국 당신이 그녀를 죽게 한 거예요. 당신의 처지는 가엾
지만 그 행위만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추악한 것이에요.』
무슨 말이라도 기꺼이 듣겠다는 듯 적음상이 더욱 깊이 머리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의 그는 양심이 있고, 옳고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
게 변할 수 있는 건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억울하오. 그대는 독고월 그 자도 꾸짖어야 공평할 것이
요. 그 자도 그녀의 죽음을 방조했기 때문이오.』
적음상이 항변하듯 강하게 말했다.
『나는 뒤쫓아온 그 자를 피하느라 미처 그녀의 마혈을 풀어줄
새가 없었소. 그 자는 마찬가지로 나를 잡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역시 그녀의 마혈을 풀어주지 않았소. 그저 힐끗 바라보
았을 뿐, 모르는 척 했던 것이요.』
『당신들은 다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당신들은 모두 미쳤어요!』
청향이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치자 적음상이 다시 얼굴을 붉히
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녀는 그 깊은 밤에 적막한 산중에서 그처럼 끔찍한 일을 당
하고도 달아나지 못하고 누워 있다가 짐승들에게 뜯어 먹히고 말
았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적
음상과 독고월에 대한 증오가 불붙듯 일었다.
『당신은 죄 값을 받아야 해요!』
벌떡 일어선 청향이 새파랗게 날선 비수를 꺼내들어 앞뒤 생각
할 새 없이 적음상을 힘껏 찔렀다.
『음...』
적음상의 입에서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청향의 비수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를 깊이 찔렸으면서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가슴 아래로 떨군 머리를 들려고도 하지 않았
다. 청향이 제풀에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적음상의 어깨 깊
숙이 박혀 있는 비수를 보는 그녀의 눈이 두려움으로 크게 떠졌
다. 그녀가 와들와들 떨며 손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당신... 당신... 괜찮은가요...?』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지만 사람을 처음 찔러 본 옥청향
이었다. 두려움과 후회가 그녀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
다.
『나는 차라리 당신의 손에 찔려 죽고 싶소.』
적음상이 고통을 참느라고 악문 이 사이로 어눌하게 말했다.
청향은 그만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3>
『끅, 끄으...』
기이한 신음과 함께 흑색 영웅건의 미청년이 목을 부여잡고 쓰
러지고 있었다. 언제 검을 뽑아 쳤었느냐는 듯, 적음상이 태연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의 눈에 가득하던 흉흉한 살기는 씻은 듯 사
라지고 없었다. 그가 돌아선 빈 공간에는 세명의 노검사(老劍士)
와 미청년 하나의 주검이 남아 아직도 더운피를 흘리고 있었다.
음산파(陰山派)의 청년기협으로 명성을 날리던 음산여검(陰山
麗劍) 공야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를 중원 무림의
후기지수 중 독보적인 존재라고 손꼽았다. 젊은 나이라고는 믿어
지지 않는 놀라운 검력과 수려한 용모로 단연 뛰어났던 것이다.
그런 그가 적음상의 일검에 아까운 목숨을 잃고 쓰러져 누워 있
었다.
나흘만에 청향이 몸을 추스르고 주루로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야치가 그녀의 미모에 호감을 가지고 접근해 온
탓이었다. 적음상은 사소히 흘려 버릴 수 있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단번에 음산삼로(陰山三老)와 공야치를 베어 버린
것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발검(拔劍)과 격검(擊劍) 그리고 철검(撤劍)의 세 동작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옆구리에서 백
광이 번쩍였다 싶은 순간에 그는 태연히 돌아서고 있었고, 미처
방비할 새도 없이 삼노(三老)와 일소(一少)는 목의 기도가 잘리
고 만 것이었다.
(세상에 저럴 수가...)
청향은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벼야 했다. 보
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주, 죽었다...』
『살인이다!』
적음상이 제 자리로 돌아가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비로소 사태를 알고 소리를 질렀다.
『갑시다.』
적음상이 아직도 넋이 빠져 있는 청향의 손을 잡아끌었다. 청
향은 멍한 얼굴로 그런 적음상에게 이끌려 주루를 나갔다.
비도 독고월의 신기(神技)라고 할수 있는 솜씨를 본 그녀였다.
이제 적음상의 일검을 보게 된 그녀는 도대체 이들이 사람이 아
니라고 여겨졌다.
(아, 육대가가 이들과 부딪친다면 과연 이들의 손을 피해 무사
히 나를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결심했소.』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음상이 청향을 돌아보며 결연한 어조로 입
을 열었다.
『무슨...?』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살인도 싫고, 비정한 강호의 생리도 싫
어졌소. 승부와, 명예와, 야망. 이 모든 것들이 이제 내게는 일
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만것이요. 바로 당신이 그
렇게 한 것이외다.』
적음상의 어조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청향은 저도 모르게 긴장
하여 그런 적음상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
지 두렵기만 했다.
『낭자를 데리고 험한 강호를 주유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요. 나는 강호를 떠나 낭자와 함께 심산유곡에 묻혀 다
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요.』
청향이 곧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의 말이 준 충격 때문이었
다. 적음상의 지독한 편집증(偏執症)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자칫하다가는 이 광적인 사내에게 이끌려 평생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심산 속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왈칵
두려움이 솟구쳤다.
『안 돼요. 나는 그럴 수 없어요. 내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데, 은둔이라니... 싫어요!』
『낭자!』
적음상의 눈이 험악해졌다. 청향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계속 도
리질을 할 뿐이었다.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요? 그럼 그 일을 마친 후에 나와 함
께 강호를 떠납시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육초량, 육가가를 찾아야 하고, 그래
서...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해요!』
『무엇이!』
적음상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눈에서 강렬한 살기가 쏘
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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