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하루종일 일없고 약속없는 금요일 오전.
잠시 연구실에 들려서 몇가지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전화가 온다.
나의 오랜 환자의 아들 한테서 어머니가 혈액투석을 받게 되었다며.
그렇치않아도 병원에 잠시 들러 어제 극심한 경추 통증으로 입원시킨 후배 형님도 보고
내가 약국에 볼일도 좀 있고 해서 30분 후에 들리마. 하고.
병실에 들러본 적 신기능이 약간 저하되어 의사가 보호자에게 겁을 주고는 왼손에 팔찌를 해 놓은 것이다.
(left arm save, 이는 왼팔에서 샘플도 하지말고 주사도 놓치말고 혈압도 재지 말라는,
왜냐하면 혈액투석을 하게 되면 동정맥루 수술을 받아야 되니까.)
나오는 데 와인 세트를 들려 준다.
이래서 내가 술을 못 끊는 이유 중 하나.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는 처에게 올림픽 공원 산책과 맛있는 저녁을 제안한다.
마을버스, 지하철 2호선, 잠실에서 내려 한참 걸어 8호선 한구간 몽촌토성역에서 하차.
노란색과 보라빛 팬지 화분
가는 길 늘어선 열주에는 이런 조각들이.
열주라면 90년에 관광을 한 이집트 카르낙 신전의 엄청난 규모의 열주들이 생각난다.
약 3, 500년 전에 세운 높이 29미터짜리 대리석으로 만든 열주들.
문 아래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이는 개선문이나 미국 알링턴 국립 묘지에서도 본 것같은데.
입구를 되돌아 보니 롯데 건설의 말많던 새로운 호텔이 건축 중이고
저걸 타자고 하니 처가 사양한다. 나는 타고 싶은데.
왜 이리 기우뚱하게 찍었을까?
봄의 전령들은 발아래에서도.
목련은 필때는 보기 좋으나 지고 나면 그 아래에 떨어진 꽃잎들을 보면 서글퍼 진다.
수상무대 뒤 벽에 그려놓은 춤추는 모습.
저 멀리 보이는 저 다리 이름은 곰말 다리.
나무 한그루만 서 있으면 '엽기적인 그녀'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몽촌 토성을 따라 걷다가
저 아래에는 꿩 한쌍이 보인다.
어느 정승의 봉분이다.
가지런히 머리를 깎은 저 나무들은?
돌단풍.
반가운 할미꽃.
공해에 약하여 서울 근교에서 다 사라져 버렸다.
66년 예과 1학년 때 서오능 소풍가서 본 할미꽃.
옆에서 처가 거든다.
'왜 우리 서오능 놀러갔을 때 석양이 좋치 않았어요?'
'그 여자가 당신이었던가?'
군대에 빠지는 방법 중 하나는 작두에 오른쪽 검지를 짜르거나
할미꽃 즙을 내어 똥고에 바르면 심한 치질처럼 보여 뺄 수도 있다.
작약이 뾰족한 싹을 내민다.
깨끗하게 모양낸 마르티스.
다 내려왔다.
이건 왕벛꽃.
마치 호주 원주민 아보리진 예술 같다.
이상하게 생긴 조각이라 아래를 보니
과연 제목이 외계인이구나.
여긴 가운데 패랭이꽃을 심어 두었다.
처가 우리동네에도 같은 집이 있다고.
그럼 다음에 한번 가보아야지.
이른 저녁을 먹으러 '몽중헌'에 들렀다.
6시부터 시작이라 한 십여분이 남아서 우선 맥주 한병을 시킨다.
메뉴에 붉은 딱지 붙은 추천 요리인 새우 딤섬 하교(蝦餃), 두개는 이미 먹어버렸다.
새우와 부추가 들어 간 구채교(韮菜餃).
XO장의 소포(XO醬义燒鮑),
돼지 고기가 들어있는 추천요리.
마지막으로 시킨 연성협(連城來), 새우를 가지로 싸서 튀긴 딤섬이다.
맥주 작은 병 포함해서 4만 오천원.
걷고 맛있는 걸 먹고 하루 오후를 잘 보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도 바빴네.
첫댓글 진료실에 갇혀(?)있느라 자주 못나가는데 늘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하여 주니 이 아니 감사할손가? 내 돈 안 들이고 여행을 하며 맛있는 것도 먹여주니 또 감사!!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고 배가 고픈 저녁녘에는 이 창은 열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보고서 꼬박꼬박 댓글을 달아 주니 고마워.
서울 도심에 꿩 부부가 놀다니, .... 그 꿩들도 안전하다는 것을 아나 봅니다. 66년에 서오능 놀러갔을 때 석양이 좋았던 것을 기억하시다니....., 기억력들이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꿩만 한쌍인가? 또 한쌍이 있지... 정말 사람답게 사시는구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고싶어도 못가고, 보고싶어도 못보는 아! 불쌍한 인생이여...
老鷄부부를 말하는 게 아닌감?
올림픽 공원, 몽촌토성, 각종 봄곷, 특히 할미꽃, 강아지, 꿩, 잘 구경하고 갑니다.
다음 번에 저도 시래옥에 한 번 들려서 시래기정식을 맛 보고 싶습니다.
잘 편집된 글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