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신사도, 일본의 무사도
서 지 문
‘이상적 인간형’은 인간이면 누구나 고결한 인격체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고 고매한 덕과 식견을 가진 자에게 운명을 의탁하고 싶은 본성을 지녔으며, 이상적 인간에 의한 지배는 안정된 사회 건설을 위한 필수요건이다. 희랍의 영웅은 숭고한 인격체는 아니었으나 괴물과 악당을 물리쳐 힘없는 백성의 재앙과 위협을 제거해 주는 존재들이었다.
중세의 기사도: 무력을 지녔기 때문에 생명과 재산에 위협적인 존재인 기사를 순치시키려는 시도. 기사의 편에서도 평화시에도 환영받고 존경받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기에 기사도를 수용함. 기사도의 계율: 충성, 공정, 용기, 무예, 자애, 관용, 예절, 봉사. 이 모든 덕목을 체화하기는 (사실 한 가지라도 제대로 실현하기는) 불가능해서 필연적으로 위선이 생겨났다. 이교도적인 덕목과 기독교적인 덕목을 적정비율로 배합한 것이 기사도. 약자에 대한 배려의 의무가 여성에 대한 존중과 경배를 낳음.
중세의 ‘기사’가 르네상스의 ‘궁정신하’를 거쳐서 ‘신사’로 이어 짐. ‘궁정신하’는 교양과 식견으로 궁정을 빛내고 언변으로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신하들. ‘신사’ 역시 교양이 매우 중요했고, 동시에 ‘기사’, 즉 칼잡이의 후예였던 신사에게는 문약함이 용서되지 않았다.
영국 신사는 왕족, 작위를 받은 귀족과는 다른, 지방귀족이었다.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있었고 정치적 야심도 강하지 않았음. 신사계급 (‘gentry’사회)은 항산(恒産)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였다. 항산(恒産)을 가진 사람만이 돈에 초연할 수 있었기 때문. 땅에서 나온 고정적인 수입으로 한가롭게, 염치와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영국은 장자상속제로서 재산의 대부분이 장자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에 재산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재산은 줄기 쉽고 재산으로 뒷받침해야하는 식구는 늘어가기 마련. 차남 이하의 아들들의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이 큰 고민이었다. 차남 이하 아들에게는 목사 또는 장교가 빈번한 선택지였다. 부유한 사업가나 상인의 딸들이 차남 이하의 배필이 되어 상인들의 신사사회로의 진입로가 되었다. 한편 차남 이하의 교육을 잘 받은 신사계급 아들들이 여러 분야로 진출함으로서 영국사회의 계층간 소통과 국가발전에 이바지 했다.
교육: 신사, 숙녀의 가정교육은 너무나 중요함. 체통을 지키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야 신사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부모의 역할이 막중함. 여아들을 위한 입주가정교사 governness; 남아들은 tutor에게 교육을 받기도 했으나 대부분 public school에 보내졌다. 전부 기숙학교였던 public school은 몹시 험악한 곳이었다. Tom Brown’s Schooldays의 주인공은 “나는 나보다 약한 아이를 때리지 않았고 나보다 센 아이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라고 말함. 이것이 신사도의 기본. 교육은 거의 희랍과 로마 고전 교육. 실용적 교과는 거의 없었다. 상급학년에서는 음주, 도박, 방탕이 난무했고 거의 모든 젊은이는 빚을 졌다.
신사의 생활. 복장은 지나치게 elaborate하고 고급이었다.
언어. 언어는 품위가 있어야 했고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우회화법을 구사할 줄 알아야했고, 화제가 풍부하고 대화에서 드러나는 인품이 공정하고 배려심 있고 판단력이 훌륭해야 했다.
품위. 신사는 몸가짐에 품위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겨야 했다. 혹시 명예를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결투를 신청해서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했다. ‘명예의 빚’(debt of honor)이라 불리웠던 노름빚은 즉시 변제해야했고 못하면 자결을 해야했다. 신사의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사교. 안면을 트는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격식을 지키며 차츰차츰 가까워져야했다. 처음 tea에 초대했다가 dinner에 초대, 가벼운 사냥에 초대, 무도회에 초대, 숙박 하면서 여러날 계속되는 사냥 파티에 초대. 무도회도 격식을 따라.
구애의 예절과 절차. 숙녀에게는 결혼이 너무나 중요했고 courtship에 있어서는 숙녀는 완전히 수동적이어야만 했기에 신사는 숙녀에게 가벼이 접근하면 안 되었다. Sense and Sensibility라는 소설의 에드워드 페라스는 경솔하게 약혼한 Lucy라는 여인이 너무너무 싫어졌지만 사약을 마시는 기분으로 결혼할 각오를 한다. 신사는 무일푼으로 결혼할 수 없었기에 오랜 약혼도 드물지 않았다. 시인 테니슨의 경우 18년.
오락, 사교: dinner, 무도회(ball), 사냥파티, punting, 크리켓, 폴로, 당구, card games 등. 특히 사냥은 많은 귀족이 열광한 스포츠였으나 ‘금렵법’ 때문에 계층 간의 극심한 위화감과 반목의 원인이 됨.
식민지경영: 영국은 19세기 중엽부터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Oxbridge에 식민지관리 양성 코스를 만들고 국가고시를 통해서 식민지관리를 채용했다. 그래서 타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착취만을 일삼았던데 비해서 (비교적!) enlightened rule 이었다.
일본의 무사도 (Bushido, the Soul of Japan by Inazo Nitobe 참고)
1899년 저술, 1902년 출판; 서구의 식자층에 일본의 무사도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명문장, 동서양의 고전과 근대 문학, 철학, 사회학 저서들에서의 현란한 인용으로 그 신뢰도를 드높임; 미국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경탄을 자아내어 Roosevelt가 수십권을 사서 지인들에게 돌렸다고 함; 1905년의 Taft-Katsura 밀약의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 됨.
서론
무사도는 귀족이 직업적으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개인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수세기에 걸친 무사의 생활에서 유기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오랜 전쟁을 통해 강한 자만이 살아남았고 그들이 samurai 계급을 이뤘다. 그들 사이에 common standard of behavior 가 생겼으니 싸움에서 fair play의 정신이다. 모든 도덕의 싹이 이 속에 있다.
무사도는 운명을 믿고 필연적인 것에 순응하며 위험 앞에서 평정심을 가르치는 불교가 원천의 하나이다. 또한 忠孝를 가르침으로서 samurai의 오만을 순화한 Shintoism 역시 근원의 하나이다. 무사도는 지식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16세기(戰國時代)가 일본종족의 최고의 자질을 드러내게 했다.
무사도의 성격
1. rectitude or justice: 비열함을 혐오하고 의리를 중시함.
2. courage: 감히 행하고 견디는 용기. 자식의 담력을 길러주기 위해 부모는 아이들을 겨울에 맨발로 등교하게 하고 처형장, 무덤, 흉가에서 밤을 보내고 처형장에서 잘린 목에 표시를 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위험 앞에서도 태연한 사람으로 기름. 기사는 전장 속에서도 시를 짓고 목이 베이는 순간 자객의 시에 시로 답하기도 했다. Kenshin은 宿敵인 Shingen의 번국에 소금을 대어 주었다.
3. benevolence: 약한 자에 대한 인자함은 무사에게 특히 어울리는 덕목이다. 연민을 함양하기 위해서 무사들은 음악을 배우고 短歌를 지으며 詩情을 기른다.
4. politeness: 일본인의 예의와 세련됨은 일본을 방문한 모든 사람이 지적하는 바이다. ‘무사의 一言’은 절대적인 것으로 서면 계약이나 맹세는 무사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samurai가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와 권력이 한 곳에 모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5. Honor: 사무라이의 honor 때문에 죄 없는 목이 많이 잘렸다. 그러나 honor의 성급함을 counterbalance하는 patience 와 magnanimity의 덕목이 있다.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는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바쳤다. 효와 충이 상충하면 충을 선택함. 주군이 잘못된 길을 갈 때는 samurai는 죽음으로 간언함.
6. 사무라이의 수련: 검도 궁도 유도, 馬術, 投槍, 兵法, 서예 도덕, 문학, 역사 등. 그러나 경제에는 전혀 무지하도록 양육됨. 돈을 받는 일은 가치 없는 것으로 침. self-control: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음. 일본인에게는 ‘speech is the art of concealing thought’이다.
7. Suicide and Redress: 일본인의 할복은 복부가 영혼의 자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극도로 고통스러우나 지극히 품격있는 의식이다.
8. the sword of the samurai: 5살 때 쇠로 된 칼을 받는 의식을 행함. 이후로 출타 시에는 언제나 나무로 된 칼이라도 칼을 착용함. 15세에 진짜 칼을 받아서 늘 차고 다님.
9. Woman: samurai class에서는 여성의 연약함을 벗어나 영웅적 굳건함을 보인 여자를 칭송함. 여자도 긴 칼을 쓰는 법을 배우고 호신용 단도를 받음.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일본에는 정조관념이 없는 것이 아니고 사무라이 계급의 여성에게는 정조는 생명보다 중함. 여성은 music, dancing, 그리고 문학 수련을 받음.
일본은 사무라이가 이룩한 나라다. 사무라이는 대중과는 거리를 두었다. 일본의 무사는 야마토다마시(和魂)을 대표한다. 明治維新의 주역들이 모두 무사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무사도는 아직 일본을 움직이는 힘이다.
일본 민족의 성격적 결함에는 무사도의 책임도 있다. 무사도가 형이상학적 훈련을 무시했기 때문에 일본에는 심오한 철학이 부재하다. 무사도의 sense of honor 때문에 무사는 너무 sensitive하고 touchy하다. 무사의 오만도 sense of honor의 산물이다.
이 저서는 세계를 매혹시켰으며 1908년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인 스스로를 자기도취에 빠지게 했고 일본의 군국주의 조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카미카제’의 결성도 이 책에 힘입은 바 크다. 일본에서는 매년 새로운 번역이 나올 정도로 성서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포츠담 회담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일본 회사의 종신고용제 등은 명백히 무사도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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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무사도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
기리스테고멘 (적절한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하급자를 벨 권리)
주군과 신하 무사들 사이의 rampant homosexuality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던 重臣들의 殉死 관습
전쟁에서 패배하면 로닌(浪人)이 양산되어 본인들의 비참한 삶, 극심한 민폐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설 (1인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유명한 검객은 아무 원한이 없어도 도전을 해서 죽임)
복수의 의무 (47인의 浪人 또는 義士; 얼굴도 모르는 친척이라도 살해를 당하면 살아있는 제일 가까운 무사가 복수를 해야했음)
무사도 영화 (武士道殘酷物語; 切腹; 숨은 요새의 3인; 7인의 사무라이; 사무라이 반란; 어용금(御用金: 고요킨); 요짐보; 카게무샤; The Last Samurai . . . . )
Eiko Ikegami 의 The Taming of the Samurai
Samurai class의 형성: 7-9세기부터 시작, 12세기 말에는 뚜렷한 계층으로 발전; 처음에는 무산자, 부랑배, 범법자, 백정, 해적 같은 부류가 많이 포함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군사력이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기 어렵게 되자 이들이 정부 또는 귀족에게 employ되기도 하면서 사병(私兵)이 되고 military might와 함께 honor code가 형성되면서 samurai 계층을 이루게 됨. 많은 사무라이들이 재앙을 없애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줌으로서 백성의 신뢰를 얻게 됨.
16세기는 일본 전국이 끊임없는 전란에 흔들렸던 전국시대. 다수의 걸출한 무사가 배출됨. 테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등은 다이묘이면서 뛰어난 무사였다. 임진왜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침략전쟁을 하지 않으면 무사들에게 나누어 줄 땅이 생기지 않고 땅을 나누어주지 않는 주군은 무사들의 충성을 받기가 어려웠기 때문.
1603년 도쿠가와막부가 열리면서 무사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됨; 무사는 연마한 무술을 발휘할 수 없어지고 문신의 역할을 하게 됨; 무사들의 계급과 직책이 출생에 의해 결정되므로 능력 있는 자의 등용과 중용이 어렵게 됨. 일시적인 녹봉의 증가, 능력 있는 젊은 무사의 중신 가문에로의 형식적 입양 등의 해결책이 고안되기는 했으나 일시방편 밖에 되지 않았음. 이때 (18세기 초)에 나온 책이 ‘하카쿠레’였다—사무라이의 절대적 충성 의무를 재확인한 책으로 군국주의 일본에서 시한폭탄의 역할을 함.
유교의 역할: 유교는 17세기 말, 도쿠가와막부 5대 쇼군 때에 이르러서야 막부의 지적 담화에서 불교의 자리를 대체하게 됨. 평화 시에 무사들을 문신으로 만드는데(samurai를 tame 하는데) 매우 적합한 이념이었다. 유교는 일본의 관료체제를 변화시키지도 않았고 국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스며들지는 않았고, 막부는 과거제도를 통해 관리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교는 사무라이의 충성심이 주군과 사무라이의 인간적 친밀감에 기초하기 보다는 국가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서 궁극적으로 막부의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