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처
천태봉 (의령군 화정면 공모마을)
날마다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가 나온다. 여기저기 미사일이 떨어지고 포탄이 터진다. 남자들은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고, 남은 가족들은 아이를 업고 보따리를 들고 피난을 떠난다. 나라를 지키려고 전선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가장과 아들을 사지로 보내놓고 나라며 일터며 집을 버리고 남의 나라에 몸을 의탁하러 가는 가족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러시아 국민들이라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내가 죽거나 남을 죽여야 하는 전쟁터로 징집돼서 나가는 젊은이들은 얼마나 두렵고, 그 부모들의 마음 또한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우리도 몇 십 년 전에 처절하게 겪었으며, 언제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어서 마음 한구석이 항상 무겁다.
푸틴은 왜 그런 전쟁을 할까. 어째서 저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어가게 만들까. 그는 심장도 없고 피는 차가운 사람일까. 얼마 전, 어느 신문이 이 전쟁과 관련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 매체에 기고한 글을 옮겨 실었다. 거기에 푸틴의 성장기 얘기가 나온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브르크의 거리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 도시의 옛 이름은 레닌그라드로 2차 세계대전 동안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난 곳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굶어서 죽은 곳이라고 한다. 푸틴이 성장기에 겪은 이 비참한 경험은 러시아 가까이에 서유럽의 군사력이 다가오는 것을 결코 놔두고 싶지 않아서 저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키신저 박사의 설명이란다. 오늘의 푸틴은 잠시 잊고, 그때 그 전쟁의 참화를 겪은 소년을 상상하면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인류의 도덕성은 그 시대의 동물적 야만성에서 조금은 깨어났다 해도, 푸틴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그 때 그 슬픔이 그대로 살아있어서 그들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 이 얘기를 조금 넓혀보면, 수많은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마음 저변에도 이와 비슷한 어떤 상처가 있었고, 그것이 2차 대전의 주요 원인이 됐을 수 있다. 이렇게 세계대전마저 사람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전쟁도 평화도 다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저 슬픔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어린이들 마음속에는 훗날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원한의 씨앗이 자라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옥의 환란이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저 잔혹한 일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가. 인류에게 평화의 길은 없는가. 그래도 키신저의 한 마디를 듣고 보니 푸틴의 마음 한 부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그 이면의 원인을 한 꺼풀씩 벗겨서 파악하고 고민해 가는 것이 작지만 본질적인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나 같은 소시민은 저러한 큰일들은 큰 분들에게 맡겨두고, 나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런 상처가 없는지 살펴본다. 내 마음 속에는 아픔이나 괴로움을 일으키는 응어리가 없는가. 내 상처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들과 동료들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심어주지는 않는가.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물음이 무색하리만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절개지에 드러난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것 같다.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 어릴 때부터 경험한 수많은 일들, 억울했던 일, 분했던 일, 모욕받은 일, 차별받은 일, 수치스러웠던 일, 무서웠던 일, 괴로웠던 일, 고달팠던 일, 힘들었던 일, 슬펐던 일, 부러웠던 일, 소외됐던 일, 외로웠던 일, 배고프고 헐벗고 추웠던 일... 등등이다. 이렇게 위축되고 졸이고 억눌렸던 고통은 그 누르는 힘이 약해지면 스프링처럼 반드시 튀어 오른다고 한다. 이 상처들이 좋은 쪽으로 작용해서 내가 고난을 인내하며 살아온 힘이 되어 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상처들이 묵어서 그것들이 내 업장이 되고 인성이 되고 성격으로 굳어져서, 무의식적으로 그 억눌림의 보상을 꾀하려고 반사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 상처의 보상에 집착이 되면 그것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반감, 나아가 포원 같은 것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누군가 내 상처를 건네받으면 그 고통은 확대 재생산돼서 다시 또 내게로 돌아온다. 이리하여 안 좋은 인연들이 뒤엉겨져서 뒤죽박죽 인생이 고달파지면 그제야 나는 팔자나 운명을 탓할지 모른다.
이렇게 나의 취약하고 투박한 마음들이 모여서 나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혼란과 세상의 전쟁과 같은 지옥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오히려 이런 아픔의 의지들이 모여서 커다란 에너지가 돼서 복잡다단하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원인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 어쩌면 희망이 되고 그마나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러한 세상을 구성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치유하는 길을 찾고 싶다. 힘을 길러서 힘으로 보상을 얻어내는 반사적 방식은 지양을 하고,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를 움직이는 그 상처들을 자각하고 그 작용 과정을 파악함으로써 눌려있는 응어리를 풀어내야 할 것 같다. 어찌 쉬운 길이겠는가 마는, 그 길을 통해서만이 연약한 생명체이며 나 자신과 나의 무리를 지키고 번성시켜야 하는 이기적 동물체로써 본능적으로 갖는 두려움과 욕망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쫓김과 꺼들림과 혼돈과 얽힘과 압박에서 놓여놔서 심신이 편안해지는 정신적 존재로 순화돼 가지 않을까.
나는 퇴직을 하고 도시를 떠나 시골에 와서 살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도시의 친구들은 아무 것도 없는 산골에 어찌 갔느냐고 묻는다. 나는 태봉이를 찾아서 왔다고 한다. 태봉이는 내 이름이다. 돌아보면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 한 것 같다. 무엇에 그렇게 휘둘렸는지 평생을 정신없이 살아온 것 같다. 나의 삶이었지만 타인들만 득실대는 세상이었고 내 삶의 중심에 오히려 나 자신은 없었던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도 내가 진실로 있었나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쫓아 산다”는 심리이론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긴다. 나 역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만 바라보며 살아온 것 같다. 내가 그렇게 하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오면서, 성공은커녕 상처만 잔뜩 받아온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상처받고 소외받은 나 자신을 찾아서 만나고 싶다. 도시생활에서도 간혹 혼자서 조용히 차 한 잔 마시면서 자신을 만날 수도 있지만, 나는 상처가 많아서 그런지 좀 더 찐하게 나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시골의 고요한 자연 속에서 때때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만나는 <나>를 어떤 이는 ‘전쟁 통에 잃어버린 내 새끼’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내 안의 정다운 연인’이라고도 한다. 허둥대며 사느라고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되찾은 감격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며, 연인끼리 호젓하게 만나서 손을 맞잡고 일체감을 누리는 그 따스한 정다움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만나고보면 그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감동적이며 촉촉한 그 무엇이 있다. 그러한 내 마음을 한 겹 한 겹 들추어보면 그 밑에는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상처들이 응어리져서 독립된 생명체처럼 살아 꿈틀거리며 그 자체의 이기성으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렇게 나는 나 자신을 만나서 묵은 상처를 드러내 어루만지고, 내가 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떠올려서 반성하고 싶다. 그대로 놔두면 더 큰 고통의 덩어리로 자라서 전쟁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위무하고 싶다. 그렇게 상처들이 얼만큼 치유가 되면 나는 비로소 나를 잊어버리고 주위와 세상에 동화가 되어서 그 속으로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수필가 : 부산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월간 海바라기 2023.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