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11년에 발간한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에서 발췌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시중에서는 정상 판매되지 않으며,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만 한정 판매하는 희귀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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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전개된 한말 항일 의병운동은 초기의 경우, 의병운동의 주체가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재야유림 세력이었지만, 후기에는 농민층이 망라된 재야 각계각층이 가세하면서 거국적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운동 양태에 있어서도 후기에 이를수록 고종을 중심으로 한 중앙세력과 지방 재야세력 양자 간의 국내적 제휴 활동은 높아갔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에는 거병의 대의명분을 부여해 준 고종의 밀지 내지 특별 당부나 권고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종의 밀지를 전달하는 역할은 수족이나 다름없는 고종 측근의 전직 관리를 비롯해 다양한 계층 출신의 별입시들이 맡았다.
한말의병운동을 촉진하는데 영향을 끼친 고종을 중심으로 한 중앙세력은 국내의 재야 세력들과 연대활동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한 외국세력, 특히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와의 국제적 연대까지 추진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연계성은 고종의 의사를 측근 관리나 별입시를 통해 전해 받은 재야세력, 즉 유립(유인석 등), 군인(김인수, 추명찬, 김원교 등), 관리(이범윤 등) 출신 등 다양한 계층이 거병 후 러시아군과 연계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항일 무장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러시아군과의 제휴 및 연대를 성사시킨 것이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전시 중립을 선언했으나, 침략국 일본의 강요에 의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형식적이나마 연합국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밀명을 통하여 거국적 항일운동을 촉구하였다. 많은 의병부대들은 독자적으로 군자금과 소모 활동을 통해 항쟁하기도 했으나, 명분상 고종의 밀지와 같은 특별지시나 권고를 통해 대의명분을 찾았고, 군자금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로 진격해 오는 것을 막고자 항일 의병들과의 제휴를 추진했는데, 한인의용군과 선견한국분견대는 그 실례를 잘 보여준다.
1905년 쓰시마 해전 이후, 러시아군 쁘리아무르 카자크 혼성여단 산하에 선견한국분견대가 결성됨으로써, 러시아와 한국의 대일본 공동 전선을 목표로 단일 지도체계를 지향하는 부대가 탄생했다. 김인수 부대와 이범윤 부대, 그리고 함경도 한인포수회 등이 러시아군 편제에 직접 편입되어 선견한국분견대라는 명칭으로 대일 공동작전을 펼친 것이다.
항일 의병부대가 주로 활동한 한반도의 북부지역은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고, 러시아의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 사령부가 파악한 한인 의병부대 역시 그 분포 지역은 한반도 북부에 집중되었다.
항일 의병부대는 국운 상실의 위기에서 일본의 공세적 진출에 맞서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국내외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부대 대부분은 고종황제의 밀명을 명분 삼아 대일 항전의 일환으로 러시아군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의병부대는 지역과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의기투합하여 결성된 사례가 많았다.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수송부대가 활약하고 있었으며, 호랑이 사냥꾼으로 구성된 함경도 한인포수회도 존재하였다. 이처럼 의병부대를 형성한 구성원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하였다.
한인의병들의 또 다른 계열로는 동학군 출신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주로 보수세력 중심의 부대인 위정척사 계열의 부대에 속해서 활동했다. 또한 이미 1895년 을미사변 이래 일본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항거했거나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쳤던 대한제국 군인 출신 한인들도 있었다.
러일전쟁 시기에 러시아군과의 연합 군사 활동을 추진한 항일 의병부대는 그 구성면에서 두 가지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 흐름은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연합활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러시아군 편제로 편입되어 활동한 경우다. 1904년 봄에 의병부대로 전환한 이범윤 부대나 함경도 한인포수회가 대표적이다. 이범윤 부대는 1905년 6월말 선견한국분견대에 편입하여 대일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두 번째 흐름은 러시아군 편제에 직접 소속되어 러시아군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한 경우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인수, 김원교, 현홍근 등이 개인적으로 러시아군으로 혹은 러시아 군사학교 유학 중 소집되어 활동한 경우다. 이들의 공통점은 러일전쟁 이후에 을사조약과 대한제국군 해산 그리고 일본의 한국 강점을 거치면서 대부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해외 근거지 투쟁 및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함경북도 지방에서는 경성군을 중심으로 이범윤 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범윤은 1902년 간도 시찰원이었다가 1903년 간도관리사로 승진하여 어사의 마패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간도 지역에 민병대인 충의대를 결성하고 군 초소를 구축했다.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인 1904년 봄 이범윤 부대는 자발적으로 의용군 부대로 전환하여 항일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이범윤이 이끄는 충의대는 3~4천명 이상의 인원이 참가하여 상당한 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지역인 종성과 회령과 무산, 부령군 일대에서 활동했다.
1904년 3월 회령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수행하던 추명찬은 "러시아와 우호협력을 유지하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회령 지역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 동향에 관한 첩보를 수집해 러시아 제 1네르친스크 카자크 연대 백인부대장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6월에는 원산지역에서 600명 규모의 한인부대를 지휘하던 김원교가 러시아 부대와는 싸우지 않을 것이며, 대원들과 함께 러시아군에 가담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전반적으로 두만강 일대에 위치한 도시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의병들은 러시아군에게 호의적이었다. 특히 1904년 7월에 고종 황제의 밀명이 전달되어 대한제국 병사들은 "러시아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지 말라"하였고, 오히려 "말먹이나 양식을 제공해 주거나 길을 알려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경성 지역 부사는 러시아 제7 동시베리아 소총부대장 루드코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 거류민들을 처단하기 위해 거병할 것이므로 모든 주민에게 신속히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루드코프스키는 경성부사가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을 들어 러시아군이 한인 의병부대와 공동으로 협력하자고 주장하였다.
함경남도 원산 지역에서는 현홍근 부대가 활약하였다. 이 부대는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인 1904년 3월, 연해주의 추구예프 유년군사학교 출신 현홍근이 같은 학교에 다니던 여러 유년사관들과 함께 결성하였다. 현홍근 부대는 300명으로 구성되어 주로 원산과 평양에 진주한 일본군 경비대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첩보수집과 첩자체포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1905년 7월 7일 한반도 북부와 동북부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지휘하는 선견한국분견대가 결성되어 작전을 수행할 때, 이범윤 부대 역시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러시아군을 도와 일본군과 싸우라는 고종 황제의 지시를 수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는 한인 의병부대와 러시아군 간 개별적이나마 상호 호의적 분위기에서 공동의 적을 목전에 두고 제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진전되면서 단일 지휘체계를 갖는 한인의용군을 창설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전쟁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는 하나로 통합된 선견한국분견대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1904년 8월 7일 이범윤 부대는 백산에서 러시아 기병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김인수 기병부대도 새로운 편제인 선견한국분견대에 참여하였다. 선견한국분견대에는 앞서 러시아군의 통제 하에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제안했던 함경도 한인포수회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러시아군이 작성한 첩보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6월 하순 일본군이 함경도 두만강 방면까지 압박해 오자 한인 포수 2천 명이 러시아군 통제하에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요청해 온 것이다. 러시아군이 상부에 보고한 내용에는 이들의 참전 의도와 무장 정도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이는 한인 상당수가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항일 군사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투쟁 의지를 잘 대변해 주는 자료다. 함경도 한인포수회에 관한 러시아군의 첩보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함경도 한인포수회로부터 러시아군 장교의 지휘 하에 유능한 통역과 함께 의용대를 구성하기를 희망한다는 제안을 받았다. 모두 2천 명 이상인 이들은 베르당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금전적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들의 평화를 파괴하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일본의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다."
러일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선견한국분견대에 가담한 한인 의병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1905년 10월 1일, 작성된 보고서에 의하면 선견한국분견대 부대원들의 총 수는 17,323명에 달했다.
첫댓글 러시아군과의 연합설은 처음이네요...간도의 조선인들이 러시아군에 가담해서 싸웠다는 내용을 들어왔어도, 이처럼 구체적으로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러시아측에 가담해서 싸웠다는
사실은 충격이네요..
저 자료가 2005년 러시아 정부에서 공개한 극비문서를 해석하고서야 알려진 내용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