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36) - 지도자의 선택은 주권자의 몫
여러 날 위용을 떨치던 맹추위가 한풀 꺾여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고 비가 내리는 등 오래 만에 포근한 날씨다. 그래도 아침 기온은 매섭고 지인들과 함께 눈꽃을 보러간 무등산에는 일주일 전에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며칠간 평년기온이다가 다음 주부터 다시 기온이 내려간다는데 건곤일척(乾坤一擲)을 겨루며 막판에 초박빙으로 접어든 대통령선거열기가 이를 녹일 수 있을까?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12일, 북한은 장거리 로켓 은하(광명성) 3호를 쏘아 올리며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국내외정세가 험난하고 경제적 위기상황이 더 커지는 엄중한 시점에서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책임 쥘 대통령의 선택은 오롯이 국민의 몫, 민주국가의 시민은 한 사람 한사람이 주권자다.(주권자의 권능을 행사할 이번 대통령선거의 유권자는 4046만4641명이다.)
수요예배의 기도에서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A large population ls a kings glory, but without subjects a prince is ruined)'이라는 성경구절(잠언 14장 28절)을 되새기며 많은 백성이 영광을 얻는 행렬에 나서기를 기원하였다. 그 밑바탕에는 '온 인류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구획'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해 있음(사도행전 17장 26절)을 떠올리며. 10년 전에 대선을 앞두고 학생들이 만드는 책자에 '성공한 대통령이 보고싶다'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대통렬의 성공이 국민의 성공인 것을 강조한 적이 있는데 그 성패는 당사자의 역량은 물론 이를 선택하고 유도하는 주권자에게 달려 있으리라.
18대 대통령선거의 부재자투표가 시작되는 13일 아침, 남구 청소년수련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귀중한 주권자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날씨가 춥고 밖이 어두운 이른 시간인데도 꽤 많은 이들이 투표장을 찾는다. 이번 부재자 투표대상자는 108만 5607명으로 지난 대선보다 30% 이상 많은 숫자다. 그만큼 주권자의 관심과 참여도가 높아진 셈인가? 이 땅에서 첫 선거가 치러진 것은 1948년 5월 10일, 그때 제헌국회가 탄생하였고 그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첫발을 내디뎠다. 제헌 때부터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헌법은 일정한 요건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국민의 기본 권리인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였다. 내가 유권자가 된 것은 1964년, 그 이후에 치러진 수많은 선거에서 주권자의 몫을 거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76년 12월 초, 일본출장 중 국회의원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 공직자를 직접 뽑는 총선거를 직접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는 유신헌법시절,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없고 비상조치법들이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린 엄혹한 국내사정이 숨이 막힐 듯 답답한 때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평온하게 치러지는 일본의 선거판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1961년의 5.16 쿠데타와 1972년의 10월 유신, 1979년의 12. 12 사태로 권력을 낚아챈 비민주적 통치시대를 마감하고 우리도 평화롭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주권자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정부가 출범한지 25년이 지났다. 암울했던 지난날을 거울삼아 유권자들 모두 소중한 주권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지도자 선택에 한 몫을 잘 감당하였으면.
민주주의의 선진국인 미국도 한 때는 선거판이 어수선하였다. 여성과 흑인들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건국 후 100년도 더 지나서였고 초창기에는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였다. 지금도 미국대통령선거는 국민의 직접투표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고도 주별로 승리한 후보가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모순 때문에 낙선하는 제도적 불합리가 남아 있다. 때마침 언론에서 난장판처럼 어지러운 1850년대 미국의 투표광경을 소개하는 그림과 글을 실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며 이를 살펴보자.
투표하던 날
투표일이다. 선거를 하러 마을 광장에 많은 남자가 모였고, 투표장 입구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투표소 옆 세 남자는 여전히 정치 토론 중이다. 이들은 무슨 열망을 갖고 여기 나왔을까. 다음 그림은 미국 풍속화가 조지 칼렙 빙엄(1811~79)의 ‘군(郡) 선거’(1852년)다. 미주리주 설린(Saline) 카운티에서 1850년 있었던 선거를 그렸다.
그림엔 여성과 흑인이 없다. 참정권이 없었던 탓이다. 그 때문에 이 그림은 미국에서 연방수정헌법 제19조를 가르치는 교재로도 애용된다. 여성 참정권을 규정한 조항으로 1920년 효력이 발생했다. 뉴욕주 세니커폴스에서 세계 최초의 여권(女權) 신장 집회가 열린 지 72년 만의 일이다. 미국 흑인들이 모든 주에서 실질적으로 참정권을 인정받은 것은 1965년 앨라바마주에서 투표권을 주장하던 흑인들의 행진을 경찰이 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였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역사화를 닮은 화면 구성을 헤치고 뜯어보면 그림 속 선거 장면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후보자는 투표장 앞에서도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오른쪽의 파란 옷 입은 남자가 그렇다. 술판이 벌어졌고, 이미 곤드레만드레 쓰러진 이들도 보인다. 저 술판과 유세장을 지나 무사히 투표해야 할 텐데 말이다. 하긴 우리의 ‘막걸리 고무신 선거’가 불과 40~50년 전 일이다. 유세장 구석에선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고, 선거운동원들은 신문지에 돌돌 말아 싼 고무신을 겨드랑이에 끼고 집집이 다니며 한 표를 호소했다고 전한다.
시골 선거 풍경으로 국민의 의무를 묘사한 빙엄은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풍속화가다. 그는 독학한 예술가였다. 어린 시절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서 파산한 뒤 미주리로 이주했다. 초상화를 그려 팔며 이곳 개척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게 된 배경이다. 유년기의 미술 교육이라곤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에 석 달 다닌 게 전부다. 오랫동안 무명으로 남아 있던 그는 1930년대 이후 재평가됐다. 탄생 200주년이던 지난해엔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 빙엄은 1848년 미주리 주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이 그림은 그로부터 4년 뒤 완성된 것이니, 그의 선거 경험이 리얼하게 녹아 들어갔다 할 수 있다.
미국 선거의 과거는 이랬다. 우리와 닮은 듯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1948년 5월 10일 첫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권은 만 21세 남녀 모두에게 있었고, 투표율은 95.5%에 달했다. 제18대 대선이 6일 남았다.(중앙일보 2012. 12. 13)
추신,
12월 14일부터 내년 1월 9일까지 동남아시아 4개국(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탐방 길에 나선다. 여행 중에 글을 올릴 수 없으므로 이해인 수녀가 쓴 '12월의 엽서'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인사를 가름한다. 부디 평강과 희락을 누리소서.
12월의 엽서
또 한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 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겠지요.
해야 할 일들 곧잘 미루고
작은 악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 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일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