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실마을자원조사 보고서
기간 : 2010년 11월 29일 - 12월 10일
조사자 : 진종옥 박태석 김정섭 백창석 외 약실마을 주민
1. 자연적환경
-. 마을이름
조선시대 박곡면의 유래가 이 마을에서 비롯되었다. 박곡의 의미는 박씨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이 아닌 지형에서 관련된 지명이다. 지형은 호로병처럼 생긴 모습으로 좁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터가 나온다. 마치 박덩굴과의 표주박의 모습처럼 생긴 것이다. 해서 박씨촌이 아닌 표주박의 모습을 띤 골짜기가 박곡이다. 지금은 약곡리로 부르고 있으며 약실과 박실 두 마을이 있다.
약곡은 약초가 많이 나는 골짜기의 마을이라는 의미다. 어유치 국사봉을 비롯한 주변의 산세와 성적골 주변의 맥반석은 약초 성장에 좋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 산 이름
마을을 둘러 싼 산 봉우리 중 이름이 있는 산은 세 개 있다.
국사봉 : 國思峰.또는 國師峰 이라 쓰는데 대체적으로 그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을 지칭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보인다. 나라나 지역에 큰 일이 있으면 이 산에서 제를 지내는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어유치 : 고기가 노는 고개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데 명당에 해당된다. 실지로 진주강씨의 묘가 있다. 달산리로 넘어가는 삼거리가 있다.
매봉 : 특징이 없는 새 형국의 산으로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 골짜기 이름
28개의 골짜기와 재가 있다.
개라울(佳也月 또는 月桂, 좁싸리 고랑) - 솔학골[松鶴동, 장사바위] - 풍덕골 - 방아골 - 남산골 - 성적골(성자골로도 불려짐, 여자의 성기를 닮음) - 초분골 - 중성골(중산골, 무안 박씨 묘에서 僧谷, 족보에서는 僧洞이라는 지명을 발견) - 된재(고개 넘기가 되다 해서 붙여진 이름, 예전에 주민들이 일로 장에 가는데 많이 활용) - 화타골(花朶洞, 무안박씨 박봉철 묘지, 약곡을 藥谷靈地라 표현) - 작은관음골(가마터가 있음) - 큰관음골 - 방아골 - 쩍골 - 범바우(진등이 범의 몸체이고 앞에 있는 바위가 범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족보에는 백호장등으로 표기) - 버텅골(옆의 박민화 묘에는 보통골이라 표기, 지형이 여자의 둔덕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짐) - 청다골(청담골로 불려야, 맑은 물이 많이 흐르고 밑에 못이 있기 때문에) - 어개(족보에는 於開로 나옴. 청다골 시토골 어개 아래를 동네들이라 불렀음, 큰 어개재 너머에 주민들이 경작하는 밭이 있는 데 그곳을 늦은 어개라 함, 어개는 깊숙한 골짜기까지 밭을 경작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인 듯) - 시토골(뚜렷한 의미를 알 수 없음) - 분정골(分頂골 - 산줄기에서 줄기가 나누어진 골짜기, 빈정골이라 했으나 분정골로 불려야 맞을 듯함), 뒷골(마을 뒤라 해서 불림, 이곳에서 가마터를 발견) - 시작골(歲鵲골 - 까치가 울어 새해를 알리는 골짜기) - 청룡등 - 감남골[甘南谷] - 숯구뎅이 - 큰용골 - 작은용골(상여집이 있다) - 서당골 - 북잿등
-. 성적골 주변에 대규모의 맥반석[麥飯石]이 깔려 있음.
석영과 장석이 섞여 보리밥으로 만든 주먹밥 같다고 하여 맥반석이라 불린다. 약석으로도 불리며 원적외선을 방출하여 찜질방, 식기, 의료기 등에서 이용한다.
2. 역사문화적환경
-. 입향조
박실 마을은 김해김씨 金載振(자-行敏, 1609-1670)이다. 그는 영광 불갑에서 세거하였으나 병자호란 등 당시의 혼란을 피하여 이곳 박곡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시류에 흔들리지 아니하며 덕을 기르니 주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약실 마을은 무안박씨 박무원(자-인여, 1585-1672)의 손자인 박진형(자-승백, 호-낙선당, 1660-1741)이다. 공은 조선 개국의 元勳인 풍정 박의룡의 후예로 선대에 해남에서 일로읍 청금성으로 이거했다가 공의 代에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은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원래는 천씨가 살았다 하나 현재는 천씨와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약곡리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김해김씨로 여겨진다.
-. 삼산정
입향조인 처사 ‘박진형’을 기리는 정자로 매봉산, 어유치, 국사봉 등 세 개의 산을 의미하는 정자이다. 입향조의 유덕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그의 7대손인 박민화, 8대손인 박병욱이 중심이 되어 1924년에 처사공의 유지에 지은 정자이다. 그러다 태풍에 파손된 것을 1941년 현 위치에다 재건축한 것이다.
삼산정은 20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독특한 구조물이다. 원래 삼산정 옆에는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고 갈라지면서 죽었다고 한다. 이 당산나무가 있을 때는 당산제 등이 크게 이루어졌으며 제를 올리면서 울렸던 농악은 몽탄면 제일의 솜씨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산나무가 없어지고 마을에 교회(1935년 광주 양림 교회 진공례 전도부인이 건립)가 들어서면서 당산제는 없어지게 되었다.
-. 가마터
작은 관음골과 뒷골의 두 군데가 있다.
지리적인 환경이 가마터를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 즉 마을 앞까지 들어온 영산강 물은 수송로를 확보할 수 있고 깊은 골짜기에서의 연료는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몽탄의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 질 좋은 점토의 흙은 도요지로서의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3. 제언
-. 마을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상품 개발
약초와 약수
-. 방만한 운영보다 주민들이 해낼 수 있는 만큼만
-. 상품에 대한 의미 부여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