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齋舍는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조상의 묘를 수호하고 묘제를 받들기 위하여 산소 아래에나 가까운 곳에 지은 건물이다. 안동지방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재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규모 면에서도 다른 지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혈연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와 환경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재사에 모여 묘제를 준비하고 음복을 함께 나누어 먹음으로써 문중의 결속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지역사회와 다른 가문에 비하여 훌륭한 가문임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향념에는 재사 건축의 특징에서도 잘 드러난다. 재사를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의 중심에는 2층으로 지은 누각 건물이 단연 돋보이지만, 일반적인 누정 건축물과 기능과 용도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번 호부터 몇 회에 걸쳐 누정 건물에 속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재사 건축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으로서의 누정 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또한 안동의 누정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안동 권씨 능동재사 추원루
안동권씨 능동재사는 시조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의 묘제와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재사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골[陵谷]에 자리 잡고 있다.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의 묘제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재사는 조선 효종 4년 1653년에 처음 16칸 규모로 건립하였다. 그 후 숙종 9년(1683년) 관찰사 권시경이 누각인 추원루 7칸을 지었다. 영조 19년(1743년)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고, 1896년에 또 화재를 당해 다시 지었다. 재사가 위치한 능골은 안동의 명산인 천등산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골이 깊고 맑아 명당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능골 뿐만 아니라 서후면 일대는 명당이 많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의 시조 묘소가 다 이 지역에 있으며,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의 묘소와 풍산류씨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의 아버지인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능골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에 안동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권태사의 묘소가 있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으며 재사의 이름을 능동재사라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시조 권행 묘소에 후손들이 시제를 올리기 위해 묘소로 이동하고 있다.
능동재사를 찾아가는 길은 안동 시내에서 풍산읍과 예천군으로 연결되는 34번 국도를 이용한다. 시내를 막 벗어나 안동버스터미널과 안동역을 지나면 송야천을 가로지르는 솟밤다리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면 34번 국도와 919번 지방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다. 능동재사는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봉정사로 들어가는 919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간다. 이 길은 안동을 가장 안동답게 갈무리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지가 산재 되어 있어 볼거리 또한 풍부한 곳이다. 초입에서부터 살펴보면 안동 권씨 복야공파조인 복야상장군 권수홍 공의 단소와 재사를 시작으로 송암 권호문 선생의 종택인 관물당, 단계 하위지 선생을 모시고 있는 창렬서원, 원주 변씨 간재종택, 의성 김씨 학봉종택과 소계서당, 경당 장흥효 선생의 강학장소인 광풍정과 제월대, 안동 장씨 경당종택, 안동 장씨 춘파재사, 안동 권씨 능동재사, 풍산 류씨 숭실재사, 안동 김씨 태장재사를 비롯하여 봉정사와 개목사 등의 전통 사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정체성을 그 어느 곳보다 잘 갈무리하고 있는 곳이다.
능골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시조 권행의 신도비각
919번 지방도를 따라 이런저런 유적지를 둘러보며 능동재사를 찾아가는 이 길은 안동을 발견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존엄의 길이자 안동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무한한 긍지를 느끼며 선현들의 발자취를 배우고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겸양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한 느낌이 들게 하는 생각의 단초에는 안동 권씨 시조인 권태사 권행을 비롯한 안동 김씨의 시조인 김태사 선평과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태사 정필의 묘소와 이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재사를 우리는 이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들 삼태사는 오늘날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을 있게 한 뿌리이자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 고창이란 지명을 안동으로 바꾸게 한 고창전투 승리의 주역들이기도 하며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사라는 벼슬을 받고 안동이란 본관을 사성 받게 된 분들이기에 삼태사와 안동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능골은 초입에서부터 안동권씨 시조 권태사의 신도비각과 하마비를 지나고 그 위쪽에 안동권씨 능동재사와 풍산류씨 숭실재(금계재사)가 우뚝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의 입구에 하마비가 있어서 더 이상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을 만큼 재사가 자리잡고 있는 위용과 기품이 절로 느껴진다. 골짜기는 초입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높아져 골짜기 안에 펼쳐져 있는 논밭은 양편으로 계단식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골짜기는 그렇게 조금씩 위도를 높여가다가 산기슭과 만나고 그곳에 재사가 지어져 있어서 재사에서 바라다보는 주변 산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동네 뒤를 막고 서 있는 야산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능동재사 주변의 산은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 험준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높이를 갖고 있다. 논밭의 경계가 끝나는 위쪽의 산기슭, 한 줄기 바람이 세월을 넘나드는 능골 깊숙한 골짜기의 앞쪽에는 안동권씨 능동재사가 있고 뒤편에는 풍산류씨의 숭실재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시조 묘소에 묘제를 올리기 위하여 진설하고 있다. 진설은 상석에 진설도를 올리고 제수의 위치에 맞게 진설한다.
능동재사는 무덤 속같이 조용하고 한적한 산골짜기인 능골 깊숙한 곳에 그곳의 고요를 온몸으로 느끼며 천년세월을 오로지 안동권씨 문중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재사의 기능뿐만 아니라 동족을 하나로 결속시켜주고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문중인으로서의 자긍심까지 지켜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주초와 기둥에는 문중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고, 추원루의 우람한 위용은 후손들의 가슴 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재사는 건너편 산기슭에 모시고 있는 권태사 묘소를 향하여 동향하고 있다.
사물의 형상(形象)은 형과 상으로 이루어진다. 전통미는 단순히 밖으로 보이는 형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안에 숨은 상을 찾아 드러낸다. 엄숙한 부처의 형을 파괴하여 나타난 우스꽝스러운 부처의 상을 통해 부처의 자애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애불이 아니겠는가? 저 부재 하나하나에 정확한 수직과 수평을 주었다면, 지금의 흥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저 큰 들보며 기둥을 들어 올리고 세우던 사내들의 건강한 근육미를 바로 그 들보와 기둥에서 읽어 낼 수 있지 않은가? 살림집도 아니고 무덤도 아닌 재사는 어차피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디쯤 세워진 우리의 흥일지 모른다. 묘제를 위해 이곳에 모여든 후손들은 생명력이 충만한 이곳에서 죽은 자들과 한바탕 축제를 벌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능동재사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