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이선수님
주 안에서
님을 대하게 되어서 기쁘며,
‘질문과답’을 통하여 복음의 교제를 갖게 됨에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
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입니다. 이 말씀과 성도의 견인의 교리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요? 성도의 견인은 그 의미상 하나님의 perseverance를 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견인으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도들의 삶이 영화의 과정으로 인도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장5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은 마치 받은 구원을 취소할 수 있다고 경고하시는 뜻으로 보일수도 있기에 꼭 그 의미를 알고 싶네요.”
님께서 알고 싶어 하는 요한계시록 2장 5절의 해석적 의미를 통해서 여기에 책망되어지고 있는 말씀이 마치 성도가 받은 구원을 취소할 수 있다고 경고하시는 뜻으로 하시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후에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이 구절이 언급되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의 해석적 의미를 통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요한계시록 2장 5절이 성도의 견인과 상관성이 있는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님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러한 설명을 드리는 것에 의해서 님이 알고자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려다 보니 글이 꽤나 길어지게 됩니다. 하오나, 여기에도 님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음으로 찬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본 답변의 글이 님이 알고자 하시는 것에 도움과 유익이 되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성도(聖徒)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은 영어로는 ‘perseverance of saints’입니다. 그래서 님이 알고 있는 대로 성도의 견인이란 용어에는 perseverance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뜻하는 일반적인 사전적인 의미는 ‘인내(력)’, ‘참을성’, ‘버팀’입니다만, 이 단어가 기독교 용어로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궁극의 보존’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인내심(인내력)’, ‘참음’의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이 인내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행되는 것에서 믿음을 지켜나가심[보존하심]에 있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는 79항에서부터 81항에 걸쳐서 성도의 견인을 다루며, 이것을 ‘구원(얻는 믿음)의 보존’, 또는 ‘구원(얻는 믿음)의 영원한 보장’의 성격에서 설명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79. 참 신자들도 그들이 불완전하며 많은 유혹과 죄에 빠지므로 말미암아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가?
답변 :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끝까지 붙드시는 은혜(견인)를 베푸시는 당신의 예정과 언약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위하여 계속 중재하고 계시며, 성령과 하나님의 씨가 그들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참 신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완전히 혹은 끝끝내 타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켜지게 된다.
80. 참신자들이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과 끝까지 붙드심을 받아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답변 :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그분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계시를 받는 일이 없이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근거한 믿음과 성령께서 약속을 주신 그 은혜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신다. 즉 그들의 영으로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과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켜질 것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81. 모든 시대의 진실한 신자들이 현재 은혜 아래 있으며, 그들이 장차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 언제나 확신되는가?
답변 :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참된 신자들도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점점 더 큰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구원의 확신을 향유하게 되고 난 이후에도 여러 가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정욕, 죄, 시험, 배반으로 인하여 약화되거나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내버려둠을 당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신자들이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늘 같이 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17장의 성도의 견인과 18장에서의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서도 보게 됩니다.
제17장 성도의 견인(堅忍)
1.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빌1:6; 벧후1:10; 요10:28,29; 요일3:9; 벧전1:5,9).
2. 성도들의 이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오는 예정의 불변성(딤2:18,19; 렘31:3)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히10:10,14; 13:20,21; 9:12-15; 롬8:33-39; 요17:11,24; 눅22:32; 히7:25),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요(요14:16,17; 요일2:27; 3:9) 은혜 언약의 본질에 달려 있는 것이다(렘32:40). 이와 같은 모든 것에서 또한 견인의 확실성과 무오성이 나오는 것이다(요10:28; 살후3:3; 요일2:19).
3. 그러나 성도들은 사탄과 이 세상의 시험을 받으며,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부패한 요소가 깊이 퍼지고, 그들을 보존해 주는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함으로 해서 중한 죄에 빠질 수 있으며(마26:70, 72, 74), 그리고 얼마 동안 그 죄 가운데 거하기도 한다(시51:14).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사며(사64:5,7,9; 삼하11:27), 그의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4:30), 그들이 받은 바 은혜와 위로의 얼마를 상실하게 되고(시51:8,10,12; 계2:4; 아5:2-4,6),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사63:17; 막6:52; 16:14), 그들의 양심은 상처를 받으며(시32:3,4; 51:8), 남을 해치거나 중상하여(삼하12:14)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시89:31,32; 고전11:32).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1. 위선자나 그 밖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상태에 있는 줄로 알고서 거짓된 소망과 육적인 억측으로 헛되게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으나(욥8:13,14; 미3:11; 신29:19; 요8:41),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사라질 것이다(마7:22,23). 그러나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신실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을 따라서 힘써 행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요일2:3; 3:14,18,19,21,24; 5:13),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중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다. 이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5:2,5).
2. 이 확실성은 허황된 소망에 근거한, 단순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 그럴듯한 확신이 아니라(히6:11,19)(히6:17,18). 이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벧후1:4,510,11; 요일2:3; 3:14; 고후1:20)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롬8:15,16). 이 영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이 영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우리가 인(印)치심을 받았다(엡1:13,14; 4:30; 고후1:21,22).
3. 절대로 틀림없는 이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참 신자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난관들에 부딪히고 난 연후에야 그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요일5:13; 사50:10; 막9:24; 시88; 77:1-12). 그렇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들을 그가 성령을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색다른 특별한 계시 없이도, 통상적인 방편들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그 확신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전2:12; 요일4:13; 히6:11,12; 엡3:17-19). 그러므로 모든 신자에게는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벧후1:10).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 화평과 희락으로 넘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넘치며, 또한 복종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있고 유쾌하게 된다(롬5:1,2,5; 14:17; 15:13; 엡1:3,4; 시4:6,7; 119:32). 이같은 것들은 확신에서 오는 당연한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이 확신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결코 방탕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요일2:1,2; 롬6:1,2; 딛2:11,12,14; 고후7:1; 롬8:1,12; 요일3:2,3; 시130:4; 요일1:6,7).
4. 참 신자일지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흔들리며, 약해지며 일시 중단될 수 있는데, 이같은 일들은 그 확신을 보존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지거나 어떤 갑작스럽거나 강렬한 시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의 빛을 숨기시어 그를 경외하는 자일지라도 흑암 중에 행하며 전혀 빛이 없게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아5:2,3,6; 시51:8,12,14; 엡4:30,31; 시77:1-10; 마26:69-72; 시31:22; 시88; 사1:10). 그렇지만 하나님의 씨와 믿음의 생활이나, 그리스도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무에 대한 신실한 마음과 양심이 결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확신이 적당한 때에 소생하게 되는 것이며(요일3:9; 눅22:32; 욥13:15; 시73:15; 51:8,12; 사1:10), 또한 그간의 심한 절망에서도 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버티어 내는 것이다(미7:7-9; 렘32:40; 사54:7-10; 시22:1; 88).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성도의 견인은 기독교의 교리로 굳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도의 견인은 칼빈의 5대교리/칼빈주의의 5대강령/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에 의해서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5대교리는 우리말로는 ‘튤립’이라고 불려지는 꽃 이름인 ‘TULIP'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 용어의 첫머리를 결합한 것입니다. (1) T=Total Depravity(전적 타락/부패), (2) U=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3) L=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4) I=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5) P=Pre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5대교리가 모든 이들에게서 수긍되고 수용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칼빈의 5대교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 이것과 반대되는 알미니안주의의 5대교리에 대항하는 것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1560-1609년에 살았던, 우리에게는 '알미니우스'(Arminius)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화란의 신학자로 유명한 야곱 헤르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알미니우스로 그 이름이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당시 개혁교회가 전파한 예정론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하여 심각한 의혹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미니우스가 쿠른헤르트(Dirk Koornhert)의 견해에 동의하여 칼빈의 예정론을 반박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한 제자들이 스승인 알미니우스가 죽은 몇 해 후에 그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5가지의 주요한 교리들을 작성하였습니다. 그 후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에 서 있는 화란 교회가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의 신앙고백을 개혁교회의 교리의 기초로 작성하고서 그 가르침에 따르고 있자 그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5가지의 주요한 교리를 문서로 작성하여서 화란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5대 강령)입니다. 알미니안주의의 5대교리는 (1) Free Will or Human Ability(자유의지 또는 인간의 능력), (2) Conditional Election(조건적 선택), (3) 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보편적 구속 또는 일반적 속죄), (4) Obstructable Grace(저항할 수 있는 은혜), (5) Falling from Grace(은혜로부터의 타락 또는 은혜의 상실)입니다.
알미니아주의의 이러한 5대교리에 대해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돌트에서 있은 회의에서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회의를 통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5대교리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함께 하고는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으로 표명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TULIP'으로 불려지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이 칼빈주의 5대교리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알미니안주의 5대교리 중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은혜로부터의 타락 또는 은혜의 상실 (Falling from Grace)에 대항하는 것에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성도의 견인 교리에 반대되는 견해의 주장인 은혜로부터의 타락 또는 은혜의 상실이 말해져 왔습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이것을 수긍하지 않고, 그래서 이것을 수용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칼빈의 5대교리 중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오늘날처럼 논쟁이 되게 된 시점은 알미니안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비롯된 것이 아닌 그 이전으로 시기가 올라갑니다.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강요에서 이것을 언급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536년에 출판한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훗날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로 확립하게 되는 설명을 하였는데 “선택된 사람은 결코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으며, 이것을 문제 삼은 이들에 의해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 교리를 볼 수 있는 언급을 한 최초의 사람은 히포(Hippo)의 어거스틴(Augustine)입니다. 그는 신자의 구원 예정에 대해 갖는 확신을 말하는 것에서 성도의 견인 교리가 구축되는 주장을 말하였습니다. 허지만 그런 그도 후대에 이르러서는 성도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의 견인 교리는 누구나 따르지 않습니다. 우선 알미니안주의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들을 알미니안주의자들로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자신들을 칼빈주의자들로 말할지라도 이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수긍하지 않고 수납하지 않습니다.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들의 믿음 여부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상실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구원을 취소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고 있는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의 해석적 의미
님은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의 말씀인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를 들었습니다만, 이 구절 외에도 히브리서 2장 1-3절인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란 말씀을 근거 구절로 삼기도 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4장 1-13절에서 보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리고 디모데후서 2장 17-18절에서의 진리의 길을 떠난 후메내오와 빌레도, 디모데전서 1장 19-20절에서의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여 사단에게 내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23-25절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배신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으로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는 말을 들은 가룟 유다 등 등의 구절을 근거로 하여서 성도의 견인을 반대하며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은 것을 상실하고 다시 타락한 자로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근거 구절로 삼고 있는 성경 말씀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즉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시는 것인지를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님께서 제시한 요한계시록 2장 5절에 한정해서 그 해석적 의미를 보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가 이 구절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 구절이 있는 에베소 교회에 주님이 주시고 있는 말씀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1-7)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교회입니다. 에베소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도 바울이 가진 제3차 전도 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제2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를 잠시 방문했었으나(행 18:19) 이곳에서의 본격적인 전도는 제3차전도 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3년 간의 심혈을 기울여 에베소는 물론 인근 지방까지 간접적으로 전도를 하였으며, 이곳에서 전도의 절정기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예루살렘, 안디옥에 이어 제3의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바울 후에 디모데가 이 교회를 잠시 사역했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이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에 주께서는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의 모습으로 대하면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왜 그러하신지요.
에베소 교회는 2-3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와 같이 칭찬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주님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아신다고 하는 ‘네 행위’는 성경 원문에 의한 문맥에 의하면 첫째, ‘네 수고를 안다’는 것입니다. 둘째, ‘네 인내를 안다’는 것입니다. 셋째,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안다’고 하면서 그 모든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은 ‘내가 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네 행위, 곧 네 수고와 인내…를 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하늘의 영광을 입으신 주님은 땅에서 일어나는 교회의 모든 일들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기의 양을 알뿐만 아니라(요 10:14, 27),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인데(요 2;24), 여기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서 일곱 교회 와 관련해서는 이들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보듯이 주님은 각각의 교회의 문제와 상황과 부합된, 단지 어떤 문제만이 아니라 선한 행위뿐만 아니라 악한 행위 등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알고 계신 에베소교회가 가진 행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각각의 행위가 무엇에서 말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 먼저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께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내가 네가 수고한 것과 네가 인내한 행위를 안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서의 언급되고 있는 ‘수고’와 ‘인내’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여기서의 수고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2-3절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에서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와 밀접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에서 볼 때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칭찬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는 것에서의 수고하고 인내를 한 행위는 그들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 따르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행동해 가져나가는 것이었으며,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가해지는 온갖 박해에 의해 어렵고 힘든 상황을 겪는 것에서도 오래 참음으로 주께 가진 믿음에 굳건히 서서 지켜나가며, 이 믿음에서 나오는 주께로부터 공급되고 있는 사랑의 힘으로 주 안에서 한 믿음에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를 섬겨 그들이 주께 가진 믿음을 지켜갈 수 있도록 믿음을 세워주는 수고를 해 나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존 스토트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가 보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그 수고를 설명했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교회가 가진 행위에서 ‘인내’는 성도들이 어떤 현지(現地)의 강력한 반대에 처해 있었을 때 가진 것이었을 것이다. 에베소는 많은 종교들이 만나는 장소였으며, 주(州)내에 있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곳 거주하는 주민들은 아시아의 모녀신(母女神)인 에베소의 위대한 다이아나에 대해 깊은 경이심을 갖고 있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복음 전도 사역을 할 때 대소동이 일어났던 것도 이 다이아나 때문이었다. 당시 은세공업자인 장인(匠人)들은 그들이 만든 은감실의 판매 감소를 염려하여서 바울을 심하게 대적했었다. 비록 사도 요한이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는 바울이 그곳에서 사역을 하였을 지라도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난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황제와 다이아나를 숭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배척하며 심하게는 핍박하는 상태는 여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주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믿음은 신실했으며 충성은 확고하고 변치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이 편지에서 주님은 “내가 네 인내를 안다”라고 말씀한다.
에베소교회는 활동적인 교회였으며,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했다. 그 구성원들은 외로운 자를 환대하며 아픈 자를 간호하며 젊은이를 가르치고 늙은이를 찾아보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분명 몇몇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만들고 수선하고, 바느질하고 뜨개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내었고, 다른 이들은 여가를 이용하여 글도 쓰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조직을 짜기도 했다. 에베소교회는 정말로 근면한 꿀벌집이었다. 그들의 수고는 유명하였다.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지런했으며 양심적이었다.(이런 까닭에 이 편지에서 주님은 “내가 네 수고를 안다”라고 말씀한다.)
(2) 에베소 교회는 또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이런 행위를 주님은 인정하여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았다’는 말은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악한 자들이 뒤이어 언급되고 있는 ‘자칭 사도들’인 거짓된 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냈습니다.” 이를 주님은 칭찬하셨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님이 미워하고 또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미워한 니골라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몇몇 초대 교부들은 니골라당으로 불리우는 자들이 좇는 니골라가 사도행전 6장 5절에서 사도들을 돕기 위해 집사로 뽑혀 임명받은 일곱 사람 중의 하나인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제자가 된’ 니골라이며, 니골라당은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집사로 임명받은 일곱 사람이 온 성도들의 칭찬을 받았던 ‘성령으로 충만’하며, ‘믿음’과 ‘은혜’가 충만했던 자들로서 집사 빌립에게서 보는 대로 사도와 같은 복음 전도의 일을 했던(행 8:5-6, 26-40) 사람이었을 것이기에 참으로 가당치 않은 주장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에서 악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자로 언급하고 있는 니골라당의 니골라는 집사 니골라와 같은 이름의 소유자이지만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서 그리스도인을 미혹하는 일을 한 자칭 사도라 하지만 거짓된 자였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그런 자들을 그들이 과연 주께 믿음이 있는지를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과연 주께 믿음이 있는 것에서 나오는 참이며 따라서 진실한 것인지를 확인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주께서는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라며 주께 있는 그들의 행위를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고 했으며, 현대어성경은 “너는 나를 위해 고난을 견디었으며 낙심하지 않았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의성경은 “더구나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고 지치지 않았다.”고 번역하였고, 공동번역은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해서 견디어 냈으며 낙심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모든 번역에서 알 수 있듯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참고 견딘 것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마 10:22; 막 13:13), 에베소 교회는 과연 그러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주께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데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이러한 주님의 칭찬이 있은 바로 그 뒤에 이번에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이 책망하시는 말씀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이죠.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칭찬에 이어서 이러한 책망을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다음의 의도에서입니다. “나는 나를 향한 너의 모든 행위를 잘 안다. 너는 나를 위하여 믿음의 인내에 있었으며, 또한 내게서 공급되는 사랑으로 너의 믿음의 형제들을 섬김에 아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너는 거짓된 악한 자들을 따르지 않고 그들로부터 네게 있는 믿음을 잘 지켰으며, 그렇게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내 이름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 고난 받을 때 낙심하지 않고 잘 견디었다. 그러한 너[에베소 교회]인데, 그러나 너를 책망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네가 나에 대하여 보인 그 모든 행위가 있어도 정작 네가 처음부터 나에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앞으로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내가 지적하여 알려주겠다. 그것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네가 나에 대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는 것인데,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 곧 주님의 복음을 듣고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일어난, 그래서 주님을 처음으로 사랑한 그 첫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처음으로 사랑을 품었던 주님에게서 사랑이 식어서, 또는 사랑이 없어져서 더 이상 사랑할 마음이 없어서 주님에게서 돌아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를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면 앞에서 그들의 (사랑의)수고와 (믿음의)인내를 알고, 거짓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받는 고난을 참고 견딘 것에 대하여 말하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주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안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대하는 믿음을 안다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행위, 곧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아신다고 하신 주께서 바로 뒤에서는 너희가 나에 대한 사랑이 없고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의 교회가 주님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은 또한 주님에 대한 사랑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즉, 주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둘은 언제나 같이 공존하는 것이요 또한 같이 병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께서는 또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는 에베소 교회가 주께 가진 사랑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떠났다는,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을 섬겨 따르는 믿음에 있지 않다는, 그래서 주님을 배신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배도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요.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그들이 주께 가졌던 언약적인 사랑에 있었던 처음 사랑에 계속해서 묶어 두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라고 처음 행위를 가질 것을 권면하시는 것은 처음에 행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가져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네가 나에 대해 처음부터 가진 그 사랑에 계속해서 있으라’는 것이요, 이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주께서 이러한 권면을 하시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시간 - 세월 - 이 흐르면서 어느덧 그들이 행하는 행위만 남았지 처음에 주님을 사랑하였던 그 열정에 의해서 행하는 행위에서 많이 달라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져서 더 이상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어져서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었으며, 그러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믿음이, 그 사랑이 ‘처음’에서 많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인지요. 주님의 언약적 사랑에 의해서, 그래서 주께 언약적 사랑에 묶여 있는 것에 의해서 주님과 에베소 교회는 둘의 관계성이 계속되어 가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에베소 교회가 주께 가져나가는 일[행위]들이 그야말로 일[행위]로만 남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언약적 관계성에 의한 본분이요 의무로써 행해지고 있는 것이죠. 무슨 말인가 하면요. 가령,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그래서 나는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르니까, 그들과 다른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고 해 나간다.”는 식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후 율법의 본질을 기억하고 그 정신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을 섬겨 경외함에 있는 것이 아닌 율법주의/계율주의로 흘러간 본분과 의무에 의한 외식[위선]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율법을 따르는 행위는 언제나 여전히 지켜 행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다른 것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에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떠나 있는 것에서 율법주의/계율주의에 있어 갔다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맺어져 있는 것에서, 그래서 주님과 교회 간의 언약적 관계가 살아 있는 것에서 본분과 의무에 의한 형식만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에게서 처음 사랑을 지니게 된 것은 그분이 주신 복음에 의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종종 비유하신 바와 같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신부로, 자신을 그 남편으로 비유하신(겔 16:8) 하나 된 몸의 사랑이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소년 때의 우정, 결혼 때의 사랑으로 말하였습니다(렘 2:2) 하나님의 그 사랑이 에베소에도 미쳐 이곳에 있는 하나님이 택정하신 자들을 자신에게로 나아오게 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어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라고 예언하신 대로, 에베소 교회에도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이는 주님을 대하는 에베소 교회가 보여 온 그들의 태도가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디서 잘못되어 문제가 되었는지를 찾아 ‘처음 행위를 가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 이유를 찾아 회개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 전처럼 주님과의 믿음의 관계를 가져나가지 않으면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주님이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권면하시는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는, 대체적으로 에베소교회 공동체에서 처음에는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런 행위들로서 성도 간에 갖는 봉사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을 책임지는 삶이요, 물질까지도 주는 것이 처음 사랑에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행위에 본을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곡해이며,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시고 있는 의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주님이 칭찬하신 에베소 교회가 보인 여러 행위를 볼 때 결코 그런 사랑의 행위를 갖는 것이 부족하거나 또는 그동안 없어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믿음을 가졌던 그 ‘처음 행위를 가질 것’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칭찬을 받는 행위가 많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께 가진 모든 행위에 열심을 가졌을지라도, 그럼에도 에베소 교회가 지적을 받으며 책망을 받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주께 가진 그들에게서 드러난 모든 행위에도 불구하고 뭔가 나사 하나 정도의 또 다른 행위가 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요, 그래서 ‘처음 행위를 가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가 처음 주께 가졌던 ‘그 행위(사랑)’가, 그래서 처음부터 주께 가져왔던 ‘그 처음 행위(사랑)’가 지금은 -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된 시점 - 보이지 않는, 곧 ‘처음 행위(사랑)’를 가졌던 그 ‘처음 행위(사랑)’에 계속해서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처음 사랑’에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있을 것을 권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권면하여 원하시는 ‘처음 사랑’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의 증거를 듣고 그분에게 있은 십자가의 복음에서 나오는 주님이 베푸신 사랑으로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시선을 놓치지 않고 집중하며 사랑에 불타는 열정에 휩싸여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드리신 예수께서 자신의 주님이 되신 것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그렇게 주께 가진 사랑의 열정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주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으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이 알고 계신 모든 행위에 열심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처음 사랑’을 행하였을지라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으로 돌리며 그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에 주께서는 그 처음 사랑에 에베소 교회를 계속해서 있게 하실 것에서 “회개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처음 행위를 가지라.” 라고 권면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처럼 에베소 교회를 ‘처음 행위’, 곧 ‘처음 사랑’에 계속해서 있게 하여 나가시는 것은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주께서 ‘네 촛대를 옮기실 것“이 됩니다. 즉, 에베소 교회를 없애실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께서는 결코 에베소 교회를 그리 하실 수가 없습니다. 자신과 언약적 사랑을 맺은 영원한 자신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처음 행위를 가지라.” 라고 말씀하시고, 그렇지 않을 경우 “네 촛대를 옮기겠다.”는 권면은 주께서 교회를 없애시겠다고 엄포를 놓으시며, 그래서 촛대가 옮겨짐에 있는 교회는 구원을 빼앗김으로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주께 가졌던 ‘처음 행위’, 곧 ‘처음 사랑’에 앞으로도 반드시 계속해서 있어 나가게 하겠다는 주님의 굳은 뜻을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자녀를 둔 부모가 아이가 공부에는 마음을 놓고 딴 것에만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며,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야? 정신을 집중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 아니냐. 처음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고 공부를 잘하더니만 이제는 몸만 학교에 왔다 갔다 할뿐이지 정작 마음은 공부에서 떠나 있고 정신을 빼놓고 다닌다.” 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권면하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커서 나중에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도 쉽게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서야 네 인생이 파멸되는 것 밖에 더 되겠느냐?”라고 주의를 주는 것에서 경고를 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뒷바라지를 하여 원하는 공부를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제발 학교를 충실히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라.” 라고 권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을 말씀하면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먹게 하리라.” 라는 생명의 약속을 주시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은 첫 사람 아담이 살던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를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으로 범죄 하기 전의 아담이 그 생명나무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낙원과 여기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약속된 하나님의 낙원과 생명나무의 과실은 에덴동산과 그 중앙에 있었던 생명나무의 과실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새로운 것으로서 에덴동산과 이곳의 생명나무의 과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재림에 의하여 주님을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이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서 이곳에 있게 될 우리 몸의 부활을 땅과 하늘에 속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 욕된 것과 영광된 것을 비교적으로 말하여 하늘의 것은 땅엣 것에 비하여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임을 말하여 준 바 있습니다(고전 15장).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낙원과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으며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음에 있는, 그래서 영생에 있게 하실 것을 약속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말씀해 주시는 거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모두 결론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교회에 전달될 메시지를 주목하라는 명령 역할을 하면서 예언의 서명 역할을 하며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의 계시를 듣고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귀를 열고 심오한 일들을 듣고 그들에게 임할 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깨달으라는 것인데, 여기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은 귀 있는 자는 듣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들음이 있으며, 깨달음도 같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귀 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깨닫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마 13:11).
요한계시록 2장 5절과 성도의 견인 교리의 상관성
님이여!
이상의 내용에서 님이 보고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요.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말씀하시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가 ‘성도의 견인’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인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5절 말씀이 마치 주께 가진 우리의 믿음을 잃을 수 있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되며,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도가 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그래서 구원을 잃어버릴(상실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뜻으로 보이는 것이겠는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이죠. 요한계시록 2장 5절 말씀은 기독교의 교리 중 구원론에서 ‘성도의 견인’(하나님의 견인) 교리를 굳건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주]이시오, 교회[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엡 1:23). 모든 믿는 자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주님과 한몸인 성도의 관계입니다. 이 교회는 결코 나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나뉘고,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분리되는 일은 ‘만일’이라는 가정과 추측으로도 발생을 생각하거나 염두에 둘 수가 없습니다. ‘만일’이라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란 생각을 갖는 것이 용납되고 용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를 잃어 버려 구원을 상실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요.
요한계시록 2장 5절은 주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이 갖는 문맥적 구조와 그 내용이 지니는 의미에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에베소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님을 위하여 갖는 ‘처음 행위’에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있어온 주님을 향한 사랑에 계속해서 있게 하실 것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이는 말이죠. 성도의 견인에서 말해지고 있는 ‘구원(얻는 믿음)의 보존’, 또는 ‘구원(얻는 믿음)의 영원한 보장’의 성격에서 다루고 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은 에베소 교회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던 처음 사랑을 버리고, 그럼으로써 구원을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서 그 사랑을 해나가면 잃었던 구원을 다시 얻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나 다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또 다시 구원을 잃을 것이고, 그래서 또 다시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만 또 다시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그 사랑을 해나가면 잃었던 구원을 다시 얻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다시 먹을 수 있게 되고…, 이렇게 처음 사랑을 버렸다가 그 사랑을 회복하여 다시 주님을 사랑하다가, 그리고는 다시 그 사랑을 잃었다가 또 다시 찾고, 그래서 구원을 잃었다가 그 구원을 다시 얻다가, 그리고는 다시 그 구원을 잃었다가 또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은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그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께 두고 있는 교회의 믿음, 교회의 사랑, 교회의 구원이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약속인 하나님의 낙원과 생명나무의 과실에 의해서 참으로 견고하게 보존하여 가실 것임을, 그래서 교회에 주신 주님을 향한 믿음이요 사랑이요 여기에 있는 교회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교회의 믿음을 이 교회가 주께 가진 처음 사랑에 의해서 요한계시록 2장 2-3절에서 말씀되고 있는 행위들에 있게 하시는데 이로 인해서 겪게 되는 것인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여 견딤에 있게 하시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가져나감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성도의 견인에서 갖는 ‘견인’(堅忍)이 갖는 의미를 단지 “굳게 참고 견딤”이란 뜻에서만 이해하지 말고, 이러한 견인을 왜 있게 하시는지를 하나님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요 그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이 택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성도에게서 굳건히 보존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은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하였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다시 확인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빌1:6; 벧후1:10; 요10:28,29; 요일3:9; 벧전1:5,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7장 성도의 견인 1항/참조. 대교리문답 79항.
이는 말이죠.
참 신자일지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흔들리며, 약해지며 일시 중단될 수 있는데, 이같은 일들은 그 확신을 보존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지거나 어떤 갑작스럽거나 강렬한 시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의 빛을 숨기시어 그를 경외하는 자일지라도 흑암 중에 행하며 전혀 빛이 없게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아5:2,3,6; 시51:8,12,14; 엡4:30,31; 시77:1-10; 마26:69-72; 시31:22; 시88; 사1:10). 그렇지만 하나님의 씨와 믿음의 생활이나, 그리스도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무에 대한 신실한 마음과 양심이 결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확신이 적당한 때에 소생하게 되는 것이며(요일3:9; 눅22:32; 욥13:15; 시73:15; 51:8,12; 사1:10), 또한 그간의 심한 절망에서도 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버티어 내는 것이다(미7:7-9; 렘32:40; 사54:7-10; 시22:1; 8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4항/ 참조. 대교리문답 81항.
에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견인은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그 확실함을 더욱 공고히 하여, 성도의 견인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깊은 신뢰를 갖고 큰 확신 속에서 우리 믿음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을 따름에 있게 합니다.
답글을 맺으며.....
님이여.
이상으로 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을 마칩니다. 님께서 본 답글을 읽으시고 님이 궁금해 하시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부활하신 주께서 요한을 통해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말씀인 요한계시록 2장 5절의 내용이 갖는 해석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견고성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이 깊은 신뢰를 가지시고 큰 확신 속에서 주께 가진 님의 믿음을 진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굳게 잘 가져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말이죠. (1)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에 있는 ‘니골라당의 니골라’의 현대판을, 또는 서머나 교회, 버가모,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 있는 ‘사단의 회’,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에 있는 ‘이세벨’,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 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의 현대판을 늘 상대하는 속에서 (2)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죽기까지 충성하라.”(계 2:10), “회개하라.”(계 2:16),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계 3:2, 3),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니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고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5, 18, 19) 라고 하신 경고를 하시는 것을 통하여 (3)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계 2:5),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이다.”(계 2:16),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줄 것이다.”(계 2:22-23), “내가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계 3:3), “내가 토하여 버릴 것이다.”(계 3:15) 라고 하신 것에 있게 하지 않으실 것이며, (4)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할 것이다.”(계 2:7),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니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계 2:10-11),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계 2:1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며,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줄 것이다.”(계 2:26, 28),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다.”(계 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에게 기록할 것이다.”(계 3:1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할 것이다.”(계 3:22) 라고 하신 말씀의 약속에 반드시 있게 하실 것이기에 참으로 그렇습니다.
지금 밖은 눈비가 같이 섞여 내리고 있습니다. 눈만 내려 하얗게 소복히 쌓인다고 하면 길거리이든 공원이든지 간에 나가 한동안 흰 눈이 내린 경치에 빠져보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치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차지하며 어느 정도까지 지배하여 갈 수 있겠는지요. 제 마음이 그럴 것이며, 님의 마음도 그럴 것이며,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의 회원이 그럴 것이며, 주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믿음의 형제들이 그럴 것이니, 그것은 주께서 언제나 주님에게로 우리의 마음이 있도록 무릇 우리 마음을 지킴에 있게 하시며, 그래서 무릇 우리 마음이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우리 마음이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보존하심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러한 자의 행복함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한때 그 행위로 인해 칭송받는 신앙인으로서 교회에서 인정받고 주목받으면서 믿음이 연약한 형제 자매를 충고하고 스스로 자고하며 결국 예배의 주인이 되어 판단하고 있던 저를 책망하시던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회고합니다. 그렇게 제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다시금 인도해 내시고 참으로 부끄러운 자아를 성령의 빛으로 조명해 주시던 그 동일한 하나님이 에베소 교회에도 동일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목사님도 감사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너무길어서 어제 오늘 이제야 다 읽었습니다~^^
휴~~~~
등산할때 꼭 정상을정복한기분이네요 ㅋㅋ
질문자의 댓글에 아주 공감이 갑니다~~
우리들에게는 매일 자기부인이 발생하고 자기십자가지는일이 발생하지요~~
참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잘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