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서는 살수 대첩의 수공에 관해서 본 적이 없습니다. 민간 전설에는 그런 내용이 있는 듯 합니다만.
그리고 우문술, 우중문의 9군이 18만에 보급품을 수송한 치중대가 12만이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군대의 편제로 본다면 대략 그 정도의 수치가 나오긴 하겠지만, 30만 5천의 군대가 매 사람마다 100일 분의 군량과 각종 장비를 지게 해서 석 섬이나 되었다고 하는 것과는 모순됩니다.
18만의 병력으로 치중대를 구성했다면, 수군이 1개월도 안되서 군량이 떨어져 주린 기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수의 군편제나 우문술의 병력을 기록한 부분, 둘 중 하나가 오기이거나 왜곡된 기록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초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엔 역사적 사실을 단순 암기로 기억해 버리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암기위주식 교육의 폐해 때문에 그런지 '역사적 사실'에 대해 보통 우리는 항상 '왜' 라는 의문은 생략한 채 결과만을 달달 외우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당당히 유지해 왔다.
버뜨... 이젠 좀 바꿔보자. 단순 암기로 인해 비판이나 반성없이 지나가 버린 우리 역사에 대해 냉철한 분석으로 다시 되새김질 해보자는 의미로 우리 역사에서 너무도 당연시 여겨졌던 사실들을 뒤집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이름하여 '딴지 역사 히떡 바로 세우기 운동"
1탄으로 수당 전쟁 시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살수대첩'에 대해 함 파헤쳐보도록 하겠다. 과연 우리가 달달 외웠던 것처럼 고구려군이 살수(지금의 청청강) 상류에 둑을 쌓아 강을 건너 퇴각하는 수군을 수장시켜 전쟁에 대승을 하게 됐는지... 그 비밀을 까발려 보기로 하자...
1 역사적 사실
구구절절히 수당 전쟁이 뭐니 하는 것은 생략하고 살수대첩이 일어나기 바로 전후의 사정을 잠시 살펴보자.
수양제의 명을 받아 우문술은 9군 30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 때 을지문덕은 압록강 부근에 주둔한 수군에게 위장 항복을 하여 적의 상황을 알아보고 고구려 진영으로 되돌아 왔다.
이 후 고구려군은 싸움마다 패하고 달아나고 하루에 7번을 져주어서 수군을 피곤토록 했다. 그리고 수군은 살수(지금의 청천강)을 건너 평양성 30리 외각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평양성에 있던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신기한 전술은 천문을 다했고, 신묘한 작전은 지리로 다했네, 싸움에 이겨 공은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게나.
란 시를 써 보내고 이후 수군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깨닫고 퇴각을 한다.
퇴각하는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널 무렵, 을지문덕은 상류에서 막아둔 둑을 터뜨리게 하고 수군의 후군을 치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요동성에 도착한 수군은 2,700명이다.
대부분 '살수대첩'에 대해 이 정도의 역사적 지식은 갖고 계실 것이다. 이 전쟁에서 하이라이트는 당빠 을지문덕의 지략이 돋보인다는 '살수대첩'이다. 상류에 둑을 쌓아 도하하는 수군을 깔아뭉게서 세계 전투사에 빛날 대승을 거둔 전투.
근데 이거 순도 99.9999999% 구란거 아니?
2 수나라 군대는 조떄로 행군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 살수에서 수나라 군이 모두 수장이 되려면 9군 30만 5천 거의 대부분이 살수를 도하하고 있을 때 둑을 터뜨려야 하는데 수나라 9군 중 첫째인 1군이 살수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9군은 어디메 쯤 있었을까?
계산을 하기에 앞서 당시 평양성에 진격한 수나라 9군의 편제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1군의 구성은 기병 40대로 1대는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병 총수 4천명이었고, 보병은 80대로 1대는 2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보병 총수는 1만 6천명이다. 그래서 보병, 기병 합계 2만 명으로 1군이 구성이 된다. 그래서 순수 전투병은 18만명이고 여기에 수송, 경비, 병참 부대를 포함하여 30만 5천의 군이 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출정 시 각 군마다 40리 간격을 두고 출발을 시켜서 24군 전군의 길이는 960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1군 20,000명 + 기타병력의 행군 길이는 40리, 즉 16km 정도란 얘기다. 물론 이 거리엔 후미 부대와의 거리도 포함되어있다.
과연 이 병력과 거리의 관계가 중국 특유의 거짓부렁인지 함 계산해 보자. 30만5천의 병력(현 울 육군의 50%)의 행군형태를 현재 2열 종대로 행군했다고 가정하자.(이렇게 가정한 이유는 우리나라 산악 지형과 좁은 길의 특성상 이렇게 행군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0만 5천/2, 즉 15만 2천 5백명으로 이루어진 종대형 행군의 길이가 9x16km=144km이고 앞 사람과의 거리가 1.06m 내외란 얘기고, 이 정도 수치면 행군간 앞 사람과의 거리는 적당하다고 판단되므로 중국 특유의 거짓부렁은 아닌 듯 싶다.
행군 길이는 적당한 듯 싶으니 수나라의 퇴각형태에 대해 함 살펴보자. 수나라 군은 퇴각시 마름모꼴 형태의 방진을 치며 퇴각했다고 한다. 수나라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자연 지형에 기인한 듯 보인다.
우리나라의 자연지형은 산도 많고 길도 좁아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매복공격에 적합하고 수비 쪽에서는 이러한 매복공격이 쉽다. 예를 들자면 기억이 나실런지 모르겠지만 80년대에 TV에 나온 '배달의 기수'에서 우리 국군은 좁은 길 주변의 나무 등지에 숨어있다가 행군 중인 북한군을 냅다 덮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예라 하겠다.
방진으로 이동했을 시 행군 길이를 계산해보자.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35만 전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했다고 가정하고 방진의 형태는 마름모의 네 귀퉁이에 병력이 포진한다고 가정한다.
방진을 통해 행군할 시는 마름모꼴의 진의 형태로 인해 일반 행군 시보다 그 길이가 약 80%로 줄어듦을 알 수 있다. (12명 이루는 방진의 길이는 10명이 1열로 행군하는 길이와 같다) 그렇다면 144km의 80%인 115km. 이 길이는 평양성에서 살수(지금의 청천강) 상류까지의 직선거리보다도 멀다!
강을 도하해야 하는 수나라 군의 입장에선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하류보단 강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중, 상류를 택해 건널 것이다. 그러나 살수대첩이 성립하기 위해선 고구려군은 중, 상류 어느 한 곳에서 둑을 쌓았을 것이기 때문에 수나라 군이 도하할 수 있는 장소는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수나라 군이 도하한 장소는 첨 청천강을 건넜던 장소였을 것이다. 또 첨 건넜을 떈 부교를 이용하여 넘었지만(왜냐하면 수나라 군은 요하 유역을 넘었을 때 부교를 사용하여 넘었다는 기록이 있기 떄문이다.) 재도하를 할 때는 고구려군이 상류지역에 둑을 쌓아 놓아 살수의 수심이 얕아졌기 때문에 부교를 이용하지 않고 건넜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제한 상황 떄문에 윗 그림에서 (1)과 (2)가 도하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지점이다. (2) 지점 이상의 지점은 고구려군이 둑을 쌓아야 할 강 상류 위치이기 떄문에 제한을 받으며 (1)이하의 경우엔 청천강 하류이기 떄문에 도하할 강폭이 넓어 도하하기에 적당치 않다.
한편 둑을 세우는 고구려의 입장에선 우선 둑의 위치가 수나라 군의 눈에 띄지 않음과 동시에 둑을 빠른시간 안에 쌓아야 하기 때문에 강 폭이 좁은 지역을 택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 2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지점은 위 지도에서 핑크빛 원으로 표시된 점이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입장에서 2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는 수나라가 처음에 살수의 어느 곳을 도하해서 내려올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공사를 할 수가 없다는 점(수나라 군이 살수를 넘어 평양성에 머무르다 다시 살수를 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10일에서 3주정도라 한다)이고 두 번째는 둑을 쌓아야하는 지점 모두 2개의 지류가 합해지는 지점이기 때문에 공사가 상당히 까다롭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당시의 고구려의 토목 기술로 이처럼 짧은 시간안에 까다로운 공사조건을 극복하며 둑을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함 다뤄 보자.
위 가정으로 단순 계산해보면 최소한 500x4880x1m3 =2,440,000m3 (ton) 물이 상류 둑에서 수나라 군이 있는 지역까지 손실없이 고대로 와야한다. 그러나 둑의 위치에서 수나라 군까지의 거리는 전혀 고려치 않은 최소의 양이기 때문에 둑에서 수나라 군까지의 거리인 최소 7km, 최대 10km를 흘러갈 양을 계산해보자. 7km일 경우 500x1x7,000m3 (ton)=3,500,000m3 (ton), 10km일 경우 500x1x10,000m3 (ton)=5,000,000m3 (ton)이다.
그렇담 둑이 저장할 물의 양은 최소 2,440,000m3 (ton) + 3,500,000m3인 5,940,000m3 (ton)이고 최대 2,440,000m3 (ton) + 5,000,000m3 (ton)인 7,440,000m3 (ton)이다.
이 정도의 저수량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전용 댐 정도의 크기다. 제일 비슷한 넘은 금강에 있는 무주댐 정도다. 무주댐은 저수량 3,400,000m3 (ton)에서 5,200,000m3 (ton)이고 댐높이는 60m정도다. 당빠 콘크리트고...
그런데 과연 서기 612년 고구려의 토목기술로 흙만을 이용하여 저수량 5백만톤이 넘는 크기의 댐을 10일에서 2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을까?
음...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가능하다고 생각시는 분덜 얼렁 우리나라 건교부에 특차로 가 주시라. 속전속결로 모든 정부 공사를 빨랑 마무리 지워 주시길 구라도리 간절히 기원한다.
혹시 또 아는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둑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만들었다고 치자. 그렇담 이젠 여기선 2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어떻게 실시간으로 수군이 강을 도하한다는 정보를 둑의 고구려군에게 연락했느냐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어떻게 둑을 부수었는가 하는 점이다.
첫 번째 경우엔 둑에서는 수나라 군의 움직임이 보이질 않기 때문에 수나라 뒤에 있었던 고구려 군에서 수나라 군의 움직임을 보고 둑을 부술 정확한 타이밍을 알려줘야만 한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말이다.
당시 통신방법으로 7-10km 떨어진 거리를 실시간으로 연락할 방법 중 제일 그럴 듯한 것은 아마 봉화의 원리를 이용해 산 정상에서 피운 연기로써 연락을 한 것이 제일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봉화가 우리나라에서 문서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이나 삼국 시대에도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실시간 연락은 가능하다고 하자. 그럼 5백만톤을 저장하는 둑을 단번에 터트릴 방법은? 지금처럼 다이너마이트나 화약을 사용하지 않고 기구적인 장치나 인력으로 댐을 한빵에 부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절대 가능하지 않다.
둑을 쌓아주었다고 인정을 해주어도 둑을 부수는 문제에서 또 난제가 발생하고 만다... 허...참... 수나라 깔아뭉게기 힘드네...
허허... 그래도 문제가 하나 남는데... 둑을 터트리고 방류된 약 5백만톤의 물이 수나라 군이 있는 곳까지 오는 시간은 어케 미리 측정 했을까? 고구려군이 아무리 거대한 둑을 10일만에 만들고 한번에 둑을 부술 수 있다 하더라도 제때에 방류된 물이 수나라 군이 도하할 때 도착하지 않는다면 조때는 거다.
상류에서 5백만톤의 물을 방류하면 얼마 후에 내려온다는 것을 고구려 군은 어케 알았을까? 이 시간을 아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실제 똑같은 조건에서 둑을 터뜨려 시간을 측정을 하는 방법과 두 번째는 수식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론 어느 것 하나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자의 경우엔 지금은 가능하지만 이 경우엔 시간이라는 개념이 들어가기 때문에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과학에 도입된 것은 300-400년도 되지 않는다. 그 전까진 시간이라는 개념이 배제된 물리학적 지식이 통용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배경으로 인해 살수대첩에선 시간적 타이밍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학문적 수준으론 계산으로 알아낼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수대첩으로 30만 5천이라는 수나라 군을 수장시켰다면 혹 이름난 점쟁이가 고구려군의 참모로 있었던 게 아닐까?
4 그려 살수대첩은 쌩구라야...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수나라의 행군 형태' 및 '4대 미스테리로 인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둑 쌓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살수에서 30만여만명의 수나라군을 수장한 것은 구라라는 것을 알려드렸다.
그렇다면 살수대첩은 왜곡된 사실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것이 구라도리 생각이다. 단지 너무도 감격적인 승리였기 때문에 과장되고 미화되는 과정에서 부불려 진 것 같다.
좀 찬찬히 살펴보면...
우문술의 30만 5천의 부대가 612년 음력 1월 별도의 보급루트 없이 평양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 때 병사 개개인에게 100일치 식량(대략 쌀 3섬)을 소지하고 가라는 조가튼 명령이 떨어진다.
기병이야 좀 덜하겠지만 보병의 경우 자신의 개인병기 및 천막까지 같이 가져가야 하는 처지에 대부분 병사가 식량을 땅에 파묻고 출발했다고 한다.
살수대첩이 일어나기 바로 전, 수나라 군이 살수를 넘어 평양성 앞에 대기 중인 그 때는 음력 7월. 100일치 식량을 소지한 병사마저 6개월이 지난 그 무렵에는 굶주릴 텐데 소지하지 않은 병사는 더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무더운 우리나라 장마철...
또한 살수 하류로 보급품을 공수하기로 한 수나라 수군이 고구려 군에 패하게 되면서 보급 상황은 더더욱 안좋아졌고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사가 지나갈 길에 있던 곡식마저 다 거두어 평양성 안에 비축해 두었다.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격한 수나라 군은 식량문제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함을 깨닫고 철군을 한다.
병력이 열세였던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원할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굶주린 수나라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마당에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에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지고 고구려군은 신중하게 살수까지 계속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그래서 수나라 군은 고구려의 게릴라전을 피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방진을 치며 퇴각을 하면서 피해를 최소화 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살수에 이를 때 까지 상당수 병력 피해를 입은 수나라 군은 도하를 준비하기 위해 부교를 놓으려던 도중 고구려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되고 도하를 준비하려던 수나라 군은 병력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허기에 지친 병사 덕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 머 이런 식의 스토리로 진행되었을 역사적 사실에 수공으로 수나라 군을 몰살 시켰다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짬뽕되어진 것이다. 약간의 과학적 지식만 갖고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면 이러한 말도 안되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텐데... 씨바로쏘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구라도리는 그것이 궁금하다니까? 아는 분덜 계시면 좀 알려주시라... 또 이번의 살수대첩의 미스테리처럼 혹 역사 속의 미스테리라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바로 주저하지 말고 구라도리에게 멜 주시라. 또 함 까발려 보겠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