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치아 보르자(Lucrezia Borgia)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걸쳐 바티칸의 주인 노릇을 했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이다. 교황은 성직자 신분으로 자녀를 일곱이나 낳았고, 그것은 전임이나 후임 교황들에 비해 그리 별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가 다른 교황들과 다른 점은, 자녀들의 존재를 사생아 위치에 버려두지 않고 공공연히 인정해, 권력의 중심에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아버지를 대신해 교화청의 정사를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에게 돌아온 것은 '교황을 타락케 한 마녀'라는 악명이었다.
부비아코, 아마 그곳에서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삶이 서막을 열었을 것이다. 그녀는 1480년 4월 18일 태어났다. 어머니 바노차 데 카타네이는 힘든 로마 생활을 피해 자주 수비아코에 머물렀다. 루크레이차의 유년 시절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별로 없다. 루크레치아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로드리고는 막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었다. 그 무렵 루크레치아는 동시에 두 남자와 약혼했다. 늘 그렇듯이 아버지가 벌인 정치게임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열여덟살인 조반니 스포르차와 처음 결혼했다. 이 결혼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그 후 그녀는 비셀리에의 공작 알폰소 다라고나와 두번 째 결혼했다. 이런 약혼과 결혼으로 교황의 동맹정치는 정착되었다.
가끔 루크레치아는 알렉산데르가 '집에' 없을 때, 로마 교황령의 정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스폴레토에 교황의 트가로 갔던 것도 그녀가 공식 책임을 지는 일을 했다는 의미이다. 루크레치아가 열아홉살이 되었을때 스폴레토에서 보낸 몇 달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때 남편 알폰소 다라고나와 깊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작은 밤중에 로마의 어두운 골목에서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살인자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알폰소는 겨우 집으로 기어올 수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남편을 극진히 간호했고, 남편이 독살당할까봐 자신이 직접 요리를 했다. 알폰소가 점차 회복되어갈 무렵,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에게 고용된 것이 거의 확실한 살인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환자의 방으로 들어가 루크레치아를 밖으로 내보내고,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사이에 그녀의 남편을 침대에서 교살했다. 루크레치아는 분노와 슬픔으로 제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범인들을 찾아 처벌해달라고 요구하고 자신은 로마의 북서쪽에 있는 네피 성으로 들어갔다. 이 시절 루크레치아는 편지에 "대단히 불행한 여인 루크레치아"라고 서명했다.
그 사이 루크레치아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녀는 마침내 로마로 돌아왔는데, 다시 삶의 의욕으로 가득차고 쾌활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기 운명의 고삐를 직접 잡았다. 그것이 변화였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페라라의 세습 공작인 알폰소와 결혼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취했던 수동적인 자세를 버렸다. 페라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바티칸과 로마, 허영의 극치를 이루는 그 모든 서커스를 뒤로 하려는 것 같았다. 그 후 그녀는 알렉산데르의 죽음 후에 오빠의 모험에 관한 소식과 그가 투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루크레치아가 다시 한 번 코르푸스 도미니 수도원으로 돌아갔을 때, 도시의 모든 시민은 공작부인이 새로운 충격을 받아음을 알게되었다. 루크레치아는 막 임신했을 때 오빠의 부음을 들었다. 그녀는 이 소식을 침착하게 받아들였다고 당대인들은 전한다. 그 사이 그녀는 폐라라의 지배자인 공작의 부인이 되었고, 그녀가 수행해야 할 궁정의 의무에 완전히 매여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오빠처럼 그녀의 인생까지 망치지는 않았다. 페라라의 공작은 그녀와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크레치아가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스스로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교황의 영향으로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공작은 결혼을 다시 무효로 할 수도 있었다.
루크레치아가 아버지와 오빠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자 희생자였던 시절이 있었음은 이미 오래전에 잊혔다. '혼인정치로 권력을'. 이 원칙은 봉건주의 시대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형태였으며 결코 보르자 가문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루크레치아는 도구도 희생물도 아니었다. 그녀는 페라라 궁정에 빛과 온정을 주는, 로마출신으로 자의식이 있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황의 딸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서른아홉살에 산욕열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인생은 이탈리아의 다른 귀족 여성과 별반 다름이 없으며, 아마도 역사서의 각주에서나 읽을 수 있는 인생이었다. 그녀가 교황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그러나 여기 페라라의 묘 앞에서 그녀를 회상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와 잠자리를 같이하해 악마를 낳았다는, 근칭상간을 한 창녀의 이야기가 당시에 있지 않던가? 그녀는 심지어 아버지의 아이까지 가졌다고 하지 않은가? 바티칸에서 열린 한 관란의 연회에서 고급 매춘부 50명이 나체로 촛대 사이를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밤을 주워 모았을 때 그녀 역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가 누군가의 재산을 착복하기 위해 꾸민 독살 사건에도 연루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플로렌츠의 신학자인 토마소 토마시는 《라 비타 델 두카 발렌티노 : 발렌시아 공작의 생애》라는 저서에서 교황의 짐을 내려주면서 그의 자식인 체사레와 루크레치아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돌렸다. 여자, 곧 루크레치아를 통해 사탄은 교황을 지배하게 되었다. 악마는 여자를 통해서만,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교황은 딸 루크레치아와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가 교황이 되었을 때, 루크레치아가 겨우 열두 살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빅토르 위고는 1831년 발표현 《루크레치아 보르자》라는 희곡에서 교황의 딸을 오빠 휘하의 용병대장을 유혹해 독살하는 여자로 등장시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사생아 아들 한 명도 독살된다. 그녀는 해독제를 써서 아들을 살리려고 하지만, 아들은 사악한 어머니의 손에 살아나고 싶어하지 않고, 그녀 역시 그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알렉상드르 뒤마도 아버지와 오빠와 성관계를 맺는 루크레치아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악마들의 삼위일체' 이런 전설을 20세기에도 계속되었다. 루크레치아의 경우, 언젠 다채로운 인물을 기대하는 문학이 전설의 전달자 구실을 했다. 그리고 통곡소설과 전설의 모티브는 우연의 영향을 받으며 계속 변화하고 발전한다 당사자를 제거하거나 깎아내리기 위해 시작된 비방이 이제는 나쁜 험담을 즐기는 끝없는 욕구로 변해 그것이 이야기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 아래의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 한 여성의 초상. 바르톨로메오 다 베네티아의 작품으로 루크레치아
의 초상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역사의 비밀2》,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오늘의 책, 2001
('루크레치아 보르자, 교황의딸, 바티칸의 마녀'를 읽고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