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원 李基源 (1882 ~ 1963)】 "27결사대, 친일 매국노들 처단 계획 참여"
1882년 11월 16일 서울 낙원동(樂園洞)에서 태어났다. 인쇄소 점원으로 일하였다. 1919년 27결사대의 단원이 되어 고종 국장일에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고, 군자금 모집 활동도 전개하였다.
27결사대는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서 온 이탁(李鐸)의 주도 하에 조직되었다. 평안남도 성천(成川)의 대부호였던 이탁은 나라가 망하자 가산을 모두 팔아 서간도로 망명하고, 토지를 구입해 학교를 세워 이주 한인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는 한편 2세들을 대상으로 인재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넘어 온 한인청년 26명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27결사대는 1919년 3월 3일 예정되었던 고종의 인산일에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을 첫 번째 활동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4개 조로 나누어 3개 조는 2월 24일부터 시차를 두고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고, 나머지 1개 조는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에서 이미 약속되어 있는 무기를 받아 서울로 합류하기로 하였다.
3개 조는 2월 26일부터 전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다. 대장 이탁은 우선 숙소를 정하고 이번 거사를 위한 현지 조력자를 찾아 나섰다. 이때 이우영(李宇榮)을 비롯한 4명의 동지와 함께 결사대에 가담하였다. 현지 대원까지 충원되어 자신감을 갖게 된 결사대는 국장 행렬이 지나갈 경로를 사전 답사하며 거사 계획을 면밀히 세워갔다. 하지만 3월 3일 예정되었던 무기가 도착하지 않았고, 무려 12일이 지난 3월 15일에 8정의 권총과 수백 발의 탄환, 단도 등이 도착하였다.
상당 기간 준비하고 계획했던 거사를 실행하지 못한 대원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기회가 올 때까지 다른 애국적 사업을 찾아 실행하기로 하였다. 우선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에 그려진 태극기가 퇴색되어 있는 것을 다시 새롭게 칠해 밝게 보이도록 하였고, 독립문과 종각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광무황제 시해와 관련된 매국노들의 죄악상을 알리는 성토문과 일제 침략자들의 응징을 알리는 경고문 등을 부착하였다. 서울 곳곳에 부착된 많은 양의 성토문과 경고문은 당시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한 결사대와 함께 활동 자금과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군자금 모집조는 상황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먼저 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박기한(朴基寒)과 한 조가 되었다. 4월 20일 밤에는 조원들과 함께 인사동에 거주하는 부호 한봉취(韓鳳翠)의 집을 급습해 120원을 모집하였다. 이어 4월 26일에는 차병제·박기한·박진태(朴鎭台)와 한 조가 되어 돈의동에 사는 김종근(金宗根)의 집을 기습하고 10.000원을 군자금으로 납부하라고 종용하였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5월 2일 3,000원을 납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철수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27결사대의 대담한 활동이 발각되어, 5월 5일 종로경찰서 일결에 대원 손창준·이우영·안경식(安景植)·박기한·박진태·차병제 등과 함께 붙잡혔고, 이후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 일로 1921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의 1심을 거쳐, 3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문서위조행사, 사기 혐의로 징역 6년(미결구류일수 중 4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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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원 군자금 모집 관련 재판 보도(『동아일보』 1921. 3. 12)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