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행
한평생 살아오면서 세상의 한 귀퉁이에 숨어 버리고 싶은 적이 있든가요?
잘나지 않았기에 으스대지 않았고 못나지 않았기에 부끄럽지 않았던 평범한 인생이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여러 사람들과 벗하며 재미나게 살고 있다는 혼자만의 자부심으로 살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아들에게 들려온 충격적인 얘기가 스스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잠행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손과 다리의 마비 그것이 경추에 생긴 종양이 원인이라는 대학병원의 진단이 내려졌을 때 상상하기 어려운 분노와 공포가 동시에 밀려오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충격 속에 빠져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밤낮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견딜 수 없는 것은 나에게 내려진 형별 같아서 하늘을 원망하고 울고 싶었지만, 아비라는 단 하나의 무게 때문에 냉정해야 했고 솟아날 구멍을 찾아 고뇌해야 했기에 스스로 용기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정신을 들게 했다.
내 아내는 용감했다.
한 번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여준 사실이 없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힘내자고 오히려 흔들리는 나를 위로함으로써 중심을 잡고 있음에 감사했다.
한가지 가진 믿음은 살아오면서 기억속에 또렷이 남는 잘못은 하지 않았다는 자신에 대해 당당함이 버팀목으로 자리 잡고 있어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중심에는 사실 내 아내의 흔들림 없는 의지가 가장 큰 힘이 됐다.
대학병원 의사의 건방진 행동에서 수술 날짜를 잡고도 다른 병원을 택했던 이유는 서울과 지방의 의료기술을 차이 때문이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얘기하는 모든 것들이 잘못된 오진일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고 불편한 의사의 행동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의 인성에서 느껴지는 오만함이 싫어 머물고 싶지 않았다.
지난 이야기지만 만약 그곳에서 수술을 진행했다면 할 수 있었을지, 하고 난 후 같은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남는 것은 수술 날 즈음 그들은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행사를 스스럼없이 했기 때문에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손에 진땀이 고인다.
운명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지 모른다.
쉽지 않다던 병원에 입원이 가능했던 것은 지인들의 도움 때문이지만 그 병원과의 연이 닿을 수 있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처음 의사를 만났을 때 대학병원에서 받은 자료를 검토한 의사는 확신은 할 수 없으며 수술을 하여 결과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으며 수술 후 치료절차에 대해 차분하게 일러줘 마음이 무지 편하고 왠지 모르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통합병동에 입원하고 일주일만에 수술 일정이 잡히고 10시간 30분 동안 수술을 받아 다시 그 병실로 돌아왔어도 코로나로 인해 만들어진 시스템 때문에 만나지 못했으나 수시로 환자의 상태를 카톡으로 알려 어느 정도의 경과를 알지만, 맨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불안하고 간혹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기쁨과 두려움을 전해주는 통로여서 한참 동안은 울리지 말았으면 하는 엉뚱한 상상을 꿈꾸며 살았다.
수술 후 한 달이 지나 재활 병동으로 옮겨야 한다며 간병인을 구하거나 가족이 병간호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본격적인 병간호를 하기 위해 병원에 가 4주간의 재활을 무사히 마치고 거의 완치되어 퇴원한, 그 두 달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힘겹고 무서운 시간임은 틀림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가장 무서워 한 것은 순서의 뒤바뀜이다.
만약 아들이 첫 번째 병원에서의 진단처럼 경추종양이라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그 뒤 발생할 끔찍한 일들이 나를 견딜 수 없는 공포와 고통 속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닐 거라는 막연한 기대, 아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은 결국 종양이 아닌 특이한 염증이라는 결과치를 받아들고 순서의 바뀜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며 감사했던지.
인천을 제집 드나들 듯이 다니면서 요통이 심해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견디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다름 아닌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직 완치되지 않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감사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오랜만에 꿀맛 같은 저녁 식사를 하는데 마음속에는 진심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일련의 일들이 생겨나고 진정되는 국면에서 나는 숨고 싶었다.
두렵고 무서워서.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의욕도,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목놓아 불러보고팠던 노래도 할 힘이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이것은 여태껏 살아온 나름의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무기력증에 헤매고 있다.
그냥 살아있으니 숨을 쉬고 배가 고프니 밥을 먹을 뿐이지 무엇 때문에 이런 반복된 습관들을 유지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없어졌다.
어떤 것에 대한 내 생각이 멈춰버렸고 좋고 싫고에 대한 마음마저도 내려놓아 흘러가는 시간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해보고 싶은 욕망 또한 없다.
단지 나도 모르게 석양을 품은 서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참 하늘이 곱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의미 없는 미소를 짓는 행동만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사실은 잠행하고 있다.
나라고 하는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욕도 가지지 않고 그냥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고 말을 잃은 지 한 달이 되어갔다.
가끔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아 평소처럼 화구를 챙겨 가지런히 책상에 놓고 그림을 그리려고 준비를 해봐도 그다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았다가 책상 앞을 떠나고 만다.
꼭꼭 숨어있는 인생 같다.
내가 가진 흔적들이 드러나면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오랜 시간 동안 옥죄고 있는 이유는 진이 빠지고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말하고 싶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길이 어쩌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부대며 살아가는 인생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마주치는 얼굴들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내 생각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고 허허롭다.
시나브로 새로운 감정과 생각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은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화구를 챙겨 평소 취미생활을 하던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문득 떠오른 순간 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는 못해도 에너지가 살아나고 있음을 안다.
며칠 동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책상에 앉을 용기는 내지 못하다가 세상에 존재하면서 잠행을 하는 나 자신의 무력감이 한참 동안 서글퍼 혼자 펑펑 울고 말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의미가 없다손 치더라도 여기 멈출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몇 번을 시도한 끝에 드디어 글을 쓰고 있다.
극한의 고통과 무서움의 끝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이 그냥 고맙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어떤 것도 고맙지 않은 것이 없다는 새로운 사실 앞에 고개 숙이고 감사하는 마음만 가득하다.
사실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가진 이기심 때문에 타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든 말든 모든 것은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 요즘 생각이다.
원망과 미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존재하리라고 믿고 싶은 이유는 사건과 사고는 만들어지고 수습되는 가정을 겪을 뿐이지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이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버리니 용기가 생기고 오늘처럼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들기는 행복이 있어 좋다.
좋고 싫은 것은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는 오만함일 뿐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다.
있으니 존재하는 것이요. 없으니 사라진 것일 뿐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내 어리석은 생각을 멈추니 그냥 감사하고 고맙다는 생각만이 온전히 존재한다.
누가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내가 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길가에 내동댕이 처진 돌멩이도 존재의 의미가 있고 내가 요즘 들어 좋다며 헤벌쭉 웃고 바라보는 서쪽 하늘 석양도 바라보지 않았다면 존재가치를 몰랐겠지만 바라봄으로써 감사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겸손하게 살고 싶어진다.
나대거나 으스대며 살아오지 않았지만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 고요를 맛보며 살고 싶어진다.
내가 쓸 수 있는 작은 휴지 한 조각도 필요한 순간이 있어 고맙듯이 불편한 사람도 그냥 있을 자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고맙고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차츰 정상을 회복해가는 아들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 생각을 포함하지 않고 그냥 바라본 기억은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기억은 없지만, 그냥 바라보고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무심을 느끼면서 감사하고 고마워한다.
산다는 게 뭔지 잘 모른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얘기를 들어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는데 순서의 바뀜이 무서운 공포로 다가왔듯이 그냥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였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나는 그냥 살고 싶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은 접어둔 채 보이는 모습만 기억하면서 순간 함께였음에 감사하고 고맙다며 살아갈 것이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차츰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걱정하고 격려해준 모든 분들께 지면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덕분이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