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과테말라 출신의 민권운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 노벨평화상 수상
멘추(Menchu Tum, Rigoberta, 1959~ )는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과테말라의 여성 인권운동가이다. 1959년 과테말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농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지하 조직인 농민연합위원회 일원으로 인권운동을 펴다 피살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79년 캄페시노 단결위원회에 가입하여 인권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일에 착수하다가 어머니가 처형되자 1981년 멕시코로 탈출하였다. 전세계에 중남미 인디오들의 참상을 알리는 일에 힘을 썼으며 동시에 과테말라의 전위 조직과 농민연합위원회를 후원하였다. 유엔 원주민문제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을 펼쳤으며 유네스코 평화교육상, 프랑스 자유인권옹호위원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199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노벨위원회는 사회적 정의와 인종·문화간의 화합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 그녀에게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저서로는 가족사와 함께 생활 경험을 토대로 한 자서전 《나, 리고베르타 멘추 I, Rigoberta Menchu》(1983)가 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영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남미의 참혹한 현실을 전하는, 반권력과 인디오 복권을 위한 투쟁사로서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 /naver
[1981년] 제1회 세계 식량의 날
"1981년 10월 16일은 제1회 세계 식량의 날이다.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는 인류를 기아와 영양실조 및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연례적으로 범세계적인 행사를 가짐으로써 식량에 대한 관심 및 인식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FAO 창립 36주년 기념일인 1981년 10월 16일을 제1회 세계 식량의 날로 정했다.
오늘날의 식량 생산은 인구 증가에 대한 식량 생산의 상대적감소, 이상 기온으로 인한 작황의 부진, 공업화 및 도시화로 인한 농경지의 감소, 식생활 패턴의 고급화, 식량 생산국과 소비국간의 지역적 편재로 인한 식량 수급의 불균형, 식량의 무기화 추세, 농업을 경시하고 공업을 중요시하는 의식구조의 변화 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매우 심각한 국면에 처해있으며, 앞으로의 장기적인 전망 역시 어떠한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밝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개발도상국에는 약 5억의 기아 인구가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반면, 선진국은 영양 섭취의 과잉으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면도 존재하고 있다.
[1979년] 서울 성수대교 개통
← 성수대교의 야경
서울 성동구 성수동 뚝섬 수원지앞∼강남구 압구정동 간을 잇는 한강의 11번째 다리인 성수대교가 1979년 10월 16일 개통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의 강남북을 잇는 성수대교 준공식에 참석, 인근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통테이프를 끊고 시공업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총공사비 1백16억원을 들여 지난 1977년 4월에 착공, 2년6개월 만에 완공된 것으로 길이는 1천1백60m, 너비 19.4m의 4차선 규모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트러스 공법에 의한 다리였으며 당시 한강다리로서는 가장 긴 것이었다. 성수대교의 남-북단 진입로에는 6∼8m 폭의 입체교차로를 각각 설치, 교통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1994년 10월 21일, 다리의 5번째와 6번째 교각이 내려앉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있어 기존의 다리를 허물고 1997년 새로운 성수대교를 건설하여 통과하중이 1등급으로 향상됐다. /조선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교황으로 즉위
재위 34일 만에 심장병으로 돌연사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1세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바티칸 추기경회의에서 폴란드인인 카롤 보이티 추기경이 제265대 로마 교황으로 1978년 10월 16일 선출됐다.
비(非)이탈리아인이 로마교황에 선출된 것은 1522년 이후 456년 만의 일이었다. 공산권인 폴란드에서 교황이 선출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두번째였다. 58세라는 나이는 1846년 교황선출 이래 가장 젊은 나이였다. 또 요한 바오르2세는 제2차 세계대전중 반(反)나치의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여할 정도로 정치경험도 풍부하고 7개국어에 능통했다.
다음날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린 취임축하 미사에서 새로운 교황은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고 약자구제에만 중점을 두겠다"고 연설했다. 신임교황은 자신을 요한 바오로 2세로 명명, 인권옹호를 다짐했다./조선
[1962년]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국교수립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1962년 10월 16일에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3년 7월에는 주(駐)사우디아라비아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고 1975년 4월에는 서울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비동맹중립외교노선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친서방정책을 펴고 있어 북한과의 수교는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는 경제기술협정(1974. 7)·문화협정(1975. 4)·항공협정(1975. 11) 등을 체결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3년 12월 한국 민간기업들의 진출이 시작된 후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해외건설 부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으로 평가되어왔다. 그동안 한국업체들이 시공한 건축구조물로는 현대건설이 1976년 6월부터 3년 6개월 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한 주베일 산업항을 비롯,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단지(1978. 9~1986. 10), 국방항공성건물(1980. 5~1986. 4) 등이 손꼽힌다. 이들 건설업체 외에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지부와 60여 개의 한국상사가 진출해 있다. 한국으로부터 철(鐵)구조물·섬유·기계·철강·전자제품 등을 수입하며 석유를 수출한다. 1991년 11월말 현재 대한수입 8억 7,686만 달러, 대한수출 29억 5,877만 달러가 기록되어 있다. 한국인 체류자는 1991년 6월에 3,802명으로 집계되었다.
[1962년]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사망
← 가스통 바슐라르
1884년 6월 27일 ~ 1962년 10월 16일
구조주의의 선구자이며 시론·이미지론으로 유명한 가스통 바슐라르가 1962년 10월 16일 사망했다.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 가스통 바슐라르는 과학적 진리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부정하고, 과학적 진리가 인간 이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능동적 이상주의'를 내세워 과학인식론에 혁명을 가져온 과학철학자다.
바슐라르는 1938년 '불의 정신분석'을 출간, 과학적 인식론에서 출발해 문학에 관한 연구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을 경계로 바슐라르는 과학적 이성에서 시적 상상력으로 관심을 옮겨 상상력의 역동성과 창조성에 주목한다.
그는 이후 문학상상력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리는 연구서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현대문학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바슐라르의 후기 저술에 속하는 '공기와 꿈-운동에 관한 상상력'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외에도 '공간의 시학' '물과 꿈' '몽상의 시학' '불의 정신분석' 등의 저서가 있다. /조선
[1960년] 작곡가 현제명 별세
← 홍난파와 더불어 서양음악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현제명
“해는 져서 어두운데...”(고향생각) “배를 저어가자 험한...”(희망의 나라로)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그 집앞). 이처럼 친숙한 곡을 우리에게 남긴 작곡가 현제명이 1960년 10월16일 향년 58세로 숨을 거뒀다.
호는 현석(玄石). 대구 출생. 계성학교(啓聖學校)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우며 합창단활동을 겸하였다. 1923년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음악교사를 지낸 뒤 미국에 유학, 28년 시카고 건음악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음악부 주임으로서 합창부․관현악부를 조직하고 음악연주회․음악강습회 등을 여는 등 음악보급에 힘썼다. 29년 귀국독창회에서 자작 가곡도 노래하였으며 31년 작곡 제1집, 33년에는 제2집을 발간하였다. 같은 해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45년 고려교향악단 및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경성음악학교가 서울대학에 통합되자 46년 서울대학교 초대 음악대학장이 되었다. 53년 한국음악가협회를 조직하고, 54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57년 시카고음악대학에서 음악박사학위를 받았으며, 60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내세운 <문화정치>에 상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홍난파(洪蘭坡)와 함께 민족음악개량운동을 펼치지만, 그의 이런 활동은 식민지 치하에서의 민족개량음악운동의 근본적인 한계점과 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을 겪으면서 중일전쟁 이후 친일음악운동으로 변질되었고, 해방 이후 친일 전력에 대한 한마디 사과나 반성도 없었고, 70년 죽을 때 까지 영향력 있고 강력한, 양악계(洋樂界)의 대부로 군림했다. 작품으로 오페라 《춘향전》 《왕자호동》, 가곡 《고향생각》 《그 집앞》 《산들바람》 《희망의 나라로》 《바다로 가자》 《여름저녁》 《진달래》 등이 있다./조선
[1945년] 국제식량농업기구 설립
1945년 10월 16일, 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인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가 창설되었다. FAO는 1943년 5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식량농업회의를 모체로 하여, 1945년 10월 캐나다의 퀘벡에서 제1회 총회를 열고 창립되었다. 이 기구는 인류의 영양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도모하고, 농업·임업·수산업 등의 생산물 증산 및 유통의 효율성 증진, 농촌의 생활상태 개선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은 인구증가 대비 농업생산량은 감소하는 추세이며 생태계 오염과 자연자원의 황폐화로 식량생산에 위기가 오고 있는 상황이다. FAO는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의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기 위하여 각종 기술원조, 식량생산에 관한 통계연감발행, 식량수급 조정, 공동협력 증진 및 투자촉진을 통하여 개발도상국을 직접 지원하고 있다. 회원국은 2002년 현재 183개국이며, 한국은 1949년에 가입했다.
[1945년] 이승만 박사 환국
일제하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기 시작했다. 미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이승만 박사가 미군 군복을 입고 김포공항에 내린 것은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였다.
10월 4일 군용기편으로 워싱턴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괌을 거쳐 12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일본 체류 중 하지와 회담했으며 맥아더와도 회동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미 군정청은 그를 극진하게 예우했다. 조선호텔의 스위트룸을 배정해주었으며 리무진을 전용 승용차로 내주었고 무장 헌병이 그를 호위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중국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도 해방 3개월여 만인 1945년 11월 23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조선
[1928년] 독립운동가 박용만, 북경에서 피살
← 네브라스카 링컨시 한인 학생 기숙사의 박용만, 1911년
박용만(朴容萬, 1881년 ~ 1928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언론인이다. 호는 우성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미국으로 가서 헤이스팅스 대학교에서 정치와 사관학교 과목을 공부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을 창설하고 이듬해 《미국 혁명사》를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에 참석하였으며, 《태평양 시사》를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19년 길림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의군부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삼일운동에 관련된 문서를 편집하여 'True Facts of the Korean Uprising and the Text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etc'라는 책자를 발행하고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조직하였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듬해 군사운동의 근거지 확충을 목적으로 베이징에 대본공사를 설립하는 한편, 1927년 초등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의 국어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8년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원 이해명에게 암살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위키백과
[1910년] 동물생태학자·교육자 최기철(崔基哲) 출생
1910. 10. 16 충남 대전 ~ 2002. 10. 22 서울
1941년 이후 한국의 과학교육 및 자연보존운동을 선도했다.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고(1931), 일본 문부성 시행 교원검정시험 동물과에 합격했으며(1935), 미국 피바디대학과 밴더빌트대학교(1957), 우즈홀 해양연구소(1958)에서 동물생태학 및 이매패의 인공 방란(放卵)을 연구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66). 순천공립보통학교·전주사범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청주사범학교와 충주사범학교 교장을 거쳐 서울대 생물교육과교수를 역임했다. 그밖에도 천연기념물 보호위원, 문화재위원, 홍도학술조사단 단장, 한국자연보존위원회 위원, 한국과학교육학회 회장, 한국동물학회 회장, 한국내수자원개발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93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1972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바지락의 치패에 천공(穿孔)하는 복족류에 관한 연구〉(1962)를 비롯해 이매패의 조기성장, 생태 및 증산에 관해 다각도로 연구했다. 1966년 이후에는 대이리 동굴·성류굴의 동물상, 1968년 이후에는 담수어의 지리적 분포에 관해 연구했으며, 5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정년퇴임 이후(1976~89) 한국 담수어의 전국 분포를 조사하여 〈각 도별 담수어편〉(8권)을 출판하고, 〈한국담수어 분포도〉(1989)를 완성했으며 〈한국담수어도감〉(1990)을 저술했다. 〈동물생태학〉을 비롯해 교과서 5권과 〈철부지〉·〈민물고기를 찾아서〉 등 7권의 책을 저술했다.
[1907년] 지리학자 육지수/陸芝修 출생
1907. 10. 16 서울~1967. 6. 28 서울.
호는 석전(石田). 일본 제8고등학교를 거쳐 193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이어 3년간 도쿄제대 잠사경제연구실 조수로 근무했다. 1936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명륜전문학교, 평양사범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51~54년 6․25전쟁 때에는 재일본 연합군사령부 민간정보교육국 편수관으로 근무했다. 1955년 4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부임, 1958년 지리학과를 창설하여 죽을 때까지 봉직했다. 1960년 학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1964년에 한국사회사업대학(지금의 대구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지리학․인구학․통계학을 주로 강의했고, 특히 잠사업․자원론․입지론 분야에 연구 업적을 남겼다.
[1902년] 프랑스에서 지문(指紋)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택
← 뉴욕경찰서에서 지문을 채취당하고 있는 독일인들. 미국에서는 헨리식 지문법을 채택해 제1차 세계대전 후 외국인에 대한 인종 조사를 위한 지문날인을 실시했다.
프랑스에서 지문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용돼 사건해결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문이 개인 식별상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은 1880년 영국인 의사 홀즈였다. 같은해 인도에서 근무하는 영국인 하셀도 그 연구를 과학잡지에 보고했다. 지문이 처음으로 범죄수사에 채용된 것은 런던 경찰 헨리로 그는 1901년 헨리식 지문분류법을 확립했다. 이 날 프랑스가 채용한 방식은 인류학자로 파리경찰서 감정국장 베르디욘이 완성한 베르디욘 방식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으로 이 방법은 과학적 수사를 한단계 더 발전시켰다. /조선
[1888년] 미국의 극작가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출생
1888. 10. 16 뉴욕 시~1953. 11. 27 보스턴.
1888년 10월 16일 브로드웨이 모퉁이의 호텔 바레트하우스 236호실에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이 태어났다. 1906년 프린스턴大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퇴학당한 그는 여러 일에 종사했다. 1910년부터는 남아메리카 등지를 방랑하다가 화물선의 선원이 되어 뉴욕으로 돌아왔다.
1912년 폐병으로 요양하던 중 J. 스트린드베리의 작품을 읽고 근대극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게 되어 극작가를 지망하게 됐고, 이듬해 단막극을 집필하였다. 1914년에는 하버드大에서 베이커 교수의 지도로 연극을 연구, 1916년 여름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프로빈스 타운 플레이어스를 조직했으며, 자작극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에는 스스로 출연하였다.
1920년지평선 너머 Beyond the Horizon가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됐다. 이는 미국 작가의 예술 작품이 처음으로 상업극장에 채택된 점에서 주목받았다. 오닐은 이 작품으로 그해 퓰리처상을 받았고,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는 그 후로도 다수의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193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 미국 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1953년 11월 27일, 보스턴의 셸턴 호텔 401호에서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젠장,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 방에서 죽다니…."란 말을 남기고. 한 극작가의 드라마 같은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지평선 너머 Beyond the Horizon〉(1920)․〈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22)․〈기묘한 막간극 Strange Interlude〉(1928)․〈아아! 황야 Ah! Wilderness〉(1933)․〈얼음장수 오다 The Iceman Cometh〉(1946) 등의 걸작에 이어서 그의 작품 세계는 사후에 제작된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1956)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886년] 이스라엘 총리 벤 구리온(Ben-Gurion, David 그루엔) 출생
본명은 David Gruen.
1886. 10. 16 러시아 폴란드 폴론스크(지금의 폴란드에 있음)~1973. 12. 1 이스라엘 텔아비브야포.
시온주의의 정치가, 정당 당수.
이스라엘의 총리(1948~53, 1955~63)와 국방장관(1955~63)을 지냈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카리스마적인 성격과 투쟁정신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에서도 은퇴한 후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되었다.
태어나서 데이비드 그루엔이라는 작명을 받은 벤 구리온의 아버지 빅토르 그루엔은 동유럽의 억압받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옛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을 보급시켰던 운동 집단인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플론스크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시온주의는 소년 데이브드 그루엔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는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을 원하는 유대인들이 제1단계로 해야 할 일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민가서 농부로 정착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906년 20세의 청년 그루엔은 팔레스타인에 도착해 수년 동안 팔레스타인 북부의 해안평야와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 농민 부락에서 농부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대 히브리어의 이름인 벤 구리온을 사용했다. 말라리아와 굶주림을 포함해 초기 개척자들의 온갖 고초를 다 겪었지만 그는 한번도 목적의식을 잃지 않았다. 시온주의 중심의 사회주의 정당인 시온 노동자당이 당의 강령 속에 "당은 이 땅에서 유대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를 갈망한다"는 선언을 삽입한 것은 벤 구리온이 힘쓴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투르크의 팔레스타인 지방 총독들은 벤 구리온의 시온주의 운동에 의구심을 품게 되어 그를 체포한 뒤 오스만 제국 밖으로 추방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뉴욕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태생의 폴린 먼웨이스를 만나 결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반에 영국이 투르크를 대신해 중동을 지배하게 되자, 유대인 정착자들과 해외에 거주하는 그들의 친구 및 지지자들은 장차 시온주의가 미국 내의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유대인 집단들에 못지 않게 영국에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가 1917년 11월 2일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민족의 고향'을 만들어줄 것을 약속한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 후, 그는 영국 육군의 유대인 군단에 지원해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에 가담하기 위해 중동으로 귀항했다.
유대인 군단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영국이 이미 투르크군을 격퇴한 후였으며,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위임받았을 때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이루기 위한 작업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벤 구리온에게 있어 '민족의 고향'은 정치적 독립으로 향하는 한 단계였다. 그 실현을 위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가속화할 것을 촉구했는데, 그것은 유대인 국가 건설의 토대 역할을 할 유대인의 핵집단을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그 핵집단이 1920년 팔레스타인에서 벤 구리온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창설된 유대인 노동자 동맹인 히스타드루트(Histadrut)였으며, 벤 구리온은 이 동맹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히스타드루트는 사회·경제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안보 분야에서까지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하여 ‘국가 안의 국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10년 후인 1930년에 다수의 노동자 집단이 연합해 이스라엘의 노동자 정당인 마파이(Mapai)를 창립하고 벤 구리온을 당수직에 앉혔다. 1935년에 그는 국제 시온주의 운동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온주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의 위원장 겸 운동의 행정기관인 유대인협회(Jewish Agency)의 국장으로 선출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정착이 그 뿌리를 강화해감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에서 불안이 고조되었으며, 그결과 두 공동체 사이에 무력 충돌들이 발생했다. 1939년 영국은 중동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유대인에 대한 동조적인 입장을 버리고 친아랍 노선을 채택했으며, 그결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과 정착은 심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벤 구리온은 이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 대항해 일어서라고 유대인 공동체에 촉구했으며, 이에 따라 '싸우는 시온주의'의 10년기가 시작되었다. 1942년 5월 12일 뉴욕에서 그는 미국 내 시온주의자들의 비상회의를 소집했으며, 그 대회에서 전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화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벤 구리온은 다시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1948년 5월 국제연합(UN) 총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지원하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었다.
데이비드 벤 구리온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선출되었다. 우익과 좌익을 다 같이 격앙시킨 국내의 정치 투쟁을 통해 그는 영국군을 상대로 싸웠던 지하 군대 조직들을 해체해 하나의 국민군으로 융합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국민군은 성숙해져가는 이스라엘 국민의 모델 겸 상징이자 시리아·요르단·이라크·이집트로부터 침략하는 아랍군들을 격퇴하는 유력한 전투력이 되었다. 싸움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랍측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국가와 공식적인 평화협상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벤 구리온은 신생국을, 2,000년 전 로마 군단들이 히브리의 자유 투사들을 진압하고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단절되었던 유대 역사의 직접적인 재개로 간주했다. 그는 유대인의 망명기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의 장기화된 막간으로 보았으며, 이제 유대인은 본래의 고향을 되찾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생 국가의 강화와 발전을 위해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세계로부터의 대규모 이민의 흡수, 사회적 배경이 다양한 신참자들의 동화, 통일된 공립교육제도의 창설, 사막의 정착화 등을 제시했다. 외교 정책에서 그는 독자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택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국방정책이 확고해, 인접 아랍국가들의 휴전협정 위반에 군사적인 보복으로 대응했다. 그의 강경책은 미국과 영국 정부로부터 거의 동조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양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로 인해 아랍의 석유수출국들과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양국은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카임 와이즈만이나 벤 구리온이 공직에서 잠시 은퇴했을 때 단기간(1953~55)의 총리로 선출되었던 모세 샤레트와 같은 보다 온건한 지도자를 선호했다. 소련은 중동에서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스라엘을 따돌리고 아랍 국가들에게 막대한 양의 무기를 제공했다. 그때 벤 구리온은 프랑스에서 우군을 발견했다. 알제리 전쟁 중에 프랑스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이끄는 아랍 연합전선의 대항에 부딪혔으며, 따라서 상당량의 군장비를 공급하면서 이스라엘과 보다 가까워졌다. 1956년 7월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프랑스는 이집트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 원정에 이스라엘을 가담시켰다(→ 수에즈 위기). 1956년 10월 29일 벤 구리온은 비밀리에 프랑스를 방문해 프랑스와 영국의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진 후 군에게 명령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게 했으며, 그 사이 프랑스와 영국은 운하의 점령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그후 이스라엘은 티란 해협에서의 운항의 자유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의 평화 정착을 위한 UN 특별감시단의 배치를 보장받은 후 시나이로부터 철군했다.
시나이 원정 이후 이스라엘은 외교와 경제의 번영기를 맞이했다. 벤 구리온은 1963년까지 행정 수반직을 계속 맡았다. 공직생활 만년에 벤 구리온은 중동의 평화 수립을 목적으로 아랍 지도자들과의 비밀 회담을 위한 몇 가지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1963년 6월 벤 구리온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일신상의 이유'로 돌연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의 사퇴가 부분적으로는 당내의 그의 지지자들과 정적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내분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한데, 정적들이 처음으로 그에게 반기를 든 것은 이스라엘의 사주로 이집트에서 일어난, 미국과 영국의 재산 파괴 활동을 골자로 하는 1954년의 ‘자본 사태’의 정치적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 사태는 벤 구리온으로 하여금 1965년 다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마파이에서 탈당해 소수 의석의 야당 라피를 창설하게 했는데, 라피의 당수로서 그는 자기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레비 에슈콜을 상대로 싸웠지만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970년 벤 구리온은 크네세트와 일체의 정치 활동으로부터 은퇴하고 네게브 지방의 한 키부츠인 스데보케르에서 회고록의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많은 저서를 출판했는데, 대부분이 연설과 수필을 모은 것들이었다. 생애에 있어서 그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에 관한 조사와 성서의 연구에도 힘썼는데, 성서 연구는 그것이 그의 이상들을 끌어낸 원천이었기 때문이었다.
[1854년] 영국의 심리주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태어남
1854년 10월 16일 태어남 / 1900년 11월 30일 죽음
"신이 인간을 창조할 당시 자신의 능력을 좀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와일드는 19세기말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내걸었던 유미주의를 대표하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심미적 열정의 인생살이를 부르짖은 월터 페이터, 존 러스킨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유일한 장편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과 희곡 <살로메 Salome>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시․소설․수필․동화에서 뛰어난 창작력을 발휘했다. 가장 성공을 거둔 장르는 풍속희곡으로,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와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등을 통해 작가로서 치밀한 구성력과 탁월한 재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의 풍속희곡에 대해 평론가 윌리엄 아처는 "현대 영국 희곡의 최고의 차원"이라고 단언했다. 죽기 몇 해 전 동성애 죄목으로 2년의 중노동형을 치르기도 했으며, 죽는 날까지 파산 상태의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브리태니커
[1846년] 모턴, 에테르 마취수술 성공
1846년 10월 16일 미국의 치과의사인 W. 모턴이 처음으로 에테르 마취를 이용한 수술에 성공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외과수술을 할 때 환자의 통증을 감소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약물이 쓰였다. 아랍의 내과의사들은 아편과 사리풀을 사용했고, 전쟁터에서 응급처치로 병사의 팔, 다리 등을 절단할 때는 럼 주를 투여하기도 했다. 누가 처음으로 진정한 마취수술을 시도했는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지만 전신마취법을 실용적인 것으로 의학계에 확신시킨 사람은 치과의사인 모턴이었다. 1846년 10월 16일 종양 수술을 받는 환자에게 에테르를 흡입하게 함으로써 전신마취 상태에서 수술에 성공했다. 영국에서는 1853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8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 그녀의 주치의인 J. 스노가 클로로포름을 투여함으로써 마취제로 공식적인 인가를 받았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마취를 전담할 전문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도 이는 일부의 관심사로 남아 있다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마취 전문의사에게 전문의 자격증을 수여하는 미국마취학협회의 설립이 이루어졌다./브리태니커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1793년 10월 16일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다. 그녀는 이른바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에 휘말리는 등 방탕하고 경박한 생활을 했으며, 백성들과 사회에는 무관심했다. 그 결과 그녀는 민중 선동가들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었다. 바스티유 함락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루이 16세와 함께 왕당파의 도움으로 파리를 탈출했으나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되었다. 그녀는 오빠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에게 프랑스를 상대로 반혁명전쟁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으나 외면당했다. 1792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 뒤에도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계속 음모를 꾸며 프랑스 국민의 분노를 샀다. 왕비에 대한 증오심은 민중 소요사태로 이어졌고 마침내 1792년 8월 10일 왕정 타도로 귀결되었다.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나서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브리태니커
[1758년] 미국 사전편찬자 웹스터(Webster, Noah) 출생
1758. 10. 16 미국 코네티컷 웨스트하트퍼드~1843. 5. 28 코네티컷 뉴헤이번.
〈미국어 철자교본 American Spelling Book〉(1783)과 〈아메리칸 영어사전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2권 1828, 재판 1840)으로 유명하다. 미국 영어에 독자적인 품위와 생명력을 주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가 펴낸 철자교본과 사전에는 철자법·문법·관용법은 인위적인 규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교사·문법학자·저널리스트·평론가·강사·로비스트로도 많은 공헌을 했다.
그밖에
2000년 한-미 미사일협상 타결로 사(射)거리 300Km 미사일 생산 가능
1999년 한국군 상록수부대 150여명 동티모르에 파병
1999년 이미자,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생활 40년 기념공연
1998년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영국경찰에 전격 체포
1998년 북아일랜드의 존 흄-데이비드 트림블, 노벨평화상 수상
1995년 전파법시행령 개정
1994년 헬무트 콜, 독일 총리로 재 선임
1994년 장한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콩쿠르에서 최우수상 수상
1990년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평양서 개최
1984년 통신종합센터 준공
1984년 남아공의 흑인종교지도자 데스몬드 엠필로 투투 주교, 노벨평화상 수상
1982년 수하르토 인도 대통령 방한
1981년 동서고속도로(대전~광주 175km)기공, 후에 올림픽고속도로로 개명
1979년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내한
1975년 스페인령 사하라서 모로코 35만명 평화행진
1974년 경주 98호 고분서 신라순금고배(高杯) 출토
1972년 자유학습의 날 실시
1964년 중국, 첫 원폭실험 성공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1963년 서독 아데나워 수상 사임, 후임에 부수상 에르하르트 취임
1962년 콩고 중앙정부군과 북부 카당가의 카당가군 휴전협정 조인
1956년 제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 발표
1952년 채플린 영화 ‘라임 라이트’ 개봉
1951년 이집트, '1936년 조약' 파기를 주장하며 폭동, 반영(反英)감정 고조
1951년 남원에 공비출현, 기관차 전복시키고 200여명 납치
1946년 2차대전 독일전범 립벤도로프 등 10명 교수형
1942년 인도, 태풍으로 인한 홍수로 4만여명 사망
1918년 허영숙(이광수 부인), 총독부시행 의사시험에 여자로서 최초 합격
1916년 마거릿 생어, 산아제한클리닉 개소
1916년 2대 총독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임명
1908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호자 출생
1901년 혜민관 설치
1863년 영국의 정치가 오스틴 체임벌린 출생. 1925년 노벨평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