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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여 어찜이뇨(욘1:1-10)-2020.5.10
요나는 BC 8세기에 사역하던 하나님의 예언자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 선교사로 파송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우상을 섬기면서 언제 자기나라를 침공할지 모르는 눈엣가시 같은 나라입니다. 그런 니느웨성에 악독을 외치라니요. 배타적 선민사상이 강한 이스라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이스라엘의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만 독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개 꼬라지 미워서 낙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가 미우니까 생선가시도 주기 싫어 낙지를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생각입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까봐 심히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을까요?
우리에게는 악인들이 넘어지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했던 적은 없었을까요? 우리는 처음부터 요나를 불순종의 아이콘으로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들에게는 그런 불순종이 없는 것처럼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요, 오늘날 교회들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는 니느웨의 정반대쪽에 있습니다. 그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배 밑층으로 내려가 잠을 청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배에 하나님이 안계시나요? 하나님도 그 배에 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배를 가만 두시지 않았습니다. 바다에 대풍을 일으키셨고 배는 파산지경에 몰렸습니다. 배안의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각자 섬기는 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배 밑층에서 깊이 잠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였습니다. 배 밑층으로 들어온 요나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리라고 생각했을 테지요. 이것이 선지자의 생각입니다.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감히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는 우리들의 생각이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동자는 계속 요나를 감시하고 계셨습니다. 요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적 우리는 숨바꼭질이라는 놀이를 즐겨했습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어 했지요. 그런데 대부분 숨어봐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결국 다 찾아냅니다. 찾아내지 못하면 자기가 답답해서 나옵니다. 마치 요나가 숨바꼭질 하듯이 배 밑층으로 숨어들었지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요나를 정확히 찾으십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이 말은 선장이 하는 소리지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소리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음성입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는 음성은 보통의 소리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뉘앙스가 있지만 뇌성벽력 같은 소리도 같고, 감미롭고 자애로운 음성 같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음성에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요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십니다. 오늘 폭풍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요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요나에게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요나야?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서 잠을 자고 있느냐?고 물어 오십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랑보다 요나에게 더욱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문제는 요나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나로 인하여 배가 풍랑을 만났고 파선직전까지 간 것입니다. 망망한 바다위에 기울어져가는 배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당장이라고 물속에 침몰할 분위기입니다. 지금 배는 바다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누구나 순풍의 돛을 달고 항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예기치 않는 풍랑이 일어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불행의 암초를 만나기도 하고, 거센 폭풍우와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높은 파도와 싸워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백방으로 자기들의 문제를 헤쳐 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진 소유를 다 잃고, 건강도 잃고, 관계하는 모든 것까지 끊어지고 맙니다. 지금 요나가 탄 배가 그 지경입니다.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뿐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전능자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시지요. 때문에 믿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그분은 외면치 아니하십니다. 보통 우리가 요나서를 보는 선입견 가운데 가장 견고한 선입견은 요나의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아이콘으로 요나를 떠올리는데 일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요나보다 그런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가 잘못했을지라도 당신의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역시 하나님의 관심은 요나입니다. 이번 풍랑도 요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라면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요나서를 대하면서 불순종한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순종하는 요나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생자는 징계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이라는 징계를 통해 요나를 부르십니다. 그런 차원으로 볼 때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는 말은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의 위치와 실존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 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물어 오십니다. 이 물으심은 아담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당장에 죽이실 수 있었지만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확인해주신 것이지요. 그 때 그 요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동일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2)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침몰직전의 배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수단을 강구합니다. 사공이나 선원들은 평생을 배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어지간한 태풍은 대처하는 방법도 알고, 요령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물건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각각 자기의 신을 부릅니다(5절). 하지만 부질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신 폭풍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지요.
이번 풍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다음에 멈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침몰직전의 배와 같습니다. 지금 지구촌의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핵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지각변동을 경험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전 세계가 싸우고 있습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럴 때에 믿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구하는 기도보다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회개와 연관시키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믿는 자는 항상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은 대부분 죄악의 소산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접근해야 이 문제가 풀립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마저 세상에 편승하여 감각없이 접근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믿는 자들에게 계시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요나를 깨우시는 음성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교회와 성도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른바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는 말은 자기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요나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아니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음성이라는 말입니다. 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드리고, 유대인들 역시 정규적인 기도를 하루 세번 드립니다. 물론 그것이 옳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기도할까요?
전 세계가 엄청난 풍랑을 만났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을까요? 오히려 기도가 위축당하지는 않았는지요? 죽겠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 믿는 자가 기도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불신자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자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 믿는 자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지 모릅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배가 난파직전에 이르렀는데 당사자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공동체가 무너질 지경인데 당사자가 잠을 자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풍랑은 요나가 회개하면 끝납니다.
요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나는 직감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예감입니다. 요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상을 공개합니다.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하고(9절), 자기가 이 배에 탄 이유까지 설명합니다(10절). 그리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고 처방합니다(12절). 이 폭풍이 자신으로 인하여 내려진 재앙임을 안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온 인류가 범죄에 빠졌고, 아간이 범죄함으로 그의 가족들이 처형을 당했으며, 다윗의 인구조사로 무고한 이스라엘 백성 칠 만 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책임 있는 당사자의 회개를 통해 당신의 진노를 풀어주십니다. 이 풍랑의 당사자는 요나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배 밑층에서 자는 것은 파도의 높이를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낮인지 밤인지 분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잠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지만 자야할 시간이 있고, 장소가 있습니다. 지금 요나는 자야 할 시간도 아니고, 자야 할 장소도 아닙니다. 요나가 일어나 회개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잠들어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들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할 우리들이 영적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아닐는지요? 지금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자다가도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안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계실지라도 배 밑층까지는 알지 못하실 줄로 생각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 정도로 미련한 선지자는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요나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 있으며, 모르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편 139편7-1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의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자는 자요 어찜이뇨’ 이 음성은 결코 믿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사명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사명은 생명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이 끝나면 생명이 끝납니다. 지금 내가 살았다는 것은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분명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성에 가서 악독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미션은 민족주의자인 요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여러 나라를 지배했던 원수국가입니다. 요나로서는 정말 가기 싫은 나라요, 하기 싫은 사명입니다. 요나는 자기생각으로 사명을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사명을 감당치 않으면 징계를 해서라도 감당케 하십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간증 가운데 하나가 주의 길을 안 갈려고 발버둥 치다가 얻어맞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야할 길이라면 지체하지 말고 가는 것이 좋고, 결국 해야 할 일이라면 좋은 말할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는 음성은 이제 다시 일어나서 가라는 것이요,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사명의 기회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인 선장을 동원하셔서 요나의 양심을 두드리십니다. ‘요나야, 이곳은 네가 머물러 있을 자리가 아니다’고 말입니다. 사실 불신자가 신자를 깨운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믿는 자가 정신 차리지 못하면 주변에 있는 불신자를 들어서라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매우 수치스러운 요법이지요. 침묵하는 요나, 도망가는 요나, 잠자는 요나를 깨우는 선장의 외침은 충격적입니다. 선장은 마치 요나에 대한 정보를 다 아는 것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6절)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40)고 말입니다. 민수기 22장28절은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거역한 발람 선지자를 향해 나귀의 입을 열어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설교자 위렌 위어스비는 ‘19세기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촉구했으나 20세기 말에는 세상이 교회를 향해 회개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사명자가 잠을 자면 안됩니다. 다 죽습니다.
캐나다의 노인들은 ‘깨워주기 회’를 가입한답니다. 보통 정년퇴직을 하면 5년 안에 죽은 일이 통계적으로 많답니다. 직장생활 할 때는 아침7시면 기상을 했는데 은퇴를 하면 아침 9시, 혹은 그 이후로 일어나는 일이 잦는답니다. 그래서 하루끼니가 두 끼가 되고, 심지어는 한 끼로 줄어들게 되는 경우도 많답니다. 어떤 이는 20시간동안 잠자는 경우도 있고, 혼자 사는 분들은 영원히 잠들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전날 배달한 우유가 그대로 있어 경찰에 신고해보면 죽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군요. 그래서 은퇴 후에 ‘깨워주기 회’에 가입하여 당번제로 회원들을 전화로 깨워준답니다. 사명이 없으면 잠을 잡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사명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족장시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르셨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강력한 지도자로 부르셨으며, 우상과 맞서 싸울 능력자로 엘리야와 엘리사를 부르셨습니다. 그 외에도 시대마다 거기에 합당한 사람을 부르시어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사명자가 정신 차리지 못하면 다시 부르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세벨이라는 여인 앞에서 벌벌 떨다가 사명을 잃어버린 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던 선지자 엘리야를 호렙산 굴속에서 다시 사명자로 부르십니다(왕상19:9).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내 마음이나 생각에 들지 않아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실 때는 감당할 만한 능력을 함께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내 생각이나 방법으로 감당하려고 하니까 트러블이 생기는 법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결코 사명을 외면할 수 없는 법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고 말입니다.
이 시간 요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이 음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음성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으로, 사명을 회복하는 음성으로 들려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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