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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장(石家莊): 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
글: 양용(梁勇)
석가장, 이 이름에는 작은 마을에서 조금씩 발전하여 도시가 된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이 도시는 비록 "기차가 끌어온 도시"라고 불리지만, 사람들은 이 도시의 역사적인 뿌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근대 철로가 발전하면서, 석가장이라는 작은 마을은 화북지방의 천년 역사를 싣고 계속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의 작은 마을에서 하나의 신도시로 성장했다. 여기는 중앙정부의 전신인 화북인민정부(華北人民政府)의 탄생지이고, 이곳은 이천년역사를 지닌 역사고도의 유적지이고, 휘황한 영웅들이 가득찬 도시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토지에서 자랐고, 생활했으며 이 도시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이 경외와 애정이 있다. 애정의 감정 속에는 약간의 애상도 섞여 있다. 여러해 전에, 누군가 이 도시에는 충분한 문화적 기반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시내의 동원(東垣), 석읍고성(石邑古城) 유적지는 도시건설의 붐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비창(悲愴), 방황, 눌함(吶喊), 견수(堅守)...필자는 이 도시의 문화적 뿌리를 찾는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역사를 찾서 더 많은 사람들이 석가장의 본토문화를 인식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진정으로 현재와 이후의 도시건설과 관리에서 석가장사람들은 자신의 본토문화와 역사문화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전승하게 되기를 바란다.
기실, 진정 석가장의 역사문명의 뿌리를 찾으려면, 호타하(滹沱河) 변의 그 아주 오래된 조상의 거주지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
호타하는 석가장의 모친하(母親河)이다. 30만년전에 석가장의 선주민은 강의 골짜기를 따라 태행산(太行山)에서 수렵생활을 했다.
정형현(井陘縣) 손장향(孫莊鄕) 동원촌(東元村)의 구석기시대문화유적지가 발견되면서, 30만년전에 우리의 조상이 생활하던 광경을 알 수 있었다. 평산현(平山縣) 물수용동(沕水溶洞)은 약 3만년전의 구석기인류 유적지이다. 석가장에서 선주민들이 살았던 상황을 알 수 있다.
1만년전의 신석기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은 석기를 쳐서 만들 다가 석기를 갈아서 만드는 역사적인 비약을 이룩한다. 이로 인하여 생산력수준이 제고된다. 그들은 거주할 곳을 만들 능력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산동에서 평원으로 내려온다. 호타하 연안에 정착지를 건설한다.
석가장 중산로 동쪽의 백불구(白佛口)문화유적지는 현재 시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류유적지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7천년전, 당시의 인류는 이미 도기를 굽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음식을 익혀먹는 시대로 접어든다. 아쉽게도 이곳은 조상들의 평원에서의 최초 군락지의 문화유적인데, 일찌기 무분별한 도시건설의 진행으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필자는 밤에 조용히 기도한다. 우리의 역사문화가 인정받고 보호받고 드러날 수 있도록.
호타하 남안의 남양장(南楊莊) 앙소(仰韶)문화유적지는 진귀한 문화재로 석가장이 세계문명사상에 이정표를 세우게 만든다. 필자는 200편짜리 TV강연드라마 <석화실설(石話實說)>과 500편짜리 라디오시리즈프로그램 <연조전기(燕趙傳奇)>에서 매번 이곳을 얘기하곤 했다. 마음 속에는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위안이 넘쳤다. 이곳에서 출토된 2건의 도질잠용모형(陶質蠶蛹模型)은 인류가 누에를 기른 역사를 전설의 황제시대에서 기원전 3400년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야생 뽕나무자원이 풍부한 호타하유역은 중국의 양잠문화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동시에 5500년전의 도방륜(陶紡輪), 사직용의 빗(篦子)과 뼈칼(骨匕)는 호타하의 사람들이 방직기술을 가진 역사가 황제시대보다도 수백년을 앞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마반(石磨盤)과 석마봉(石磨棒)은 조상이 양식을 갈았던 도구이다. 일찌감치 기원전3400년전에 이곳의 주민은 식량가공기술을 지녔다는 걸 말해준다.
증거자료들에 따르면, 중국최초의 "상인(商人)"은 하나의 부족에서 시작되었다: "상(商)". 왜냐하면 그들의 7대조인 왕해(王亥)는 가장 먼저 역수(易水)의 가에서 무역을 진행했다. 그래서 상인들은 상업과 연결된다. 상은 그리하여 상업무육, 상업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상족의 조상은 호타하유역에서 현조(玄鳥, 제비)를 숭상하는 한 고부락이다. 상인의 시조인 설(契)은 대우(大禹)시대의 부족두령이고, 설의 모친인 간적(簡狄)은 모계사회 우두머리이다. 이에 대하여 사학계는 일찌감치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상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역대학자들은 고대전설을 근거로 여러가지로 추측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갈수록 많은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설거번(契居蕃)"이라고 적고 있다. 설의 아들인 소명(昭明)은 지석(泜石)에 거주했다고 한다. 사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번(蕃)은 번오(蕃吾) 즉 지금의 황벽장댐부근이라고 한다. 지석은 원지(元氏)의 지하(泜河)유역이다. 최근 들어 석가장시에서는 시광가, 녹천, 평산에서 4000여년전의 선상(先商)문화유적지가 발견되고, 신락, 무극, 정정, 고성, 조현등지에서는 여러 상나라때의 취락유적지가 발견되었다. 호타하유역은 선상, 조상(早商)과 상나라때 청동문명의 역사맥락을 지니고 있어 상족의 기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평산, 녹천, 원지 일대는 바로 상민족의 조상인 설과 그 아들인 소명이 거주하던 곳이다. 필자는 "선상문명이 이곳에서 나왔다'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고고학자들은 고성대(藁城臺) 서쪽의 상나라유적지가 상나라때 왕기(王畿)내의 한 도읍이라고 증명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400년전의 역사이다. 이 유적지는 여러가지 세계에서 최초의 발견이 나타나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세계최초의 철기인 철인동월(鐵刃銅鉞),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제조공방의 유적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술기기인 폄겸(砭鎌). 세계최초의 비단(泡泡紗)..이 상나라유적지는 세계문명사상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이는 이 지방이 고대에 찬란하고 휘황한 문명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2
동원(東垣) - 진정고성(眞定故城)은 석가장도시의 역사뿌리중 하나일 뿐아니라, 국가역사문화도시 정정(正定)의 전신이기도 하다.
석가장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성원(城垣)은 전국시대 중산국(中山國)에서 만든 원읍(垣邑, 지금의 장안구 동고성체육북대가 양쪽)이다. 전국칠웅의 다툼 속에서 천승지국(千乘之國)인 중산국은 이 성읍을 만들었다. 북으로는 호타하에 접해있고, 서로는 정형구(井陘口)를 막고 있어 지리적인 위치가 중요했다. 기원전305년, 조무령왕은 중산, 취고, 봉룡, 석읍등을 공격하여 취한 후, 이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다. 당시 조나라는 산서에서 이미 원읍(垣邑)이라는 이름이 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성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동원이라고 명명한다.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후 동원현을 설치한다. 나중에는 항산군(恒山郡)의 치소(治所)가 된다. 그리하여 이곳은 태행산 및 그 동쪽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지가 된다. 기원전196년, 한고조 유방이 대군을 친히 이끌고 이곳에서의 반란을 평정한다. 그리고 동원을 진정(眞定)이라고 바꾼다. "진정으로 안정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이라는 명칭의 내력이다. 서한 원정(元鼎)4년(기원전113년) 한무제는 조카인 유평(劉平)은 진정왕(眞定王)에 봉한다. 이때부터 이곳은 진정국 제후의 도성이 된다. 성원은 높고 관아는 화려하다. 이곳은 서한 남월왕 조타(趙佗), 서한 회남왕 유장(劉長)의 생모 조씨미인 그리고 삼국명장 조운(趙雲)의 고향이기도 하다.
동한말기, 조조는 원소를 물리친 후 상산군(常山郡)을 원지(지금의 원지고성)에서 이곳으로 옮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이곳은 계속하여 상산군의 치소였다.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에 따르면, 이 고성은 전성기에 장방형을 취하고 있었고, 남북으로 5킬로미터, 동서로 3킬로미터의 너비이며 면적은 15평방킬로미터에 가까웠다. 성안의 중심은 서쪽으로 치우친 곳이었는데, 거기서 와당, 대형회문방전(回紋方塼), 통와(筒瓦), 판와(板瓦)등이 발견되었다. 그중 대형회문방전은 진정왕궁이 건축재료였고 문양이 아름답고 공예도 정교했다.
동진16국시기에 북위 탁발씨와 후연 모용씨는 태행산에서 계속 전투를 벌인다. 후연의 대장인 모용각(慕容恪)은 호타하북안에 안락루(安樂壘)를 쌓아서 호타하의 군사보루로 만든다. 다만 이 후연의 황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그가 만든 이 보루가 얼마후 상대방인 탁발씨의 중심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398년,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상산군(지금의 장안구 동쪽의 고성)을 점령하고, 성에 올라가 북쪽으로 안락루를 바라본다.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상산군의 치소를 안락루로 옮긴다. 그리고 영원히 '안락'을 누리길 희망했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킨 후, 안락루에 항주(恒州)를 설치한다. 이때부터 이곳은 항주성(恒州城)이 된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두건덕, 유흑달의 대하왕조가 하북을 점거한다. 사년간 이세민 형제와 전투를 별인다. 무덕4년(621년) 당나라는 유흑달을 멸망시키고, 태행산동쪽의 지역을 조정한다. 진정현의 치소를 북쪽의 안락루로 옮기고, 거기는 항주와 진정현 두 지방정부의 치소가 된다. 호타하 남안의 진정고성은 점점 황폐화되고, 그저 동고성, 서고성의 두 마을만 남기게 된다.
청나라의 옹정제는 즉위후 그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옹정의 이름이 윤진(胤禛)이다). "진정(眞定)"의 이름을 "정정(正定)"으로 바꾼다.
북위이래로, 안락루를 기초로 하여 확장된 정정성은 이 일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안사의 난이후에는 성덕군절도사 번진할거의 중심이 된다. 성벽건축은 날로 견고해진다. 그리하여 안에는 아성(牙城, 지금의 정정현정부일대)이 있고, 가운데에는 성지(城池, 지금의 양화루를 남문으로 하는 내성)가 있고, 밖으로는 외곽의 각성(各城)이 있는 배치가 이루어진다. 북송때, 진정은 하북서로의 수부(首府)였고, 북송명신 구양수, 심괄등이 전후로 이곳에서 장관으로 근무한다. 원나라때는 진정등 구로도원수(九路都元帥) 사천택(史天澤)의 저택이 있었다. 그리고 원곡(元曲)의 발상지미여 원산곡(元散曲)의 전파지이기도 하다. 지금의 정정성 마가대원에 위치한 원곡박물관에서는 이 고성과 원곡예술의 인연을 잘 볼 수 있다.
지금 정정은 국가역사문화명성이다. 명승지가 많고, 인문이 발달했으며 흥륭사, 천녕사 능소각, 임제사 징령탑, 개원사 종루등 국가급 중요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고거축전문가인 양사성 선생은 중국고건축박물관이라고 불렀다.
3
역사에 뿌리를 붙잡고, 문화의 연원을 붙잡고 도시의 혼을 붙잡는다. 그래야 도시의 독특한 문화적 매력이 드러날 수 있다. 석가장의 사람들은 문화에 대하여 인식과 응집되도록 해야 한다. 문화는 응집되어야 더욱 자신이 생기고 문화는 자신이 생겨야 더욱 아름다워진다.
석가장은 현대도시로 굴기하고 있다. 19세기말 이 도시의 모체는 석가장촌(石家莊村)이다. 지금의 신화로 북쪽이고 원래는 정정부 획록현, 유영향이었다. 청나라 광서제의 <획록현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석가장, 현의 동남쪽 35리, 가도(街道)6, 묘우(廟宇)6, 정천(井泉)4" 19세기말, 점유면적 0.1평방미터이 석가장촌에는 500여명이 살고 있었다. 범위는 지금의 산화구북대가의 서쪽, 흥개로의 남쪽, 신화로의 북쪽, 북우가후통의 동쪽이다.
왜 이런 작은 마을이 거대한 규모의 성회(省會)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근대철도의 건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나라 광서22년(1896년) 서태후는 장지동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한철로(노구교-무한)를 건설한다. 그리고 인근성과는 지선을 만들어 연결시킨다. 산서순무 호빙지는 정정에서 태원으로 가는 지선(간칭 정태철도)을 주청올려 허락받는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돈이 없어서, 화아도승은행(華餓道勝銀行)과 철로차관계약을 체결한다. 프랑스 엔지니어인 올바니가 측량하고 호타하에 대교를 건설하는 비용을 들이지 않기 위하여 정태철도와 노한철도의 교차점을 정정부 호타하의 남안에 있는 유림포(柳林浦)로 결정한다. 지금의 석가장시 교서구), 그래서 당시에는 류태철도라고도 불렀다. 광서27년(1901년) 노한철도는 북경 정양문까지 연장되고, 경한철도로 개칭된다. 다음 해, 경한철도는 석가장촌의 동쪽에 역을 만든다. 석가장촌이 너무 작으므로 칠리바깥에 있는 큰 마을 진두(振頭)를 역이름으로 한다.
1904년 정태철도의 건설이 시작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선로를 단축한다. 그리하여 노한철도와의 교차점을 남쪽으로 이전하여 석가장촌 동쪽의 진두역으로 한다. 그리고 1미터궤도거리의 협궤철도로 건설한다. 정태철도가 준공된 후, 정태철도의 직원은 돈을 모아 철로를 건너는 대석교(大石橋)를 건설한다. 이렇게 하여 철로양측의 교통이 원활하게 해준다. 이때부터 석가장은 교동, 교서라는 지명을 갖게 된다.
석가장이 점차 중요한 물류중간기지로 변신한다. 점점 획록현의 '부두'가 가졌던 물류중심의 지위를 대체하고, 교통허브이면서 도시굴기를 주도한다. 그리하여 석가장은 '기차가 끌어온 도시'라는 말이 붙었다.
정태철도가 완공될 때 파리철도회사는 석가강촌동쪽에 정태총기창, 정태반점, 정태로국판공루, 프랑스엔니지어공관과 고위직원숙소를 건설한다. 이리하여 근대도시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후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상업, 음식서비스업, 전장, 은호가 발전하게 된다.
정태철로는 1미터 협궤이고 경한철로는 1,435미터 국제표준궤도이므로, 두 철로는 나란히 운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철로와 두 기차역의 사이에, 방대한 규모의 창고운송업이 발달한다. 산서에서 운송해온 물자는 정태철로의 기차에서 하차한 다음, 다시 경한철로의 기차에 싣는다. 그래야 남으로 내려가고 북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리하여 석가장은 운송, 창고, 물류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석가장촌의 남대교가 일선에는 여관, 객잔을 위주로한 서비스업이 발달하게 되고, 촌의 동쪽은 한한철로를 따라 분포한 공상업지구가 들어선다. 1911년이 되어서는 석가장과 주변의 면적은 약 1평방킬로미터로 확장된다.
1922년, 무한초흥공사는 석가장철로교통지위와 주변면화생산지구의 우세를 보고, 경한철로동쪽의 휴문촌에 대흥사창(大興紗廠, 나중에 석가장제7면방직공장으로 변경됨)을 만들어 석가장의 방직업역사를 시작한다. 동시에 철로동쪽의 발전을 이끈다. 점차 철로서쪽의 석가장과 철로동쪽의 휴문, 율촌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면적이 약 1.8킬로미터로 늘어난다(휴문과 율촌을 포함하지 않고)
철로교통으로 일어난 석가장은 점차 성벽이 없는 '신도시'로 변모한다.
1925년, 직예성은 시자치제를 실시한다. 중국식의 도시건설을 꾀한 것이다. 당시의 당산, 정정, 획록등 11개도시는 시자치제를 시행했다. 석가장상무회는 회록현에 보고서를 내서, '석가시(石家市)'의 건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구가 1만이 되지 않아. 휴문, 율촌을 합쳐야 했다. 나중에 석가장, 휴문 두 촌에서 각각 1글자씩을 따서 "석문시(石門市)'를 건설하려 한다. 그러나, 인구와 도시규모등의 원인으로 시로 승격하지 못하고 현이 관할하는 진(鎭)으로 남는다. 비록 '석문시'를 만들려는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도시화의 진전에 지장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공상업이 발전하면서 농촌인구가 대거 석문으로 몰려들었다.
1937년 10월 10일, 일본군이 석문을 점령한다. 그리고 거기에 군사,교통기지를 건설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한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자원약탈을 확대하기 위하여 석태철도를 표준궤도로 다시 만들고, 또한 석가장에서 덕주(德州)로 가는 철도도 건설한다. 이때부터 석태철도와 경한철도, 석덕철도는 같은 궤도로 운행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석가장의 교통중심지로서의 지위는 더욱 제고된다. 동시에 일본군은 시의 서북지역에 군사공항을 건설한다. 그리고 일화대가(日華大街, 지금의 중화대가) 및 그 서쪽의 신도시를 건설한다. 많은 일본, 조선이민이 들어온다. 시의 면적은 30평방킬로미터로 늘어나고, 인구는 20만에 가까워진다.
석문은 마침내 1947년 11월 12일 새롭게 태어난다.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이 해방시킨 첫번째 대도시로서 처음으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인민정권이 들어선다. 석문시는 '석가장시'로 개명한다.
1948년, 중앙인민정부의 전신인 화북인민정부는 석가장 인민예당에서 성립한다. 중국인민은행은 석가장 중화대가 소회루에서 창립된다. 첫번째 인민폐도 여기서 발행된다. 중국인민대학의 전신인 화북대학도 정정에서 창건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예빈교육사업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수많은 최초를 만들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석가장시는 석가장전구(石家莊專區)의 소재지가 되어, 정정, 획록등 17개현을 관할한다. 그리하여 정정현의 지역중심도시로서의 지위를 대체한다. 1968년, 하북성의 성회가 석가장으로 옮겨오면서, 정치적인 지위는 제고되고, 경제, 사회, 문화사업의 발전을 이끌게 된다. 1975년에 이르러 도시인구는 50만에 이른다. 개혁개방이래, 석가장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룬다. 오종삼횡의 도시 간선도로가 만들어진다. 2006년에는 도심지구와 정정, 녹천, 고성, 난성의 4개 위성도시를 확정하여, "1+4"의 지역공간전략이 수립된다. 2009년에는 하북성정부가 석가장을 500만인구의 대도시로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수립한다.
2017년 2월 9일 '일성삼구삼조단"으로 정정현, 정정신구가 석가장시에 편입되어 관리되기 시작한다. 정정이라는 역사문화도시는 마침내 석가장의 도시체계에 편입된 것이다. 이는 역사문화의 회귀와 통합이다. 정정고성과 호타하남안의 천년고도인 동원고성은 자룡대교로 연결된다. 고성 정정과 동완고성, 그리고 석가장 도심지가 연결되어 하나의 도시로 된다.
기차가 끌어온 새로운 도시와 천년고도 정정이 공동으로 굴기하여 화북의 천년역사를 계승하게 된다.
이는 역사의 매력이고 문화의 부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