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판의 추억
오늘의 대구시 중구 대봉동 60번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교는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의 맥을 잇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가 낳은 시인 이상화의 영탄이 흐르던 그 시절, 3남지방의 수재들이 초등교원의 꿈을 안고 대구사범에 모여들었다. 당시 전국에 사범학교는 서울 평양 대구 세 군데밖에 없어 대구사범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1개 군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할 정도였다. 구미초등학교에서 최초로 대구사범에 합격한 학생이 박정희였다.
15세 되던 1932년 4월에 입학해서 5년간 수학을 하고 20세 때인 1937년 3월에 졸업해 문경보통학교에 부임해갔다. 그가 대구사범 5학년 진급을 앞둔 4학년 3학기 중간인 1936년 1월 말쯤이었다. 밤새 눈이 쌓여 학생들이 교정의 제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참 눈을 치우고 있는데 박물교실의 뒤뜰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정희가 그쪽을 돌아보니 대여섯 명의 동급생들이 둘러선 가운데 우락부락한 녀석이 상대도 안 되는 약골을 사정없이 윽박지르고 있었다. 강자의 이름은 석광수, 약자는 주재정이었다. 둘 다 박정희의 동급생들이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거야!”
으르렁거리는 석광수를 아무도 제지하지 못해 소녀처럼 가냘픈 주재정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석광수의 돌주먹에 모두들 겁을 먹어 꼼짝을 못했다. 안 되겠다 싶어 박정희가 그쪽으로 가는데, 석광수가 어디서 주웠는지 유리병을 들어 주재정의 머리를 후려치고 말았다.
“악!” 눈 깜짝할 사이에 주재정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시뻘건 피가 얼굴로 흘러내렸다.
“이놈의 자식!” 꽥 소리를 지르며 뛰어든 것이 박정희였다.
“어, 저 피, 피!”
“괜찮나? 정신 차려라!”
동급생들이 놀라고 당황해 소리를 쳤다. 박정희가 도끼눈을 부릅뜨자 석광수가 움찔했다.
“네가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야?”
“그까짓 일로 사람을 쳐? 네놈이야말로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박정희는 주재정과 별 차이 없이 키가 작았으나 동급생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키는 작아도 당차고 말이 없어 조용했으나 돌주먹을 들이대는 석광수 같은 건달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독사 같은 눈매에 뭔가 폭발할 것 같은 불덩이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의무실에 업혀가는 주재정을 가리키며 박정희가 말했다.
“네놈이 책임져야 해. 알았어?”
기세가 꺾인 석광수는 아무른 대꾸도 못했고 나중에 주재정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사과를 했다. 그 사건으로 석광수는 한 달 정학처분을 당했고, 남은 1년 동안 얌전히 공부에 힘써 불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박정희는 석광수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석가 놈에게 가까이 하지 마. 얻어맞을라.”
동기생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하면서 석광수에 대한 나쁜 인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대구사범 동기들이 교육계를 비롯해 사회 각 분야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때 석광수는 부산일보의 상무를 역임했다.
모두가 가난과 설움의 그 시절 젊은 꿈의 나래를 펴던 친구들인데 대통령 박정희는 석광수가 식도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치료비를 대주었다. 석광수가 먼저 떠나고 박정희도 떠났다. 석광수의 부인은 병상의 남편과 절망에 빠졌을 때 대통령의 도움을 못 잊어 국립현충원 묘소를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