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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화북면 장각동으로 향하는 우리 느림보 리무진 내에는 오늘 따라 유달리 새로운 산벗들이 많이 합류하는 경사스런
분위기 인지라 산행 안내를 하시는 강 대장님 모습도 여느 때와는 달리 상당히 상기된 표정이시다.
처음 보는 새벗님들과의 상면식을 마치면서 강 대장님께서 오늘 우리가 산행을 할 예정인 속리산 주봉 천왕봉에 관한
부연 설명을 아주 자상하게 하셨는데 그 내용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약 2년 전에 천황봉이라 명기 되었던 표지석을 다시 천왕봉으로 바꾸어 설치하게 된 연유는 원래의 산명인 천왕봉을 일제가
자신들의 천황을 상징코져 천황봉이라 개명을 하였다는 설과 천황이란 산명은 중국 천황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왕으로
한단계 격하시키기 위해서 일제가 천왕봉이라 명 했다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개콘의 애정남 (애매한 것을 정해 주는 남자)이
아니면 참으로 판단키가 애매한 사항이라고 하신다.
중국의 고대 설화에는 백성들을 평안히 잘 다스린 전설적인 여덟 분의 성군이 나온다.
세분의 황과 다섯분의 제 즉 삼황 오제를 뜻 하는데 그 개개의 인물은 여러 설이 있어 아주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데
일반적으로는 천황,지황,복희씨,신농씨,요 임금과 순 임금 등 등 인데 후일 진나라의 영정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곤 삼황 과 오제에서 딴 두 글자 황과 제를 엮어 황제란 말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은 최초의 황제이니 시황제라 칭 하게
된다.
분서갱유,만리장성,불사초와 거대한 병마용 군단을 거느린 진시황릉으로 유명한, 오늘날 역사서에 나오는 진시황제가 바로
그 인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비봉산이란 산명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데 이 또한 일제가 조선의 기와 맥을 끊기 위한 일환이라 하여
산명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많은데 봉황이 날아 드는 신성한 산명을 왜 하며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비봉이란 말이 이미 봉황이 날아 가 버린 쓸모 없는, 진액이 빠져 버렸다는 교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는데 애정남이
아니고선 도저히 판단키가 어려운 일이다.
삼천갑자 동방석이 일화와 같이 사람의 일이란 꿈 처럼 해몽하기 나름이다.
봉이 날아 올랐으니 그 산은 봉황의 보금자리가 틀림없으니 언젠가는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돌아 올 수 밖에 없으니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있다고 한다.
이곳 장각 폭포마을은 우리 강 대장님의 친구분이신 핑크님의 친정 고향마을 이라고 하시니 아무래도 이 문제는 핑크님께
애정남의 역활을 맡겨 봄이 가장 현명한 처사일 듯 하다.
그리고 핑크님께서 자신의 고향마을인 장각동을 다녀 오신 특별한 소감을 따로이 부탁하셨는데 이에 앞서 우선 제대로 마무리를
못한 치악산 산행기를 잠시 추임새로 넣어 봅니다.
폭군 연산군은 결국엔 중종 반정으로 왕좌에서 쫒겨 나선 군으로 강등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이 분의 무덤이 북한산 자락인 도봉구 방학동 신동아 아파트 인근에 있다.
연산군 무덤 근처엔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인 수령이 약 1,0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오래 전 이 일대를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면서 이 나무를 없애려 하자 전국의 환경운동단체가 벌떼 처럼 달려 들어 농성을 하여 이를 지켜 낸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셨던 풍수학자 최 창조씨의 글을 인용하면 연산군이 폭군이였는데 명당에 묘를 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악터에도 여지껏 마을을 일구어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연유는 이 거대한 고목이 마을로 들어 오는 나쁜 기운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나... 좌우간 풍수지리란 건 녹비에 가로 왈 아니면 이헌령 비헌령이다.
우리나라는 여러 외침과 6.25 전란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몇 몇 훌륭하신 선조님들
덕분에 이를 온전히 지켜 낸 일화가 여럿 있는데 우리 느림보의 다음 산행 예정지인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지켜 내신
분을 우선 소개해 올리면 빨간 마후라로 유명한 공군의 김 영환장군 이시다.
영화 배우 신 영균씨가 F-86 쎄이버 전투기를 조종하여 적 진지로 급강하해 들어 가던 빨간 마후라란 영화의 실제 인물이였던
김 장군께선 가야산 폭격을 명 받고 편대장으로 출격을 하였으나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 갑자기 생각 나서 명령에 불복
하곤 상당한 고초를 받게 되었고
지리산에 있는 구례 화엄사를 불 태우란 명을 받은 지난 산행기에 기술한 차 일혁 총경께서는 불을 태워 재로 만드는 건 한 나절
이면 족 하지만 이런 문화재를 세우고 지켜 내는 데는 천년 세월도 부족하다시며 화엄사 내에 있는 각황전 문짝 하나 만을 뜯어
내어 불 태우곤 명령은 완수했다며 돌아 섰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를 불 태우러 온 국군장교에게 나도 함께 불 태우라며 법당 내에서 정좌를 하고 요지부동했던
한암 스님이 계시다.
결국엔 이 이름 모를 국군장교도 법당의 문짝 하나 만을 불 태우고 돌아 섬으로서 우리 후손들에게 오늘날의 상원사란 귀한
문화재를 남겨 주게 되었는데 이 한암 스님의 스승이 경허 선사란 분이신데 원효 이후 최고의 선승으로 존경 받는 분이며
캬톨릭 신자이신 작가 최 인호님의 길 없는 길 이란 책을 읽어 보면 이 선사의 온 몸을 전율케 하는 감동적인 일대기 나온다.
개인적으로 강추 하는 바 이며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의 제자 중에 한 분 이신 대행 스님은 안양 석수동에 있는
한마음 선원에 주석하고 계시는데 이 스님은 여자의 몸이지만 그 수행 방법이 참으로 특별하였다고 한다.
주로 우리가 다녀 온 원주 치악산 일대에서 변변한 토굴 하나 없이 홀 몸으로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기거를 하였다고 한다.
화북 면 소재지를 조금 못 미친 곳에서 느림보 리무진이 좌회전을 해서 들어 가는데 포장은 되어 있지만 마을 진입로가 버스
한 대가 갠신히 들어 갈 정도로 너무도 협소하다. 조금은 의아스럽다 거의 농로 수준이다.
장각폭포 뒤로 차가 오르니 제법은 잘 정비된 주차장이 보이면서 1960년대에 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지었다는 금란정이란
아름다운 정자가 보인다.
주차장 한켠에 마련한 화장실엔 오랫 동안 사용을 통제하였는지 싯뻘건 녹이 슬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임시 방편으로
두 개의 이동식 화장실이 바로 옆에 놓여 있다.
관리할 주체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가 본데 괜한 예산 낭비가 너무도 안타깝다.
핑크님의 부탁도 있고 하여 여러 느림보님들이 단체 사진을 찍느라 부산한 틈을 타서 금란정과 장각폭포 주위를 서성이다
늦게서야 맨 후미로 산행을 시작하니 얼마 가지 않아 우측 언덕 위로 칠층 석탑의 장엄한 모습이 보인다.
이곳 장각사지는 원래 비천사 혹은 장각사라 불리우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지금의 칠층 석탑도 일제 때
왜놈 낭인들의 손에 의해 도굴되면서 무너져 내렸던 것을 최근에야 복원하였다고 한다.
2층 기단 위에 칠층으로 조성된 이 석탑은 특이한 형태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조성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탑은 이 사 육 팔 장이 아닌 홀수 즉 일 삼 오 칠 구로 조성하는데 이 장각 폭포마을은 마을 입구에서 진입할 때 부터 웬지 모를
언밸런스를 무지 많이 느끼는 독특한 마을이다.
전면에 우에서 좌로 흐르는 계곡이 있고 그 너머에 있는 산줄기는 산세가 너무 높아 통상적인 가람의 배치도 도무지 아닌 듯 하고
예전 사람들은 폭포 인근에는 좀체 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폭포나 철 철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사람의 기를 산만케 한다는 이유인데 도봉구 방학동 처럼 이곳도 어떤 무었이
있어 마을을 형성하고 살고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려 본다.
속리산 법주사 처럼 대부분의 절터가 자리 하고 있는 곳은 최대의 명당터이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의도로 건립하는 것을 비보 사찰
이라고 하여 악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심지어는 저수지를 메워 버리고 사찰을 건립하는 경우도 있다.
길 옆에 아담한 마을회관이 보인다.
이름 모를 꽃들이 예쁘게 잘 피워 오르고 있는 고운 화단 너머 마을 회관은 낮 시간이여서 인지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는데
유리창 너머 거실은 마을 주민들이 자주 사용을 하지 않는지 여러 물건들이 산적해 있었다.
마을 회관 주위 농촌에는 온통 잘 익은 감나무들의 향연이 벌어 지고 있었다.
경상도란 도명을 경주와 상주의 지명에서 따 올 정도였으니 오래 전에는 상주라는 도시도 상당히 번창하였음이 틀림없으나
여러 사정으로 지금은 낙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주는 특산물로 곶감과 양잠(누에고치)이 유명하여 도처에 뽕나무가 심겨져
있어 뽕나무에 달린 검붉은 오디가 집집 마다 멍석에 그득하게 말리던 곳인데 한 때 양잠을 장려하던 시절에는 양잠학교라고 하여
정규 고등학교 과정도 있었는데 길 왼편 계곡쪽으로 한창 감 수확을 하는 분들의 모습이 보여 눈을 돌리며 아차 하는 생각이 든다.
감나무는 몸체에서 뻗어 난 가지에 하중을 가 하면 아주 쉽게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감을 수확할 땐 절대로 나무에 올르지 않고
장대에 주머니를 단 졸기라는 도구를 하여 감을 따는데 이 분들은 아무래도 감 수확의 초짜배기가 틀림 없어 보인다.
감나무에 올라 선 너무도 위태로운 모습을 바라 보며 계속해서 길을 걷노라니 왼편에 큼직한 돌에 몇 몇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한농 무어 무어라 해서 이 마을 이름인가 아니면 마을 자체에서 결성한 농민단체이나 하면서 조금 더 길을 걷는데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위로는 제법 넓은 등산로가 있고 아래론 계곡물이 흐르는 묘한 위치에 별장도 아니요 펜션도 아닌 기묘한
분위기의 건물이 보이면서 마악 우리 뒤를 따라 온 승용차 한 대가 그 집으로 진입하는 순간 불현듯 내 머리에 아 아 하는 생각이
떠 오른다.
당초에는 엘리야복음선교원이라 했다가 지금은 한농복구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는데 여러 뜻 맞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집단
생활을 하면서 유기농법으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면서 곧 다가 올 종말에 대비한다는 신앙 단체가 틀림 없어 보인다.
물론 기존의 여러 개신교 단체로 부터 이단시 된지는 오래 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암암리에 퍼진 교세가 이미 전국구라고 한다.
우리 학창 시절에 장래 희망을 물으면 약간은 장난스럽게 답변하던 말이 앞으로 사이비 교주가 되겠다는 것이다.
장사 치고 대동강 물을 공짜로 팔아 먹은 봉이 김 선달을 제외하곤 이렇게 쏠쏠한 장사는 세상에 없다.
신도들은 전 재산을 헌납하고 폐쇄된 집단 신앙촌에 들어 와선 죽을 때 꺼정 무임금으로 죽어라 일만 하니 인건비란게 전혀
들지 않을 뿐 더러 귀 더욱 잼난 일은 하나님의 은총이니 성총이니 머니 하며 적당히 구슬리며 최면을 걸어 대면 집단촌에
들어 온 여신도들 가랭이 벌이게 하는 일은 손바닥 뒤 집는 일 보다 더 쉽다. 이 뿐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란 선진 민주국가에선 종교단체에 한 해서 세금이란 걸 부과하는 법이 없다.
참고로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인 미국이라는 선진 국가에선 여타 종교를 막론하고 철저히 세금을 징수한다고 한다.
주위에선 저를 보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말을 증말 많이도 합니다.
얼핏 보기에 쌍판대기 점잔케 생겻재 주둥아리 벌였다 하문 돼지도 않은 썰래발이 막 쏟아져 나오재...
약 300 미터 거리의 천왕봉을 다녀 온 헬기장에서 우리 느림보님들만의 오붓한 점심상이 펼쳐 진다.
난 배,신,염 그리고 유 고문님들과 함께 자리를 했다.
배울 만큼 배우고 할 만큼 열심히 인생을 사셨던 노 신사분들께는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할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문님들과 함께 맛난 점심을 함께 하며 부채살 같은 속리산 연봉들을 바라다 보노라니 사회 초년병 시절 회사원으로 극기 훈련
이란 걸 한다며 수북히 쌓인 눈길을 워카(군화)발로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아주 손 쉽게 문장대를 오르던 젊었던 시절의 내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이미 대가리가 반백이 다 된 모습으로 이곳 천왕봉 문턱에서 구래도 오래 살아 보겠다고 게걸스레 음식물을 입에 걸쳐 넣는
내 모습을 내려다 보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본다.
이런 만감이 교차하는 기묘한 순간이면 난 언제나 처럼 어쩌면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숙제를 던져 본다.
내가 어머님 자궁에서 수태하기 전엔 어디에서 왔으며 이미 살아 온 생 보단 아무래도 길어 보이지 않는 이 생을 마친 연후에는
과연 어느 곳으로 어떤 모습을 흘러 갈 것인지를 뇌리를 떠 올리는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말씀이 내린다.
지금의 네 꼬라지가 바로 네 전생의 모습이요 현재 네가 행하는 모든 행적이 바로 다음 생의 네 몰골이니라.
한국 씨리즈 야구 보느라 만부득 산행기를 늦게 올렸네여 지송하고 다음 산행 때도 우리 건강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만나요.
탄천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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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돌삐님..뭐가 늦지 않았다고 하시는건지...
하시던대로 하세요.
느림보 산행 나오셔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산행기 방에 재미난 글 ..영양가 있게 올려 주시고..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다'
어느 스님 말씀처럼 처한 환경대로 사는게 인생이다..
느림보 돌삐로 살아주세요..^^
원효대사 해골물의 깨닮음이 생각나믄서,,,^^샘에 고인 썪은 물을 발견했다지요 죽을것 같은 목마름에, 하고 침을 벹았다 하지요.. 또 목이 말라 죽을것 같은 심정으로,그 샘을 다시 찾아 목숨을 부지했답니다.( 전생과 이생의 꼬라지를 논하시니,상반된 이기심에,,잠시나마 ^^)감합니다...^*^
어떤 산객이 힘겹게 산행을 하다보니,, 물이 떨어져 갈증이 심했나 봅니다..
그러던 차에 작은 옹
정신없이 그 물로 갈증을 해소 하였다네요..글고 나선,, 퉤
돌고 돌아 길을 잃고 헤메던중
깨닮음과 이기심
마지막, 짧은 메시지가 생각을 돋웁네염
유익한 산행기
재미만땅............해박한 지식.어디서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