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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壯麗)했느니, 우리 그 낙일(落日)
이 문 열
길게는 환단고기(桓亶古記) 만 년으로부터 짧게 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반(半)만 년에 이르기까지 이 겨레가 지나온 영욕의 구비가 얼마일까만, 오늘의 이 행복을 위해 넘어야 했던 첫 번째 고비는 아무래도 우리 옛 왕조가 끝날 때를 전후해 있었다는 편이 옳다. 그때 우리 왕가(王家)는 아시아의 여러 전제왕조들처럼 역사의 어둠 속으로 지고 있는 해(日)였으나 그 낙일(落日)은 장려하였다. 애잔하면서도 눈부신 그 잔영 속에 옛 우리가 지고 새로운 우리가 태어나며, 그 새로운 태어남이 바로 이 오늘의 행복을 향한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우리 왕가와 마지막 임금님에 대해 별 희한한 소문이 다 떠돌고 있다 한다. 한마디로, 왜곡과 와전과 낭설들이 우리 자랑스러운 왕조의 그 장려했던 낙일을 먹칠해 진상을 날이 갈수록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아는 이에게는 자신의 이력보다 더 뚜렷한 일인데도, 우리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치욕 속에 묻으려는 못된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못된 세력이란 우리 중에 섞여 살고 생김도 차림도 비슷하나, 피는 우리와 조금씩 달리하는 되〔胡〕 트기, 양(洋)트기, 한자(韓子=일본 혼혈아) 들을 이른다. 앞으로도 종종 얘기되겠지만, 그것들은 어쩌다 제 핏줄에 튀긴 이족(異族)의 피가 무슨 요사라도 부리는지 좋을 때는 우리 중의 하나로 가만히 있다가도 정작 긴요한 대목에 오면 갑자기 한겨레 아닌 딴겨레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우리의 자랑이 될 만하면 깎고 부끄러움을 보태며, 이로움은 피하고 해로움을 끌어들여 제가 사는 땅보다는 어느 적에 튀겼는지도 모를 지 애비, 할비의 피를 따라가 버린다.
그것들의 입이란 게 가죽이 모자라 찢어진 거나 다름없으니, 그것들의 말도 다 말이라고 이러니저러니 길게 끌 것 없다. 한마디로 우리 옛 왕가는 우리의 다함없는 존숭(專崇)과 애도 속에 스러졌으며, 그 존승과 애도는 다시 우리가 다 함께 끌어안아야 할 그 무엇으로 바뀌어 자칫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역사의 고비를 거뜬히 넘기게 했다. 그리고 ― 우리의 참된 얼이 기억하는 한 그 경위는 대강 이랬다.
민주니 공산이니 하는 멀리 바다 건너 터럭 누르고 눈알 푸른 사람들이 지어낸 생각 다발을 놓고 그게 옳으니 그르니 하며 동서로 두 조각이 나서 다투다가 끝내는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피탈까지 본 일본이, 근년 들어서는 턱없이 우리 흉내를 내다가 일이 꼬여 곤욕을 치르던 끝에 우리에게 몇 십억 불 빌어 가 간신히 발등의 불을 끈 한심한 그 섬나라가, 한때 강성하여 겁 없이 우리를 넘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지난 행복의 잔영(殘影) ㅡ 은자(隱者)의 명상과 새벽의 고요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약삭빠르게 바다 건너 사람들의 재주 몇 가지를 배워 제도를 고치고 물산을 일으킨 덕분이었다.
하기야 그 무렵 턱없이 우리를 넘보기로 치면 그게 어디 일본뿐이겠는가, 먼저 코쟁이라면 이놈 저놈에게 한 번씩 터져 보지 않은 데가 없을 만큼 붙었다 하면 깨져, 코피가 나도 여러 번 나고 갈빗대가 나가도 열 대는 더 나갔음 직한 청국(淸國)이 그랬다. 염통 쓸개에 허벅지살까지 떼어 주고 간(肝)만 남은 까닭인지 그래도 오기 하나만은 살아남아, 우리에게는 한사코 미꾸라지 먹고 용트림하는 것 같은 종주권(宗主權)을 내세우며 걸핏하면 퍼렇게 멍든 눈을 부
릅뜨고 썩돌 같은 주먹을 을러메던 그 꼴이 자못 불량스러웠다. 노국(露國) 또한 분수없이 날띈 꼴로는 그 청국에 못지않았다. 손톱 밑에 가시 박힌 줄은 알아도 염통에 쉬 스는 줄을 모른다고 발등에 떨어진 불 같은 제 나라 혁명은 제쳐 놓고 얼지 않는 항구 같은 데만 눈이 뒤집혀 설쳐 대는 품이 잘하면 뜨물에 애 생길 뻔도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때 얼토당토 않게 거문도까지 점령하고 나선 걸로 보아 영국도 이 땅에 바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고, 신미·병인 두 해의 작태로 보아 미국이나 불란서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났다고 발뺌하지는 못할 것이다. 구왕실이 명함을 모아두지 않아서 그렇지, 찾아보면 이 땅 보고 껄떡거린 것들 가운데 독일이나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의 명함은 왜 없겠는가. 어쩌면 남의 나라 넘보기가 그 시절 서양에 만연했던 괴질이었는데, 일본이 쓸데없이 깝죽대며 그쪽과 오가다가 그 못된 병부터 먼저 옮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처음 한동안은 일본의 그 같은 넘봄이 턱없는 짓 같지만도 않았다. 남의 뭣은 부지깽이로라도 쑤셔 본다는 기분으로 공연히 이 땅을 기웃거려 이 땅의 식민지화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슬그머니 손을 뗀 양귀(洋鬼)들이 먼저 일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이미 일 벌여 둔 곳이 많은 그들에 비해 이 땅밖에는 달리 비벼 댈 곳이 없는 일본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생결단으로 나서자 이런저런 구실로 손을 뗀 것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한몫 단단히 한 것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삼십 년도 안 돼 제 목을 겨룰 칼끝인 줄도 모르고 노국의 남진(南進)을 막아 준다는 말에 영국은 못 이긴 채 인도로 돌아가 버렸고, 미국은 태프트란 물렁한 외교관을 보내 이 땅을 필리핀과 어물쩡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을 기고만장하게 만들어 준 것은 역시 오기와 허풍으로 큰소리 한번 질렀다가 진흙땅에 메다 꽂힌 격이된 청국과 노국이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주제에 이 땅에까지 걸레 같은 군대를 보내 일본에게 반도 출병(出兵)의 구실을 주고, 종당에는 제 등골까지 파먹히게 되는 청국의 꼴은 쌍말로 국 쏟고 뭣 데고, 사발 깨고 동네 개싸움 시키고, 잠자리에서는 남편에게 따귀 맞은 칠칠치 못한 계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베리아쯤 몇 개 사단을 깔아 놓고 기다리면 될 걸 구태여 대함대를 지구의 반이나 돌게 한 뒤 저희에게는 낯서디 낯선 바다에 몰아넣어 몽땅 수중고혼이 되게 하고, 나폴레옹과 히틀러에게도 한 적이 없는 항복 같은 강화의 치욕까지 맛본 노국 또한 그 꼴이 청국보다 크게 나을 건 없없다. 그리하여 그 두 번의 싸움으로 눈앞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간덩이가 부풀어 오른 일본이 요즘에는 좀 시들해진 감이 있는 그 식민지 놀음에 뒤늦게 열을 올리게 되었다.
갑진(甲辰) 년에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시작하고 을사(乙巳) 년에 억지 춘향이 격으로 보호국을 만들었다가 다시 경술(庚戌)년에 그 욕된 합방극(合邦劇)을 연출했다. ― 요즘 퍼지고 있는 못된 소문이 말하는 그 소문의 다음 경과는 대개 그러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말 놀랍고도 기막힌 우리 왕조의 최후가 감추어져 있다. 슬프면서도 장려(壯麗) 한 지난 시대의 낙일(落日)인 동시에 오늘날의 이 행복을 위한 출발이 되는 엄청난 일이.
그 출발을 되돌아보는 일은, 오, 언제나 눈시울 뜨거운 감격이다. 우뚝한 푸른 산 같고 거침없이 흐르는 물 같은 말솜씨인들 그날을 이야기함에 떨리고 막힘이 없을 것이며,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글인들 그 감격을 담아 처음과 끝이 가지런할 수가 있으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감격적인 것은 우리들의 마지막 임금님 ㅡ 그 분과 그 자손들의 거룩한 피로 자칫 그릇되어 흘러갔을 뻔한 역사의 물길을 바로잡으신 고종(高宗) 폐하의 죽음이다. 생각하면 지난날 이 땅과 우리를 다스린 이들 가운데 그분처럼 욕되게 꾸며지고 거짓으로 뒤틀린 전설 속으로 사라져 가신 이도 드물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야심을 펴기 위한 도구였으며, 자라서는 드센 아내와 고집센 아버지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고, 끝내는 그 아내를 죽인 일본인의 꼭두각시로 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 바루먹은 말처럼 시름시름 죽어 갔다는 터무니 없는 얘기가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분의 참모습을 그린 것으로 믿기어지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분의 욕됨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그 아들에 척(拓)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순종(純宗)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의 뒤를 잇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걷어채이듯 옥좌에서 밀려나 일본의 한 번왕(藩王)으로 굴러떨어졌다는 말이 있다. 또 딴 아들에 은(垠)이란 이가 있어,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할 원수 집안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일본의 육군 소장까지 지냈으며, 끝내는 노새처럼 후손도 없이 불모지에서 죽었다는 더 고약한 소문도 있다. 모두 한심하고도 속 상하는 낭설들이다.
좀 나은 것이 강(堈)이란 왕자지만 그분도 우리를 위로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하다. ‘독립한 조선의 한 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皇族) 되기를 원치 않노라’던 대동단(大同團) 사건 무렵의 기백에 비해 그 뒤의 생애는 애매한 점이 많다. 만일 그분이 정말로 그랬다면 그 뒤로는 수없는 탈출과 자결이 기도되었어야 할 것이지만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인멸된 것 같지 않은데도 그 생애는 너무도 흐지부지 끝나 버린다.
한마디로 말해 요즘 떠도는 그 못된 소문에는 우리의 마지막 임금님과 그 왕자들의 모습이 자칫 한심한 기분이 들 정도로 어리석고 못나게만 왜곡되어 있다. 누가 어떤 속셈으로 지어내 펴뜨렸는지는 알 수 없으되, 적어도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던 이들을 이간시켜 이득을 볼 자들의 소행이라는 것만은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한 왕조의 무너짐이 어찌 그리 허망할 수 있겠으며, 하늘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고른 성스러운 핏줄의 마지막 줄기가 또한 어찌 그리 한심하게 끝맺을 리 있겠는가.
과연 그러하니, 항간의 뜬소문과는 달리 우리 옛 왕조의 마침은 이러했다. 어떤 문명 국가도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 적에 의해서만 멸망당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안에 있는 적에 의해 안에서부터 먼저 망한 뒤 다시 바깥의 적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데,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그 이름이 드러난 을사년(乙巳年)의 다섯 도적을 비롯해, 비록 이름은 무사히 가리어졌지만 더 많은 도적들이 먼저 안으로부터 우리를 망하게 한 뒤에야 다시 바다 건너의 도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높은 갓 쓰고 긴 수염 드리웠던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들, 오직 한족(漢族)의 문화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고 그들의 땅이 바로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모화사상가(慕華思想家)들 그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내부의 도적들이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던 그 앞뒤 없는 국수주의자들, 어쩌면 스스로를 너무 믿은 게 아니라 지나치게 믿지 못해 생겨났을 쇄국주의자들, 그들도 종종 그 이름이 빠지는 내부의 도적들이다.
새롭다는 것과 가치 있다는 것을 혼동한 그 경박한 개화사상가들, 외족인 친구가 동족인 적보다 틀림없이 나으리라고 믿은 그 얼치기 혁명가들, 그들 또한 손가락질 받지 않은 내부의 도적들이다.
까닭 모를 무력감에 빠져 한번 싸워 보기도 전에 마음으로부터 손을 들어 버리고 만 패배주의자들, 또는 제국주의에 최소한의 이해조차 없던 개국론자들, 그들도 역사의 어둠 속에 이름을 숨긴 내부의 도적 들이다.
이쪽저쪽 다 비난하며 중용이니 조화니 하고 떠들기는 했어도 기실 그들이 노린 것은 일신의 영달뿐이던 기회주의자들, 그들도 마땅히 기억되었어야 할 내부의 도적들이고, 티끌 자욱한 세상을 등지겠네 어쩌네 하면서 점잖게 돌아서도 마음속은 다만 혼란과 불안뿐이던 그 은둔주의자들,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내부의 도적들이다.
쓸쓸하여라, 일일이 들자니 끝이 없다. 어떤 번들거리는 허울을 썼건, 무슨 어마어마한 명분을 앞세웠건 남보다 나를 위한 마음이 컸던 모든 자들은 하나같이 세월에 가리어진 내부의 도적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도적들에 이어 뻔뻔해져 오히려 정직해 뵈는 을사년의 다섯 도적이 나타나 먼저 안으로부터 이 나라를 허물어 놓았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임금님은 역시 하늘이 그를 골라 우리와 이 땅을 그 손에 부치신 이의 후예다우셨다. 지켜야 할 것과 버릴 것을 아셨으며, 비록 비극적일지라도 왕자의 책무와 존엄은 잊지 않으셨다.
오욕스러운 을사년의 그날, 무장한 일본군들의 흉흉한 시위 아래 그 우두머리 이등박문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대신들을 위협해 얻어 낸 조약서를 들고 어전으로 갔을 때였다. 우리 임금님께서는 단호하게 조인을 거부하셨다. 넒은 근정전을 가득 메운 것은 번쩍이는 총검을 든 이등(伊藤)과 장곡(長谷) 의 졸개들이요, 늘어선 것은 이미 혼마저 팔아먹은 을사년의 다섯 도적들뿐이라 그 같은 항거는 거의 목숨을 내건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때껏 이 나라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줄 알고 신이나 일을 꾸며 오던 이등과 장곡은 잠시 아연했다. 몇 십 년을 함께 살아온 왕비 명성황후를 죽여도 별 반감이 없기에 무엄하게도 우리 폐하를 갈 데 없는 무골충(無骨蟲)쯤으로 여겨 온 그들이었다. 뜻밖으로 다 된 죽에 코 빠질세라 안달이 나서 어떤 대신에게도 한 적이 없는 위협과 회유를 되풀이했다.
그래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등은 갖은 달콤한 조건을 다 내걸고 장곡은 무엄하게도 군도(軍刀)자루에 손까지 댔지만 우리 임금님께서는 작은 흔들림도 없으셨다. 그대로 돌로 깎은 왕자(王者)의 상(像)이었다.
그러기를 대여섯 시간, 어느새 밤이 되니 이등은 드디어 미리 꾸며둔 다른 방법을 쓰기로 작정했다. 장곡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장곡은 곧 졸개들을 시켜 근정전 안에 있는 모든 대신들과 내시들을 멀리 궁 밖으로 몰아내게 한 뒤 태자 척(拓)을 끌어냈다 나중에 순종이란 꼭두각시 황제가 되어 합방 때까지 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다가 끝내는 독살당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 이였다.
태자가 우리 임금님 앞에 끌려 나오자 장곡은 무엄하게도 평소 뽐내며 차고 다니던 군도를 뽑아 들고 소리쳤다.
“폐하, 폐하께서 기어이 이 문서에 조인을 않으시면 저희들은 여기 이 태자의 목을 천황폐하께 올려서라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씻어야겠습니다. 그래도 좋으시겠습니까?”
한번 얼러 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금세 칼을 휘두를 기세였다. 하지만 우리 폐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신 뒤였다. 한동안 사랑하는 아들을 그윽히 내려다보다가 담담하게 이르셨다.
“먼저 가거라. 살아 왜왕(倭王)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욕을 입느니보다는 조선의 태자로 떳떳하게 죽는 게 나으리라. 구천(九泉)에 가서 열성(列聖)을 뵈옵거든 아뢰거라. 못난 형(熙: 高宗의 諱)도 곧 뒤따라가서 오백 년 왕업을 그르친 죄를 빌리라고.”
그리고 눈길을 돌려 등불에 일렁이는 단청을 가만히 바라보셨다. 부자간의 영결(永訣)치고는 너무도 조용했다. 우리의 태자도 그런 부왕(父王)의 아들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옛말에 죄가 삼천 가지라도 부모 앞에서 먼저 죽는 불효보다 더 큰 죄가 없다 학였으나, 이제 아바마마의 허락하심으로 먼저 죽는 죄 씻음을 받게 되니 소자 죽어도 남는 한이 없겠습니다. 부디 다음 세상에는 망국의 태자로 태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며 불초 척은 먼저 갑니다. 옥체를 보중하시어 광명한 날을 다시 만나시길 빌 따름입니다.”
그리고 엎드려 두 번 절한 뒤 장곡(長谷)의 칼 앞에서 길게 목을 늘였다. 병 약한 몸이라고는 하나 스물의 청년이라 맨주먹으로라도 저항하다 죽는 걸 생각해 볼 수도 있지반, 만승의 태자로서는 할 바가 아니다. 자칫 천박한 발악으로 오인받느니보다는 이미 기운 대세를 거역하지 않고 고요히 목을 내미는 쪽이 훨씬 의연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 같은 우리 임금님 부자의 태도에 이등(伊藤)도 잠시 섬뜩한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한동안 놀란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이 워낙 악물(惡物)이었다. 장차 일본으로 하여금 동양 삼국을 피로 물들이고, 마침내는 저희도 태평양을 저희 백성의 썩은 시체로 뒤덮으며 망할 준비를 하기 위해 내려온 살성(殺星)이라, 인두겁을 써도 모질고 독하기가 한이 없었다. 장곡(長谷)을 향해 한 번 눈을 깜박하자 장곡의 모진 기합 소리와 함께 태자의 목은 근정전 마룻바닥에 굴렀다.
우리 임금님은 옥좌에 앉으신 채로 지그시 눈을 감으셨다. 얼핏 보아서는 이등의 그 방법이 효과를 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잠시 후에 눈을 뜨신 우리 폐하께서는 한층 낮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등에게 말했다.
“하늘에 죄를 얻지 않았으면 시체는 흩는 법이 아니니라.”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양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계실 뿐이었다.
그만하면 그 같은 방법으로는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깨달을 법도 하건만 이등과 장곡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래로 세 분 왕자를 차례로 끌어내어 우리 폐하를 위협하며 목숨을 앗기 시작했다. 살아남아 너절하고 욕된 자취를 우리 기억에 남긴 것으로 조작된 이들이었다. 피를 본 그 악물들의 흉성(兇性) 이 발작한 것인지, 아니면 그 기회에 우리 왕가의 대를 끊어 버리기로 미리 작정했는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우리 임금님은 잔혹한 고문과도 같은 그 시간을 끝내 옥좌 위에 앉으신 채 버티셨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자식들의 모습에 실성한 늙은이의 추태를 보이지 않은 것만도 왕자(王者)의 기품이 아니면 될 수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장곡의 칼 아래 뛰어들어 함께 죽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뒷날을 위해 참고 또 참으셨다.
하지만 우리 임금님도 결국은 피와 살로 된 인간이셨다. 마지막으로 순빈(淳嬪) 엄씨에게서 난 은(琅)까지 끌려와 죽자 지그시 감은 두 눈으로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소에 배운 대로 왕자다운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기는 해도 아흡 살의 나이 탓인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늘게 몸을 떠는 막내 왕자의 애처로운 모습 때문이었으리라.
그 눈물을 본 이등이 악귀처럼 이죽거리며 물었다.
“위로 둘이나 죽어도 눈 한 번 깜박하시지 않던 폐하께서 어찌 셋째 왕자는 눈물로 보내시오?”
“척이나 강 등은 자기 갈 길을 알고 갔으나, 그 어린 것은 다만 시절을 잘못 타고난 죄로 아무것도 모르고 베임을 당했으니 어찌 가엾지 않겠느냐?”
임금님은 대꾸라기보다는 나무라심으로 그렇게 말을 받으셨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에 어새(御璽)를 놓으실 일이지, 어찌 채신없이 용안을 눈물로 적시고만 계시오?”
이등이 들고 있던 조약서를 흔들어 보이며 다시 빈정대듯 물었다. 그때 우리 임금님은 벽력같이 꾸짖으셨다.
“이놈, 네 말이 간교한 가운데 이로(理路)마저 뒤뚫렸구나. 아비와 자식의 정은 사사로운 것이요, 나라가 있고 없음은 이 나라 억조창생의 생사가 걸린 공변된 일이니라. 아무리 무도한 섬오랑캐라 하나 그래도 한 나라의 상신(相臣) 이 되어 그만한 의(義)도 모른단 말이냐? 네가 그릇 적으면서도 수단까지 혹독하니 뒷날 반드시 제 명에 죽지 못하리라.”
그런 우리 폐하의 눈에서는 한 줄기 번개가 쏟아지는 듯했다. 이등 그 물건이 능히 발끈할 만한 말이었으나 워낙 그분의 위엄이 무거우니 저도 질리는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장곡을 말리듯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사령관은 어서 시체를 지우고 이왕(李王)을 조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깊이 감추도록.”
“그럼 이 기회에 저 늙은이도 함께 베어 버리지 않으실 겁니까?”
직함이 좋아 조선 주둔군 사령군이지 사람 백정이나 다름없는 장곡이 못마땅한 눈길로 이등에게 물었다. 이등은 한층 엄하게 그런 장곡의 사나움을 억눌렀다.
“그렇다. 아직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살려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조인(調印)은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
“그건 이미 준비가 돼 있다. 하야시(木木董: 당시의 駐韓公使) 군이 이 년간이나 공들인 작품이지.”
그리고 다시 이등은 악귀와도 같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부터 그 방면으로 밝은 이등의 못된 꾀를 우러러 오던 장곡이라, 이등의 그같은 웃음을 보자 더는 되묻지 않았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이미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믿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왕자들의 시체는 주한 일본군 사령부로 싣고 가 적당히 묻고 우리 폐하도 그 안에 있는 지하호에 가둬 버린 일이 그랬다.
물론 이 일을 처음 듣는 이에게는 이 모든 사실들이 놀랍다 못해 의심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 족속끼리만 해치운 일이니 증인도 구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의 마룻바닥을 자세히 살피면 그때 우리 왕자들이 흘린 핏자국이 몇 군데 남아 있고, 또 거기 진열돼 있는 고종 임금님의 구식 승용차 뒷자석에도 왕자들의 시체를 옮기다 묻은 핏자국이 있다 뿐인가, 당시 주한 일본군 사령부 부근을 파면 어딘가 크고 작은 몇 구의 백골들이 나올 것이다. 그 뒤 얼마 안 돼 벌어진 해괴한 조인극(調印劇)도 한 간접 증거로 쓰일 수 있으리라.
을사보호조약의 조인식은 그날 밤이 제법 깊어진 뒤에야 바로 그 근정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경복궁 휘황한 촛불 아래에는 우리 임금님과 원통한 넋이 되어 흩어진 세 분 왕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다. 여우 같은 주한 공사(公使) 하야시가 바로 그 같은 날에 대비해 지난 이 년간 이 땅을 뒤지다시피 하여 찾아내고 훈련시킨 대역(代役)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우리 왕가의 사람들과 흡사하고, 궁중을 드나들며 왕족들의 특징을 꼼꼼히 살
핀 하야시의 훈련과 분장이 얼마나 교묘했던지, 가까이서 모시던 대신들조차 그들이 가짜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깊은 밤에 촛불 아래서 조인식을 거행하니 일은 더욱 감쪽같았다. 간혹 우리 폐하나 왕자들의 행동거지가 전에 없이 천박하고 어색한 걸 느낀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또 장소의 험악하고 살벌한 분위기에 억눌려 그 의심을 키워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을사년의 다섯 도적이 포함된 아홉 대신들은 물론 궁안의 내관들조차도 그 기막힌 바꿔치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에 대역을 맡은 일제의 꼭두각시들은 세계 역사에도 예가 드문 엉터리 조인극을 연출해 갔다. 우리 임금님과 왕자들에 대한 갖가지 고약한 후문은 바로 그 대역들의 기막힌 솜씨였다.
그 후문들 가운데 가장 민망스러운 일로는 우리 임금님이 벌벌떨며 이등박문에게 어새를 바쳤다는 것이 있다. 왕자 하나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이제는 우리 모두가 살게 되었느냐고 하야시에게 물었다는 것도 한심스럽고, 누구는 까무라쳤다는 것도 욕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는 순종 영친왕(英親王)·의친왕(義親王)의 후문들, 그중에서도 의친왕 대역이 보여준 호기는 좀 별나지만 아마도 그것은 대역의 과잉 연기였거나 무슨 올가미였을지도 모른다. 뒷날 일이지만 그 바람에 우리 대동단(大同團)이 뿌리째 뽑히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걸로, 한 왕조가 망했는데 왕족 가운데 단 한 사람의 독립투사가 없었다는 그 희귀한 예에 우리가 든 까닭은 밝혀진 셈이다. 그 틈을 타 어떤 양(洋)트기가 한때 미국에서 한국의 왕자 행세를 한 적도 있다지만, 어떤 의미로 우리의 왕자들은 일본과의 첫 싸움에서 산화한 투사들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을사조약이 진행될 무렵 지으신 것으로 보이는 우리 폐하의 단장시(斷腸詩)도 눈물겹다. 비분을 삼키며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뒷날을 기약하던 그분께서 멀지 않은 망국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신 그 시는 감시하던 일본인 하급관리조차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사설은 널리 알려져도, 우리 폐하의 애절한 단장시를 아는 이는 드물고, 위로 민영환(閔泳渙)·조병세(趙秉世)·송병찬(宋秉瓚) 같은 사대부들로부터 아래로 전봉학(仝奉學)·윤두병 (尹斗炳) 같은 사졸(士卒) 에 이르기까지 그날에 자결한 이들의 이름은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도, 섬오랑캐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은 우리 왕자들의 그 기막힌 일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감동 받을 일은 그 불행한 날에만 있지는 않다. 그 뒤 그분께서 겪으신 십여 년의 세월은 짐작하기에도 끔찍한 인고의 세월인 동시에 그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한 날들이었다.
한바탕의 바꿔치기는 그럭저럭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넘길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오래잖아 일본인들은 우리 임금님을 다시 옥좌로 모셔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들이야 평소에도 대신들이나 백성들에게 그리 알려진 얼굴이 아니어서 오래된 내관만 바꾸면 계속 버텨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님에 이르면 아무리 모습이 닮고 분장과 흉내가 교묘해도 가짜로는 오래 버텨 나가기가 어려웠다.
당초에 저희끼리 생각한 대로 내친김에 바로 합방까지 몰고 갔더라면 그런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왕가의 대신들만 손아귀에 넣으면 되리라는 계산에서였는데 ― 그게 그만 뜻 같지가 못했다. 한번 굴욕적인 보호조약의 소문이 펴지기 무섭게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벌떼처럼 의병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무력이야 대단치 않다고 해도 무시하고 합방으로 밀고 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거기서 적어도 몇 년은 더 우리 왕가를 존속시킬 필요가 생기자 일본인들은 다시 우리 폐하를 옥좌 위로 끌어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다시 나온 우리 임금님께서 그 뒤 십여 년간이나 저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주신 데 대해서는 의혹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눈앞에서 세 아들을 차례로 죽인 원수들과 어떻게 그 오랜 기간을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만이라도 그 끔찍한 일의 진상을 밝히고 자결이라도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렇게만 돼도 언젠가는 그 진상이 궁 밖으로 새어 나올 것이고, 마침내는 거국적인 항쟁의 원동력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ㅡ 대개 그런 종류의 의혹이 되겠지만 너무도 얕고 속된 바람이다. 쉽게 말해 우리 폐하의 처신이 다만 구차한 목숨을 위해서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의혹이며, 한 왕조를 닫는 일을 장사치 난전 거두듯 하라는 바람이다.
우리 임금님께서 죽음보다 더한 그 수모와 분한(憤恨)의 세월을 참고 견디신 데는 보다 깊고 거룩한 뜻이 있었으니, 그 한 뚜렷한 증거가 을사년으로부터 이태 뒤에 난 해아밀사(海牙密使) 사건이다.
그해 화란(和蘭)의 수도 해아(海牙) 에사 열린 회의는 말이 좋아 ‘만국평화회의’지, 내막으로는 일본과 한통속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모인 ‘힘세고 못된 놈들 저희끼리 안 싸우고 힘없는 놈 잡아 갈라 먹기 회의’였다. 그런 아수라 먹자판에 도마 위의 고기 신세 같은 우리의 외로운 목소리가 제대로 닿을 리 없건만, 그래도 우리 임금님은 그들이 내건 그럴듯한 공의(公儀)에 한 가닥 기대를 품었던 듯하다.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種) 세 사람을 뽑아 친서와 함께 우리의 외로운 처지를 전하게 하니 이른바 해아밀사(海牙密使)였다.
그들 셋은 해아까지는 무사히 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간교한 일본 대표 소림(小林)의 방해 공작과 거기에 넘어간 화란 정부 및 회장 넬리도프의 멍청한 판단으로 회의장에는 들어가 보지조차 못했고, 개별로 만난 만국의 대표들도 한결같이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미 말했듯,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을 맛있는 먹이 정도로 생각하는 데는 일본과 다름없는 것들인 데다, 그 모임이 또한 먹자판에 어떤 질서를 주자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일본의 입에 반이나 들어간 폭인 우리나라를 놓고 공연히 이러쿵저러쿵 간섭했다가 독 오른 일본에게 따귀 맞을 게 겁난 듯했다.
원래가 남의 힘을 빌어 어떻게 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에 좀 문제가 있고, 일도 결국 이준 열사만을 이역(異域)의 외롭고 분한 넋으로 만드는 걸로 끝나고 말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임금님께서 결코 도적들의 위세에 질려 나라와 백성들을 잊고 있지는 않으셨다. 정미(丁未)년의 그 물샐 틈 없는 감시와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나 국권회복의 밀사로 수만 리 타국에 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 일본인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저들이 우리의 세찬 저항을 각오하면서까지 우리 임금님을 억지로 퇴위시킨 것도 그 사건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음에 틀림 없었다. 그들은 본래의 예정을 바꾸어 양위(讓位)란 이름 아래 가짜 황태자로 하여금 우리 폐하의 자리를 대신케 했다. 그리고 갑자기 서둘 듯 식민지 놀음의 마지막 코스로 돌입해 갔다.
그 첫째는 우리 임금님을 퇴위시킨 그 달로 꼭두각시 새 황제와 ‘한일신협 약(韓日新協約)’이란 조약을 다시 맺은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합방의 전야제였다. 그다음은 거창한 황제 즉위식과 황태자 책봉식으로 이어졌다. 가짜 태자를 제위에 올린 것도 부족해 가짜 왕자까지 태자로 봉한 것인데, 저희 딴에는 그렇게라도 멀쩡한 임금님을 잃은 우리를 무마한다고 꾸며 낸 각본 같았다.
다음은 명목적이나마 남아 있던 군대의 해산, 일본인 차관(次官) 임명, 재판소 설치 ㅡ ‘정미 7조약’에 있는 대로, 이 나라 사법·행정 양권(兩權)의 주된 기둥들을 뽑아 버리는 작업이다.
퇴위한 우리 임금님을 창덕궁에 가둔 것은 그해 십일월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어떻게든 시해(弑害)하고 싶었겠지만, 나라 안의 사정이 뜻 같지 못해 취한 차선책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은 우리 폐하의 억지스러운 양위와 정미 7조약에 항거하는 의병들로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위에 퇴위한 임금님까지 시해했다가는 정말 어떤 큰일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기야 남몰래 독살하고 을사조약때 구해 둔 가짜로 대역을 시키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앞서 말했듯 그것은 너무도 탄로 날 위험이 컸다.
그 뒤 십 년, 우리 마지막 입금님의 행적은 오직 저들 일본인들의 정책적 인 배려에 의해서만 우리 앞에 드러났다. 정책적인 배려란 시해의 의심을 면하기 위한 저들의 정 기적 인 이태왕(李太王) 동정(動靜) 발표를 말한다.
거기에 따르면 우리 임금님은 전형적인 망국의 못난 군주였다. 다시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는 일도 없고, 왕자다운 위엄으로 일본인들의 잔학에 저항했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회한과 오욕 속에 구차한 목숨을 이어 가는 것이 전부인 양보였다.
하지만 오늘날에 널리 믿기어지고 있는 소문처럼 그분의 삶이 그대로 어이없이 끝나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몸은 퇴락한 고궁에 갇혀 있어도 우리와 이 나라를 위해 일찍이 품었던 깊고 거룩한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다.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뜻을 펼 기회뿐이었다.
그러다가 ―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언제 들어도 눈시울 뜨거워지는 감격의 그날, 천 년이 지나도 우리에게는 오히려 새로워질 그날이.
끝내는 가짜 태자로 세웠던 황제마저 폐하고 만 일본이 합방이란 그럴듯한 이름 아래 이 땅을 삼킨 지 구 년째가 되던 해였다. 그 기미년 정월 어느 날 우리 마지막 임금님은 마침내 오랜 감금에서 벗어나셨다.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심경으로 때를 기다리시다가 저들 일본인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갇혀 있던 창덕궁에서 몸을 빼내신 일이 그랬다.
일본인들의 방심은 그 무렵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이 땅의 공기 때문이었다. 명성왕후 시해 때부터 을사보호조약, 정미 7조약을 거치는 동안 그토록 일본을 성가시게 하던 의병들도 그 무렵엔 잠잠했고, 서울과 지방 도시에도 배일(排日)의 기운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철저하게 대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합방이란 사건이 너무나도 엄청나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은 우리가 잠시 머뭇거리며 살피고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그 같은 탈출은 그분에게는 십여 년을 참고 기다려 거두신 보람이었고, 우리에게는 마비와도 같은 머뭇거림과 살핌에서 벗어나 빼앗긴 땅을 되찾게 되는 계기였다. 몸을 빼치신 길로 은둔한 지사(志士)의 집을 찾으신 그분은 당신에게도 마지막이고 우리에게도 마지막인 교지(敎旨)를 팔도에 내리셨다.
강포한 일본의 눈길을 피해 몰래 전해졌지만, 신통하리만치 이 땅 구석구석까지 전해진 그 교지는 우리의 대표를 서울의 주산(主山) 북악(北岳) 기슭에 불러 모으는 내용이었다. 그 신분에 따라서는 선비〔士〕 대표, 농민〔農〕 대표, 공인[工] 대표, 상인〔商〕 대표에 화공(晝工), 악사(樂士)며 광대 백정도 머릿수에 따라 대표를 보내도록 했다. 그 믿는 바에 따라서는 유림(儒林) 대표, 불가(佛家) 대표, 도교(道敎) 대표에 동학(動學)·서학(西學) 을 빠뜨리지 않았고, 그
밖에도 무리가 있으면 가리지 않고 대표를 보내도록 했다. 대표는 이 만 명에 하나씩 보내도록 하니, 그 수가 꼭 천 명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저버리시지 않으셨는지 이 겨레의 본성 이 원래는 그러했는지, 그 일만은 이천만이 하나같이 비밀을 지켰다. 정한 날이 되자 흰옷 입고 갓 쓴 이들이 줄을 이어 북악 기슭을 찾아드는데, 귀신 같다는 일본 고등계 형사며 눈썰미 매섭기로 이름난 헌병은 물론 어리친 일본 강아지 한 마리 짖어 대는 법이 없었다. 정오가 되어 마지막 도승지 격인 그 지사가 모인 대표를 헤아려 보니 그 수가 꼭 천(千)이었다.
모두 다 모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자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는 모두에게 잘 보이는 높은 바위 위로 오르셨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몸에는 곤룡포에 옥대를 둘렀으며 손에는 한 자루의 보도(寶刀)가 들려 있었다. 그날에 대비해 창덕궁에서 몸을 빼칠 때 미리 준비해 온 차림이었다.
그분께서 먼저 지목한 것은 한쪽 바위 그늘에 모여 있는 선비 대표들이었다.
“너희 넓은 갓 쓰고 수염 길게 드리운 자들에게 말하노라. 우리 태조(太祖)께서 너희에게 의탁해 아조(我朝)를 일으키신 이래 비유컨대 너희는 이 나라의 머리였다 이 나라의 모든 제도와 형률이 너희로부터 나왔으며, 오백 년의 문물과 예악 또한 너희로부터 비롯되지 않음이 없었다.
너희는 그 앎과 슬기로 인해 다른 부류는 겪지 않을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가 누리지 못할 번성도 누렸다. 스스로 수고롭게 일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이 먹고 씀으로 다른 부류에게 진 빚도 많았으되, 눈이 어둡도록 읽고 머리가 세도록 생각해 베풂도 많았으며, 밝지 못한 길을 앞장서 더듬어 가는 어려움은 있었으되, 보다 나은 세상을 연다는 자긍(自矜)도 컸으리라.
그러나 이제 너희의 날은 짐의 날과 더불어 다했다. 많이 누린 자는 많이 내놓아야 하고, 많이 빚진 자는 많이 갚아야 하며, 편안했던 자는 더 수고로워야 하고, 자긍했던 자는 부그러워야 한다. 너희 궁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도 못했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지도 못했다. 너희 앎은 가 버린 날들에 치우쳤고, 너희 슬기는 살과 뼈를 잊었으며, 그리하여 너희가 연 새 세상도 언제나 낡은 세상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시절도 아니요, 바다 건너 오랑캐도 아니며, 목인(睦仁)이나 이등박문의 무리는 더욱 아니다. 바로 너희 굳음이며 낡음이며 치우침이며 작음이며 가벼움이며 얕음이라 할 수 있으되, 어찌하랴, 먼저 짐과 조종(祖宗)의 죄가 아울러 하늘을 가리니 너희 허물을 탓할 겨를이 없다.
다만 바라노니, 너희 선비여, 앞으로는 어떤 가르침에 너희 행함을 의지하고 너희 앎을 걸든, 오늘로 밝아 올 새날에는 지난 허물을 거듭하지 말라. 옳더라도 굳어지지 말며, 좋더라도 치우치지 말고 맞더라도 낡아지지 말라. 새로움에 가볍지 말고 이로움에 얕아지지 말며 힘 앞에 작아지지 말라.”
그리고 이어 농민 대표를 향했다.
“그을린 얼굴에 거친 손발을 가진 자들아, 너희는 베옷에 나물죽으로 견뎌 왔으나 비유컨대 아조의 배와 가슴이었다. 너희가 힘써 앎을 얻고 몸가짐을 닦으면 선비를 낳았고, 수고롭게 갈고 뿌리면 이 나라 물산(物産)의 바탕을 이루었다.
그러하되, 돌이켜 보면 열성(列聖)의 제도는 두루 갖추지 못하고 그 보살핌도 모자라, 너희는 항시 힘쓴 만큼 얻지 못했고, 수고로운 만큼 누리지도 못했다. 너희 겉은 천하의 큰바탕(大本)으로 추킴을 받아도 기실은 큰 앗김(被奪)이었을 뿐이었고, 너희 속은 제 선 곳에 편히 머물고 넉넉함을 앎[安分知足)으로 꾸며져도 또한, 기실은 억눌림과 시달림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보고 살필수록 부끄럽고 두려우나 그보다 더한 것이 이제 다시 너희를 모질고 독한 바다 건너 도적의 손에 붙이는 일이라. 자식을 버린 어버이가 이보다 더 부끄러울 것이며 빌 곳 없는 죄인이 이보다 더 두려우랴. 다만 훨씬 크고 무거운 게 앞날임에 기대 지난 허물 비는 일을 잠깐 미룰 뿐이디.
이르노니, 너희 천하의 큰 바탕이여, 오늘로 밝아 오는 새날에는 그 앗김과 시달림과 억눌림을 거듭 겪지 말라, 너희 참음이 힘 있고 못된 자들의 업신여김을 길러서는 안 되며, 너희 내놓음이 저들의 앗음을 도와서는 안 되고 너희 굽힘이 저들의 억누름을 불러서도 안 되리라. 외적에게 맞설 때도 겨레를 대할 때도 아울러 지녀야 할 너희 마음가짐 이어야 할진저…….”
그런 다음 눈길을 돌린 곳은 장사치와 장인바치의 대표들이 모여선 비탈이었다.
“짐이 오래전부터 이날을 꾀할 제 마주하기 가장 두려웠던 이들이 바로 너희 상천(常賤)의 부류였다.
너희는 비바람 불고 눈길 미끄러운 장삿길과 오뉴월의 달아오른 풀무가와 동지섣달 얼어붙은 강해(江海)를 마다 않고 이 나라의 손발이 되어 일했으나, 열성의 덕이 미침은 한결같이 가볍고 엷었다. 즈믄(千) 밤을 새워 우리 살이의 가멸음과 편의로움을 궁리해도 그 열매는 너희 것이 아니었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몸이 수고로워도 그 거둠을 누리는 자는 따로 있었다. 재주가 있어도 학문을 닦을 길이 없었고, 요행히 학문을 닦아도 세상이 써 주지 않았다. 더러는
그 슬픈 바람(願)을 자식에게 걸었으나, 서얼(庶孼) 과 한가지로 타고난 굴레가 무거워 쉽게 벗을 길이 없었다.
이제 뉘우침 속에 가만히 돌이켜 보매, 열성과 짐의 날이 다한 것은 하늘이 우리를 저버렸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을 저버린 탓이라. 이 땅과 이 백성을 맡긴 하늘의 큰 뜻을 어겼으니, 그 가운데 가장 큰 어김은 너희를 바로 쓰지 못했음이라.
너희가 배 타고 장사하는 일을 선비가 행실을 닦는 일과 나란히 추어주었더라면, 저 미리견(美利堅)·아불리가(阿佛利加)의 넓고 기름진 땅이 어찌 양인(洋人) 들의 오로지함이 되었을 것이며, 자연의 법칙을 찾고 물(物)의 이치를 살펴 그 힘을 비는 일을 선비가 글을 읽음과 함께 높이 여겼으면, 어찌 철선(鐵船)과 화포(火砲)가 저들만의 것이었으랴.
그 어둡고 막한 허물을 들추자면 한이 없으되, 그래도 한 가지 위자(慰藉)가 되는 일은 밝아 올 새날이 너희의 날임일지라. 부디 스스로를 업신여기지 말고 너희 길을 가, 새날의 주인 됨에 모자람이 없게 하라. 지난 외로움과 고달픔을 다시 겪지 않을 길도 그 같은 너희 길에 정진함이요, 이 땅을 삼키려는 외족들로부터 너희를 지켜 가는 길도 또한 그뿐이리라.”
우리 임금께서도 그렇게 말씀을 맺으시자 사민(四民)이 잠시 숙연하였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원통함이나 후회로움이 어찌 없으리오마는 무너져 내리는 왕조의 장엄한 낙일(落日)이 주는 비감에 일시 마음속의 원혐과 회한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같은 우리 임금님의 말씀에는 무언가 단순한 자괴(自愧)의 뜻 외에 사죄와 격려를 아울러 보여 주는 어떤 비장한 최후를 예감케 하는 데가 있어 한층 듣는 이를 감동시켰다.
잠시 당신의 신민들을 굽어보시는 우리 임금님의 용안(龍顔)에도 그들 못지않게 비감이 어렸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들을 불러 모으신 까닭이 어찌 그런 감회를 펴심에만 있겠는가. 오래잖아 다시 왕자의 당당함을 회복하시더니 남은 무리를 향했다. 이번에는 그 믿는 바에 따라 대표로 뽑혀 온 이들이었다.
“큰 성인(大聖: 공지)과 버금 성인(亞聖: 맹자〕의 높은 가르침도 끝내는 이 나라를 지켜 주지 못했고, 석씨(釋氏)의 삼천불(三千佛)이며 노군(老君)·진인(眞人)의 법력(法力)과 도력(道力)도 이 겨레를 감싸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서학(西學)이 비록 힘이 있다 하나 그 총애는 우리를 핍박하는 양이(洋夷)들이 오로지하고 있으니 가히 믿을 바 못 되고, 동학이 그들에게 항거코자 일어났으나 이미 오래전에 꺾인 바다.
또 근자에 서양에는 이 같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대신하여 무슨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것이 일어나 사람의 마음을 끌고 있다고 한다. 워낙 그 갈래가 여럿이고 우기는 바가 각색이라 옳고 그름을 졸연히 분별하기 어려우나 그 또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진대 살피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할 거야 무에 있겠느냐? 곰곰이 헤아리면 너희가 지금까지 믿고 따라온 옛 가르침들도 그 본뜻에서는 그릇됨보다 옮음이 많았듯이, 저들의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것도 생각건대 다만 보다 잘 살기 위한 사람의 궁리가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너희 모두에게 한가지로 이르노니, 옛 가르침에 굳고 얽매이지 말 것처럼 새 가르침을 받아들임에도 지나치거나 흘리지 말라. 서로 마음을 열고 뜻을 합쳐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되, 먼저 이 나라와 겨레의 복된 삶부터 꾀하라. 다른 나라 다른 겨레를 생각함은 먼저 너희를 구한 뒤에도 늦지 않으리라.
이제 멀지 않아 홍수처럼 밀려들 무슨 주의니 사상을 대함도 또한 같다. 이 땅을 가르거나 겨레를 이간시키는 것은 그 이름이 아무리 아름답고 그 말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오히려 배척할 일이요, 이 땅을 살찌게 하고 겨레를 뭉치게 하는 것이면 그 이름이 소박하고 말이 서툴러도 마땅히 따르리라.”
그 뒤에도 우리 임금님께서 다시 옥보(玉步)를 옮기시어 일일이 손을 잡듯 나머지 여러 부류의 대표를 찾으셨다. 한편으로는 숨김없이 지난 잘못을 비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앞날의 경계할 바를 일러 주시기 거의 한 시각이었다.
그 말씀 어떤 것인들 버리고 취할 게 따로 있을까마는 전해야 할 말씀은 길고 주어진 시간을 짧아 한가지로 모두 옮기지 못함이 한이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그 모두를 듣고 싶은 이가 있을까 일러두거니와,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매우 찾기 어렵지만 그때 자기가 속한 부류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나갔던 할아버지들이 아직은 몇 분 살아 계시고, 이미 고인이 되셨을지라도 똑똑한 자손을 둔 분은 구전(口傳)이나마 우리 임금님의 고명(顧命)을 전하셨다.
근세사의 한 비극적 종막이며, 우리 행복한 오늘을 위해서는 엄숙한 서곡이 되는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비장한 최후는 모든 백성들을 무리별로 마주하신 지 오래잖아 있었다. 정치와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던 이조 여인들의 유일한 예외일 수 있는 기생들의 대표를 보신 걸 끝으로 우리 임금님은 원래의 바위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를 향하여 크게 일렀다. 삼천리 구석구석까지 스미는 옥음(玉音)이었다.
“충성과 신애(信愛)로 아조 오백 년을 떠받쳐 온 신민들이여, 그리고 본시 한 핏줄에서 갈라져 나온 겨레여, 다시 말하노니, 짐과 열성(列聖) 조종(祖宗) 의 날은 다했다. 지난날 하늘은 이 땅을 흐르는 여러 핏줄 가운데서 짐의 핏줄을 택해 이 나라를 맡기셨으나 불행히도 짐의 대에 이르러 남의 손에 앗기우고 말았다.
아득히 돌아보면, 이 땅의 어떤 일도 짐과 열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바 없으니, 이 나라를 망친 것 또한 짐의 핏줄이 되리라. 허나 아름다운 이름은 핏줄을 거슬러 그 조상에 미치어도, 부끄러움과 욕됨은 핏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법이 아니다. 나라가 망한 것도 짐의 대(代)요, 모든 허물 또한 이 한 몸에 있으니, 너희 원망이 핏줄을 거슬러 열성의 거룩한 넋에 미치지 않게 하라.
오늘날에는 미리견(美利堅)이나 태서(泰西)의 몇몇 나라들처럼 백성이 그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가 생겼으나 우리 태조께서 이 나라를 여실 때는 만방을 둘러봐도 다스리는 이는 다만 군주뿐이었다. 설령 군주 한 사람이 나라를 좌우하는 제도가 그릇되었다 한들, 어찌 그 허물을 우리 태조대왕께만 돌릴 수 있겠느냐?
또 저쪽에서는 군주를 두면서도 백성 이 편안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제도가 궁리되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열성의 시절이 나라에는 너희가 견뎌 온 그 제도밖에 알려진 게 없었다. 그 제도나마 거칠고 그릇되이 편 일을 말한다면 모르되, 그밖에 알지 못해 그 제도를 취하신 일이야 어찌 열성의 허물이 될 것이랴.
거기다가 나는 들었다. 서양의 발달된 제도란 것도 군주가 스스로 깨달아 베푼 것은 하나도 없다고. 모두가 그 신민들이 궁리하고 내세우고 싸워 마침내 이룩한 것일 뿐이니, 그렇게 못한 너희 허물은 또 어쩌겠느냐? 너희 가운데도 그릇된 다스림에 소리 높여 항거한 이가 있고, 때로는 무리 지어 난리를 꾸미기도 했으나 한결같이 그 과녁은 사람이었지 제도는 아니었다. 어떤 민란(民亂) 어떤 역모(逆謀)에 군주를 없애고 공화(共和)를 열자고 내세운 일이 있으며, 세 정승 여섯 판서를 없애고 의회를 두자고 주장한 적이 있느냐? 다만 너희가 바란 것은 크면 임금을 바꾸는 것이요, 작으면 탐학하는 목민관(牧民官) 을 벌하라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신민들이여, 겨레여, 이제 짐은 한 고명(顧命)으로 그대들에게 바라노라. 부질없이 지난 그릇됨을 따짐에 날을 허비하기보다는 망한 나라를 새로 일으키는 데 날을 바치거라. 몰라 저질러진 지난 허물을 원망하기보다는 알면서 행한 죄악에 분한(慣恨)을 품으라. 죽기로 싸워 저들 간악한 섬오랑캐에게 나라 빼앗긴 부끄러움을 씻으라.
이 자리를 끝으로 짐도 더는 그대들의 임금도 주인도 아니다. 태조께서 하늘로부터 받은 다스림의 권한을 너희 모두에게 돌리니 일후 이 나라는 짐의 것이 아니고 그대들의 것이다. 이천만이 각기 명군(名君)이 되고 현주(賢主)가 되어 일찍이 없었던 복된 냐라를 이루거라. 짐은 다만 이 자리를 빌려 나라를 조정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그들에게 돌려주지 못한 허물을 스스로 벌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날 이 땅에서 우리 임금님의 그 같은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일본인들과 그 앞잡이들뿐이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땅과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쥐어짤 궁리와 만주를 삼킬 궁리로 겨를이 없고, 앞잡이들은 그런 일본인들이 던져 주는 더러운 벼슬과 재물로 한 몸 살찌울 궁리에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뒤이어 이 하늘을 뒤덮는 흰 빛줄기는 보았으리라. 우리 임금께서 뽑으신 보도(寶刀)에서 뿜어 나오는 빛줄기였다.
“이 보도는 태조대왕께서 지리산 기슭을 치달으시며 왜구를 베실 때 쓰시던 성물(聖物)이다. 내 이를 물려받고도 오히려 그 왜구의 후예에게 나라를 잃었으니 남은 일은 다만 이 칼로 스스로를 베어 벌함뿐이다.
내 주검을 염(殮)할 때는 얼굴을 가죽으로 싸매고, 관곽(棺槨)과 봉분(封墳)은 서민의 예로 하라. 죽어 구천에선들 무슨 낮으로 열성을 뵈오랴. 무덤 인들 뒷사람의 손가락질을 어떻게 감당하랴.”
그 비장한 외침과 함께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는 날선 보도(寶刀)를 안은 채 서 계시던 바위에서 뛰어내리셨다. 그리고 왕자들의 참혹한 죽음을 눈앞에서 보시면서도, 그 뒤 욕스러운 저들의 꼭두각시 노릇과 다시 고난에 찬 십 년을 보내시면서도, 끝내 자진(自盡)하지 않으셨던 까닭을 그제야 뚜렷이 보여 주셨다. 사사로운 정분이나 분한(憤恨)으로 자결하신 것이 아니라 나라 잃은 죄를 물어 공의로 스스로를 처단하셨으니 듣는 윗사람조차 그저 망극할 뿐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다.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옥체가 땅으로 굴러떨어지면서 안고 있던 보도에 베인 가슴이 열리는 순간 뇌성과 함께 한 마리 희고 거대한 용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흰 구름처럼 까마득히 치솟더니 곧 이천만 마리의 작은 용이 되어 비처럼 삼천리 구석구석까지 쏟아졌다.
얼핏 보아서는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우선 그 북악 기슭에 떨어진 것은 꼭 천 마리였다. 삼 대 열아홉 명과 머슴에 침모(針母)까지 합쳐 가솔(家率)이 스물일곱 명인 인사동 김부잣집 에는 꼭 스물일곱 마리가 떨어졌고 경상도 두메산골 홀로 사는 산지기 집에는 한 마리만 떨어졌다. 환웅과 웅녀의 자손이면 누구에게든 한 마리씩 떨어진 셈이었다.
이어 그 작은 용들은 익히 아는 길을 가듯 각기 한 사람씩을 찾아 그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낮잠 자는 늙은이나 우는 아이에게는 크게 벌린 입을 통해 들어가고, 짐승을 겨냥하고 있는 포수에게는 크게 뜬 외눈을 통해 들어갔다. 대낮 정사(情事)를 엿듣고 있던 여관집 머슴놈에게는 귓구멍을 통해 들어갔으며 그 시각 측간을 타고 앉은 아낙에게는 샅을 통해 들어갔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았고 남자 여자도 가리지 않았다. 친일파며, 저들의 앞잡이, 보조원, 정보원도 가리지 않아 ― 어쨌든 이 겨레면 모두 작은 용 한 마리씩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래도 빠진 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할미 가운데 하나가 임진왜란 때 겁탈을 당해 이 땅에 떨어진 왜병의 씨일 것이다.
그 밖에 또 하나 덧붙일 얘기가 있다면 신통하게도 모든 친일파들이 그날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일이다. 우리 임금님의 마지막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우리 모두 가슴에 한 마리씩 품게 된 그 작은 용의 조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래야 당연하다는 생각은 모두가 같을 줄 믿는다.
역사는 가정(假定)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 그같이 장려한 옛 왕조(王朝)의 낙일(落日) 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뒤 우리가 겪어야 할 불행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만약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자신을 베어 가며 새로운 충성의 구심점을 마련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갑작스러운 권위의 부재로 큰 혼란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흐지부지 사라져 버린 옛 권위에 대한 실망은 전통 속에서 어떤 원칙과 방향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았을 것이고 맹목적일 만큼 어떤 새로운 것에서 그것들을 찾게 만들었을 것이다. 백 사람이 백 가지 주장을 내세우고, 천 사람이 천 가지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의 구심점
이 없고 확립된 권위가 없으니, 시비는 커지고 다툼은 격화될 것이며, 분열과 반목은 이 겨레의 보편적인 고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는 일본과의 효율적인 수복전쟁(收復戰爭)도 가능했을 리가 없다. 친일도 하나의 새로운 주의일 수 있으니, 나름의 논리만 마련하면 버젓이 활개 칠 수 있었을 것이고, 기회주의도 하나의 세련된 행동철학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요행 반일 또는 구국의 세력이 모여도 머릿수가 열 명이면 파벌은 열한 개요, 모든 대일(對日) 전쟁은 얼에 아홉이 변절이나 밀고로 모의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한 수복전쟁이 그 모양이 되면 이 나라의 회복은 싫어도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도 크지만 투자와 위험도 큰 장사가 전쟁이다. 어떤 나라가 본전 밑지는 장사를 하려 들겠는가.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새로운…… 아아, 그만하자. 비록 가정이라 할지라도 공연히 우울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어쨌든 우리 마지막 임금님은 그렇게 돌아가셨고 우리 옛 왕조의 해는 그렇게 졌다. 그 뒤 그해 3월 1일에 바로 시작했으나 일 년도 안 돼 실패로 끝난 제1차 수복전쟁 (또는 기미평화전쟁)이며, 이듬해 다시 시작해 중강진(中江鎭) 부터 한치 한치 빼앗듯 우리 땅을 되찾은 제2차 수복전쟁(또는 25년 전쟁), 그리고 수복 뒤의 몇 가지 재미있는 사건이 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다. 여기서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행복한 이 오늘의 출발에만 한정되었고, 이제
그 이야기는 끝났다
(1984년)
2016년 12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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