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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수원화성여행
수원화성 內 행궁(行宮)
건립시기/ 정조17년/1793-1796년(2년반) -223년되었네.성곽둘레/5.744km
다정한 친구들과 매월 함께하는 나들이를 수원으로 정(定)했다.
수원은 서울친구들도 오기쉽고 대전에서 올라가는 사람들도 편하기에 수원화성(水原華城)을 選定한 것 이다.
우리는 수원역 에서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나란히 역사를 나와서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친구 동열이 여기서
화성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미리 알아보고 온듯...!.
나는 천천히 걸어 20분정도 될것 이라 답하니 그렇다면 걸어 갑시다 라는 말에 모두 찬성 하여서 걸어가면서
거리구경도 하고 생경했던 수원을 조금 더알아 가는데 큰도움이 되었고 기분도 상쾌해져서 여행(旅行)의
깊은 재미가 더 한층 업(Upgrade) 된것 같다.
단체(團體)는 해설사(解說師)의 도움을 받을수 있다해서 문화해설사의 案內를 받아 華城內 行宮에 대한 해설 을
들으면서 천천히 행궁(行宮의 歷史와 背景을 알아가는 意味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 旅行目的은 그런 것이 아니고 歷史의 都市 水原華城을 보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水原華城은 西紀1796年 正租大王 의 意圖한 대로 축성(築城)된 邑城 그러나 다른 지방 읍성(邑城)들과
差異點은 正租大王이 양주(楊洲)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 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
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시켜 능행(陵行)을 위한 행궁(行宮)을 구상해 화성(華城)안에 행궁을
건축(建築)하였다는 점이다.
水原華城의 그 방대한 工事를 2年9個月이라는 短期間에 끝낼수 있었던 것은 茶山 정약용이라는
젊은 實學者 의 役割이 컸다.
그는 華城의 設計를 맡아 傳統的인 方法을 基礎로 中國을 통해 들어온 여러 西洋의 建築을 參考하였다.
華城은 정약용의 設計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覇氣와
기중기, 녹로와 같은 科學技術이 接木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建設된 主要施設物로는 門樓와 甕城을 갖춘 4대문과 行宮, 암문, 수문, 연못, 장대, 공심돈, 각루,
포루, 봉돈, 궁대, 치성, 용도, 적대 등 48개소 라고 한다.
노산 이선승지 以善勝之
정조대왕의 화성행차 8일간의 일정
1년이 넘는 준비를 마친후, 정조는 1795년 2월 9일 새벽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陵이
있는 화산을 향해 긴 원행길 에 나섰다.
창덕궁을 출발해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오기까지 장장 8일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남겨진 8일간의 기록에 따르면 대왕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를 연출하듯 자신의 모든 것을 행차의 와중에 펼쳐보였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 혜경궁 과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지극한 효심과 백성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아낌없이 펼쳐 보인것은 백성들에게 국왕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첫째날(2월9일)
행차의 출발은 새벽이었다.
출발시간은 묘시(卯時·새벽 5~7시)로 정해졌다. 출발에 앞서 왕은 수정전 으로 나가
할머니(政敵이였던 정순왕후 김씨)께 예를 올렸다.
<잠깐>
할머니인 정순왕후는 어머니인 혜경궁홍씨 보다 10살이나 적은 시어머니 다.
정조대왕 보다는 7살이 많았고... 할머니 보다는 누님에 가까운 사이
행차에 나선 왕은 군복인 융복을 차려입은 굳건한 모습의 잘생긴 군주였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왕은 어머니(혜경궁)을 기다려 인사를 올린후 말을 타고 앞장서 출발,
'반차도'에 따르면 행렬의 가장 앞은 경기감사인 서유방이 이끌었고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해 총 1천779명에 달하는 인원이 어가(御駕)를 따라간 기록이 있다.
수백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115명 기마악대의 힘찬 연주가 기나긴 행렬의 발걸음을 가볍게
도와주며 행차는 남대문을 지나 노량진에 도착했다.
강에는 정약용이 미리만든 배다리가 놓여 있었으며 행차를 위해 임시로 놓은 시설이다.
배다리(舟橋)를 안전하게 건넌 왕은 용양봉저정(노량행궁)에 먼저 도착해 어머니가 쉴 방과
음식을 점검하고 어머니의 도착을 기다린다.
노량행궁에서 음식과 휴식을 취한후 왕의 행렬은 시흥행궁을 향해 나아간다.
왕은 이번에도 시흥행궁에 먼저 도착해 행궁을 살펴본 후 어머니의 도착을 기다려 맞았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교통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치만 그때그 운치가 더 멋진 것 같다.
둘째날(2월10일)
출발시간은 역시 새벽인 묘시였고 왕은 융복을 입고 말을 탔다.
행렬은 지금의 시흥대로와 만안대로를 따라 안양을 거쳐 점심께 사근참 행궁에 도착한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왕은 "비가 멎지않는데 새로 지은 사근참행궁 은 밤을
지내기 어렵다.
비를 맞을 것이 걱정되지만 화성이 얼마되지 않으니 오늘 도착할 수 있다"며 궂은비를
뚫고 행차를 강행하기로 한다.
지금의 지지대고개인 미륵현 에 이르러 땅이 질고 미끄럽자 왕은 말에서 내려 어머니의
가마를 찾아 문안을 드렸다.
왕의 행렬이 지금의 노송지대를 지나 진목정(眞木亭)에 이르자 먼저 도착해있던 채제공 과
장용영(壯勇營)외영 군사들이 어가를 맞는다.
왕은 갑옷과 투구를 입고 위풍당당하게 장안문을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화성유수 조심태 를 비롯한 관속과 군병들이 엎드려 맞는 가운데 왕의
행렬은 대로를 따라 화성행궁에 도착하게 된다.
창덕궁에서 이틀간의 여정 끝에 도착한 화성행궁이었다.
어머니 혜경궁이 거처할 장락당 에 어머니를 모시고 저녁식사까지 올린 후 왕은
신하들 에게 말 한다.
"비를 맞은 것은 미안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으니 다행이다.
더욱이 경작이 곧 시작될 시기에 논과 밭에 비가 내렸으니 이는 농부들의 경사사 아닌가?
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아도 왕은 애민정신 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봉수당 진찬연.
셋째날(2월11일)
첫째·둘째 날과 같은 시각이니 묘시에 정조는 융복을 입고 말을 타고 화성행궁을 나섰다.
화성에서의 첫 행사로 향교를 찾아 참배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팔달산 남쪽기슭에 자리한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올라 공자와 성현들에게 예를 올린 왕은
내부를 살펴보고는 허술한 곳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향교참배가 끝난후 진시에는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문무과 별시가 치러졌다.
왕은 심환지와 이병정 에게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라는 제목의 시험문제를 내게 했다.
어머니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시험문제였다.
왕은 문과별시의 합격자를 화성·광주·시흥·과천에서 고르게 뽑도록 했다.
이어 왕은 무과 응시자들을 하나하나 불러 활쏘기 시험을 진행했다.
별시가 끝난 후에는 봉수당 에서 셋째 날 마지막 행사인 진찬습의(회갑연 예행연습)가 진행됐다.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이 이번 행차의 가장큰 행사인 만큼 정조는 직접 봉수당에 나아가
준비를 점검했다.
넷째날(2월12일)
이날은 다른 날보다도 더 일정을 서둘렀다.
오전에 아버지 묘소인 화산 현륭원까지 행차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5시 조금 못되어 왕은 어머니를 모시고 현륭원으로 향했다.
행차도중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 어머니께 간식과 함께 문안을 올린 정조는 곧바로
병조판서 심환지 에게 먼저 현륭원으로 가서 어머님께 올릴 삼령차 1첩을 즉시 달여
놓으라고 명했다.
남편의 묘소를 눈앞에 두고 심기가 편치 않아진 어머니의 상태를 눈치챈 것이다.
비통함이 가득한 현륭원 참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왕은 홍살문 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부친의 능을 바라보다가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옮긴후 매년행하는 참배였지만 돌아갈 때마다 왕은
뒤를 돌아보며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곤 했다고 한다.
화성행궁으로 돌아간후 오후에는 3천700여명의 군사가 참여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이
진행됐다 정조는 친히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나아가 훈련을 지휘했다.
낮과 밤에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된 훈련이 끝나자 정조는 수백명의 군사들에게 궁시와
포목 등을 상으로 내려 사기를 높여 주었다.
다섯째날(2월13일)
이번 행차에서 가장큰 행사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예정된 날이었다.
잔치는 오전 9시가 조금 못된 시간에 봉수당 에서 시작되었다.
주인공 혜경궁 의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렸고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쳐졌다. 왕은 어머니의 동쪽 자리에 앉았다.
음악과 함께 잔치가 시작되자 왕은 어머니께 술잔을 올리고 세번 절한 후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쳤다.
이후 왕과 신하들에게도 음식상과 꽃이 전달됐고, 춤과 음악이 이어졌다.
회갑의식이 끝난후 왕은 백관들에게 음식과 꽃은 나눠 주도록 명한 후, 신하들과 시(詩)를
지으며 연회의 기쁨을 나눴다.
이어 신하들에게 이날 사용한 잔치 도구들을 화성부에 보관해 혜경궁 의 칠순 때
다시 사용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여섯째 날(2월14일)
다시 창덕궁으로 향하기 전날인 이날은 백성들을 위해 준비한 날이었다.
새벽 6시께 왕은 융복을 입고 말을 타고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로 나아가 2층 누각에
앉았다.
이때부터 신풍루를 비롯한 화성4곳에서 화성부 사민(四民 홀아비·과부·고아·독자를 이름)
539명과 진민(賑民·가난한 백성) 4천813명에게 쌀과 죽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때 정조는 신하에게 죽 한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명했다.
혹시 백성들에게 맛없고 차가운 죽을 먹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 에서였다.
왕은 자리를 떠나면서도 신하에게 "기다리는 사민에게 일일이 죽을 먹이고,
뒤늦게 오는 자가 있어도 냉죽을 먹이지 않도록 직접 챙기라"고 명을 내렸다.
이어 진시 에는 낙남헌에서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이 거행됐다.
초대받은 노인은 한양에서 내려온 노인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었다.
왕은 노인들에게 노란 비단손수건을 나눠주어 지팡이에 매게 하고 비단 한단씩과
음식을 내오게 명했다.
그리고 별도로 교를 내려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노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했다.
밖에서 뜻밖의 술과 음식을 받은 노인들은 일어나 춤추며 왕을 기렸다고 한다.
양로연이 끝난후 왕은 방화수류정에 나아가 성곽을 살펴보고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며 화성행궁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일곱째 날(2월15일)
화성에서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길 행차가 미륵현에 이르자 왕은신하에게 명했다.
"이 미륵고개에 오면 떠나기 싫어 거둥을 멈추고 남쪽을 바라보게 된다.
이번에 고개 위를 보니 둥글게 생긴 돌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지지(遲遲)'라고 하라.
그리고 미륵현 아래에는 '지지대'라는 글자의 표석을 세우라." 창덕궁으로 향하는 왕의
환어행렬은 점심 무렵 사근참행궁에 도착했다.
왕은 인근의 부윤·현령·현감들을 불러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사근참행궁 에서 점심을 마치고 행차는 시흥행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왕은 이번에도 먼저 행궁에 도착해 시설과 음식을 점검하고 어머니의 도착을 기다려
모신 후 저녁식사를 올렸다.
여덟째 날(2월16일)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행차가 출발하기 앞서 왕은 교를 내려 지방관들에게
백성들을 모아 거둥길의 넓은 곳에서 대기할 것을 명했다.
백성들의 민의를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문성동 앞길에서 시흥현령 홍경후가 이끌고 온 백성들을 만난 정조는 어려움을 물었다.
백성들이 쉽게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자 왕은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다그쳤다.
백성들이 "호역(戶役)에 두번이나 징발되어 폐단이 있다"고 하자, 왕은 "지난해 가을에
연기했던 환곡을 모두 탕감하고, 호역은 폐단과 일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며,
행차 때 백성들이 눈을 치우고 길을 닦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원행 일자를 봄과 가을의
농극(농한기)으로 하겠다"고 왕의 뜻을 알리게 했다.
다시 길을 떠난 행차는 점심께 노량행궁에 도착했다.
왕은 배다리를 건너기 앞서 주교도청 이홍운 을 불러 혜경궁이 하사한 금단 1필을 하사하고
배다리(舟橋)를 건설한 뱃사공들에게 까지 상을 내렸다.
왕은 마지막으로 배다리 건설의 총 책임자였던 주교당상 서용보 를 불러 "내일 다리를
철파하고 배들을 내려 보내 뱃사람들이 늦지 않도록 하라"고 명한 후, 배다리를 건너
숭례문과 돈화문을 거쳐 창경궁 내전으로 돌아갔다.
현륭원 참배와 혜경궁 회갑연을 포함한 많은 행사가 이어진 장장 8일간의 장엄한 화성행차
는 이렇게 아름답게 막을 내렸다.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중 남쪽 대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문 이며 정도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사도세자릉) 을 가기위한 통과 해야 하는 문이다.
팔달문은 모든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의 의미이고 축성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보물제 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밖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측면에서 바라본 팔달문
신풍루
정도대왕의 어필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인증샷을... 해설사의 권유로 사진을 ...
화성 제일높은곳의 서장대/ 남한산성에 가면 똑같이 생긴 장군대가 있다.
문화해설사 의 달변이 재미를 더한다.
장락당/ 화성 나들이시 정조의 생모 혜경궁 이 머믈던 전각이다.
어머니 혜경궁 앞에 선 정조대왕
조선에서 몇안되는 필자가 좋아하는 임금이다.
靈木 느티나무
화성행궁의 느티나무는 화성이 지어지기 전에도 있었던 신령스런 나무로 영복(靈木),신목(神木), 규목(槻木),
라고 불리워 지던 나무라서 잎이나 가지를 꺽으면 목신이 노여워 해서 어려움을 격게 되고
이나무에 손을 대고 기도(祈禱)를 하면 모든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나무인데 그러나 그후 화재로
고사해 버리고 마는데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으로 나무살리기 프로젝트로 겨우 한가지만
살아서 영목의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나무라 많은이 들이 찾는곳 이기도하다.
화성내 자리한 寺刹의 佛像
서장대 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봉화를 올렸던 봉수대
수원화성 둘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