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오씨족도 [海州吳氏族圖]
1401년(태종 1) 오선경(吳先敬)이 작성한 해주오씨의 족도. 크기는 가로 112cm×세로 115cm이며, 장지(壯紙), 필사본이다. 현재 오광정(吳光廷)의 19세손 오경환(吳璟煥)씨가 소장하고 있다. 족도는 특별한 체제에 구애되지 않고 대수에 따라 종으로 후손들을 도식(圖式)한 족보의 초기 형태이다. 15세기 이전에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가계를 기록했으며, 15세기 중반 경에 보도(譜圖)를 기본으로 하여 자표(字標), 범례(凡例), 부록(附錄), 서발문(序跋文) 등이 추가되면서 정식의 족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족도의 체제는 표제(表題), 족도(族圖), 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인 해주오씨족도는 원래의 명칭은 아니고 후대에 첨부된 것이며, 그 하단에는 쌍행으로 “전서공휘광정초창(典書公諱光廷草創) 사인공휘선경도사(舍人公諱先敬圖寫)”라는 주기를 통해 작성자를 명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좌측 하단의 발문에도 원래 이 족도는 오광정(吳光廷)의 초본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오선경이 완성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족도에는 해주오씨를 중심으로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혼인관계에 있었던 장흥임씨(長興任氏),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원최씨(水原崔氏), 여흥민씨(驪興閔氏), 행주기씨(幸州奇氏)의 가계가 함께 도식되어 있어 해주오씨의 상대 세계는 물론 혼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참고가 된다. 먼저 족도의 중심을 이루는 해주오씨는 1세 오인유에서 9세까지의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1세에서 5세까지는 장자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녀관계를 포괄하여 족도의 취지가 충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6세부터이다. 6세는 곧 당초 족도의 초안을 만든 오광정의 아버지의 항렬에 해당한다. 가계에 따라서는 8세까지만 수록된 경우도 있는데, 족도의 주인공인 오광정·오선경의 가계는 8세인 오선경에 그치고 있다. 자녀는 출생순에 따라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아들의 차서는 장자(長子), 2자, 3자, 4자 등으로 매겨져 있고, 딸(사위)은 차서에 따라 기녀(幾女)로 표기된 경우도 있고, 서(壻) 또는 여자(女子)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극히 소략하여 차서(次序), 관직,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족도의 작성자인 오광정·오선경 부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족도에 국한한다면 해주오씨의 시조는 오인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선경이 발문에서 오인유 이전의 세계가 담긴 속적(屬籍)이 우씨(禹氏)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오인유가 해주오씨의 시조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인유는 1634년(인조 12)에 간행된 해주오씨족보 초간본(甲戌譜) 이래 모든 해주오씨족보에서 시조로 등록되었는데, 그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이 족도이다. 장흥임씨는 임원후(任元厚:守大師中書令)의 자손들로 오인유의 증손 오찰(吳札), 현손 오승(吳昇)과의 관계 속에서 수록되었으며, 김봉모(金鳳毛:平章事) 계열의 경주김씨는 오승의 처가였다. 그리고 최루백(崔婁伯: 國子祭酒) 계열의 수원최씨는 오찰의 처가였으며, 여흥민씨는 민지령(閔志寧: 禮賓卿)의 자손들로서 오찰의 손자 오민정(吳民政)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수록되었고, 기수전(奇守全:宰臣) 계열의 행주기씨는 오승과의 관계 속에서 수록되었다. 이 족도는 원본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도로서 1600년 경에는 오희문(吳希文)·오윤해(吳允諧) 부자에 의해 부본이 작성될 정도로 해주오씨 가문 내에서는 그 중요성이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1634년에 간행된 해주오씨 갑술보의 저본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만 오인유 이전의 상대 세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海州吳氏族譜(甲戌譜) ≪참고문헌≫ 海州吳氏族圖考(鄭在勳, 東亞硏究 17, 서강대학교, 1989)
최고의 그림족보 처음 발견, 부산시 남구 해주 오씨 족도
● 앵커: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족보와 전혀 다른 그림으로 표시된 족보가 처음 발견됐고 뿐만 아니라 이 족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보도해 드립니다. ● 기자: 현존하는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안동권씨 성화보 보다 75여년이 앞서 작성된 족도가 처음 발견 되었습니다. 본사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취재팀이 찾아낸 해주 오씨 족도는 부산시 남구 밀락 동 오자근씨가 선조대대로 간직해온 것입니다. 이 해조오씨 족도는 종이 한 장에 한 개인의 조상과 자손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으로 창시조와 중시조 밑에 수많은 가족관계를 종합한 17C후반의 족보보다 원시적인 형태의 족보입니다. ● 황운룡 (동아대 사학과): 이런 문서는 제가 보기에는 처음 접하는 문서입니다. 이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족보를 제작할 수 있었고 족보제작의 기본이 되는 그러한 문서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 기자: 이 족도에는 거문3년 즉 조선조 태종원년 1401년에 작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작성자의 부친이 늙고 병들어서 기억력이 떨어지기 전에 가족관계를 적어 둔다는 작성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 해조 오 씨 족도는 본선과 외선을 똑같이 기록하고 있어 족보의 초기 형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해조 오 씨 족도는 지금까지 알려져 온 족보의 원시형태인 가승 팔구조도나 내외보호와는 다른 그림족보로서 조선 초기 가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MBC뉴스 이상룡입니다. 1987.7.14
해주오씨 족보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전하여지고 있는 족보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 서기1423년 조선 세종5년계묘(癸卯)년에 발간된 문화유씨 영락보(榮樂譜)인바, 구월산(九月山) 대승공(大丞公) 묘하 재실(齋室)에 보관중이나 서문(序文)만 전하고 실물(實物)은 없다.
고려대 민연, 조선족보 DB 구축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인 최대의 베스트셀러(가독성 여부는 차치하고 말이다)는 말할 것도 없이 족보다. 가구당 족보를 비치하지 않은 곳은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런 족보도 DB화가 진행 중이다. 바쁜 일상의 와중에 시조 이래 중시조를 거쳐 유구한 가문 인물들을 다 들여다 볼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나 하겠는가? 이 작업에 가장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이보다 앞서 일부 개인 족보연구자가 90년대 중ㆍ후반에 이 작업에 투신해 '족보 벤처'를 일으킨 경우도 있다. 이런 흐름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원장 김흥규)도 가세했다. 차별성이 있어야 하므로 이 연구원 한국사연구소는 조선전기 족보에 주목한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이 기관이 추진하는 족보 전산화 프로젝트는 조선초기 족보에 수록된 인물을 DB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현존 자료 기준으로 편찬 시기가 가장 빠른 족보류는 거대한 닥종이 한 장에다가 가문 족보를 그림으로 그린 해주오씨 족도(族圖). 하지만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이 족도는 최근 행방이 묘연하다. 원래 소장처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탈출'한 이 족도는 얼마 전에는 대구 고서점가에서 나타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이후 행방은 확연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족도를 이어 우리에게 익숙한 족보류는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1476)와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1565)가 있다. 이들 족보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학 연구에서 혁혁한 공로를 남긴 최재석 고려대 교수가 요긴하게 연구에 활용하면서 그 유명한 '17세기 중반설'을 제시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됐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부계 중심 성리학적 세계는 적어도 이 한반도에서는 17세기 중반 이후에야 확연해 지며, 그 이전은 무늬만 성리학이었지, 실제로는 부계와 모계가 같은 비중으로 취급되는 사회였음을 명쾌하게 논증한 것이다. 이에 걸맞게 17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재산분배도 균분법이라 해서 소위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있었으며, 제사 또한 딸까지 포함해 자녀끼리 돌아가며 지냈다. 그런 17세기 중반 이전 조선 사회를 대표하는 제1급 증거가 바로 안동권씨성화보와 문화유씨가정보였다. 여기에서는 부계 뿐 아니라 모계, 나아가 분가한 딸들의 자손들까지 가계의 범위에 포괄하고 있다. 친손 외손을 망라한 셈이다. 그래서 여기에 수록된 인물 중 정작 안동권씨와 문화유씨는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소위 성이 다른 외손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도 여성들은 1대에 한 해서만 부계의 그것을 물려받는데(즉, 아버지 성씨는 딸만 물려받으며, 그 아랫세대는 그 여자의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는 뜻이다), 이런 특성에서 말미암아 실제 문화유씨나 안동권씨가 아님에도 이들 족보에는 그 가문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안동권씨성화보에는 약 9천 명, 문화유씨가정보는 약 5만5000에 이르는 가문 구성원을 수록하고 있다. 이번 전산화 작업이 완료되면 이들 가문에 속한 인물들은 키보드 한 두 번 두들기는 것만으로 검색이 가능할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기증유물도록 2권 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오는 5월 개관하는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이존희)에 지금까지 기증된 각종 유물 5천점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실물 사진자료를 담은도록 2권이 발간됐다. 도록에 수록된 문화재는 일단 지난 95년 이후 2001년 상반기까지 개인 혹은 단체 73곳에서 기증된 유물을 수록하고 있다. 이 중 「기증유물도록Ⅰ」은 개인 72명이 기증한 1천898점을 실었다. 「도록Ⅱ」는 경북 안동 주촌의 유서깊은 문중인 진성 이씨 종가가 지난 2000년8월에 일괄 기증한 집안 고문서 등 소장품 2천913점을 담았다. 진성 이씨는 퇴계 이황의 문중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퇴계는 종손은 아니다) 우리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바로 이 집안 고문서 가운데 하나였다. 도록 1권에 실린 기증 유물은 소박한 민속품에서 화려한 귀중품에 이르기까지종류가 다양하며 제작 시기 또한 선사시대 이래 광복 이후까지 망라되고 있다. 이중 김종춘씨가 지난 98년 4월 30일 기증한 유물 213점 중에는 벼루를 중심으로 선사시대 돌칼이나 돌화살촉, 중국 전국시대 화폐인 명도전, 복원 완료돼 최근공개된 백제 청동신발이 특히 주목을 끈다. 기증자 중에는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한국과학사가 전상운 교수도 있다. 조선사나 고문서 연구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진성 이씨 기증 고문서는 작성연대로 보면 조선초기인 1430년대에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 500년에 걸쳐 있으며 종류 또한 다종다양하다. 구체적으로 보면 전적류 15점, 고문서 101점, 성책고문서류 134점, 기타 고문서2천104점이다. 이중 진성 이씨 족보 3책은 발행연대나 서문이 없으나 나중에 발간된 다른 족보내용으로 보아 1600년에 발간된 경자년 족보임이 입증됐다. 이는 현존 우리 나라 족보류 중에서 해주 오씨 족보와 문화 유씨 가정보에 이어3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남자 장자중심 부계자손뿐 아니라 외손쪽 혈연관계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친족범위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귀중한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현존 자료에서 가장오래된 가문 족보를 그림으로 그린 해주오씨 족도(族圖)|작성자 ojh7071 현재 족보는 대부분 가짜일 확률이 높다합니다. 일제이전에는 양반인구가 10% 정도였다고 하는데
너도 나도 족보를 가지게 되었지요. 서강대 사학과 백승종교수의 "천태만상 족보위조"란 글을 보면 현재 한국의 족보는 대부분 가짜라고 합니다. 그러면 족보만으로 양반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이 마음만 먹으면 조정에서 인증한 문과방목, 무과방목, 사마방목(생원진사시)등을 대조하여 진짜 양반의 후예들을 구분해 낼 수 있겠지요. 성균관, 향교, 서원에 등록된 양반 유림등을 구별해내는 방법도 있겠지요. 규장각이나 정부보존문서로 과거합격자를 구별하는 방법, 종가집에 구비된 오래된 족보로 구별하는 방법등 다양할 것입니다. ----------------------------------------------------------------- * 집성촌에서 인정하는 양반, 선산이 있고 문중제사를 시행하며 주변 마을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양반 문중등이 있습니다. 원래 양반도 4대 정도가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몰락양반이 되거나 중인대접을 받게 되는게 조선시대의 엄격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중기에 사림이 득세하면서 서원이나 향약등이 광범위하게 보편화되었는데 서울지역 양반가는 지방보다는 더욱 엄격하였던 것 같습니다. 향교라고 전부 양반만 등재된 건 아니고 중인도 섞였던 것 같습니다.사림은 조선 정부가 인정해주던 학파였으니까 예우가 가능하겠지요. ----------------------------------------------------------------- * 일제 이전에 아무리 조선 정부가 부패하였기로 양반 기득권을 그리 호락호락 놓았을리는 없습니다. 족보에 별보로 등재되었다가 별보 구분이 없는 족보에 등재된 후 문중 종친회에서 활약하는 집안들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일제가 수탈대상을 늘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계층에게도 주인집 본관과 성을 마음대로 부여하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양반 인구는 총독부에서 별도로 집계하였던 모양입니다. ----------------------------------------------------------------- * 신흥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3대나 4대는 걸쳐야 주변에서 어느정도 양반으로 대우해 주었던 관습을 볼 때 가짜족보가 있다고 종가나 문중, 마을에서 양반대접을 해줄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없는 서얼차별제도가 조선에 생겨나서 그 전통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다고 하는제도인데 양반 집안은 서얼차별이 있겠지요. 양반 증가를 막기 위하여 과거도 못보게 하던 서얼인데 호적에 등재되었어도 서얼차별을 하는 집안은 분명 있습니다. 양반구실을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집안에서의 은밀한 서얼차별이 존재하는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는 양반으로 보일지 몰라도 집안에서 서얼차별을 받게되면 제대로 된 양반은 아니겠지요. 조선조에 서얼출신들이 은밀하게 관료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 과거에 합격되고 실력이 특출하여 국왕이 인정하면 관리가 되었나 봅니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행해지는 서얼차별은 저로서도 뭐라 할말이 없습니다. 어디 수천년 된 전통이 서얼차별뿐이겠습니까? 중인출신, 평민출신, 향소부곡출신, 8천 천민 출신등 다양하겠지요. 이런건 인력으로 막지 못합니다. 고향을 떠나 살거나 고향을 외면하면 아무소리 안듣겠지만 그 대신에 뿌리 없는 집안으로 살아야 되겠지요. 문중제사나 조상제사 거부하는 집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겠지요.
DNA 분석해 3천년 전 조상 찾아
<앵커 멘트> 전사자의 유해를 확인할 때 생존 가족과 전사자의 DNA 정보를 비교하는 방법이 사용되는데요, 독일에서 3천 년 전 발굴된 유골의 DNA 분석을 통해 후손을 찾았다고 합니다. 김영민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최근 독일의 한 동굴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유골. 3천 년이나 됐지만 적정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동굴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DNA분석으로 안면 재생이 가능할 만큼 정확한 정보가 수집되자, 곧바로 유골의 후손 찾기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박물관 측은 먼저 지역 주민들에게 타액을 채취했고, DNA를 분석한 후, 유골의 것과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2명의 주민과 청동기 시대의 유골의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터뷰> 맨프레드(유골 후손) <인터뷰> 랑게(유골 후손) 자신과 똑 닮은 3천 년 전 조상을 찾게 된 이 주민은 자신과 청동기 시대 조상을 이어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를 완성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KBS 뉴스 김영민입니다. 국제] 장현진 기자 입력시간 : 2008.08.06 (19:30)
♣. 중국 (中國)
- 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왕대실록」 이니 원록(源錄)」이니하여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길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문헌에 의하면, 후한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 (右族)·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 하는 사상이 높아져 서, 이때부터 족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에 있어서는 제가의 족보를 수집 심사한 뒤에 이것을 갑·을의 문벌로 구분하여 세족이 아닐 경우에는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지 못하 도록 하였다.
- 수(隨)·당(唐) 에 이르러서는 문벌을 가리지 않고 학력과 인물을 주로 하는 과거 제도 가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천거(薦擧)의 표준으로서 문벌을 도외시하지 않았 다. 그러나
- 송대(宋代)에 들어가면서 이제까지 관에서 정한 공적 성격을 띤 족보가 사적인 성격 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의 관리선발의 추천 자료가 됐고, 동족의 「수족(收 族)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곧 이와 같은 기능을 중심으로 민간에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 고려시대(高麗時代)
- 권문귀족(權門貴族) 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世系)·항렬 (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行列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문종(文宗;1047년)때에는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으며, 더구나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 이던 송(宋) 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 이 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 조선시대(朝鮮時代)
- 국초(國初) 부터 족보의 편성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 정치의 국가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 성족(姓族)파별로 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학파(朋黨學派)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해 자연 동당(同黨)·동파 (同派)·동족(同族)의 일치 단결을 공고 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 왕실의 계보록이 중요시되어 ≪원계보( 源系譜)≫와 ≪종실보첩(宗室 譜牒)≫이 그후 여러차례 수보(修補)되었으며, 귀족·권문에서도 수보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最初의 族譜發行 (족보발행) -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라 알려지고 있다. 문화유씨 족보는 1522-1566 (중종 16-명종 21) 가정년간(嘉靖年間) 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 가정보(嘉靖譜)≫라 한다.
1565년(명종 20) 간행된 문화유씨의 족보. 11책. 목활자본. 문화유씨종친회 소장.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서 신뢰할만한 것은 안동권씨의 ≪ 성화보(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권씨의 족보. 목판본. 현전하는 우리 나라 족보 중 가장 먼저 편찬된 것 이다
- ≪ 성화보(成譜)≫는 성종(1476)때인 명나라 헌종 성화 12년에 간행 된 것으로, 문화 유씨의≪가정보(嘉靖譜)≫보다 약86년 앞선 셈이다. 안동권씨측의 말에 의하면 안동 권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네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사시(四始)」라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첫째로 꼽고 있다. 그런데 문화유씨 - ≪ 가정보(嘉靖譜)≫서문 가운데는 가정보다 140년 전이 되는 명나라 영락년간(永樂 年間)-세종5년 계묘(癸卯)에 이미 문화유씨보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락보≫가 과연 간행본인지 혹은 필사에 그치는 정도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 다. 하여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 족보는 당시 계급사회의 산물로 안동권씨보, 문화유씨보 등이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명족의 족보출현이 다른 문중에서 족보를 만 드는데 모형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이러한 족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필사에 의하 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족보보다는 가첩이나 가승이 오히려 많았을것으 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 후
- 족보는 임진왜란이란 미중유의 전란 때문에 많은 문헌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 이후 에야 다시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의 소위 양반들은 특권층 으로 대개 지주들 이었는데,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직을 강화해야만 했다. 예컨대 서원(書院)·향약(鄕約)·향청(鄕廳)·두레계(契)·족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당시 에는
-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며,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 그 후 일제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의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 보다 도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 중 족보발행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 것보다 일문일가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 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취락」후편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인 발행의 단행본·출판허가 건수는 1933년에는 861건, 1934년에는 1,090건이 었는데, 족보의 발행 건수가 1932년에 137건, 1933년에는 151건에 달하여 한국인 간행의 출판물 중 족보의 발행이 항상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 10개년간(1823~1932)의 족보 발행 회수를 각 본관 성씨별로 따져 본다면, 일족이 가장 번영한 김해김씨는 112회, 연평균 12.5회로서 수위를 차지하며, 밀양박씨가 88회, 경주 김씨가 69회, 전주이씨가 68회, 경주이씨가 55회, 호산신씨가 42회, 광산김씨가38회, 안동권씨가 34회, 수원백씨가 27회의 순위로 되어 있다.
- 족보는 인쇄에 의한 간행 이외에도 필사 또는 등사본(謄寫本) 등의 유포가 적지 않았을것을 고려할 때, 당시 얼마나 족보 발행이 성행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1. 족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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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산김씨 (安山金氏)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