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시움은 이상향을 뜻하는 보통명사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 즉 상상의 곳을 동경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욕망은 보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비치는 밝은 원, 엘리시움은 그렇게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다. 게다가 그곳으로 가는 길은 고가의 비행권으로만 열린다.
눈에 보이지만 갈 수 없는 곳. 철학자 바타유의 말처럼 금지는 욕망을 키운다. 지구의 가난한 청년 맥스에게 엘리시움은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자 결핍의 확인이다.
영화 ‘엘리시움’은 SF물이다. 어떤 점에서 ‘엘리시움’은 ‘설국열차’와 닮아 있다. 우리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이 지구에 문제가 생긴다. ‘설국열차’가 얼어붙은 지구를 보여준다면 ‘엘리시움’은 공해와 질병으로 얼룩진 지구를 보여준다.
‘설국열차’에서는 빙하기를 이겨낼 유일한 방법인 열차 승차권이 돈과 권력에 의해 분배된다. 가진 자는 안락한 칸에 승차하지만, 없는 자에겐 약육강식의 밀림과도 같은 꼬리 칸이 제공된다. 엘리시움은 그런 점에서 꼬리 칸 사람들이 절대 갈 수 없는 앞 칸과도 같은 곳이다.
엘리시움이 낙원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병이든 고쳐내기 때문이다. 질병과 죽음에 시달려야 하는 지구인들과 달리, 엘리시움의 시민들은 노화마저도 극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혜택은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엘리시움 시민에게 지구인은 귀찮은 침략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쾌적한 삶을 위해 지구인들을 격리하고 통제한다.
영화 ‘엘리시움’의 가장 큰 볼거리는 배우들의 호연이다. 엘리시움의 배타성을 목숨처럼 지키고자 하는 조디 포스터의 연기가 훌륭하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맥스만큼이나 눈길을 끈다. 그녀는 보호와 차별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영화는 계급과 욕망, 평등의 문제를 다루지만 철저하게 SF의 장르적 법칙 안에서 그려낸다. 맥스라는 영웅적 인물의 행적도 그렇고 맥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의 액션도 그렇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혹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엘리시움을 찾은 지구인은 침입자로 분류돼 살해당하거나 체포당한다. 함께 나눠 쓸 수 있지만 엘리시움 시민들은 결코 나누지 않는다. SF영화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는 매우 중요한 갈등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매트릭스’에서 프로그램과 인간이 대결했다면 ‘아일랜드’에서는 복제자와 피복제자가 대결했다. ‘엘리시움’에서 대결은 지구인과 엘리시움의 미친 지배자, 그리고 그가 고용한 용병의 싸움으로 압축된다.
데뷔작인 ‘디스트릭트 9’에서 속도감 있는 전개와 독창적 카메라워크를 보여주었던 닐 블롬캠프 감독은 이번에도 매우 스타일리쉬한 SF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미래사회의 계층 문제나 삶의 조건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박진감 넘치는 대중영화의 문법에 녹아 있다. 꽤 잔혹한 전투씬이나 액션씬도 핍진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스펙터클로서의 액션이 아니라 생과 사가 구분되는 본격 액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의 불평등, 환경오염, 금융위기 등등. 세상은 점점 더 살기 나빠지고 있다. 공기도 나빠지고, 기후의 변화도 인간의 예측을 배반하기 일쑤다. 지금도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빙하는 녹아 해수의 움직임을 교란한다.
인간이 기획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끼리 생존을 도모하는 것일 테다. 현실은 SF영화 속 이야기를 단순한 공상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엘리시움과 지구로 나뉜 불평등한 삶이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흥미로운 상상은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