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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한바퀴 135 - 남한산성과 한산이씨
11월6일 한산이씨 이용규할배. 이성구할배. 이완복아찌랑 함께 효종갱(曉鐘羹)을 먹으러 남한산성에 있는 음식점을 찾았는데 그 음식점이 이미 폐업을 하여 다른 음식점에서 닭백수를 먹었습니다. 만해기념관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만해(卍海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년)을 기억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여기서 님은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조국(나라), 절대자를 뜻한다고 배웠습니다. 만해는 절대자로 생각했던 조국이 일제에 의해 빼앗긴 후 '님의 침묵'이란 시로 저항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3. 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만해 한용운의 삶을 정리해놓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만해기념관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안에 있습니다. 공립 박물관이 아니라 개인이 만든 겁니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산성입니다. 광주시에 거의 전부가 있지만, 성남시와 하남시에도 일부가 걸쳐있습니다.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접근성이 좋기에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합니다.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의 도립공원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조선 인조 때 손을 보았는데, 해발 497m인 청량산(淸凉山)을 서쪽 끝으로, 해발 514m 벌 봉을 동쪽 끝으로 하여 긴 장방형 돌로 쌓았습ㄴㅣ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 형상입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입니다.
2013년 하반기에 발간된 한성백제사 시리즈 제3권에서 이형구 교수가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백제식 토기를 근거로 남한산성을 처음 세운 주체가 백제임을 입증한 이래,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웠음은 분분명해졌습니다.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습니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 차례 천도를 단행했습니다.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백제 왕도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대동야승(大東野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등 대부분 조선 시대 책들은 백제 고성이라고 적었습니다. 이와같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관찰이 2010년대에 들어와서야 고고학적으로 확증
된 것입니다. 즉 남한산성은 몽촌토성이나 이성산성이 그랬듯 풍납토성을 방어하는 여러 산성 중 하나로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발굴된 유물들은 신라계 유물이 여전히 압도적이기에, 백제가 한성 공함을 당한 이래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다가 신라가 한성을 점령한 후 다시 주장성(晝長城)으로 개축했을 개연성이 높아졌습니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 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와 맞붙은 나당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만에 하나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 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바로 다음 방어선으로 활용하고자 남한산 주위에 둘레 4,360보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그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습니다.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설 역시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자료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최근 수행된 남한산성 행궁지 기단과 그주변 지역 발굴조사 결과 신라계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1621)에 개수했습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다시 개축했습니다.
방문자센타입니다.
행궁이란 임금님의 임시거처. 남한산성행궁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여러신하와 함께 머물면서 항전했던곳입니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1621)에 개수했습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다시 개축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고는 재침에 대비하여 개조되었습니다. 개조 완료후 광주목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는 기본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 기능했음을 시사합ㄴㅣ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주요한 전투로는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홍타이지의 군대를 상대로 벌인 농성전이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결국 함락되었다는 점 때문에 입지가 요새로서 탈락이고 심지어 평지성과 다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막상가보면 산세는 지금도 험준하고, 급히 도망쳐 들어간 데다가 방산비리까지 겹
쳐 물자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막강한 청군의 서양식 화포에 얻어맞으면서도 한 달 이상을 버텨냈음 자체가 방어력을 입증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밑에서 남한산성을 보면 청나라군이 물리적으로 함락하지 못한 이유가 대충짐작이 갈 것입니다.
공방전 40여일 동안 청군은 수차례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성 내부 물자가 고갈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으면서 서서히 조선군을 조였습니다. 결국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된 탓에 항복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안내도
이곳은 맹인들을 위해 점자로 안내로 되어있어요.
병자호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인데, 신해 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간히기 시작했고 신유박해의 한덕운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에는 김덕심, 김성우 형제 등이 순교했습니다.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입니다. 정은, 그의 종손 정양
묵, 그리고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성우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습니다. 현재 알수있는 마지막 순교자는 이치재 입니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 군기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 건축물이 사라졌습니다. 1917년에 군청이 경안면으로 이전한 뒤로는 서서히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 일부와 함께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소실되었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정말 완벽하게 매몰되어 유구 상태가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습니다
남한산성 동문 (좌익문)
산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이다. 좌익 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왕이 행궁터를 중심으로 남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동쪽이 왼쪽이 되어 그렇다고 합니다.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 입니다. 동문은 일반 벽돌에 비교해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것을 사용하여 쌓았습니다. 다른 문에 비해 낮은 지
대에 축조했기 때문에 성문을 지나는 길에 계단을 만들었으며,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 문 남쪽에 있는 11 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문은 보수공사로 인해 걸려있 습니다. 남한산성 4대문 중에서 유일하게 도로 때문에 한쪽 성벽이 끊겨 있습니다.
외행전
1779년 8월, 정조는 남한산성에 방문합니다. 정조는 봉암에 올랐다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명응의동생 서명선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났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흔적이 남아 있냐고 묻자 서명응은 남한산성 행궁 뒤에 있는
청량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청량산은 온조왕이 첫수도 하남위례성을 만든 뒤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때부터 정조는 온조왕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고 온조왕사에 대해서도 더욱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후 1795년 9월, 광주 판관 이시원이, 고구려의 사당인 숭령전이나 고려의 사당인 숭의전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유독 백제의 사당만 이름이 없으니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숭렬전(崇烈殿)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온조왕사는 정식으로 국가가 제사를 받드는 사당인 숭렬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설화가 있습니다. 제문을 준비하고 있던 정조의 꿈에도 온조왕이 나타난 것입니다. 꿈에 나타난 온조왕은 정조의 인품과 그의 업적들을 칭찬하면서 혼자서는 쓸쓸하니 다른 국왕들의 사당처럼 명망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잠에서 깬 정조는 온조왕의 청을 받아들여 남한산성 축성에 공로가 컸던 총융사 이서를 숭렬전에 같이 모시게 하였습니다. 온조왕과 이서는 무려 1,600여 년의 시간 차이를 가진 인물들로 이렇게 숭렬전은 이 두 사람이 함께 모셔진 독특한 사당이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남한산성이 온조왕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 하남위례성의 유적으로 유력한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남한산성 간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백제 초기 수도에 대한 대략적인 위치 개념은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근대에 지어진 요새들이 대부분 그렇 듯 현대에 와서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대신 현재는 각종 먹거리, 볼거리들이 밀집된 관광지와 등산로서 애용되고 있습니다. 서울 거주자로 어딘가로 가고 싶은데 멀리 갈 여유는 없다면 남한산성도 고려해볼만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하철역에서 버스만 타고 가면 둘러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산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유료주차장이 있어 주차 후 어떤 방향으로 올라가도 산성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힘들면 물론 다시 성벽에서 중앙방향으로 가면 주차장이 있다보니 소위 하이힐신고도 둘러보는 코스가 됩니다. 등산뿐 아니라 로드자전거 업힐코스로도 유명하여 주말이되면 수많은 인파와 자전거로 마찰이 일어나기 일쑤입니다. 가서 둘러보다 보면 볼거리나 먹거리가 생각외로 많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해장국으로도 유명한 곳이었고, 9번 버스를 타고 간다면 남한산성 남쪽 민속마을에 닭죽촌도 있습니다. 우리 한산이씨 일행은 닭죽과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 육군교도소가 옛날엔 남한산성 근방(복정역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군 내부에서 육군교도소를 은어로 '남한산성'이라고 돌려 말하고는 했습니다. 경기도 이천시 쪽으로 육군교도소를 옮긴 후에는 없어진 말이지만 나이드신 분들은 남한산성이라고 하면 군 내부의 법적 처벌을 상기하기 때문에 매우 싫어합니다. 오인용의 연예인 지옥을 보면 사람 하나 때려 잡으려고 하면 남한산성 가고 싶냐며 말리는 장면이 자주 나오며, 서울의 봄에서도 "행주대교 막히면 남한산성 끌려가서 인생 종친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본인도 방위생활을 남한산성 부근에 군부대에서 근무해서 아침출근때 버스에서 내리면 공수부대원들과 같이 다니곤 했습니다.
이용규, 이성구 할배들.
좌승당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7세기 신라시대 유적부터 17~19세기 조선 시대의 축성기술이 모두 보이며, 비상시 산성도시라는 독특한 점이 큰 점수를 얻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운 산세와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린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 그리고 서양식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기술이 접해지고, 당시 중국과 일본의 축성양식도 들여와 더해진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로써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은 11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의 안전등급이 D E급으로 안전대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었습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 내에도 대인지뢰 매설지역이 있다. 2001년부터 3회에 걸쳐 지뢰 제거 작전이 실시되었지만 지금도 미확인 또는 유실지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과거 지뢰지대 등 표시판이 곳곳에 있기에 지뢰 표시판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아야합니다.
오늘은 한산이씨 모임입니다. 이완복 엉클(uncle)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산이씨 (韓山李氏)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입니다.
시조 이윤경(李允卿 )은 고려 숙종 때 호장(戶長)으로 지냈습니다. 6세손 이곡(李穀)이 1320년(충숙왕
7년) 과거에 급제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습니다.
이곡의 아들인 이색(李穡) 도 1353년(공민왕 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이르렀고 1391년(공양왕 3년)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습니다. 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95명,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2명을 배출하였습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權知戶長 )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입니다. 이윤경은 한산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리(鄕吏)토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한편 한산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며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입니다.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 였습니다. 그는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는데 원의 벼슬로는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을 고려에서는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습니다. 그의 아들 이색(李穡)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韓山)으로 하여습니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권지문하사사(權知門下司事) 혹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를 지냈는데, 왕의 신임을 얻어 동생 이윤경과 함께 각각 한산이씨의 시
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호장공계의 족보에는 두 사람이 형제였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4세손 이무(李茂)가 충렬왕조에 사설직장(司設直長)이 되고 신호위낭장(神虎衛郎將)으로 공을 세워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長軍)에 이르러 한주군(韓州君)에 봉해진 이후로 후손들이 한산을 관향으로 삼았습니다.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세록(世錄)편에는 이윤경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세록편에서도 이윤우를 시조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조 이전은 전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윤경과 이윤우가 형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산이씨는 이들을 시조로 각기 분파되었으며 그 중 이곡.이색을 배출한 호장공
계의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한산이씨의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은 한산 지방의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직(鄕職)의 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代 )에 걸쳐 호장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芝峴里) 건지산(乾至山) 밑에 있는 시조 이윤경(李允卿)의 묘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으로 알려졌으며 본래 한산군의 동헌(東軒)이 있던 곳이었는데 관가의 현감이 앉는 널판
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익혀 두었다가 묘를 썼다고합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의 6세손 곡(穀)이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원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스승인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했으며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3대 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백이정, 우 탁(禹倬 ) 등과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大家 )로 손꼽혔습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고려말(高麗末) 삼은(三隱 )으로 일컬어졌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익재(益齋:이제현)의 고제로 14세때 성균시십운과(成均試十韻科)에 합격하고 1351년(공민왕 2) 등과(登科)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공양왕(恭讓王) 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는 격동기에 풍운이 격심한 일생을 살면서 다섯 차례나 유배(流配 )를 당했던 목은은 뛰어난 학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명망을 떨쳤습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목은을 불렀더니 목은은 태조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옛날처럼 서로 읍만 하였고, 태조는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써 대접하였습니다. 잠시 후 시강관(侍講官)이 열지어 들어오므로 태조가 왕좌에 올라앉자 목은은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고 하자 태조가 "원컨대, 가르침을 받들겠으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하였습니다. 목은은 "망국의 대부(大夫)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다 죽게 된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색(穡)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종덕(種德)과 차남 종학(種學)도 조선조(朝鮮朝) 들어와 벼슬을 마다하고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두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목은이 여주(驪州)에 물러가 살았
는데, 하루는 그의 옛 제자가 찾아와 됩자고 하자 아무말도 않고 앞장서서 깊은 골짜기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큰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가슴이 시원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목은은 이태조(李太祖)와 태종(太宗)과의 친분이 있어 조선이 개국된후에도 초대되어 궁안에 드나들었으나, 고려의 충신으로 대절(大節)을 이루었습니다.
인정나사물무정(人情那似物無情) 인정이 어찌 물(物)과 무정함이 같으랴
촉경년래점불평(觸境年來漸不平)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
우향동이만면(偶向東籬滿面)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차니
진황화대위연몀(眞黃花對僞淵明) 꽃은 진국화(眞菊花)요, 사람은 거짓 도연명(陶淵明)이다.
그의 시(詩)에는 슬픔이 담겨있었다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 험준한 산악의 지세를 이용하여 건설한 초대형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세워진 주장성(晝長城)터를 기본으로 축조했는데,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고려되었습니다. 이러한 남한산성은 전쟁 발생 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산성에는 성문, 암문, 장대를 포함한 군사 시설 뿐 아니라 행궁을 갖추고 수천명의 주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시의 남한산성은 광주(廣州 )의 치소인 읍치(邑治)로서 기능하였습니다. 2014년 유네스코에서는 이러한 남한산성의 문화유산 가치를 인정해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17세기 축조된 남한산성의 역사적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남한산성이 사료 상에 나타나는 것은 672년(문무왕 12)부터 입니다. 이 시기 남한산성은 신라의 신주(新州)에 속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신주는 553년(진흥왕 14)에 설치되었으며, 이후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南川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그 뒤 한산주(漢山州)로 불렸습니다. 672년에 문무왕은 당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한산주에 둘레 4,360보(8km)에 달하는 주장성을 축성하였 습니다. 이러한 주장성은 신라시대 대규모의 군사와 물자를 수용할수 있는 군사 거점으로 기능하였 습니다. 이후 한산주는 남한산주(南漢山州)로 변경되었습니다.
현재 남한산성 행궁 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기와와 석축이 발굴되고 있습ㄴㅣ다. 또한 남한산성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화강암 성돌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건설된 남한산성이 신라 문무왕대의 주장성 터에 세워졌음을 알 수 수습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2021년 12월 27일에 보물로 승격 받았습니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하나 입니다. 5장대 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 건물의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는 5장대 모두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
장 대를 2층 누각 형태로 건립하여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남아 있습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 입니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 합니다. 왼쪽에는 청량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우물이 있어 장대에서 근무하는 장졸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합니다.
남문입니다
북문(전승문)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 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습니다. 전승문이라는 명칭은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어진 이름입니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습니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 식 문이며, 홍예기 석 위에 홍예 돌 10개를 쌓아 구축하였습니다
여담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인조와 김류의 독촉으로 이시백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 북문으로 나와 싸우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 300명이 모두 전멸한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1779년 8월, 정조는 남한산성에 방문합니다. 정조는 봉암에 올랐다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났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흔적이 남아 있냐고 묻자 서명응은 남한산성 행궁 뒤에 있는
청량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청량산은 온조왕이 첫수도 하남위례성을 만든 뒤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때부터 정조는 온조왕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고 온조왕사에 대해서도 더욱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후 1795년 9월, 광주 판관 이시원이, 고구려의 사당인 숭령전이나 고려의 사당인 숭의전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유독 백제의 사당만 이름이 없으니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숭렬전(崇烈殿)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온조왕사는 정식으로 국가가 제사를 받드는 사당인 숭렬전이 되었습니다.
봉암성과 한봉성
외성 역할을 합니다. 정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아 옛 성벽의 정취를 느끼러 오는 사람들이 찾습니다. 수백년이 지났기에 벽돌들이 떨어졌고, 군데군데 여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인상적 입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외성이 없어서 청군이 여기서 진을 치고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포를 쌌다고 합니다. 호란이 끝난 후 이
곳에 새롭게 성을 쌓아 방지했습니다.
남문에서
돌탑공원
첫댓글 남한산성에대한 이야기와 한산이씨에 대해 많은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