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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포산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여성독립운동가, 잊혀진 이름들
김경희 목사
너무 모른다
아는 것 없이 글을 쓰려고 하니 힘이 너무 든다. 삼일절 100주년을 맞으니, 새삼스레 100년 동안 묻어두었던 타임캡슐이라도 꺼내보듯 세상이 시끄럽다. 아니다, ‘시끄럽다’는 표현은 너무나 불경스럽다.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이들이 생생한 생명체로 살아 일어나는 소리는 마치 겨울을 깨고 나오는 봄처럼 조용히 천지를 울린다. 몇일 동안 내 눈과 입과 생각을 지배한 일곱 글자는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의 여성독립운동가는 과연 몇 명일까? 몇 명이었을까? 나라로부터 훈장이나 포상을 받은 명단이 2018년 11월 기준으로 357명이다. 나는 그 357명 중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유관순, 남자현, 김마리아, 김알렉산드리아, 조마리아, 곽낙원... (다른 이름을 떠올리느라 한참 이 자리에서 커서가 깜빡거린다.)
당시 인구의 2%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약 30만명. 그 가운데 357명이라니! 훈장이나 포상을 받은 전체 15,510명(2019년 3월 기준) 중에서도 2% 정도에 그치니, 이것은 가히 비현실적인 숫자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여자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다. 이름없이 기록된 성서 속의 여인들처럼,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 땅의 여자들 역시 누구 누구의 어머니, 누구 누구의 아내, 때로는 그 이름조차 없이 아무개씨로 겨우 기록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다수는 기록되지 않았다. 성서 속의 수많은 마리아들처럼, 해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십시일반 원조를 보내온 이들 역시 수많은 ‘매리’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름을 남기고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나마 기억하게끔 한 357명은 357명이 아니라 3,570명이고 35,700명이며 357,000명이다. 그 이상이다.
獨立, 그녀들이 일어섰던 바로 그 순간, 그 자리
3.1혁명은 식민지 10년의 인내가 터져나온 사건이었다. 지난 2016년 10월 말부터 그 땅을 다시 흔들었던 촛불혁명 역시 10년 간의 불의한 정권에 대한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때에 터져나왔다.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는 촛불 하나면 되었다. 10년의 일제의 폭압에 맞선 것이 가슴에 품은 손수 그린 태극기 한 장이었던 것처럼. 이집트 400년의 노예생활의 끝에 히브리들은 그저 울부짖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잊었고, 자기 민족의 이름도 잊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았으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을 이끌고 나온 광야와 그곳에서 보낸 40년의 시간은 그들로 하여금 노예의 때를 벗고 주인이 되게 하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일제 10년의 억압을 뚫고 외친 “만세”외침은 이 민족을 더욱 깊은 억압의 굴레로 밀어넣었지만, 그 날 우리가 확인한 것은 이 민족의 저력과 희망이었다. 아직 만세 말고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처참하게 죽어가야 했지만, 그 만세는 광야길을 안내하던 하나님의 불기둥이자 구름기둥이 되었다. 3.1혁명이 이끌어낸 것은 상해임시정부만이 아니었다. 3.1혁명을 시작으로 여성이 역사의 전면에 각계각층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3.1혁명 자체가 학생, 노동자, 농민, 백정, 기생, 양반 등 신분의 귀천과 고하를 막론하고 이룬 것이고, 그 가운데 수많은 여성들이 만세의 중심에 있었다. 삼일절의 상징으로 유관순의 이름 하나가 남겨진 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의 힘이었던 것이다.
학생, 교사, 기생, 노동자, 농민, 간호사, 해녀, 의용대 등 그들이 어디에 속해 있든지, 어머니, 아내, 할머니 등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든지, 만주, 상해,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그들이 어디에 있었든지, 그녀들이 절망과 두려움을 딛고 일어섰던 바로 그 자리가 독립의 자리였다. 독립은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쳤던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며 견뎌낸 시간들, 그 매 순간이 그들의 독립의 날들이었다. 손가락에 낀 가락지를 빼고 비녀를 빼서 행한 국채보상운동, 기미가요 안부르기, 백지시험 동맹, 조선인 차별없이 치료하기, 의병에게 밥지어주기, 그것이 그들의 독립운동이었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로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1)는 유명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그는 일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에 힘쓰던 중, 어머니 조마리아의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편지를 받는다. 오늘날 불의한 방법을 써서라도 제 자식은 벌을 면하게 하려는 부모들을 조마리아 여사께서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손자 신을 데리고 상해로 떠나는 길에 말했다. “약속해라, 신아. 너는 혼자 살겠다고 네 동무를 팔지 않겠다고. 죽어야 한다면 네가 죽겠다고. 네가 살겠다고 네가 그런 짓을 한다면 이 할미는 살 수가 없다.” 오늘날 어미들은, 할머니들은 이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 없다.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랐지만, 그 젖먹이 시절은 제 어미의 품에서 자랐다. 그 어머니 요게벳은 분명히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젖먹이에게 히브리신앙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것이 훗날, 40년이 지나도 8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모세의 정신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나서게 한 것이다. 디모데는 헬라인이었지만, 그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진실한 믿음을 이어받았다(딤후1:5). 「장강일기」를 남긴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이었다. 여섯 번이나 국경을 넘으며 독립자금을 전달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임정이 만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머나먼 이국땅, 피난민으로 태어나 자라야 했던 미래세대에게 “모국의 산과 들, 모국의 냄새, 모국의 마음을 … 틈만 나면 독립된 그들의 조국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모국의 언어와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나라를 잃지 않은 것이다.
안창호의 아내 이혜련,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 그들은 과연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아내였지만,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누구의 아내로 머물 수 없는 운명과 시대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집단학살을 당한 제암리 교회의 사람들, 그들 중 두 명은 그저 ‘김씨’로 ‘~의 아내’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조차 남길 수 없이 창졸간의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때 죽어간 이름없는 이들이 이들 뿐이겠는가!
미리암, 드보라 같은 여성들
영화 <암살>의 안옥윤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은 총을 들었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과 안옥윤의 실제모델 남자현과 광복군 지복영, 오광심, 김정숙, 조순옥도 총을 들었다. 여자폭파범이라 불린 안경신은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그의 말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에서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요. …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하오. 불꽃으로.”(미스터 션샤인의 대사)가 나온 것이 아닐까.
양반가 마님이었던 윤희순은 최초의 여성의병장이다. 강주룡은 12미터 을밀대에 올라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여성노동운동가 1호이며, 지복영은 사관학교 장교였고, 신정숙은 광복군 여군 군번 1번이다. 권기옥은 최초의 여성비행사다. 열 여섯 살 권기옥은 일본을 이길만한 무기는 비행기뿐이라 생각하여 비행사가 되고자 마음 먹었다. 남자도 해내기 힘든 훈련과정을 마쳤고 공군전투기를 몰았다. 김명시는 당대의 유명한 무정장군의 보좌관이었다. 김명시 장군이 무정과 함께 해방 후 종로통 거리를 지날 때의 광경을 듣자 하면, 마치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는 메시아 예수를 보는 듯 하다.
“굉장했지. 종로통이 온통 사람들로 백차일을 쳤으니까. 무정이 장군과 그 부관인 김명시 장군이 뒷다리 쭉 빠지고 훨씬 키 높은 호마 타고 종로통 거리를 지나가는데 모두들 손바닥이 터지라고 손뼉을 쳤어요. 그러면서 목이 터지라고 외쳤지. 무정 장군 만세! 김명시 장군 만세!”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거사를 이룬 여성지도자 미리암, 성서는 마뜩찮은 이유로 미리암이 벌을 받았다고 고발하고 있지만(민12:10), 출애굽의 영광의 선두에 미리암과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차마 다 숨겨두지 못한다(출15:20~21). 아무리 여성의 이름을 지우려 해도, 드보라가 바락보다 앞서서(삿4~5장) 미리암이 모세와 함께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부러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감추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불과 십 몇 년 전만 해도 여자가 운전하는 것만도 시비거리였던 세상이다. 여자는 아이와 집안이나 돌보라고 했을 것이다. 여자가 무슨 총을 드냐고 했을 것이다. 여자가 비행사라니 기도 안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다. 그들은 여자로서가 아니라,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두려움에 맞서고 세상의 눈에 굴복하지 않았다.
신분과 이념을 넘어
성서에는 이방인 여인들의 이름이 종종 등장한다. 결정적으로 메시아 족보에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 라합과 룻은 이방인 여인들이고 밧새바와 다말은 부적절한 관계의 여성들이다. 심지어 라합은 가나안 땅의 매춘부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메시아 족보에 오른 것은 그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어졌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는 그가 어떤 출신이든, 신분이 어떠하든, 어떤 도덕적 문제를 안고 있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사실 매춘부는 몸 팔아 살 수밖에 없는 지극히 가난한 여성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는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사에는 그가 사회주의 계열에 속했다고 해서 완전히 지워진 이름들이 있다. 일본군과 전투에 직접 참가한 박차정도 김원봉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최근에서야 서훈이 이뤄졌다. 또 한 인물, 지워진 이름 세 글자는 이화림. 백범 김구의 비서였고, 윤봉길, 이봉창의 거사에 함께 했던 그였지만 끝내 사상의 문제로 백범은 자신의 일기에조차 그의 이름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화림 회고록』2)이 번역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러시아나 중국, 연해주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은 자연히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 수 있다. 독립운동가에서 사회주의 계열을 배제한다면 온통 미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만이 훈장과 표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영화 <암살>로 인해 알려진 약산 김원봉은 해방 후 친일악덕경찰 노덕술에게 취조당하는 수모를 견디지 못해 월북한 분이다. 월북이 그가 평생 바쳐온 독립운동의 공을 무너뜨린단 말인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데 남녀가 따로 없듯이 이념이 따로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들은 바로 기생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나라의 주인으로 창녀들을 앞장 세우셨다. 가장 천대받는 그 시대의 신분, 성, 계층을 다 표현하는 이름 창녀, 기생들이 바로 그들이다. 유관순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8번방에 있었던 김향화는 동료 기생 33명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수원에 김향화가 있었다면 진주에는 한금화가 해주에는 문응순, 김해중월, 이벽도가, 통영에는 이소선과 정막래가 있다. 정칠성은 3.1운동 때 바로 그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태화관’에 있었다. 그 날을 계기로 정칠성은 화류계를 떠나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여성해방운동에 몸담고, 삼월회, 근우회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 역시 월북하였기에 357명 가운데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외국인 여성독립운동가들
그리고 357명의 명단을 보면,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있다. 두쥔훼이, 미네르바 구타펠, 그리고 익숙한 이름이지만 외국인인 송정헌과 송미령(쏭메이링)이다. 두쥔훼이는 운암 김성숙과 결혼한 중국인이다. 미네르바 쿠타펠은 미국인으로서 감리교 선교사다. 선교사로서 조선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선교일지를 남겼고, 본국으로 돌아가서는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송정헌은 중국인으로서 유평파(유진동의 동생, 김구의 경호원)와 결혼하여 부부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쏭메이링은 장개석의 부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동을 받아 거액의 후원금을 독립자금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최근 영화 <박열>로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가 2018년 순국선열의 날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숨진 지 92년 만이다.
중국인에 미국인, 심지어 일본인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선 사람들이었다. 룻과 같은, 라합과 같은 이들이다. 룻은 모압 여자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고, 라합은 가나안에서 매춘부로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비참한 여자였지만,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을 도왔고 그 복을 함께 누렸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은 메시아 족보에 들어갔다. 메시아 족보에 들었다 함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였다는 뜻이다. 입에 낯선 두쥔훼이, 송정헌, 쏭메이링, 미네르바 구타펠, 그리고 가네다 후미코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의 시대를 이겨내고, 오늘날 이 자유와 평화에 이르게 한 구원의 어머니들이다.
부끄러운 이름, 명예로운 이름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잊었다. 잊혀졌다. 왜냐하면 기억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원치 않게 기억하고 기록됐고 부르게 된 이름들이 있다.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최승희... 이들은 동상으로 영화로 심지어 교과서에 실리는 것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었다. 최남선과 이광수, 지금 누구도 그들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무슨 민족시인인 양 시를 쏟아내던 고은이 그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 후로 누구도 그의 시를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 속에 스며 있는 친일파의 흔적들, 그들의 야욕들이 봄날 돋아나는 새 생명 사이로 잡초처럼, 독초처럼 자라고 있다(잡초와 독초에게 미안하다).
여자폭파범 안경신의 폭탄거사는 수시로 실패를 거듭했다. 실패에 또 실패. 그러나 어떠하랴. 그것이 과연 실패일까?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최승희의 성공이 과연 명예로울까? 아직 친일적폐가 청산되지 않았다.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은 늙은 염석진이 한 골목으로 들어서면서부터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16년 전으로 소환된 듯 그 장소에서 독립군의 마지막 임무가 수행된다. 반민특위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오히려 애국자처럼 돌변하여 당당히 법정을 나섰던 그의 최후다. 아직도 수많은 염석진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여유로이 외제물건을 손에 들고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그들의 최후는 임무를 잊지 않은 독립군의 손에 달렸다. 역사를 잊지 않은 우리 손에 달렸다.
숨겨놓은 이야기, 잊혀진 이름들
357명에 들어가지 않은 이름들이 여기 저기서 이름없는 꽃처럼 피어난다. 정칠성, 한금화, 문월선, 문향희, 주산월, 그리고 백정의 아낙들, 걸인들, 나무꾼과 맹인, 광부들도. 그 이름들을 찾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학계는 물론이고, 지역마다 학교마다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고 있다. 그 노력으로 찾아낸 이름 하나가 바로 ‘김락’이다. 김락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 명가의 안주인이었다. 그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온 백성이 참가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그런데 이 이름은 한 역사가의 밝은 눈과 성실한 탐구가 없었다면 영원히 묻혔을 이름이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2000년에 「고등경찰요사」3)를 살펴보다가 김락이 두 눈이 멀게 된 이유를 기록한 대목을 찾아낸 것이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기록하지도 기억하지도 않은 이름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은 원수의 기록물에서 찾아냈다.
시인 이윤옥은 『서간도에 들꽃피다』(시집, 10권)를 냈다. 각권마다 스무 분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담겼다. 제목만 보아도 그들의 삶이 느껴진다. 이름없는 들꽃에 이름을 붙이듯, 잊혀진 이름을 되새기듯,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시와 이야기로 풀었다. 그 이름들 중에 이런 이름들이 있다. ‘하와이서 부른 독립의 노래, 심영신’, ‘미주 동포사회에 독립 의지 심은 사진신부, 양제현’, ‘사진신부로 독립의 노래 부른, 김도연’, 이들의 이름 앞에 ‘사진신부’라는 이상한 표현이 붙어 있다. 사진신부란 오늘날도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사진이 먼저 오가는 것처럼,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난 조선인 남성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 결혼방식이다.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무려 1천명의 사진신부가 태평양을 건넜다. 많은 경우 사진보다 훨씬 늙은 남자인 경우가 많았고, 노동현실도 들은 바보다 열악했다. 그러나 그 궁핍함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꾸준히 독립자금을 부쳐왔다.
3.1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거나, 각 지역에서 붙잡혀 당한 고문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어린 유관순은 자궁과 방광이 파열되어 끝내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눈은 물론이요 고막과 유방이 파열되는 것도 다반사, 출옥한다 해도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 그 가운데는 어린 소녀들이 많았다. 최연소 여학생의 나이 만 14세 10개월, 소은명. 어린 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4) 유관순과 똑같은 과정으로 결국 옥사에 이른 함경북도 명천의 동풍신은 유관순보다 두 살 어린 소녀였다. 또한 경상남도 통영에서는 김순이가 고문후유증으로 어린 나이에 숨졌다. 김순이는 유관순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들의 나이 열 일곱, 열 여덟, 열 아홉이었다.
獨立, 그 열매를 맛보며
청소년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여성독립운동가의 이야기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김일옥 글, 백금림 그림, 상수리)에는 여자로서 무력감을 호소하는 동네아낙들을 붙잡고 용기와 격려를 불어넣는 조마리아 여사의 말이 담겨 있다.
“우리 여인들은 나무뿌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네. 비록 어두운 땅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지만, 뿌리가 없다면 그 나무는 어찌 되겠는가? 자네의 일을 결코 가벼이 생각하지 말게나.”(조마리아)
모두 화려한 꽃이 되길 바라고, 모두 빛나는 열매가 되길 바라지만, 스스로 뿌리가 되기로 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이다. 꽃도 열매도 없으니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이름도 몰랐을 수많은 뿌리들, 그러나 그 뿌리들이 그 어둠을 견디었기에 독립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내가 지금 누리는 이 평화와 자유는 그분들의 희생과 죽음 위에 피어난 꽃이다. 내가 숨 쉬는 오늘은 그 인내가 맺은 열매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는 엄연한 진리, 그러나 그조차 매일 되새기지 않으면 낯선 진리일 뿐. 그리하여 사순의 절기를 지나며 예수의 삶과 사랑, 고난과 죽음을 기린다. 100년 전 오늘, 이 땅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외치다 고문당하고 죽어갔으며 마침내 독립의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 그 이름을 기억하듯이 그날 그곳의 그녀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눅22:19)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우리가 기억해 주지 않으면 그녀의 피맺힌 ‘만세’ 외침은 허공에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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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편지에 대해서는 진위논란이 있다. 편지 실물이 남아있지 않고, 안중근과 그 어머니에 감동받은 한 일본인 스님의 책(『내 마음의 안중근』)에서 인용되면서 회자된 것이다. 다만 안중근의 기개와 그 어머니의 기상이 당대에나 지금이나 의미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폐기되지 않았으리라. 역사적 사실로 전하기보다는 그러한 이야기가 있더라, 수준에서 안중근 모자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2)이화림 구술로 쓰여진 『정도(征途)』(장촨체, 순징리 공편/박경철, 이선경 공역)를 번역한 책.
3)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가 만든 고등계 형사 지침서.
4)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수록인물 4,857명, 그 중 독립유공자 730여명 확인. 그리고 그 중 만 20세 미만의 독립유공자 60여명 확인. 소은명은 1920년 만세1주기를 맞아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체포 구금되었다. (한국일보 2019.3.7.기사)
5)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인문서원)
■참고자료
조한성, 『만세열전』, 생각정원
박시백, 『삼십오년』, 비아북
이윤옥,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얼레빗
심옥주,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학교
김일옥, 『나는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상수리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이윤옥, 『서간도에 들꽃 피다』, 얼레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