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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봄바람, 여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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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여우]
이은봉 시집 / b판시선 012 / 도서출판 b(2016.04.2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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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은여우
이은봉
봄바람은 은여우다 부르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달려와 산언덕 위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은여우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다리 자꾸 후들거린다
온몸에서 살비듬 떨어져 내린다
햇볕 환하고 겉옷 가벼워질수록 산언덕 위 더욱 까불대는 은여우
손가락 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그녀는 온다
때가 되면 온몸을 흔들며 산언덕 가득 진달래꽃 더미, 벚꽃 더미 피워 올린다
너무 오래 꽃 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차가워질수록 더욱 우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
소나무 자식
이은봉
제석산 산책길, 남 다 보는데도
버젓이 소나무와
관계하는 사람 있다
젊고 튼튼한 소나무를 끌어안고
가슴께, 아래께를
콩콩콩 찧는 사람 있다
소나무의 가슴께, 아래께가 반질반질하다
이 사람, 머잖아
소나무 자식 낳겠다
너무도 푸르고 싱싱한 이 사람
이미 굳세고 강건한
소나무 자식이다.
골짜기에 나자빠져 있는 바람
이은봉
한 십 년 골짜기에 나자빠져 있는 바람
팍, 시르죽어 있는 바람
내내 자랑풀 한 잎 날리지 못한다
더는 등을 밀어줄 향단이가 없어
기껏 그는 나나니벌 따위처럼
깊은 골짜기에 갇혀 붕붕거린다
물은 아래로 흐르기라도 하는데
아지랑이는 위로 날기라고 하는데
골짜기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바람
그는 주섬주섬 쑥이나 뜯고 있다
우두커니 산마늘 따위나 캐고 있다
한 십 년 마음을 갈고 닦고 있는 바람
태풍의 꿈은 다 접었는가
그냥 곰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바람이 좋아하는 것
이은봉
멈춰 있으면 바람이 아니다 움직이는 바람, 움직이는 바람, 달리는 바람, 튀어 오르는 바람, 휘몰아치는 바람……
이 부잡스러운 녀석이 좋아하는 것은 계곡이다 틈이다 구멍이다
점잖게 여백이라고도 말하는 구멍을 향해 부지런히 제 몸을 던져 넣으면서 바람은 바람이 된다
구멍 속에는 무엇이 있나 구멍 속에는 식량이 있나 사랑이 있나
바람도 먹고 살기 위해 달린다 바람도 사랑하기 위해 달린다
어떤 바람은 늦게 달리고 어떤 바람은 빨리 달린다 생명 있는 것들은 다 달린다 생명 없는 것들도 다 달린다.
달리는 바람, 솟구치는 바람, 바람은 빠르게 변하고 바뀐다 멈춰 있으면 바람이 아니다.
쥐똥나무 울타리
이은봉
쥐똥나무 울타리를 만들자
가시철망 촘촘히 두르고 서 있는, 시멘트 벽돌로 만든 담장, 이제는 다 허물어버리자
쥐똥나무 울타리를 만들자
쥐똥나무 울타리에선,
아침 햇살 환하게 피어오른다 집안 가득 참새 떼 날아오른다
느릿느릿 시궁쥐며 두더지도 드나들고, 굼실굼실 도둑고양이며 족제비도 드나드는 곳,
쥐똥나무 울타리를 만들자
쥐똥나무 울타리 아래에는
봉숭아꽃, 맨드라미꽃 심어보자
채송화꽃, 앵초꽃 심어보자
해거름의 나주볕이 환하게 내려오기 시작하면 손나팔을 불며 저녁때를 알리는
분꽃도 심어보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
이젠 다 허물어버리고
쥐똥나무 울타리를 만들자
쥐똥나무 울타리 안에서는
옥수수 삶는 냄새 구수하게 들려온다 식구들 모여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나눈다.
거친 귀
이은봉
오늘 밤도 장맛비로 세상 구죽죽하다
외각도로를 뭉개며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 창칼을 휘두르는 소리처럼 차고 시리다
자정이 넘었는데, 첫새벽이 오고 있는데 온갖 소리들 끊이지 않는다
소리들이 왁작대며 빗속을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그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저 소리들 속을 뒤집는 것은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지 못하는 귀 때문이다
순해지지 않는 귀
투박하고 거친 귀
이런 귀가 어찌 저 소리들의 내력을 다 알아듣겠는가
쪽빛 하늘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는 소낙비를, 소낙비에 젖어 질척이는 흙을……
투박하고 거친 귀는 아직도 떨림판을 갈고 있다
빗방울 소리 한 점만 떨어져도 귀는 천둥이 치고 벼락이 치는 소리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란다
허연 파뿌리를 흩날리며
너무 늦게 늙는 밤, 오늘 밤도 나는 동구 밖으로 나가 소리들 속으로 오는 첫새벽을 기다린다
어린 발자국 소리를.
다리
이은봉
민들레 샛노란 꽃들 지고
화들짝 꽃솜들 피어난다
민들레 꽃솜들에게도
다리가 달려 있다
꽃솜들의 다리는 바람……
다리가 달려 있는,
민들레 하얀 꽃솜들
하늘, 가득 날아오른다
잘 익은 해 그만 땅으로 떨어진다
광화문 시청 청계천
오조조 별 뜬다 촛불별들
아직 어두운 촛불별들에게도
다리가 달려 있다
그들의 다리는 사람……
사람 따라 촛불별들 걷는다
세상, 차츰 밝아온다
꽃
이은봉
꽃이 사랑을 먹고 피는지를
몰랐다고, 이슬을 먹고 피는 지를
아침 이슬이 마를 때까지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면
꽃은 시들어버리고 만다니까
아니야 아니야 벽오동나무
넓은 잎사귀마저 축축 늘어져버리는
텅 빈 땡볕의 여름한낮
여름 한낮의 땡볕을 먹고
폭력을 먹고 피는 꽃도 있다니까
나비조차 날지 못하는 이 더위에
설마 그런 꽃이 어디 있으려고
무슨 꽃이 그렇게 피는데?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바람
이은봉
제가 바람인지 모르는 바람이 있다 정오가 될 때까지 질펀하게 자취방에 퍼져 잔다
잠들면 허공에 떠 있는 독수리처럼 고요한 바람
공허가 무엇인지 체험하고 있는 걸까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는 걸까
마른 수건처럼 구겨진 채 침대 위에 팽개쳐져 있는 바람
극장식 커튼이 내려져 있는 어두운 방에 그는 지금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처럼 유폐되어 있다
제가 바람인지 모르기 때문일까 때 절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그는 여태 시간 밖의 일들에 취해 있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살고 싶기 때문일까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바람의 몸이 차다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배와 허벅지와 종아리와 발바닥이 차다
푸른 정맥을 드러낸 채 시간 밖의 삶을 살고 있는 바람
쉰이 넘도록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철부지 바람이 지금 자취방에 퍼져 잠들어 있다.
달리는 바람
이은봉
바람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다
광주발 서울행 심야고속전철을 탄 것도
그 때문이다 서울을 향해 달리는 바람,
심야고속전철 안에서도 바람에게는 쉴 틈이 없다
짓이 나 책읽기에 깊이 빠져 있는 바람,
심야고속전철 안, 너무 환해
잠 이루지 못하기 때문일까
오늘도 바람은 조금 들떠 있다
어디서 폭탄주를 마신 것일까
줄곧 어깨를 으쓱대는 바람
때로는 숨이 차오르기도 하지만
아직도 바람은 팽팽한 심장을 갖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내일은
서울발 광주행 심야고속전철을 타야 한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달리게 하나
돈만 되면 못 갈 곳이 없기 때문인가
바쁘고 분주한 한 주가 지나면
그는 다시 또 광주발 서울행
심야고속전철을 타야한다 비늘 꽂을
틈만 보여도 서둘러 스며드는 바람
젖어드는 바람, 끝없이 떠돌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는 도무지 쉴 틈이 없다.
바람의 본적
이은봉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가 바람에게도 고향이 있는가 태를 묻은 땅이 있는가 족보도 있고 혈통도 있는가 미풍으로 폭풍으로 눈보라로 순식간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바람아 네게도 부모가 있는가 형제매가 있는가 고향집 울안에는 오얏나무 푸르게 자라고 있는가 봄에는 개나리꽃 피고, 여름에는 맨드라미, 채송화 피는가 바람아 불어오는 곳이 어디인가 불어오는 곳이 있기나 한가 먼 하늘 속, 타는 태양 속 흑점을 뚫고 먹구름을 헤치며 바람아 지금도 불어오는가 흔들리는 갈대들의 허리 꺾으러 오는가 꺾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가 바람아 너도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애 태우는가 주린 입술, 칭얼대는 눈망울 어린 누이와 아우들로 눈물 글썽이는가 딱하기도 해라 바람아 후끈 달아오른 고향 사투리야 먼 바다, 은빛 물꽃 속에서 너는 불어오는가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의 골목을 내달리며 함부로 지껄여대는 바람아 아무데서나 부풀어 오르는,고무풍선아 아직도 딱딱하고 단단한 막대기, 굵은 하지감자 따위 흔들대고 있는다 헉헉 단내 나는 입김, 뜨거운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가.
바람의 손
이은봉
1.
바람의 손엔 산부인과용 비닐장갑이 끼어 있다
휘몰아쳐 오르는 제 열기에 취해 논두렁 건달처럼 좌우로 몸 흔드는 바람
활짝 피고 있는 꽃의 자궁 속으로 쓰윽, 비닐장갑 낀 제 손 집어넣는 바람
손 집어넣고 휘저어대는 바람
조류독감처럼 빠르게 밀려들어오는 바람의 손과 마주치면
꽃의 태아는 겁에 질려 울지조차 못한다
금세 시체가 되어 끌려 나오는 꽃의 핏덩이를 보아라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바람의 손은 메뚜기 떼의 이빨처럼 무엇 하나 남기지 않는다
2.
순식간에 로봇으로 변하는 바람의 손에는 날카로운 쇠갈고리가 들려 있다
꽃은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열매부터 밀어 올리는 무화과
무화과의 과육에까지 콱, 박히는 쇠갈고리의 괴성이 세상을 퍼렇게 흔든다
어느새 무쇠장갑차로 바뀌어 사막을 질주하고 있는 바람의 손
이내 전투기로 변해 하늘을 날아오르는 바람의 손
순식간에 따뜻한 남쪽 하늘을 검고 칙칙하게 덮어버리는 싸가지 없는 바람의 손
일만 달러짜리 미화처럼 사납다 이라크 파병된 미군 병사들처럼 무섭다
허공
이은봉
세상은 벌써 눈 덮인
겨울 산, 겨울 하늘
눈 감으면 마음의 허공 한 가운데로
어린 꾀꼬리 한 마리,
파릇파릇 솟구쳐 오른다
길게 대각선을 그으며.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
이은봉
감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 위에 다시 눕는다
눈 감았으면서 뜨고, 뜨면서 감는다
그러는 사이 감나무 잎새들
보이면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인다
감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홍시들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가
그늘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는가
홍시들 사이, 그늘들 사이 푸르른 하늘이 나타나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나타난다
하늘 가까이 새하얀 뭉게구름 몇 점도 그렇게 나타나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나타난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저것들 사이
언뜻언뜻 허공이 보인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저것들,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가라앉고, 가라앉으면서 솟구친다
허공이 만들면서 지우는 저것들
내게서 나가면서 내게로 들어오고 있다.
철없는 바람이라니
이은봉
바람은 왜 그리 서울을 좋아하는 걸까 온갖 소문들에 몸 담근 채 조동이를 벙긋대고 싶은 것인가
옛 친구들 인사동 어디 모여 있기 때문인가 어린 자식들 돈암동 어디 공부하고 있기 때문인가
회오리로 몸을 비틀며 한바탕 놀다가 지친 바람
오늘은 고속전철 역방향 좁은 좌석 위에 잠들어 있다
서울이 태를 묻은 고향이라도 되는가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코를 고는 모습이 안쓰럽다
바람은 아직도 제 꿈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인가 제 욕심에 허리춤까지 잡혀 있는 저 철없는 바람이라니
읽다 만 조간신문이 잠든 바람의 뺨을 덮고 있다 꼬불꼬불 에어컨 냉기가 시르죽은 바람의 뺨을 핥고 있다.
바람아
이은봉
바람아 너도 오랜 친구한테 뜻밖의 엉뚱한 욕을 먹은 적 있니
무슨 공적인 일로 통화를 하다가 엉뚱하게 욕을 처먹은 적 있니
늦은 밤 서로 믿고 의지하던 친구한테 바람아 이 옹졸한 녀석아
오늘의 설움을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
아무한테도 말 할 수 없어 망연자실한 채 창밖의 캄캄한 밤하늘이나 쳐다본 적이 있니
대전으로, 서울로 떠나는 자동차소리 자꾸만 가로수 잎들을 흔들어대는데
바람아 너도 옛 친구와 통화하다가 어쩔 줄 몰라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한참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니
한 손으로는 이마를 짚기도 하며……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어 동물원의 오랑우탄처럼 두 손으로 탕탕탕 가슴을 친 적이 있니
이마를 짚던 두 손으로 그렇게 가슴을 치며 마음을 가라앉힌 적이 있니
바람아 참고 견디는 시간아 내일이면 또다시 멀리 떠나고 말 아픈 사랑아.
바람의 문자
이은봉
바람은 느릅나무 속잎처럼 여린 내 가슴 안에까지 쳐들어와 온갖 아양을 다 떨고는 바람은 문득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휑한 가슴, 텅 빈 비닐봉지 따위와 놀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뜻인가 바람은 깃털 날씬한 강남제비처럼, 내 가슴의 속주머니까지 톡톡 털어 가고는 입을 꽈악, 다문다
너무도 마음이 복잡한 바람, 바람의 말에는 문자가 없기 때문일까 낙서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바람을 만나려면 제석산 기슭에라도 가야 한다
제석산 기슭이라니 부처님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인가 여기 무명 부처님들 묘 등에 기대앉아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으면 바람은 서서히 다가와 저 자신을 좀 보라고 보리수나무 잎사귀를 알싸하게 흔들어댄다
이렇게 문자를 그려 자신을 드러내는 바람에게 구태여 나는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다 변덕이 심한 그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태풍의 함성으로 나를 뿌리째 뽑아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굴참나무나 피나무, 참식나무나 오리나무의 잎사귀를 흔들며 만드는 문자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내 마음 안에까지 들어와 함부로 까불어대는 꾀꼬리 목소리조차 바로 알아듣지 못하거늘
자리를 옮겨 요여기 무명선사님들의 묘 등에 기대 앉는다 문득 바람이보리수 잎사귀를 흔들어 만드는 문자를 내가 옳게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바람은 나 자신이 되어 있지 않은가
봉두난발을 하고 여전히 내가 여전히 세상 안팎을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언제인가는 내 가슴에도 저 벅찬 바람이 가득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누가 모르랴.
바람이 내 안에 머물며 이런저런 문자를 남기는 동안만은 내 낡은 청춘도 어질어질 되살아나리라 끝내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말겠지만.
더러운 피
이은봉
가끔씩 가슴이 꽉 막히고, 머릿속이 징 어지러웠다 도무지 몸과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그럴 때마다 잠시 눈을 감고 침대에 몸을 눕고는 했다 더러는 와락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팍, 몸을 던져 잠에 빠져있다가 깨어나야 겨우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손과 발에서 힘이란 힘은 다 빠져나가기도 했다 연필을 쥘 힘조차 없었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그럴 때도 눈을 감고 침대에 깊이 몸을 눕고는 했다 그렇게 쉬고는 했다
이게 다 더러운 피 때문이라니 더러운 피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였다
더러운 피, 더러운 피는 달콤한 피였다
피가 단 것이 문제였다 피가 단 것은 내 몸에 살고 있는 꽃뱀 때문이었다
징그러운 꽃뱀, 지나치게 많은 꽃뱀은 지나치게 많은 욕망을 불러들였다
꽃뱀은 흔히 고기, 생선, 계란, 우유의 모습을 하고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가 고기, 생선, 계란, 우유가 꽃뱀의 모습을 하고 내 피를 더럽히다니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감치는 입맛으로 꼬리를 치며 내 피를 달콤하게 더럽히는 꽃뱀이 나는 싫었다 미웠다 징그러웠다.
도산사 근처
이은봉
가쁜 숨 헐떡이며 기어오르는 산골짝이다
지친 몸 쉬기 위해 눈 들어 잠시 허공 바라본다
반짝이는 것들, 새인가 잎새인가
새이면 어떻고, 잎새이면 어떤가
이미 저 스스로 새이고 잎새이거늘
재잘대는 골짝물 속으로, 조각구름 내려와 젖고 있다
젖고 있는 것들, 구름인가 물고기인가
구름이면 어떻고, 물고기면 어떤가
이미 저 스스로 구름이고 물고기거늘!
바람의 칼
이은봉
바람은 처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바탕 흙먼지를 거느리고 불어올 때나 겨우 그를 알아보았다
보통은 흙먼지보다 안개 더미를 몰고 다니는 것이 바람이었다
안개 더미를 몰고 다니는 바람을 맞으면 늘 갈 길이 몽롱했다
안개 더미를 몰고 다니는 것은 바람이 땅에서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가 문제이기는 했다 사람들은 바람의 정체를 잘 알지 못해 자꾸만 불안해했다
바람이 주로 사는 곳은 하늘이었다 하늘에서 살 때는 천천히 뭉게구름을 밀고 다니며 유유자적했다
그렇게 한가하게 사는 바람이 나는 좋았다 한때는 그것이 바람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창틈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에 사는 바람은 전혀 욕심이 없어 보였다
청정하고 무구한 바람, 그때는 몰랐다 바람이 제 가슴에 엄청난 짐승을 키우고 있는 줄을
느닷없는 바람……, 별안간 울타리를 부수고 뛰쳐나온 바람이 미친 비를 몰아대며 땅에 내려와 꼬라지를 떨어대기 시작하면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람이 폭우 속에서 양 손에 칼을 들고 지랄을 떨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꼼짝없이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어야 했다
바람의 칼, 그의 칼을 맞고 피투성이로 쓰러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날은 하루의 운세를 담고 있는 일진日辰만을 탓하기가 어려웠다
물에 젖은 두텁고 축축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우물 속으로 가라앉는 수밖에 없었다
가라앉아 발가락이나 꼼지락거리며 어서 빨리 날이 바뀌기l를, 새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집
이은봉
여수의 돌산이 갓김치로 유명하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유명하기로는 향일암도 갓김치에 못지않았다
돌산에 가서 정작 보고 싶은 것은 갓김치나 향일암이 아니라 돌의 집이었다 오죽하면 이 섬의 이름을 돌산이라고 지었을까
너무 안쓰러워 나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돌의 집을 수소문했다 돌의 집이라니 어디에도 돌의 집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바닷가 근처 물에 잠겼다가 떠오르는 여가 돌의 집일까
섬의 외곽을 저속의 자동차로 달리다가는 방파제 끝으로 가 물방개와 놀기도 했다
바닷속까지 꼼꼼히 들여다보았지만 버려진 미역 오라기 따위만 이리저리 몰려다닐 뿐 돌의 집은 없었다
돌의 집을 먹고 싶어 하기 때문일까 갑자기 배가 아팠다 후닥닥 길가 낯선 집 화장실에 뛰어 들어 변기 위에 앉았을 때였다
바람의 집, 퍼뜩 엉뚱한 간판 하나가 달려와 어깨를 두드려댔다
옷을 고쳐 입고 난 뒤에도 바람의 집 안으는 들지 않았다 금방금방 한 뼘씩 손을 뻗어대는 호박넝쿨과 함께 집밖 돌담 가 비키니 의자에 앉아 먼 바다나 먹고 있었다
황홀했다 이토록 슬픈 풍경을 갖고 있어 바람의 집이라고 했을까
바람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안방까지는 차마 들여다보지 않았다 누구의 안방인들 누추하지 않으랴
사르르 아픈 배를 어루만지며 돌의 집보다는 바람의 집으로 온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돌의 집은 끝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금빛 저녁 해가 바람의 집을 노랗게 물들이며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거기 하늘가 제 몸 붉게 꾸미고 있던 구름이 바다를 향해 탕, 탕, 탕, 장총 몇 방을 쏘아댔다 붉게 얼비치는 핏빛 노을이라니
이토록 잔인한 놈이 구름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가는 구름이란 놈이 만드는 고요까지도……
연초록 잔디밭 위로 겁에 질린 노송들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바람의 집이 터지기 직전의 수류탄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제 머리에 무겁고 벅찬 정의를 이고 있기 때문일까 누구도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바람의 집은 내게 돌의 집을 대신했다 돌산에서도 나는 꿩 대신 닭이나 잡아먹었다,
바람의 파수꾼
이은봉
무엇으로, 왜, 어떻게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 저기 아득한 허공을 주욱 둘러보고는
불어오는 바람을 꼼짝 못하게 잡아 묶어 감옥에 처박아 주겠다는 것인가
킥킥킥, 새들이 웃는다 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실은 새들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당신 아닌가
바람보다 먼저 새들이나 지켜보시지
새들보다 먼저 구름이나 지켜보시지
새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구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왜, 무엇으로 바람을 지키시겠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이유로
당신은 바람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바람은 사람, 사람은 마음, 마음은 자유……, 자유가 발길을 만들고, 발길이 역사를 만들지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은 역사를 지키겠다는 것
무엇으로, 왜, 어떻게 역사를 바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바람은 흐르는 것, 바람은 달리는 것
그렇지 물처럼 여기저기 스미는 것
아직도 당신은 구름을 타고 있는가
당신이 타고 있는 구름은 뜬구름
손오공의 흉내 그만 두고 얼른 땅으로 내려오시게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미루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머리칼이나 날려 보시게
그것이 실은 바람을 지키는 일
더는 바람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네
바람이 지금 당신의 여린 잎새들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잖나.
창공
이은봉
새털구름 높이 떠 흐르는 창공!
창공에는 새털구름만 떠 흐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오랜 꿈도 함께 떠 흐른다
우리의 오랜 꿈이 무엇이냐고
묻지 마라 지금은 보라매의 웅지로
비행기가 뜬다 당신의 뜨거운 열정이 만드는
보아라 저 씩씩한 은빛 날개를!
텅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차 있는 창공
창공에서 깨닫는 것이 공허만이 아니다
당신의 오랜 희망도 함께 깨닫는다
보라매의 날갯짓으로 치솟는 역사도
창공에는 있다 최첨단 문명의 내일도
하늘빛으로 몸 감춘 채 날고 있다
보아라 은빛 공허 속, 우리의 벅찬 날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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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바람에 관한 몇 가지 상념
바람은 무엇인가. 바람은 누구인가. 바람은 어디서 살고 있나. 바람은 몇 살인가. 질문으로, 상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사람이다. 사람은 바람이다. 바람은 세상이다. 세상은 바람이다. 바람의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바람은 공기이고, 돌은 흙이다. 공기인 바람도 4원소 중의 하나다.
바람은 소리다. 바람은 뜻이 아니다. 바람은 언어다. 기의언어가 아니라 기표언어다.
기표바람은 기의바람을 끌고 다닌다. 기의바람은 기표바람을 쫓아다닌다.
기의바람을 만드는 것은 기표바람이다. 기표바람을 따라 기의바람은 그때그때 살짝 태어났다가 사라진다. 기표바람을 따라 금방 날아가는 잠자리 같은 기의바람!
기표바람이 기의바람을 만드는 곳은 상황, 선택과 배열의 관계다.
기표바람은 잠깐 기의바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기표바람은 그렇게 이미지다.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움직이는 기氣다. 운기運氣하는, 활동하고 움직이는 기!
바람은 ‘바라다’라는 동사의 명사다. 바람은 희망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다.
희망이나 꿈처럼 바람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저 혼자 봇도랑에 처박혀 있기도 한다.
사람은 말한다, 바람은, 꿈은, 희망은 이루어진다고.
바람이, 꿈이, 희망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은 하단전下丹田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의 기표이다. 그렇다. 바람은 리비도의 기표다.
거개의 바람은 붕새처럼 하늘로 솟구쳐 오르지 못하고 텃새처럼 산기슭의 초가집 주변이나 맴돈다.
바람은 추상이나 관념으로 이해되기 쉽다. 바람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바람은 끊임없이 형상이다. 이때의 형상을 누구나 다 바로 읽어내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형상이 아니다. 나뭇잎을 흔들거나 비닐봉지 따위를 날려 형상을 이룰 뿐이다. 형상이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자질로 삼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바람이 만드는 형상도 이미지다. 아니, 바람 자체가 이미지다.
언어도, 문자도 이미지다. 바람이 만드는 저 많은 언어를, 문자를, 이미지를 누가 다 읽어낼 것인가. 나는 겨우 몇 개를 골라 시로 해독해 볼 따름이다.
이처럼 바람은 미지未知이다. 본래 미지로부터 오는 것이 이미지이다. 이미지인 바람이라는 말로 만든 시! 여기 그 물질이 살짝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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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詩集 [※봄바람, 여우※]
[ 해설 ] -
불투명한 바람과 투명한 마음
김종훈(문학평론가)
1
세상은 그것이 투명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을 굴절시킨다. 그 사람은, 체험과 역사가 지닌 깊이, 자신과 타인이 품은 뜻이 마치 거울 속의 모습처럼 같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지니고 있다. 그의 바람이 실현되기 위한 최소 조건은 배려, 정직 등일 터인데 이를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 한상 지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부러지고 잘려나간 욕망의 파편들, 공존하고 있으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흩뿌려진다. 『봄바람, 은여우』에서 이은봉의 시선이 자주 허공을 향하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가 눈길을 거둔 지상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 그리고 그가 파악한 허공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를 헤아리기 위해서 일단 종이와 펜을 준비한다.
세상은 벌써 눈 덮인
겨울 산, 겨울 하늘
눈 감으면 마음의 허공 한가운데로
어린 꾀꼬리 한 마리
파릇파릇 솟구쳐 오른다
길게 대각선을 그으며
-「허공」전문
백지에 난을 치듯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선을 긋는다. 맞물린 삼각형 두 개가 생겨났으나 이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다.「허공」에 등장하는 꾀꼬리의 동선처럼 ‘길게’ 대각선을 긋기 위해서는 종이가 더 크거나 깊이를 갖춘 공간이 필요하다. 시인은 ‘대각선’으로 평면을 마련하고, ‘길게’로 그 평면을 의심하게 한다. 즉 눈 덮인 겨울 산을 배경으로 설정하며 공간을 백지에 옮기려 했으나 매끄럽게 그리지 못한 것이다. 왜 입체의 흔적이 종이 위에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그는 왜 입체의 흔적을 지우려 했을까.
‘길게’는 이차원위 되는 과정 중에 삼차원이 남긴 흔적이다. 어떤 그림들은 소실점과 원근법으로 평면의 깊이를 재현하지만 이 시의 그림은 하나의 선으로 그 깊이를 환기한다. 이것이 의도로 남았는지 의도치 않게 남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이 시가 입체적인 공간을 평면화하는 방식으로 쓰였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세상은 눈에 덮이는 것으로 한 번, 눈을 감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입체성을 줄인다. 바깥세상이 있던 그 자리에 “마음의 허공”이 들어서자 비로소 어린 꾀꼬리가 날아간다. “파릇파릇 솟구쳐”오르는 모습은 마치 희망 찬 미래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지워진 세상은 늙고 병든 절망적인 현실이다.
2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은봉의 시는 삶의 현장을 토대로 구축된다. 개인적 체험과 공통 현실은 구체적 삶을 조명하는 두 가지 핵심요소인데, 그의 시적 개성은 이 둘이 거의 겹쳐 있는 데서 발생한다. 가령 꿈꾸었던 시절 마포경찰서 근처식당을 기억하는 것은 개인적 체험이지만 그가 언급한 근처의 창비․ 문지․ 자실 등은 당대 문인이 겪은 공통 현실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꿈」). 또한 역전 대상다방에서의 추억은 구체적 체험이지만, 조국이니 민중이니 하는 말을 하며 “반유신의 불화살로 날아가고 싶”었던 마음은 공통 현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싸락눈, 대성다방」). 구체적 체험과 공통 현실이 포개지며 시련이 찾아오고 욕망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집에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 삶이 회상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일까. 실제로 뜨거운 마음은 과거에, 찢겨진 날개는 현재에 있다. 가난했으나 꿈이 있었던 과거와 “그렇게 내 날개는 찢겨져버렸다 부러져버렸다 꺾어져버렸다.”(「꿈」)며 비상의 가능성이 꺾인 현재가 대조되고 앞의 시간에는 시련과 낭만이 뒤의 시간에는 좌절과 실패가 배치된다. 꿈꿀 시간이 예전보다 덜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에게 입은 내상도 한몫하는 것 같다. 그는 마치 지상의 삶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세상을 납작하게 인식하고 시선을 허공으로 옮긴다.
민들레 샛노란 꽃들 지고
화들짝 꽃솜들 피어난다
민들레 꽃솜들에게는
다리가 달려 있다
꽃솜들의 다리는 바람……
바람 다리가 달려 있는
민들레 하얀 꽃솜들
하늘, 가득 날아오른다
잘 익은 해 그만 땅으로 떨어진다
광화문 시청 청계천
오조조 별들 뜬다 촛불별들
아직 어두운 촛불별들에게도
다리가 달려 있다
그들의 다리는 사람……
사람 따라 촛불별들 걷는다
세상, 차츰 밝아온다
-「다리」전문
낮에 꽃솜들은 바람을 다리 삼고 하늘을 터전 삼는다. 밤에는 촛불별이 뜬다. 바람에 대응하는 촛불별의 다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촛불별들의 다리가 되어 세상을 밝히고 동을 틔운다. 그가 지상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까지 공동체를 떠나 허공을 향했다는 진단은 섣부르다. 세상이 탁하다고 하면서도 “그냥 그렇게 탁한 세상이나 웃으며 살리”(「그냥 그렇게」)에 위안과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가지가 부러지고 잎사귀가 찢긴 나무가 피워 올리는 꽃은 얼마나 초라한가”라 말하면서 동시에 “어린 새벽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나는 거듭 내 속에서 크는 가지가 부러지고 잎사귀가 찢긴 황금나무를 어루만졌다”(「잎사귀가 찢긴 황금나무를 어루만졌다」)고 한다.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오랜 신뢰가, 희망이 곧 도착하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날개가 찢겨진 상태이지만 그 날개를 꿰매줄 이들이 공동체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허공은 이처럼 지상에서 입은 상처를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특별한 메시지 없이 그것은 존재만으로 지상을 상대화한다. 지상에서 입은 상처도, 피할 수 없고 나을 수 없는 운명에서 벗어난다. 지상의 의미를 상대화하는 개념은 다른 것도 있다. 가령 자연이나 지상을 꼽을 수 있으나 이들은 정형화된 의미를 가지고 지상의 뜻도 고정시킨다. 시집에는 마치 허공의 의미를 비워두겠다는 듯이 형상 없는 바람이 만상에 닿고 있다. 허공은 의미가 아니라 위상으로 절대적인 대상을 상대화한다. 삶 옆에 죽음을, 안 옆에 밖을, 끝 옆에시작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감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 위에 다시 눕는다
눈 감았으면서 뜨고 뜨면서 감는다
그러는 사이 감나무 잎새들
보이면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인다
감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홍시들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가
그늘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는가
홍시들 사이, 그늘들 사이 푸르른 하늘이 나타나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나타난다
하늘 가까이 새하얀 뭉게구름 몇 점도 그렇게 나타나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나타난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저것들 사이
언뜻언뜻 허공이 보인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저것들,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가라앉고, 가라앉으면서 솟구친다
허공이 만들면서 지우는 저것들
내게서 나가면서 내게로 들어오고 있다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전문
「대나무 평상 위에 누워」는 시집의 중심 사유가 압축적으로 제시된 시다. 시인은 평상 위에 누워 있다. 긴장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이완의 시간이다. 눈을 감았다 뜨자 감나무 잎이 안보였다 보인다. 그가 묻는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쉬면서 흘려보내던 시간이 그 질문 주위로 모여들어 시적인 힘을 만든다. 재차 묻는다. 홍시가 떨어지기를, 그늘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예측으로 가까운 미래를 불러들여 시간이 두터워지기 시작한다.
반전이 일어난 것이 이때이다. 피사체였던 홍시와 그늘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그것들 사이에 눈이 간다. 하늘이 펼쳐져 있고 뭉게구름이 떠다닌다. 아니 이제는 어떤 대상이 부각되기보다는 차라리 대상의 변화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된다. 사라지면서 나타나고, 없다 있는 그 운동성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공이 나타난다. 그 속에서 가라앉음과 솟구침이, 있음과 없음이, 사라짐과 나타남이 서로 긴장하며 변화한다. “내게서 나가면서 내게로 들어오는” 이 변화의 운동성을 바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3
이은봉은『봄바람, 은여우』를 바람의 시집으로 읽어주기를 권한다. ‘시인의 말’을 잠시 요약해보자. 바람은 사람이었다가 세상이었다가 역사가 된다. 바람은 공기이고 소리이고 언어이고 기표이자 기의이다. 바람은 형상이자 형상이 아니다.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이율배반의 진술이 연속된다. 분포도를 작성하여 빈도수로 바람의 성향을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말은 그와 같은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쓰인 듯 바람에 뜻을 계속해서 미끄러트린다. 바람은 겹겹의 의미를 안고, 그래서 주술처럼 의미들을 흐트러트리며 허공을 떠다닌다. 바람은 상충하는 대상들을 움직이게 하며 그것들을 서로 걸려 있게 한다.
봄바람은 은여우다 부르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달려와 산언덕 위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은여우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다리 자꾸 후들거린다
온몸에서 살비듬 떨어져 내린다
햇볕 환하고 곁옷 가벼워질수록 산언덕 위 더욱 까불대는 은여우
손가락 꼽아 디다리지 않아도 그녀는 온다
때가 되면 온몸을 흔들며 산언덕 가득 진달래꽃 더미, 벚꽃 더미 피워 올린다
너무 오래 꽃 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차가워질수록 더욱 우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
-「봄바람, 은여우」전문
봄바람은 생명의 경쾌함을, 은여우는 야생의 활달함을 북돋는다. 봄바람은 은여우 덕분에 까불대며 빛나게 되고, 은여우는 봄바람 덕분에 변덕스럽고 화사해진다. 봄바람, 은여우,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그녀까지 모두 소멸보다는 탄생에 가까운 것들이다. 하지만 바람을 탄생의 메신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곧이어 다른 뜻이 첨가된다. “너무 오래 꽃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가 등장하더니, “차가워질수록 더 우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숨기로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로 시가 마무리된다. 탄생을 재촉하는 바람 다음에 따뜻한 바람이 아니라 위기의 바람이 불어온다. 봄은 화사함 이면에 불길함을 내장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황사바람의 등장은 허공 위에 ‘길게 그어진 대각선과 같다. 기대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면에서, 지각의 범위를 확장했다는 면에서 그렇다. 첫 번째 특징은 변화무쌍한 바람과 맞물려 시집이 지향하는 의미가 어느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준다. 두 번째 특징은 평면에 깊이를 확보했던 것처럼 차원을 하나 늘려 봄의 풍경에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을 환기한다. 바람은 여기에서 종잡을 수 없는 실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암시해주는 전달자이다.
멈춰 있는 바람에는 “태풍의 꿈은 다 접었는가”(「골짜기에 나자빠져 있는 바람」)라 하고, 민들레 홑씨에 부는 바람에는 “봄바람은 하느님의 낮고 작은 숨결”(「봄바람」)이라 한다. 날개를 편 새로 비유된 바람은 “접혀 있는 속날개의 깃털은 노랗다”(「바람의 발톱」)로 마무리된다. 또한 노숙자로 비유된 지쳐빠진 바람을 두고는 “그는 아직 회오리로 이 세상 거칠게 몰아칠 때가 오리라고 믿는다.”(「지쳐빠진 바람」)며 반대 의미를 계속해서 끌어들여 의미를 두텁게 한다.
오해의 여지없이 뜻 하나를 가리키는 낱말을 투명하다고 말한다면 시집의 바람은 불투명하다. 바람이 닿는 이율배반의 말은 논리적 파탄을 이끌어 뜻을 헤아리는 시도를 막는다. 그 말은 초점 없이 흘러가지도, 허무 의식에 잠겨 있지도 않지만, 합리적 이성의 권위에 도전한 이들의 시도에는 동참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바람에 담겨 있는 뜻은 모순될 것이 없다. 무엇이건 뚫는 창과 막는 방패는 한자리에 모이되 한순간에 부딪치지는 않는다. 봄바람과 황사바람이 시간차를 두고 부는 것처럼 불투명한 다른 바람도 시간의 격차를 두고 오가는 것이다.
나뭇가지, 푸른 나뭇가지는
멧새처럼 날갯짓하며 푸른 생명을 키운다
나뭇가지, 검은 나뭇가지는
가위손처럼 버걱거리며 검은 죽음을 키운다
생사의 나뭇가지는 당신의 마음
가까이 다가올수록 검고 푸르다
가까운 것은 늘 먼 것을 꿈꾼다
생사의 나뭇가지는 지금 희망의 산으로 가고 싶다
생사의 바깥에서 저 스스로 꿈이 되는 산
이제는 잿빛 옷의 구름바다를 데리고 가고 싶다
-「구름바다-정취암 언덕에서」부분
「구름바다」를 보자. 구름바다로 자욱한 산이 원경으로 펼쳐진다. 구름바다는 그에게 감상이 아닌 외경의 대상이다. 시인은 범접하지 못하는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어떤 관념 하나를 질서 있게 배열하는 데 공들인다. 푸른 나뭇가지가 푸른 생명을 키우고 검은 나뭇가지가 검은 죽음을 키운다는 진술은 논리 정연한 말이지 환상으로 어지럽혀진 말이 아니다. 그런데 생명과 죽음을 함께 매단 이상한 나뭇가지가 “당신의 마음”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음이라는 내적 풍경과 구름바다라는 외적 풍경이 중첩되며 점점 더 시가 어지러워진다. 이것을 모순의 순간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가. 안과 밖의 소통이 이뤄지는 순간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멀리 보이는 산이 원경의 시야를 그에게 제공하자 그는 삶 옆에 죽음을 끌어 놓ㅍ게 된다. 둘이 한 가지에서 나왔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다. 때로는 불투명하게 보이고 때로는 혼란스럽게 보이고 때로는 이율배반으로 보이는 진술들은 건너지 못하는 심연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은 진실을 보여주려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삶과 죽음은 같이 긴장하며 서로를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지지한다. 논리적 파탄의 순간이 아니라 새로운 소통의 순간이다. 원경과 근경, 생명과 죽음, 그리고 생사의 안과 “생사의 바깥”이 서로 걸려 있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
『봄바람, 은여우』에는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으며 안과 밖이 통해 있다. “바람은 사람, 사람은 마음, 마음은 자유……, 자유가 발길을 만들고, 발길이 역사를 만들지”(「바람의 파수꾼」)나,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있으면서 없다.”(「나무, 나무, 나무」)에도 모순의 상황보다는 소통의 국면이 강조된다. 삶은 죽음과 말의 한계는 침묵의 세계와 접목한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다. ‘바람’은 자유이자 역사이고 ‘나’는 있으면서 없다. 허공이 마련한 공간에서 상충하는 의미들이 바람을 매개로 인연을 맺는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집착과 허무가 있을 것이다.
4
허공은 공간이고 바람은 매개이다.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허공과 바람이 포개지며 인연의 공동체가 구성된다. 바람에 의해 서로 걸려 있는 것들에는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상충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가장 큰 삶, 가장 작은 솜털 등이 모두 인연을 맺으며 서로를 긴장시킨다. 굳이 허공과 바람이 시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아래 시는 실제와 환상이, 안개꽃과 달빛 세상이 인연의 국면을 보여준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안개꽃 더미, 이미지
벌떼처럼 몰려다니는 안개꽃 더미
세상은 안개꽃 더미지 흐리고 뿌옇지
안개꽃 더미가 세상을 바꾸지 이미지가
세상을, 시간을 밀고 다니지 달빛처럼
한 생애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여기 모여 있지 환상덩어리가 그것을 끌고 다니지
한 생에는 환상덩어리지 흐리고 뿌옇지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모르는 것이 어디 있기라도 하니
아는 것이 어디 있기라도 하니?
-「안개꽃 더미」부분
멀리서 보면 뿌옇고 흐릿하기 때문이겠지만 안개꽃 더미는 환상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시인은 한 생애를 안개꽃에 비유한다. 삶의 허무를 드러낸 것인가.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모르는 것’이 어디 있기라도 하니/‘아는 것’이 어디 있기라도 하니?”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해석이 갈라진다. 시인은 앎과 모름의 구분에 대해 그런 것이 애초에 있는지 질문한다. 이 질문이 앎을 좇아 살아온 과거의 삶을 회의하는 것이라면 안개꽃의 이미지는 허무의 색채를 띤다. 그러나 질문이 “달빛처럼” 시간을 ‘밀고’ 다니는 현재를 향한 것이라면 생생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시인은 계속 질문하고 단정한다. 보통 질문은 불확실한 것에 하고 단정은 확실한 것에 하는데, 여기에서는 짝이 바뀐다. 확실한 과거에 대해 질문하고, 불확실한 현재에 대해서는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니 확실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앎과 모름의 경계선 자체를 문제 삼는 것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불확실한 현재를 단정할 수 있었을까. 시인은 유사 방법적 회의론자가 된다. 회의론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모든 것은 의심할 수 있으나, 의심하고 있는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이 주체의 자리에 이미지를 넣는다. 모든 것은 확실하다. 시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것이 뿌옇고 흐릿하다. 그러나 뿌옇고 흐릿한 안개꽃은 선명하다.
안개꽃이 없다면 삶에 대한 회의는 삶에 대한 허무나 부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지나온 생애의 불확실성은 남은 생애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지고, 도저한 불확실성은 확실성을 폐기하도록 이끈다. 그는 안개꽃을 통해 불확실성을 앎과 모름의 영역으로 양도하고, 확실성을 이미지에 배당한다. 이미지는 질서정연한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시간을 배열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억과 예감을 쟁여 넣어 그 시간을 두텁게 한다. 안개꽃의 이미지는 인식의 공터가 지닌 함의를 공허라는 무덤에서 허공이라는 요람으로 전환하여 바람의 길을 터놓는다.
늙어가는 저녁별
더욱 찬란하거늘
강물 위 조용히 떠 흐르고 있구려
더러는 자맥질해
눈뜬 물고기들 잡기도 하는구려
당신 따라 새끼오리들도
자맥질하는구려
그것들도 물고기들 잡으려
강물 속 진흙 말 끌어안고 있구려
공주 금강가 언덕
모처럼 착하고 아름답구려
이 모든 것들 위해
물오리 한 마리
물속의 발갈퀴 재빨리 휘젓고 있구려
-「물오리-L.T」부분
강물은 속으로 진흙을 끌어안고 있고, 위로 허공을 받아낸다. 오리는 그 경계에서 자맥질을 한다. 새끼들이 따라 한다. 분주하게 다른 목숨을 잡아먹어야 생을 지탱할 수 있는 비천한 운명들이다. 바빠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모습을 두고 다른 말을 꺼낸다. “모처럼 착하고 아름답구려.” 여백이 많은 호흡으로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이게 연출한다. 그는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인가. 조용히 떠가는 강물 위에 허공이 비치고, 부모를 믿고 따르는 새끼들의 자맥질 속에서 가능성으로 충만한 다음 인연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봄바람, 은여우』는「소나무 자식」에서 시작하여「창공」으로 끝난다. 지상에서 시작하여 천상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소나무를 푸르고 싱싱하며 굳세고 강건한 사람과 연관지을 때(「소나무 자식」) 창공에 오랜 꿈과 희망이 있다고 말할 때(「창공」) 어디서나 건강한 희망을 기원하는 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발밑의 세상과 머리 위의 세상에서 같은 모습이기를 희망하지만, 그래서 시련이 그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두 세계를 함께 보며 엮기 때문에 오래 절망하지 않는다. 그가 본 창공은 지상의 공허까지 안은 허공이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차 있는 창공/창공에서 깨닫는 것은 공허만이 아니다/당신의 오랜 희망도 함께 깨닫는다”(「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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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이은봉의 시에는 온통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에 어울리는 재목들이 잇다. 이 바람들은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서정적인 가락은 아니다. 시대와 겨루던 땀의 흔적이 더께로 앉은 창틀에서 밀치고 젖히는 문짝과 떨리는 소리를 내는 창에 부는 바람이다.
바람은 창밖 공간에도 이어져 거미와 매미, 머루와 다래 등 삼라만상에도 휘감기니 이것은 우주의 생태와 호흡을 함께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본색에 중심을 두고 바람에게 말한다. 타고 흐르는 뜬구름에서 내려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미루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머리칼을 날리라고 한다. 비록 절개지가 되어 생명의 풍경과 존재의 이미지들이 파괴되어 있고,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12층 공중무덤 납골당으로 자러 돌아가지만 빈 남골당은 저도 많이 외롭다. 뉴타운 아파트 단지라지만 검은 시멘트 숲을 걸어가다가 희고 뽀얀 강돌 한 개를 줍는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다, 강가라면 멋지게 물수제비라도 띄우고 싶다.
꼭 강가가 아니면 어떠리, 시인은 푸른 빈 하늘에 바람을 띄우듯이 아름답고 작은 돌을 던질 수도 있다. 이 시인에게도 한때는 조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부르르 떨리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조국 같은 것은 없어져 버린 것 같은 시대가 왔다. 강과 모래를 팔아서라도 부자가 되려고만 한다. 햇빛을 팔아먹으려면 하늘을 개발해야 하나.
열정과 고뇌를 잊고 바람처럼 살더라도, 다시 세상 사랑할 수도 있다고 이은봉 시인은 넉넉하게 다짐하고 있다 - 구중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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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시인∥
∙ 1953년 충남 공주(현, 세종시)에서 출생했다.
∙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1983년《삶의문학》제5호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 1984년《창작과비평》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외 6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활동했다.
∙ 시집으로《좋은 세상》《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책바위》《첫눈 아침》《걸레옷을 입은 구름》등이 있고,
∙ 평론집으로《실사구시의 시학》《진실의 시학》《시와 생태적 상상력》《화두 또는 호기심》 등이 있다.
∙ (사)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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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봉 형 시집 보냈다는디, 오늘 도착했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