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에서 기도는 떼어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소그룹에 영적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 에너지가 배터리처럼 충만하면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나고 생명의 공동체로 기쁨이 충만하고 생기가 넘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그룹 리더의 기도입니다. 공동체는 리더의 수준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있듯이 리더의 기도만큼 소그룹 구성원들도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그룹 리더는 팀 켈러 목사가 제시한 기도의 유익을 온전히 깨달아 생명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충만하고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쪽으로 눈길을 돌려라
기도는 형식과 관계없이 세상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시각을 다시 설정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줍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 배경에 하나님을 두게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저 입을 열어서 필요와 두려움, 바라는 일과 관심사, 회의와 당혹감, 죄에 관해 속내를 털어놓자마자 그런 요인들을 쳐다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시편 73편 17~20절에서 기도가 시선을 바꾸는 실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자의 마음에는 남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향한 질시와 원망이 가득합니다. 자신은 온갖 어려움에 시달리며 사는데 저들은 날로 번성하는 듯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 73:13~14)
하지만 기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을 ‘기도한다’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이 인간의 삶과 역사를 송두리째 휘어잡고 움직여 가신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결국 죄악은 이 세상에서도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게 마련일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을 피해 갈 수도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시각이 달라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기자는 이를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상황에 빗대며 말합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여기서 기도는 나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꿈속에서 그토록 심하게 여겼던 일들도 한낱 웃음거리로 바뀝니다.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으며 실제로는 아무 탈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기도에는 정반대의 효과도 있습니다. 허상을 무너뜨리고 영적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위태로움을 일깨웁니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험악한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자아를 요란하게 흔들며 소리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 겁을 집어 먹는 거야!” 아니면 이렇게 다그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올 수 있지? 어떻게 이게 괜찮다고 생각한 거지?” 기도는 시선을 교정하고, 큰 그림을 보게 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신세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이다.
J. I. 패커는 “기도는 에너지를 얻는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무얼 두고 기도하는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어김없이 영적인 각성과 기력, 자신감이 쉴 새 없이 공급된다. 청교도들은 기도를 심령의 바퀴에 기름을 칠하는 일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천이 되는 걸 흔히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포도나무에 접붙인 가지와 같다는 뜻입니다. 줄기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나길 기대하는 것입니다(요 15:1). 기도 역시 그런 결과를 얻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 말미에서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라고 당부합니다. 추상적인 지침을 주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영적인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로움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며, 복음에서 비롯된 평안으로 신발, 또는 군화를 삼아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로 공격을 막아 내야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마음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힘입어 삶을 빚어 가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 같은 삶에 제대로 대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서 강건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능력을 단단히 부여잡고 주님을 돌아보며 그 안에서 안식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서 비유를 마무리 지으며 말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진리, 정의, 평화, 믿음,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기도를 갑옷에 포함시키려 애쓰는 주석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에 열거한 덕목 하나하나가 투구, 검, 흉배 같은 아이템들과 연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질없는 수고일 뿐입니다. 편지 끄트머리에서 바울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기도하며, 온갖 간구를 다하고, 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기초적이지만 중요한 개념이 또 있을까? 기도란 그리스도가 이루셨으며 크리스천이 믿고 있는 모든 사실들을 우리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진리가 마음에 작용해서 새로운 본성과 반응, 기질을 만들어 내는 외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라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하나님은 그저 '내가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 기도에는 특별한 의식,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외하는 의식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은 기도를 통해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이슈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감각적으로 감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게 아니라 마음에 거룩한 사랑이 흘러넘치는걸 느끼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기도에 걸 맞는 이해와 애정, 은혜를 가장 알맞게 맞춰 주시는 일을 하신다라고 설명합니다. 놀라우리만치 균형 잡힌 선언입니다. 기도는 의무입니다. 형편이 어떠하든지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기도하자면 '애정(두려움과 놀라움, 사랑이 뒤엉킨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기도가 천 갈래만 갈래 갈라지거나 냉랭해지지 않습니다. 산만하고 건조한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한 최상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해선 제 마음을 뜻대로 좌우하기 어렵습니다. 성령님조차도 모든 이들에게 항상, 같은 정도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18세기에 활동한 목회자이며 찬송가 작사가인 존 뉴턴(John Newton)은 '하나님의 뚜렷한 임재'를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그분의 선물이라고 평가합니다. “더러 주님이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차원의 역사를 멈추실 때가 있다. 그러고 나면 인내심이 바닥나서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조차참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반면에 주님이 크리스천의 내면에서, 거룩한 자녀들을 위해 하시는 일을 분명히 보여 주시는 경우도 있다.”
거스리는 하나님의 임재란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감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으로 감지할 수 있는 부류의 음성이고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기도를 통해 그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