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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6월 2일 화요일
[(녹)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마르첼리노와 성 베드로 순교자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고 한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3,12-15ㄱ.17-18
사랑하는 여러분,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15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논쟁에서 밀린 채 포도밭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마르 12,13 참조)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끌어들입니다.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제국에 기대어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어서 황제 쪽으로 기울기 쉬웠지만, 이와 달리 바리사이들은 황제에게 납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서로 섞이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이, 한 사람을 넘어뜨리고자 잠시 손을 맞잡습니다.
목표는 분명합니다. “말로 올무를 씌우려”(마르 12,13)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칭찬으로 덫을 윤나게 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대답해 보십시오.’ 질문은 하나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허락됩니까?’ ‘그렇다.’라고 하면 이스라엘 민중을 잃고, ‘아니다.’라고 하면 황제의 반역자로 몰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이 쓴 가면, 곧 ‘위선’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은화에는 아마 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과, 신성을 암시하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2,17). 제국의 화폐를 쓰려면, 그 체계가 요구하는 의무도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더 깊은 차원을 여십니다. 동전에는 황제가 새겨졌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정신 모두입니다(신명 6,4 이하 참조). 신앙은 이해관계에 따라 요령을 부리는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전인적 응답’입니다. 신앙은 삶 자체의 근원을 묻는 마지막 물음이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요?(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대응!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시대 식민지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어깨 힘주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었습니다. 최근 그들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마치 혜성처럼 떠올라 군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예수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유다 본산을 강력하게 성토하고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합칩니다.
머리 좋고 언변이 탁월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보낸 이유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잘 어울리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공의 적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먼저 감언이설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르 12,14)
웬일로 이렇게 호의적인 모습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즉시 난감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세금은 인두세를 가리킵니다. 이 세금은 로마의 은화로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불과 이틀 전에 메시아로 불리셨고, 또 메시아로서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백성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인두세는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가장 증오를 받던 표지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신다면, 제국에 대한 반역이며 혁명가로 오해받게 됩니다. 적대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로마의 적, 폭동의 선동자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대응이 놀랍습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데나리온은 세금 바칠 때 통용되던 은화였습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절묘한 마무리 말씀으로 위기를 넘기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유다인들이 식민지 안에서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더럽히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국가 권위와 종교 권위가 저마다 적정한 범위 안에 머문다면 양쪽 다 정당한 것입니다.
내 영혼에 찍을 인장은 내가 선택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주어라." (마르 12,17)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속으로는 날카로운 비수를 감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 세금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매국노로 몰릴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의 함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얄팍한 속내를 꿰뚫어 보시고는 데나리온 은전 한 닢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언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주어라."
우리는 이 복음을 읽으며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하고 끝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히 세금은 국가에 잘 내고 헌금은 성당에 잘 내라는 윤리적 지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영혼의 밑바닥을 향해 가장 두렵고도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은 검은 수단이나 목에 하얀 띠를 두른 '로만칼라' 셔츠를 입고 다닙니다. 이 옷은 단순한 유니폼이 아닙니다. 내 목을 하느님께 묶어두었다는 뜻이며, 나는 온전히 하느님께 바쳐진 '하느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움직이는 간판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고 거리를 나가면 참으로 피곤할 때가 많습니다. 횡단보도에 빨간 불이 켜져 있고 차가 한 대도 안 지나가도, 감히 무단횡단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식당에서 밥이 늦게 나와도 짜증을 낼 수 없고, 운전하다가 누가 끼어들어도 욕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목에 둘린 로만칼라를 보고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행동 하나가 하느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기에, 저는 꼼짝없이 거룩한 척이라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편안하게 술집에 가서 눈치 보지 않고 맥주 한잔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어떻게 할까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용히 목에서 로만칼라를 빼서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왜 로만칼라를 뺄까요? 그 순간만큼은 '하느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그 거룩하고 무거운 인장(Seal)을 지워버리고, 잠시나마 세상에 속한 평범한 사람, 세상의 소유물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자들이 제가 사제인 것을 다 아는 성당 안에서 사제복을 입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쉬운 일입니다. 오히려 저를 모르는 비신자들 앞인 세상 한복판에서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야말로 "나는 언제 어느 때나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진짜 신앙일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는 분들을 보면 그렇게 멋있고 존경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길을 걷거나 등산을 하면서도 손에 묵주를 쥐고 당당히 기도하며 가시는 교우분들, 대중교통을 탈 때도 꼿꼿하게 사제복과 수도복을 입고 계신 분들을 보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저도 요즘은 작은 결심을 하나 실천하고 있습니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거나 술을 한잔하러 갈 때, 비록 자리에 앉아 먹을 때는 답답해서 옷을 갈아입거나 칼라를 뺄지언정,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만큼은 반드시 사제복을 온전히 입고 들어가려 노력합니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사제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하고, 저 스스로에게도 '너는 하느님의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부끄러움과 불편함을 무릅쓰고 이 옷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그 짧은 순간이, 바로 내 이마에 '하느님의 것'이라는 인장을 쾅 하고 찍기 시작하는 위대한 출발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아주 뼈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내 정체성은 '내'가 정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내 자녀다, 너는 나와 같은 거룩한 신(神)이다"라는 영광스러운 인장을 선물로 내미십니다. 반면, 우리 안의 얄팍한 자아는 "너는 그저 쾌락과 돈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일 뿐이야. 그냥 네 욕망대로 편하게 살아"라며 세속의 인장을 내밉니다. 이 두 인장 중에서 지금 내 이마에 어떤 것을 찍을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주어라"라고 명령하신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억지로 빼앗아 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에게는 너희 자신을 스스로 선택해서 바칠 수 있는 위대한 자유가 있다. 그러니 짐승 같은 자아의 인장을 거부하고, 네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어 스스로를 하느님께 바쳐라!" 라는 주권적 결단의 촉구인 것입니다. 제가 사제임을 자주 기억하고 그 옷의 무게를 견디려 애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하느님의 것이라고 선택하고 선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세상의 인장이 내 이마에 쾅 하고 찍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미사에 나와 거룩하게 앉아 있을 때는 누구나 다 하느님의 소유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영혼을 고난과 억울함이라는 십자가의 강렬한 '불빛'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내 이마에 스스로 어떤 워터마크를 찍었는지가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원수를 향해 분노와 복수심을 뿜어낸다면 그는 스스로 짐승을 선택한 가짜입니다. 반면,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고통받는 순간에도 스스로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정체성을 꽉 붙잡고 이웃을 용서한다면, 불빛에 비친 그의 영혼에는 가장 선명하고 찬란한 '예수 그리스도'의 워터마크가 떠오릅니다.
이 영광스러운 소유권의 법칙은 이미 구약 성경 탈출기에 완벽한 알레고리로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대사제인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예복을 짓게 하십니다. 그중에서도 대사제의 머리에 두르는 터번 앞쪽에는 순금으로 만든 아주 특별한 패를 매달게 하셨습니다.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장을 새기듯이 그 위에 ‘주님께 성별된 이’라고 새겨라. 아론은 그것을 이마에 달아라. 그 패가 늘 그의 이마에 달려 있어, 그 예물들이 주님 앞에서 호의로 받아들여지게 하여라." (탈출 28,36.38).
이마에 붙인 이 순금 패는 "이 사람은 하느님의 소유물이다"라고 선언하는 절대적인 인장이었습니다. 아론이 제단에 오를 때 수많은 죄와 부족함이 있었지만, 그가 스스로 이 인장을 이마에 매달고 나아갔을 때 하느님은 아론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그 이마에 빛나는 황금 인장을 보시며 이스라엘 전체를 용서하고 품어 안으셨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28장).
우리도 일상 속에서 이 아론의 금패를 이마에 달고, 하느님의 인장을 세상 앞에 쾅쾅 찍어대야 합니다. 식당에서 밥이 나오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성호를 크게 그으며 자랑스럽게 식사 전 기도를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영혼에 인장을 찍는 일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 복음을 두고 이렇게 명쾌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카이사르는 은전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초상화를 찾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혼에서 당신의 잃어버린 초상화를 찾으신다. 은전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었듯,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오늘 하루, 나를 옭아매는 세상의 두려움을 십자가 앞에 모두 던져 버리십시오. 내 정체성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 "그래, 너는 내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나의 귀한 자녀다!"라고 흐뭇하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세상 한복판에서 여러분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십시오. 오직 내가 하느님의 소유물이라는 그 압도적인 자존감의 인장을 꽉 쥐고, 세상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당당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처음 간 것은 1996년입니다. 30년 전이었습니다. 보좌 신부님들도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교구의 방침이 있었습니다. 1995년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다녀왔고, 1996년에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로 다녀왔습니다. 아쉽게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있었고, 보좌 신부님을 위한 성지순례 프로그램은 없어졌습니다. 그 뒤로 ‘복음화 학교’ 담당 신부를 맡으면서 복음화 학교에서 주관하는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현지 가이드가 안내해 주었습니다. 큰 관심도 없었고, 미사 봉헌과 교우들과의 만남 때문에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에 본당 교우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다른 곳에는 현지에 있는 가이드가 안내해 주었는데, 파티마에서는 수녀님이 안내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의 안내와 현지 가이드의 안내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는 직업적인 면이 있었지만, 수녀님의 안내는 소명과 사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수녀님은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였고, 파티마의 성모님이 바라는 것을 영성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파티마 성지의 광장에는 마주 보면서 두 곳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한 곳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이고 매일 그곳에서 묵주기도와 미사가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맞은 편에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조형물이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그 조형물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둥근 원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의미하고, 구름은 성령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나귀와 소가 있었습니다. 나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소는 다른 나라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여성과 남성이 있는데 여성은 성모님, 남성은 요셉 성인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강보에 싸여 있었고, 강보는 끈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묶여 있는 끈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조형물의 보습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수녀님의 설명이 있어서 더욱 뜻깊은 순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의 절망 속에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고통과 눈물이 기억되지 않는 전적인 새로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 속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 “우리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로움’은 시간이 흐른 뒤의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완성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는 그 약속이 절정에 이릅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 하느님께서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죽음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세계,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새로움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이루시는 완성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저마다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꿉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아메리카로 이민을 오는 사람, 군 복무를 마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젊은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 모두가 ‘새로운 시작’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들의 새로움은 여전히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조건이 달라질 뿐, 인간의 한계와 상처는 그대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다릅니다. 그것은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 죄와 죽음의 질서가 완전히 사라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랑을 선택하고, 용서를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 순간마다 우리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커다란 황소도 고삐만 잡으면 어린애라도 쉽게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재물은 황소보다 훨씬 힘이 셉니다. 재물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식의 전환으로 이 땅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오늘의 성인
성 마르첼리노(Marcellinus)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연도 : +303년경
같은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성 베드로 (Peter)
활동년도 : +303년경
신분 : 구마자,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페드로, 페드루스, 피터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로마(Roma)의 뛰어난 사제였고, 성 베드로(Petrus)는 구마자였다.
이들은 새로운 개종자를 얻고 그들의 신앙을 돈독히 하는데 온갖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개종자 가운데 어느 간수의 아내와 딸 때문에 그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실바 니그라라는 숲으로 끌려가서 자신들의 무덤을 판 후 참수되었다고 전해진다.
열심한 귀부인인 루실라와 피르미나는 그들의 유해를 몰래 운구하여, 라비카나(Lavicana) 가도의 성 티부르시오(Tiburtius) 카타콤바에 안장하였다.
교황 다마수스 1세(Damasus I)는 그들의 묘비명을 세웠고, 콘스탄틴 황제는 그들의 지하묘소 위에 성당을 지었다.
성녀 블란디나 (Blandina)
활동년도 : +177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리옹(Lyon)
같은 이름 :
성 포티누스(Pothinus) 주교와 함께 리옹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들 가운데 한 분인 성녀 블란디나는 원래 노예 소녀였는데 여주인의 영향으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들은 수치스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만 되풀이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형리들조차 이런 여인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블란디나와 함께 순교한 이들 중에는 성 폰티쿠스(Ponticus)라는 15세 소년도 있었는데,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격려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하였다.
성 니콜라오 (Nicholas)
활동년도 : +1094년
신분 : 순례자
지역 :
같은 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페레그리노, 페레그리누스, 펠레그리노, 펠레그리누스
성 니콜라우스 페레그리누스(Nicolaus Peregrinus, 또는 니콜라오 페레그리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열심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그리스 사람이며, 이탈리아에서 이방인처럼 방랑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 정착했지만, 곧 아폴리아 전역을 방랑하다가 병이 들어 트라니(Trani)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키리에 엘레이손’(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을 외치며 다녔다. 그는 가끔 사과나 혹은 어린이들이 좋아할 물건들을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모이면 함께 찬미가를 노래했다. 또 가끔은 미친 사람으로 몰려 곤욕을 치루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그의 높은 덕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치유의 기적으로 지금도 순례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성 니콜라우스 순례자 또는 성 니콜라우스 펠레그리누스(Nicolaus Pellegrinus, 또는 니콜라오 펠레그리노)로도 불리는 그는 1098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