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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봉의 제국 공룡능선, 가운데는 1,275m봉
과학은 우리에게 도덕이나 영적인 면에서 들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보이
저 우주선이 해왕성을 지나면서 마지막 한 번 슬쩍 고개를 돌리자 지구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음을 기억해 보라. 아폴로 우주인들이 찍은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지구가 아니라, 우
주라는 광막한 배경에 찍힌 화소 한 점에 불과한 지구 말이다. (……) 그 크나큰 배경 속에 박
힌 작디작은 우리 행성의 사진을 응시하고도 호전적인 국가주의자, 이 작디작은 한 점 티끌
을 피로 불들이고 싶어 하는 광신도, 혹은 오로지 손익 계산만 앞세우는 자본가로 남을 수 있
다면 어디 한 번 남아 보시라. 이런 과학적 증거가 진정 무가치하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함의
가 없단 말인가?
―― 칼 세이건, 『코스믹 커넥션』
▶ 산행일시 : 2018년 9월 16일(일), 흐림, 비 오다말고
▶ 산행거리 : 이정표 거리 20.6km
▶ 산행시간 : 8시간 28분
▶ 갈 때 : 동서울터미널에서 거진 가는 06시 49분 출발 첫 버스 타고 용대리 ‘백담사 입
구’에서 내림(요금 : 15,900원), 백담사 입구 셔틀버스 터미널에서 백담사까지 셔틀버스로
감(요금 : 2,500원)
▶ 올 때 : 설악동 소공원 주차장에서 시내버스 타고 속초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요금 :
1,050원), 동서울 가는 우등버스 탐(요금 : 15,600원)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가급적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6 : 49 - 동서울터미널
08 : 57 - 용대리 ‘백담사 입구’
09 : 12 - 백담사 입구 셔틀버스 터미널
09 : 36 - 백담사(百潭寺), 산행시작
10 : 38 - 영시암(永矢庵)
11 : 35 - 만경대(萬景臺, 922.2m) 갈림길
11 : 40 - 오세암(五歲庵)
12 : 42 - 마등령(馬等嶺, 1,220m)
13 : 17 - 나한봉(羅漢峰, 1,297.4m)
13 : 30 - 1280.1m봉
14 : 04 - 1,275m봉
15 : 10 - 신선대(1,234m)
15 : 30 - 무너미고개
16 : 10 - 양폭대피소
16 : 50 - 귀면암(鬼面岩)
17 : 20 - 비선대(飛仙臺)
18 : 04 - 설악동 소공원 주차장, 산행종료
18 : 47 ~ 19 : 00 - 속초 시외버스터미널
21 : 10 - 동서울터미널
1. 공룡능선 1,275m봉 주변
2. 천화대 범봉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나에게는 악재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속초 가는 06시 05분발 첫 버스가
예전에는 용대리 ‘백담사 입구’만은 정류하였는데 지금은 버스시간표에 빠져 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속초 가는 06시 05분발 첫 버스가 있기에 기사에게 사정할 요량으로 그 시간에 맞
춰 터미널에 나갔다. 속초 가는 버스는 서울양양고속도로로 가기 때문에 용대리에 정류하지
않는다고 한다. 용대리 ‘백담사 입구’ 정류는 거진(巨津) 가는 06시 49분발이 첫 버스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화장실을 가다가 킬문 님을 만났다. 반갑다. 홍천 쪽 산을 간다고 한다.
킬문 님 얼굴 오른쪽 바로 눈 위아래로 길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일전에 산에서 된통 굴렀다고 한다. 눈을 다치지 않았기에 천행이라고 했다. 허벅지에서 다
리까지는 더한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도 산을 간다. 혼자서.
버스는 이른 아침 홍천 가는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린다. 이곳은 추석 즈음하여 조상 묘를
벌초하려는 사람들이나 나들이객들이 몰리지 않았다. 38대교 아래와 그 주변의 소양강물은
많이 불었다. 만수위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내 마음이 넉넉하도록 푸근하여 보기에 좋다. 버
스는 인제를 화장실에 갈 틈 없이 잠깐 들르더니만 원통에서는 15분간이나 머문다.
용대리 백담사정류장에 내려 백담사 셔틀버스 타러 가는 길이 꽤 멀다. 길옆에 활짝 핀 코스
모스가 어서 오시라 응원한다. 가로수 마가목은 가지가 휘어지게 다발 다발이 알알이 익어간
다. 이런 알뜰한 모양이 과연 설악산 신선봉 너덜지대의 마가목 작황까지 대변할지 의문이
다. 셔틀버스 터미널이 비교적 늦은 시각이라 한산하다. 셔틀버스 운행시간은 매표 이후 30
분 간격이라며 대기인원이 33명에서 37명에 이를 경우 바로 출발한단다.
그러고서 26명인데도 출발한다. 이유인즉 백담사에서 용대리로 나오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이 많았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백담계곡의 백담이 맞는지 확인한다. 셔틀버스 기사님은 도
로가 좁아 마주 오는 버스와 교행할 수 있는 장소를 서로 무전으로 연락하며 달린다. 백담사
주차장. 내 아직 백담사 절집을 들러본 적이 없다. 늘 산행하기에 바빠서다. 오늘도 그런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영실천 따라 3.5km이다. 산굽이굽이 물길 옆 숲속 대로를 간다. 이
대로를 좁다하고 간다. 봉정암 순례단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주로 노장년층 수백 명이 계속
줄지어 온다. 한 단체 인원만 120명이라는데 서너 단체이다. 이건 산을 가는 길이 아니라 서
울시내 명동 길을 인파 헤치며 걷는 기분이다. 영시암에 다다라서야 길이 풀린다.
중후한 영시암(永矢庵)이란 현판의 글씨는 여초거사 김응현(如初居士 金膺顯, 1927~2007)
이 썼다.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이 세웠는데 ‘(불법을) 영원토록
널리 베푸는 암자’라는 뜻이다. 삼연의 ‘영시암’이라는 시 제2수를 주련에 새겼다. 불가의 냄
새가 덜 난다.
雲守虛樓鹿守園 구름은 빈 누각을 지키고 사슴은 동산을 지키는데
檢看舂井宛然存 살펴보니 절구와 우물이 완연히 있네
牛於耕日勤生犢 날마다 수고로이 밭가는 소는 송아지를 낳고
蜂在花時鬧出孫 벌은 꽃필 적에 시끄럽게 자손을 낳네.
可忖山奴治事密 산촌 머슴의 세밀한 일처리 헤아릴만 하고
亦知隣寺護緣敦 이웃 절이 보호해주는 도타운 인연 또한 알겠네
西游得喪都休說 서쪽에서 유람하며 이익과 손해를 말하지 말게
且據殘冬受飽溫 남은 겨울 배부르고 따뜻하게 또 의지하려네
영시암을 지나 가파른 데크계단을 한 피치 오르면 봉정암 갈림길이다. 첫 휴식한다. 1시간씩
걷고 나서 휴식하리라 다짐한다. 오세암 가는 길 2.5km는 한갓지다. 마주치는 등산객과 수인
사를 나누는 여유가 생긴다. 산자락 지능선을 넘고 넘는다. 등로 주변의 전나무가 볼만하다.
전나무 숲은 오대산 월정사의 진입로를 제일로 치지만 한 그루 한 그루의 크기로는 이곳이
제일이 아닐까 한다.
3. 백담사 셔틀버스 타러 가는 길가의 코스모스
4. 오세암 주변
5. 오세암 전경
6. 마등령에서 바라본 천화대
7. 천화대 범봉
8. 1,275m봉
9. 나한봉
10. 나한봉 서릉
11. 왼쪽 아래는 가야동계곡 천왕문
12. 왼쪽은 1,275m봉, 앞 오른쪽은 1280.1m봉
13. 1280.1m봉
골로 갈 듯 뚝 떨어졌다가 되게 가파르게 오른다. 능선마루 안부 오른쪽은 만경대 가는 길이
다.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을 세웠다. 오늘은 시간이 빠듯하여 만경대를 가지 않기로 한다.
다시 산자락을 200여 미터 돌아들면 오세암이다. 때마침 공양시간이어서 밥 드시고 가라지
만 그럴 틈이 없다. 동자전(童子殿) 계단 길을 올라 전경을 바라본다. 노산 이은상이 만경대
에 올라 “前人이 다이르되 (오세암이) 庵子터로는 朝鮮第一이라고, 과연 그옳은말임을 萬景
臺上에 올라서만 깨달을수잇습니다.”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이곳이 절승의 터임
을 알 수 있겠다.
오세암의 본전인 ‘천진관음보전(天眞觀音寶殿)’의 주련의 일부다. 여느 절집에서 흔히 보는
주련 글귀인데 행초서로 써놓아 해득하기 어렵다. 주련이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장식이다.
白依觀音無說說 백의관음 말없이 설법하고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 들음 없이 들어 주네
甁上綠楊三際夏 병속의 버드나무가지 언제나 여름
巖前翠竹十方春 바위 앞의 푸른 대나무 온 세상이 봄
오세암에서 마등령 가는 길은 주의해야 한다. ‘봉정암, 마등령 가는 길’이라는 방향표지판을
따르다 보면 봉정암 쪽으로 가다가 마등령 가는 갈림길이 나올 줄로 잘못 알기 싶다. 오세암
사립문을 나서면 잘난 봉정암 가는 길이 나오고, 그 위로 소로의 마등령 가는 길이 보인다.
너덜 혹은 돌길이다. 산자락 이슥히 돌다가 데크계단 굽이굽이 오르면서 가팔라지기 시작
한다.
이정표에 마등령 1.2km이라는 지점에서 하산하는 등산객과 만나 수인사 나누며 서로의 산
행정보를 교환한다. 공룡능선을 타고 설악동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자, 대뜸 빡빡하시겠다고
걱정하며, “여기서 마등령까지 적어도 1시간, 공룡능선만 4시간 정도 ……”. ‘빡빡하시겠다’는
말은 오지산행 산행공지에서 캐이 님으로부터 댓글을 받고 잔뜩 긴장했던 터인데 또 육성으
로 듣고 보니 야마가 빡 돌았다.
내 나름으로 여기서 마등령까지 1.2km는 30분을, 공룡능선 4.9km(마등령에서 희운각까지
는 5.1km이다)는 2시간 30분을 견적하고 있는데 5시간이라니. 어쨌든 이 앙다문다. 줄곧 가
파른 돌길 오르막이다. 발걸음으로 갈지자 어지럽게 그리며 오른다. 가쁜 숨이 턱에 차면 스
틱을 짚고 서서 삭히곤 한다. 그러는 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가만 쫓으면 다람쥐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없이 바쁘다.
이윽고 능선마루에 오르고 넙데데한 등로를 간다. 사면을 누비며 참나무 고사목을 뒤져 눈먼
표고버섯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 길섶 투구꽃의 잇단 추파
도 애써 모른 척한다. 마등령.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천화대 범봉과 1,275m봉이 보이는
공터에서 모처럼 배낭 벗어놓고 휴식한다.
마등령이 눈에는 명당이지만 입에는 둘도 없는 악처다. 도시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치이라 그렇다. 중청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공룡능선을 넘어온다는 일
단의 산악회 등산객들이 도착하더니 천상의 명당이라며 점심밥을 먹자하고 자리 편다. 대장
님이 아침에 만들었다는 주먹밥을 내게 한 주먹 준다. 운무는 범봉을 휘감는 황홀한 광경을
연출한다.
“저게 방금 여러분이 넘어온 1,275m봉이고 그 왼쪽 아래가 천화대 범봉이고 ……”, 알려주고
일어난다. 공룡능선에 들어선다. 걸음걸음이 경점이라 마음은 급하되 발걸음은 사뭇 더디다.
혹시 놓친 경치가 있을까봐 열 걸음에 아홉은 뒤돌아봄에야 더욱 그렇다. 그나마 등산객들과
자주 마주 치니 암릉이나 협곡에서는 지체한다.
14. 1,275m봉
15. 1,275m봉
16. 1,275m봉
17. 뒤돌아본 1280.1m봉
18. 흐릿한 용아장성
19. 뒤돌아본 1280.1m봉
20. 뒤돌아본 1280.1m봉과 맨 오른쪽은 나한봉
21. 1,275m봉 전경
22. 1,275m봉 전경
23. 1,275m봉 전경
24. 1,275m봉 지나 신선대 가는 길
25. 신선대
26. 공룡능선
운무를 동무한다. 조금 더 있으면 빗발도 합세한다. 너덜사면을 잠깐 오르면 침봉의 제국 공
룡능선의 첫째 관문인 나한봉이다. 사방 둘러보며 큰 한숨 내쉬고 내린다. 공룡능선은 때로
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로운 1,275m봉을 멀리서 또 가까이서 바라보는 즐거움이, 1,275m
봉을 지나면 공룡능선의 외곽을 위호하는 외연한 천화대 범봉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각별
하다.
오르내리는 슬랩이 축축하니 젖어 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쇠줄 움켜쥔 팔에 힘이 부친다. 봉
봉마다에서 전후좌우를 자세히 살핀다. 1,275m봉에서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기봉이 참
으로 기경이다. 1,275m봉을 넘고부터는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가는 이도 오는 이
도 없는 혼자 가는 산행이다. 적막한 첩첩산중에 내 거친 숨소리가 크게 들린다.
햇살이 비치면서 비 뿌린다. 주변 갈잎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로는 호우가 내린다. 얼굴 들어
서 맞는 빗발의 감촉이 시원하고 입안에 흘러드는 빗물은 약간 찝찔하다. 침봉의 제국을 나
가는 관문인 신선대다. 신선대 슬랩을 오르면서 또 신선대 암반에서 뒤돌아보는 지나온
1,275m봉 주변은 설악산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오늘은 다 내 것이다. 그 눈 안주로 맥주
를 마신다.
신선대를 넘으니 어쩐지 산행을 다한 느낌이다. 따져보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데 그러하
다. 가파르고 미끄러운 대슬랩을 쇠줄 난간 잡고 내리고 계류 졸졸 흐르는 지계곡을 건너 산
허리 돌아가면 무너미고개다. 지체 없이 천불동계곡으로 발길을 돌린다. 돌길 가파른 내리막
이다. 희운각 쪽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과 자주 만난다. 그들은 주로 청춘남녀들이다. 그들
의 행동거지도 예쁜 것이 우르르하는 내 발걸음에 길을 얼른 비켜준다.
계류 괄괄 대는 계곡에 이르고 고개 들어 좌우에 도열한 천불(千佛)을 훑어보며 간다. 계류
의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에 내 걸음이 빨라진다. 칠형제봉이 엿보는 천당폭, 양폭은 맘껏 소
리 지른다. 양폭대피소 앞 무지개다리 건너고 숲속의 박석 깔린 길을 간다. 곳곳의 다리가 보
수공사 중이다. 오련폭은 아직도 숨어서 소리 지른다. 천불동계곡의 유일한 오르막인 귀면암
긴 데크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귀면암을 자세히 보고자 뒷걸음질한다.
오늘은 집에서 싸온 점심도시락이 펴지 않은 그대로다. 휴식할 때마다 간식을 먹었고, 마등
령에서 주먹밥 한 주먹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자리 펴고 도시락 펼칠 시간이 아깝다. 막 간
다. 운무 감도는 장군봉이 먼발치에서 보이고 이내 비선대다. 소공원 3.0km. 내게는 여기가
험로다. 마지막 스퍼트 낸다. 숲속 이 너른 길을 가도 가도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신흥사 앞 금강교가 가까워지고 여느 때는 쌍천을 기웃거려 알탕을 도모했는데 그러다 속초
가는 마지막 시내버스를 놓칠라 그냥 간다. 소공원 가게는 불을 밝혔다. 주차장에 시내버스
가 시동 걸어놓고 내 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시내버스는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40분
남짓 걸린다. 동서울은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간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서울 가는 버스시간을 물어본 게 잘못이다. 그 버스시간에 쫓기기 마
련이다. 그랬다. 버스는 19시에 있다. 28인승 우등버스의 남은 표는 딱 한 장이다. 겨우 13분
의 여유가 있다. 화장실에 들러 낯 씻고 웃옷 갈아입을 시간 만큼이다. 또 쫄쫄 굶고 간다. 저
녁밥은 22시쯤 집에서나 먹을 것 같다.
27. 범봉
28. 범봉
29. 가야동계곡 주변
30. 지나온 공룡능선
31. 천불동계곡에서 올려다본 칠형제봉 연봉
32. 천불동계곡 주변 만경대(?)
33. 천불동계곡 주변
34. 천당폭포
35. 천불동계곡
36. 천불동계곡, 왼쪽이 귀면암
37. 비선대 장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