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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공관복음 강론 (21) 마태복음 7장 전반부
7장 전반부는 우물 밖에 있는 클레로스 안에서 클레로노모스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미리 말씀하신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모두 다섯 가지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21-1 양육과 권면
첫 번째 주제는 양육과 권면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 된 큰 자들이 어린 형제들을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마 7:1 비판(크리노)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크리마)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메트레오) 그 헤아림(메트론)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의 결론은 양육과 권면을 잘 하기 위해서는 네 눈에 들보가 먼저 빠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판하거나 헤아리거나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잘 비판하고 잘 헤아리기 위해서는 네 눈에 들보가 먼저 빠져야 되고, 그래야 눈 속에 아직 티가 있는 어린 형제들을 양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벧전 5:1) 그대들 중 장로들에게 나는 함께 장로된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5:2 그대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십시오 피치 못해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고 부정한 이익을 위해서 하지 말고 아낌없이 하십시오
5:3 그대들의 몫으로 주어진 사람들(클레로스들)을 지배하려고(카타큐리유오) 하지 말고 무리의 본(튀포스)이 되십시오
본이 되는 자들이 장로이고, 본을 보이는 이유는 어린 형제들이 자기들과 같은 장로로 성장하게 하는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장로들인데 아직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지 못한 장로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의 본을 보이라고 걱정스럽게 권면을 하는 것이다.
무리의 본이 되는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에서 들보가 빠진 사람이다. 양육과 권면은 클레로스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명인데 이 양육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린 자들을 권면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에서 들보가 빠진 자이어야 한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고 베드로 사도는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어린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사람으로 먼저 그 선까지 성장해야 된다는 것이다.
먼저 된 자들인 장로들이 본을 보임으로써 모든 어린 형제들을 자신들과 같은 장로로 양육해가는 나라, 클레로스
21-2 뱀 같은 지혜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은 개 돼지 같은 놈들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진리의 빛을 비추었을 때 공격을 해오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때 그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보호함은 물론이고, 그들을 위해서도 악을 행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리들 가운데 가서 좋은 진주를 찾아내는 것이 진리의 빛의 사명이다. 나머지 이리들에게는 평화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의 빛을 비출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보호함은 물론, 그들을 위해서도 악을 행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손가락질을 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개 돼지 같은 모습을 보이는 반응을 보이는 자들도 소중한 자들이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악을 행해서 그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도 피하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다.
21-3 회개와 간구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아가도스/ 선한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고 오독하게 되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선한 것,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독해불가인 것은 아래 누가복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성령의 새 창조와 인도를 가리키시는 말씀이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독해가 안 되는 이유는 성령을 구하는데, 성령이 나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떡을 주지, 이렇게 독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소원을 막 비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약속된 새 창조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해서 회개와 간구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는 것도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인 것이다. 이해하고 동의한 다음에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무엇을 이해한 것이냐 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믿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열심히 기도해서 내 소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아니고 약속하신 것을 약속하신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회개와 간구에 집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21-4 황금률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앞에 말씀들의 결론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 번째 주제가 양육이었다. 두 번째 주제가 너희를 공격하는 자들도 소중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새로운 창조와 그 후에 계속 이어지는 성장 과정을 놓고 회개하고 간구하라는 것이다. 아직 새 창조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새 창조가 일어나기를 간구하는 것이고, 새 창조가 일어난 사람은 그다음에 성장을 위해서 또 간구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다른 사람도 나만큼 소중한 존재로 보이는 새 시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윤리 도덕이나 또는 훌륭한 인품이나 이런 얘기가 아니고 상대방도 나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시각인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의미상 똑같아 보인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셨고,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똑같은 말로 보인다. 하나는 긍정적인 그 서술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서술인데 같은 의미일까?
공자가 한 이 말은 남들에게 그러지 말라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주인공은 자기이고 소중한 건 자기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잘 해줘라.,이 정도 의미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좀 잘 해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그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나만큼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는 자들의 모습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다른 사람도 나만큼 소중한 존재로 보이는 새 시각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앞에 세 가지 주제를 쭉 말씀하시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누가 됐든 간에 개 돼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내가 소중한 것만큼 그들도 소중하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고린도 후서의 사도 바울의 정의가 시각이 바뀌고 인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고후 5:16-18)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인간의 본성(싸르크스)을 따라 바라보지(에이도, see)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인간의 본성(싸르크스)을 따라 인식했으나(기노스코, understand) 이제부터는 그같이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본래의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보십시오 (새로운 피조물들은)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의 직무를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시각이 바뀜으로써 어떤 일이 전개가 되냐 하면 다른 사람들과 화목해지는 것이다. 우물 밖에서는 당연히 한 몸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우물 속에서도 다른 세상 사람들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 화목의 전제 조건이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 시각의 핵심은 내가 소중한 것만큼 내 앞에 있는 저 사람도 소중하다고 인지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 명령이 아니다.
<참고> 공자의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구절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우물 속 타인을 향한 예의범절
맹자의 인, 측은지심
21-5 좁은 문과 넓은 문 – 새 문명과 옛 문명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그런데 사람들은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이라는 말씀을 기독교인이 되라, 그리고 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라는 말씀으로 오해한다. 저 세상에서 사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삶이고 교회에 들어와서 신자가 되고 점점 더 신심이 깊어지면 그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우리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옛 문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해석한다.
옛 문명의 특징은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무한 경쟁의 정글 속에서 공멸하면 안 되니까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무한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우물 속에서 그 무한 경쟁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 관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 경쟁을 강화하든가 회피하든가 통제하든가 세 가지 수단이 있는 것이다.
옛 문명 :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무한 경쟁의 관리(약육강식의 강화와 회피와 통제)
폭력의 현실 놀이 (제국주의, 자기 계발) 승리 지상주의
무한 경쟁에서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 승리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의 현실 놀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식민지를 만드는 제국주의 같은 것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별로는 자기 계발이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출세하고 돈 벌고, 이것이 폭력의 현실 놀이다. 내가 승리자가 되어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회피의 현실 놀이 (외톨이)
그냥 숨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으로 안 나가는 것이 요즘 일본에서 유행이라는데, 그것이 지금 세계적인 현상으로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집 밖에 안 나오고 그냥 혼자 있는 그런 것이 일종의 회피의 현실 놀이다. 경쟁이 두려우니까 외톨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통제의 현실 놀이 (법과 윤리 도덕) 공생 공존공영 추구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법과 윤리 도덕을 가지고 공생 공존 공영을 추구하면서 통제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과도한 경쟁을 막고 불공정한 경쟁을 막고 공정한 경쟁을 하게 함으로써 공멸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서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을 국가가 복지 정책 같은 걸로 돌봐 줘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통제의 현실 놀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종교도 똑같다.
폭력의 종교 놀이 (우상, 즉 수호신을 동원한 폭력) 승리 지상주의
폭력의 종교 놀이는 뭐냐 하면 우상 즉 수호신을 동원한 폭력이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이런 복음 선교다. 그래서 종교 전쟁이 모든 전쟁 중에 가장 잔인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의 종교놀이의 형태인 것이다. 이것은 국가 단위, 교회 단위, 교단 단위, 또는 신자 개인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수호신이 나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그래서 세상에서 승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런 번영 신학이 다 폭력의 종교 놀이다.
회피의 종교 놀이 (개인의 영성, 해탈, 달관)
회피의 종교 놀이가 있다. 불교의 경우에는 해탈, 도교의 경우엔 달관, 이런 식으로 세상과 등을 지는 것이다. 기독교회도 신비주의가 세상과 등을 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수도원의 영성이라는 등, 심지어 어떤 수도원들은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을 안 만난다 하는 서약을 하고 들어가는 그 수도원도 있다. 그런 것이 회피의 종교 놀이다.
통제의 종교 놀이 (율법과 기독교 윤리학) 공생 공존공영 추구
그 다음에 통제의 종교 놀이가 있다.
율법과 기독교 윤리학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경쟁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데 도를 넘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이고 기독교 윤리학인데,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이다. 종교로 공멸을 통제하는 것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리워야단)”
여기서 우리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말을 봐야 한다. 홉스의 통찰이 뭐냐 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우물 속의 본질에 대해서 이런 통찰을 가졌던 것이다. 홉스는 인간은 무한 경쟁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고, 경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가 내놓은 해결책이 뭐냐 하면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무한 경쟁은 강력한 국가 공권력으로 통제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통제의 현실 놀이를 답으로 제시를 한 것이다. 강력한 국가의 공권력으로 공멸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공권력으로 불공정 거래를 막는다던가 하는 것이 다 국가의 폭력인 것이다.
통찰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약육강식)
해결책 :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무한 경쟁은 강력한 국가 공권력(리바이어던)으로 통제하는 것이 답이다
제목 ‘리바이어던’은 성서에 나오는 그 옛 뱀의 이름이다. 개역 개정에는 리워야단으로 번역을 했다.
욥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개역:악어)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41:1 Canst thou draw out leviathan with an hook? or his tongue with a cord [which] thou lettest down? (KJV)
41:1 "Can you pull in the leviathan with a fishhook or tie down his tongue with a rope? (NIV)
시 74: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74:14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74:15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시 104:2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104:25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104:26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사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우물 속 옛 문명(경쟁 시스템)은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오늘의 최종 결론과 같은 말씀이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그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은 종교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도생하면서 무한 경쟁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우물 속 세상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이 현실적인 진단이다. 영원한 승리자라는 건 없고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다.
(1)화무십일홍, 권불십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따라서 경쟁에서 승리하면 자기가 승리자가 되어서 행복해질 것 같지만 영원한 승리자는 없다. 결국 늙어 죽는 것으로 패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패배를 겪는다. 패배를 겪지 않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2)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아무리 협력을 하고 아무리 사이가 좋고, 의리 우정 등 별소리를 다 해도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안 일어났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경계하고 걱정하고 불안 가운데서 살게 되어 있다. 따라서 경쟁하는 자들이 만든 이 옛 문명 속의 삶은 멸망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종교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싸르크스는 우주의 주인공의 자리와 승리의 환상을 가지고 유혹한다
사도 바울도 겪은 일들이다.
(딤후 1:15) 그대가 보아서 알듯이 아시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서 돌아섰고
(딤후 4:10) 데마는 이 세대를 사랑하여 나를 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갔으며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간 이유는 자기가 주인공인 삶을 살고 싶어서 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주인공인 삶이 정상적인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각자도생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경쟁하면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면서 승리의 환상에 취해서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패배로 끝나는 것이다.
우물 밖 새 문명(하나 됨 시스템)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서 맞이하게 되는 우물 밖 새 문명은 하나 된 시스템이고 이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이다.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도 종교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 안에서 하나된 삶이라는 것이 새로운 문명인데 진정한 답은 경쟁의 통제나 관리에 있지 않고, 공정한 경쟁을 하는 사회라는 것은 답이 아니고 결국은 다 구성원들이 전부 패배하게 되어 있으니까, 답은 경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하나됨에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종교를 가질 거냐 말 거냐 기독교 신자가 될 거냐 말 거냐 이런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삶
진정한 답은 경쟁의 관리에 있지 않고 경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하나 됨에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구원은 현실이다
새 문명으로의 이동,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의 이동, 즉 우물 밖으로 나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시작하는 자들이 만들어가는 문명은 경쟁이 없는 나라이며, 모두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인식해 가기 시작하는 나라이다. 물론 이 땅에서 완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출발을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하나가 되는 길에 올라섰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마지막 푯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 됨을 향해서, 그리고 그 완전한 하나 됨은 주님이 오시는 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결론에 해당하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은 이 새 문명과 옛 문명을 비교하시는 말씀인데 이것은 종교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내리는 결론은 구원은 현실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강민지 자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