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9일(현지시각) 오후 1시, 이건희(李健熙) 전 삼성그룹 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에 모습을 드러내자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지난해 연말에 단독 특별사면(特別赦免)을 받은 후 첫 번째 공식 외출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이 전 회장에 못지않게 관심을 끈 사람은 두 딸이었다. 제품 전시 부스로 향하던 이 전 회장이 딸들을 찾더니 ‘두 딸을 좀 광고해야겠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이 전 회장은 오른쪽에 맏딸 부진(富眞)씨, 왼쪽에 둘째딸 서현(敍顯)씨를 세우고, 두 손을 꼭 잡은 채 전시회를 둘러봤다. 외아들 재용(在鎔)씨와 부인 홍라희(洪羅喜)씨는 이들보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전시회장을 둘러봤다. 이들 가족의 ‘라스베이거스 나들이’는 다음날 모든 신문에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이 전 회장이 이날 두 딸을 유독 챙긴 탓인지, 업계에서 ‘향후 두 딸에게 힘이 더욱 실리지 않겠느냐’는 시선이 많다. 실제로 국내 재벌그룹이 ‘3세 시대’를 열어 가면서, 재벌가(家) 여성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고(故)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의 친손녀 부진씨, 서현씨, 외손녀 정유경(鄭有慶)씨가 해당 회사에서 중책(重責)을 맡고 있다.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의 친손녀 성이(聖伊)씨와 지이(志伊)씨, 고 조중훈(趙重勳) 한진그룹 회장의 친손녀 현아(顯娥)씨도 경영 전면에 나섰다. 국내 4대 그룹 중 LG그룹은 여전히 ‘집안 여자들은 경영에 나서지 말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고 최종현(崔鍾賢) SK그룹 회장의 손녀들은 20대(代) 초반의 나이여서 경영을 운운하기는 이르지만, 향후 등장이 기대되는 3세들이다. 바야흐로 재계(財界)에 ‘여인천하(女人天下)’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재벌가의 안주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들, 그들의 사업가로서의 경쟁력은 얼마나 될까. 이건희 전 회장 맏딸, 면세점 성공으로 자질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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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월 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두 딸의 손을 꼭 잡고 다닌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
이건희 전 회장의 두 딸은 삼성그룹 계열사에 출근한 지 어언 10여 년이 됐다. 이들은 회사 경영에 대한 밑그림 그리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설 채비다. 맏딸 부진씨는 삼성그룹 계열사인 호텔신라 경영기획담당 전무와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전무를 겸직(兼職)하고 있다. 올해 서른아홉인 그녀는 대원외고, 연세대 아동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95년, 삼성복지재단으로 입사(入社)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재계에서 ‘호텔신라는 이건희 회장의 장녀 몫’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떠돌더니, 그녀는 2001년 호텔신라 기획팀 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 전무는 호텔에 입사하자마자 선진 기업에 대해 벤치마킹을 하면서, 호텔의 중장기 성장 전략을 짰다. 결과적으로 호텔신라는 지난해 사상 최대(最大)의 매출을 기록했다. 2002년 4200억원이었던 호텔 매출이 2009년 1조2000억원을 넘겼다. 불과 7년 만에 매출이 3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매년 평균 16% 신장했다. 2007년 이후 전(全)세계의 경기 침체로 인해 유통 부문의 사업성이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신장세다. 이런 실적에 바람을 불어넣은 사람이 이부진 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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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신라 경영기획담당 전무와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전무를 겸직하고 있는 이부진씨. |
이 전무의 경영스타일은 한마디로 ‘균형감’이다. 이 전무는 호텔신라의 사업 전략과 영업 실적을 모두 챙기는 균형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호텔 내 부대사업에 불과했던 면세점 사업과 고질적으로 적자를 면치 못했던 식음료 부문을 주목했다. 호텔신라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전무가 경영에 나설 때 면세점 사업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2002년 총 매출 2300억원으로 호텔 전체 매출(4200억원)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국내 면세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대로 미미했고, 이 부문의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호텔의 캐시카우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전무는 ‘면세점 사업이 호텔의 주력사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존의 면세점을 혁신하고, 외형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떻게 변신시켰습니까. “호텔신라를 면세 쇼핑의 명소(名所)로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공간을 리뉴얼하고, 상품력(MD)을 확충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섰고, 2008년에는 인천공항의 면세점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면세점 부문은 호텔 전체 매출의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전무가 주목했던 면세점 부문은 7년 만에 매출이 4배 이상 늘었다. 2002년 2300억원이었던 면세점 부문 매출은 2009년 9800억원으로 늘었다. 현재 호텔 전체 매출(1조2000억원)의 81%를 차지한다. 호텔신라의 면세점은 매출 규모로는 세계 7위에 랭크돼 있다. 호텔신라 뷔페, 업계 최초로 연매출 100억원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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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진씨가 애착을 보인 인천공항 내 신라호텔 면세점. |
그녀는 호텔 내에서는 식음료 부문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실 호텔 내에서 식음료 부문은 호텔에서 골치 아픈 사업 부문이다. 호텔신라 관계자의 설명이다. “호텔서비스 중 식음료 부문은 대표적인 저수익 사업입니다. 식재료가 비싸고, 직원들의 봉사료 등 인건비가 비싸 이익을 내기 힘듭니다. 고객들은 호텔의 식음료가 비싸다고 얘기하지만, 호텔 내에서도 돈이 안되는 부문이죠. 2002년에 식음료는 66억원 영업적자를 봤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호텔신라의 식음료 부문은 더 이상 골칫덩어리가 아니다. 2009년에는 130억원의 영업흑자를 기록했다. 더구나 이 호텔의 뷔페레스토랑인 ‘파크뷰’는 지난해 업계에서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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