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18장 15-20절 죄 지은 형제를 대하는 법
사람들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있지만 실상은 그 사람도 역시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마음과 육체가 완벽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인간은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나약함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범합니다. 또 정욕에 이끌려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적인 죄가 인생에 큰 파문을 몰고 올 때도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보면 낮에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 잠을 깨우기 위해 거닐고 있는데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그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한 다윗은 부하를 시켜서 누군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 부하는 얼른 가서 알아보았는데 다윗의 충실한 부하 장수인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우리야는 전쟁터에 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려면 전쟁이 끝나야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범할 바탕이 마련된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죄는 짓도록, 그리고 순탄하게 일이 풀리는 것처럼 흘러갑니다.
다윗은 사람을 시켜서 우리아의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침상에 끌어드렸습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왕의 침상에서 다윗은 죄를 범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마음에 함한 자요, 날마다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다윗에게도 죄는 슬그머니 들어가 순식간에 큰 파도를 일으킵니다. 다윗은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죄는 다윗을 파멸시키기 위해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도 밧세바도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죄는 죄를 지은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죄를 범해놓고 “휴” 하고 한숨 쉴 때 죄는 죄를 지은 사람의 멱살을 꽉잡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밧세바는 자기가 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이 그림이 그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날 그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 모략을 썼습니다. 우리야를 불러들여 우리야가 임신을 한 것처럼 두 부부를 동침하게 하도록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야의 충성스러움은 일반적인 도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야부부를 동침시키는 것을 실패한 다윗은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도록 일을 꾸밉니다. 그래서 요압에게 편지하여 전투하다가 죽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요압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왕의 명령에 따라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야가 죽었다고 보고하도록 사람을 보냈습니다. 일은 이제 아무도 모르게 끝났습니다. 우리야의 장래가 끝나자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맞이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과 친한 나단 선지자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임하게 될 다윗의 가정의 큰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임신한 아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일로 인해 다윗의 집에 피바람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철저하게 회개한 다윗의 죄는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내리시기로 한 벌은 거두어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한 나단선지자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본문 말씀 가운데 15-17절을 보면 교회에서 죄를 범한 형제를 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나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의 말씀은 일을 하나씩 해결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으로 시작하셔서 “들으면”과 “만일 듣지 않거든”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에서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전개 방식 속에는 형제의 죄의 문제를 속히 처리하는 것보다는 그 형제의 영혼을 얻는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 정죄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는 한 사람의 영혼이 옳으냐 그르냐를 넘어서 그 형제의 영혼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염두해두고 있습니다. 율법의 공의로는 이 사람은 교회에서 내쳐야하며 공동체의 단죄를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시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그리고 세리장 삭개오의 변화된 모습을 보시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좋아하셨던 예수님은 교회에서 죄를 범한 형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을 마음에 품고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지은 형제도 역시 포함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죄를 지은 교회를 향하여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해서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죄를 지었는데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신이 지은 죄를 분명히 알고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이 자기의 죄를 분명하게 회개한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침상을 눈물로 적실 정도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두리뭉실하게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는지를 분명히 알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도, 목회자를 통해서도, 성도를 통해서도, 그리고 교회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돌이켜 회개함으로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정면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가졌던 편안한 관계도 갖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를 해결해야 편안한 관계가 됩니다. 이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것은 하나님께 해야 하고, 사람에게 용서를 빌 것은 사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사람들의 죄는 용서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지옥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모든 결과를 맡기고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은 천국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이것은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형제가 여러분들의 말을 듣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면 그 문제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영원히 묻히게 될 것입니다. 이미 다 해결되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잡아 떼면 문제는 더 커지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증인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가 “네 의견만 옳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어 내가 옳을 수도 있잖아.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형제는 알면서도 발뺌하는 것잃 수도 있고 진짜로 자기가 잘못한 지를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다른 한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운 후에 그 형제가 지은 죄의 문제를 확실히 이야기하고 그 진위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형제가 자기에게 권고하는 두 세 사람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우기면서 고집부리면 교회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교회가 듣고 그 사람을 부르던지 아니면 그 사람에게 찾아서 그 형제가 아직도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잘못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형제가 자기의 잘못을 그제서야 인정하면 교회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와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우기면 교회는 그 형제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로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향한 기도를 계속하라고 말씀합니다. 18-19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죄를 지은 형제를 교회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죄를 개인과 교회로부터 분명히 들었는데도 좀처럼 회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개인적으로 권고하면 권고하는 사람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형제를 찾아가서 권고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때부터는 교회가 함께 모여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교회가 그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하늘에서도 그 형제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 형제를 포기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더 이상 그 형제를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형제를 구하시는 여부를 교회의 마음과 기도에 두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영혼의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으신 것처럼 교회가 연약함으로, 혹은 순간적인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할 때 일어나는 일은 바로 예수님이 그 가운데 계셔서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실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아들과 교회를 위해 그 형제가 돌이키도록 역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그 형제를 돌이키실 때 그 교회가 갖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형제가 실족했는데도, 또 죄를 범하여 그 죄에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방관하는 교회는 에수님도 역시 그 교회와 함께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를 통해서 하실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도, 또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도, 교회 속에서 실질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도, 사랑으로 기도하는 교회, 사랑으로 서로를 소중히 여기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 제석교회가 바로 그런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 실족한 성도들이 다시 돌아오고 죄지은 형제가 회개하며 돌아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 날까지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돌이키셔서 교회가 온전한 사랑으로 연합하고 다시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위하여 달려갈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